태조대왕

 


'''고구려 6대 국왕'''
'''太祖大王 | 태조대왕'''
'''시호'''
태조대왕(太祖大王), 국조왕(國祖王)
'''성씨'''
고(高)
''''''
어수(於漱)[1]
궁(宮)
'''왕후'''
왕후[2], 후궁[3][4]
'''왕태자'''
고수성(高遂成)[5]
고막근(高莫勤)
'''왕자'''
고막덕(高莫德), 고백고(高伯固)[6]
'''아버지'''
고재사, 대무신왕[7]
'''모후'''
부여태후
'''사망지'''
국내성 별궁(國内城 別宮)
'''재위 기간'''
음력
53년 11월 ~ 146년 12월[8]
? ~ 121년[9]
'''생몰년도'''
음력
47년(?) ~ 165년 9월(?) (118세?)
49년 이후 ~ 121년[10]
1. 소개
2. 이력
3. 정복 전쟁과 영역의 확정
4.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서 태조대왕의 나이와 관련된 문제
4.1. 중국 측 기록과의 충돌
4.2. 왕계 교체설
4.3. 학계의 정설
5. 삼국사기 기록
6.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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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고구려 제6대 임금.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태조왕이 아니라 태조대왕(太祖大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서 이렇게 대왕으로 표기된 임금은 제6대 태조대왕(太祖大王), 제7대 차대왕(次大王), 제8대 신대왕(新大王) 세 명 뿐이다. 그 세 명의 명칭[11] 때문에 이 시기에만 대왕이라는 말이 공식적인 명칭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지만 확실히 밝혀진 바는 없다.[12][13]
태조를 붙였다는 점에서 묘호와 얼추 비슷해 보이기도 하는데 삼국사기에서 차대왕에게 양위한 태조왕 본인이 자신을 태조대왕이라고 자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묘호는 본인이 죽은 뒤에 붙이는 것이므로 그가 살아있을 때 태조라고 했으면 엄밀히 말해 중국식의 묘호는 아니게 되는 셈. 때문에 학계에서는 묘호가 아니라 묘호와 비슷하게 지은 호칭이며 후에 이 호칭이 시호로 굳어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본래 묘호로 붙인 거였는데 삼국사기를 지을 당시에는 저렇게 알려진 것일 수도 있고 본인이 스스로 저렇게 부른 호칭이 시호만이 아니라 묘호도 되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리고 삼국사기의 각주에는 '태조대왕 또는 국조왕(國祖王)이라고 불렀다'라고 각주를 달아놨기에 태조대왕이 아닌 국조왕이 실제 호였을 개연성도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태조왕 본기, 차대왕 본기, 신대왕 본기에서는 모두 이 셋을 형제 관계라고 한다. 그러나 같은 삼국사기에서도 신대왕의 아들인 산상왕 본기에는 산상왕을 태조왕의 증손이라고 한다.[14] 중국측 사서인 범엽후한서나 진수의 삼국지에 따르면 차대왕은 태조왕의 아들이고 삼국지에는 신대왕을 다시 차대왕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위진 남북조시대의 사서인 북사에는 동천왕이 태조왕의 증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15] 일단 신채호는 후한서, 삼국지, 북사 등의 기록을 채택해 차대왕과 신대왕 모두 태조왕의 서자라고 추측했다.

2. 이력


'''등극한 고추가 재사의 아들'''
'''6대'''
'''7대'''
'''8대'''
'''태조대왕(太祖大王)'''
'''차대왕(次大王)'''
'''신대왕(新大王)'''
《삼국사기》에 의하면 태조대왕은 유리명왕의 아들이자 대무신왕의 동생 재사의 아들로 태어나자마자 눈을 떠 주변을 둘러봤다고 한다. 사실 모본왕 사후 왕에 추대된건 재사였지만 재사는 자신이 나이가 많다고 사양해 그의 아들이 즉위했다. 당시 태조대왕은 10살도 안 되는 나이였기에 초기에는 어머니 부여태후섭정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장성한 뒤에는 왕자 고수성과 함께 요동, 우북평, 상곡, 어양 등지[16]를 공격하여 유린하였다. 태조대왕이 노쇠한 이후에는 고수성이 병권을 잡고 이곳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위상을 높였다.
146년에 수성에게 선위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역모를 일으켜서 왕위를 넘겨받았다고도 한다. 어쨌든 태조대왕은 약 19년 뒤 별궁에서 118살의 나이로 승하했다고 한다.
참고로 공인된 최장수 기록은 1997년 사망한 잔 루이즈 칼망의 만 122세이며 남성의 경우 공인된 가장 장수한 인물은 일본기무라 지로에몬이며 만 116세에 사망했다. 현대 의학의 혜택을 받으며 당시보다 엄청나게 많은 인구 수의 현대인에서 뽑고 뽑은 기록이 이 정도다. 상식적으로 너무 장수했기 때문에 태조대왕의 수명에 대한 기록은 많은 의심을 받고 있다.
태조라는 묘호를 받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후세 고구려인들은 실질적으로 고구려를 혹은 기틀을 세운 왕으로서 보았던 듯하다. 이를 묘호가 아니라고 단정하는 의견도 있는데 묘호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만도 없다. 고구려에서 태조왕 이전은 실제로는 추존 왕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17]# 예를 들어 진흥왕 순수비에는 태조를 언급하고 있고[18] 문무왕릉비김인문 묘비 등 신라 금석문에는 태조 성한이라는 정체불명의 인물이 신라의 시조라고 말하고 있으며 무열왕의 묘호를 당나라가 싫어하는데도 불구하고 태종으로 올렸다. 일본 기록인 《속일본기》에는 백제에서 도모왕(都慕王)을 태조라고 불렀다고 하니 고구려의 태조대왕도 이런 의미일 수 있다. 참고로 조나 종으로 끝나는 묘호는 당나라 이전에는 아무 군주한테나 올리는게 아니었기 때문에 고려 이전의 한반도 왕조도 묘호를 함부로 올리지 않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상황인데다 현재는 기록까지 많이 없어졌으므로 원래 얼마 없던 묘호의 흔적을 더욱 찾기 어려운 이유이다.

3. 정복 전쟁과 영역의 확정


고구려 초기 최고의 정복 군주 중 한 명으로 당시 고구려의 서쪽과 서남쪽에는 요동군, 낙랑군 같은 만만찮은 중국 지방 세력이 있었기에 그의 재위 초기에는 서쪽 대신 주로 동쪽과 동남쪽의 소국들을 병합해 나라의 크기를 늘렸다. 56년 동옥저 병합, 68년 갈사국 항복, 70년 조나 병합, 72년 주나 병합으로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확장했다. 그리고 책성, 남해(동해안 연안), 부여 지방을 순수하여 확장된 영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즉위하고 50여 년이 지난 재위 후반기쯤부터는 국력이 쌓이고 자신감이 생겼는지 한나라와도 피터지게 싸우기 시작했다. 한나라를 막기 위해 요서에 10성을 쌓기도 했는데 일각에서는 요동을 확보해야 요서 10성 축성이 가능하다며 고구려가 이때 이미 요동을 확보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통설은 아니다. 요서와 요동은 북방의 초원, 고비 사막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북쪽으로 돌아서 간다면 요동을 완전히 장악해야만 요서를 공격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
105년에 요동의 요새 지역으로 들어가 여섯 현을 공격했다[19]가 가을 9월에 요동태수 경기에게 격파되었다. 112년에는 예맥, 현토군 등을 공격했으며 118년에는 예맥과 함께 현토군, 낙랑군 화려성을 공격했다.
121년에 큰 승리를 하는데 한나라에서 유주자사 풍환(馮煥), 현토태수 요광(姚光), 요동태수 채풍(蔡諷) 등이 고구려를 공격하자 고수성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게 해 방심하게 만든 뒤 험한 곳에 자리잡고 대군을 막으면서 몰래 3천의 군사로 현토, 요동을 습격해 2천여 명을 죽였으며, 여름 4월에 선비족 8천 명과 함께 요동을 공격해 채풍이 추격하자 신창현에서 싸우다가 태수 채풍, 공조연 용단, 병마연 공손포 등을 죽였다.[20]
변방에서 왕과 같이 군림하던 요동태수를 사살하는 큰 전공을 세운 기세로 같은 해 12월에는 마한예맥의 수천 기병을 인솔해 현토를 포위했다. 그러나 북쪽에서 부여의 왕자 위구태가 현토의 지원군으로 2만의 군사를 이끌고 내려와 고구려군의 포위는 실패했다. 그러나 그의 치세부터 시작된 요동 등 서쪽 진출은 고구려의 숙원 과제가 되었고 훗날 미천왕 때 다시 시작된다.

4.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서 태조대왕의 나이와 관련된 문제


삼국사기 기록상으로만 보자면 태조대왕은 서기 53년에 7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146년에 왕위를 고수성에게 물려줄 때까지 무려 93년간 왕위에 있었다. 그 후에도 19년을 더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이것이 만약에 실제라면 대단히 장수한 셈이다.[21] 사실이라면 세계에서 2번째로 오래 재위한 인물이다. 삼국사기가 아니라 후한서 등 당대 중국 기록을 기준으로도 재위 기간만 68년에 75세에 죽었어도 고대 세계에서는 충분히 장수한거다. 그런데 만 118세라는 수명은 현재 기록된 기네스북 남자 최장수 수명(116세)보다도 2년이나 길며 기네스북에 공인된 최장수 인물인 잔 칼망의 122년과 불과 4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현대 의학위생 관념이 부재하던 2000년 전 인물이 이 정도 수명을 누렸다는 것은 비정상적이다.
물론 1명쯤 특이하게 장수할 수는 있지만 고구려 국왕의 나이 문제는 태조대왕만 있는 게 아니다. 태조대왕의 뒤를 이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태조대왕의 동생인) 차대왕은 71년에 태어나서 7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며 (《삼국사기》에 따르면 동생인) 신대왕은 89년에 태어나서 7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70대인 사람이 왕위에 오르는 것도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형제간에 나이 차이가 43살까지 벌어진다는 것도 이상하다.[22] 이복형제라고 둘러댈 경우 말이 되기는 하지만 삼형제의 아버지 고재사의 기록도 이상하다. 모본왕이 시해당한 후 유리명왕의 아들인 고재사가 자신이 연로하다며 사양해서 아들인 태조대왕이 왕위에 올랐다고 하는 기록부터 의문인데 당시 고구려는 부자 상속이 아닌 형제 상속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고재사가 즉위할 명분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23] 고재사의 출생 연도는 알 수 없지만 고재사보다 형일 대무신왕 무휼이 서기 4년에 태어났으므로 서기 53년에 고재사는 50이 되지 않은 나이였을 것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고재사의 아들이라 하는 차대왕, 신대왕은 각각 서기 71년, 89년에 태어났다고 하기 때문에 연로하다며 왕위를 태조대왕에게 양보한 재사가 그로부터 20년~40년 후까지 더 살아서 아들을 낳은 셈이다. 유리명왕이 서기 18년에 사망했으므로 신대왕이 태어났을 때 고재사는 살아있었다면 최소한 71살은 되었을 것이다.[24]
원래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초기 왕들의 수명이 비상식적으로 길게 기록돼 있다는 문제가 공통적으로 나타남을 감안해도 왕들의 수명이 너무나도 현실적이라 백제본기나 신라본기에 비해 비교적 신뢰를 얻고 있는 고구려본기에서[25] 특정한 시간대에 연속해서 왕들의 수명이 비정상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문제로 이 시기만큼은 백제, 신라 기록보다도 불신도가 더 높은 편이다. 이 때문에 후기에 신라 중심 사관으로 역사를 쓴 김부식이 고구려의 연대를 줄이기 위해 초기 왕들을 합쳤다는 의혹이 조선시대부터 제기되었다.[26]
남당 박창화도 태조왕의 나이를 의심하여 그의 위서 남당유고에서는 태조왕의 치세 앞쪽을 고재사가 재위한 기간으로 분리해놓았다.
아마도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이 참고한 해동고기의 내용에 몇 가지 오류가 있던 것이 있었을 듯 하며 후대에 태조대왕의 기록을 조작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사실 후손인 장수왕도 97세까지 살았다고 하고[27] 동시대 인물인 명림답부도 113세까지 살았다고 하니 김부식 입장에서는 "저렇게 오래 살았다는데 삼형제 설이 틀렸다고 할 수 있나"라고 생각할 건덕지가 있기는 했다.[28] 다만 실제로 장수한 것이 교차검증이 되는 장수왕과는 달리 태조대왕은 다른 역사 기록과도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4.1. 중국 측 기록과의 충돌


후한서에서는 삼국사기와 달리 태조대왕은 왕위에 오른지 69년만에 '''사망'''했고, '''아들'''인 수성이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의 차이에 대해서는 김부식도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후한서에 이렇게 쓰여 있다. 안제(安帝) 건광(建光) 원년(121년)에 고구려 왕 궁이 죽어 아들인 수성이 왕위에 올랐다. 현도 태수 요광이 아뢰기를 ‘그들이 상(喪) 당한 것을 타서 군사를 내어 공격하려고 합니다.’고 하니, 의논하던 자들이 모두 허락할 만하다고 여겼다. 상서(尙書) 진충(陳忠)이 말하였다. ‘궁이 전날에 교활하게 굴 때에는 (요)광이 토벌하지 못하다가 죽은 다음에 공격하는 것은 의가 아닙니다. 마땅히 사람을 보내 조문하고 이전의 죄를 책망하되 용서하여 죽이지 말고 뒤에 잘되는 쪽을 택하여야 할 것입니다.’ 안제가 그 말을 따랐다. 다음 해에 수성은 한나라의 산 포로를 돌려보냈다.』 해동고기(海東古記)를 살펴보면 이렇게 쓰여 있다. 『고구려 국조왕(國祖王) 고궁(高宮)은 후한 건무(建武) 29년(서기 53년) 계사(癸巳)에 즉위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일곱 살이어서 국모(國母)가 섭정하였다. 효환제(孝桓帝) 본초(本初) 원년 병술(丙戌)(146년)에 이르러 친 동생 수성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이때 궁의 나이가 100살이었으며 왕위에 있은 지 94년째였다.』 그러므로 건광 원년은 궁이 재위한 지 69년째 되는 해이다. 그러므로 (후)한서에 적힌 것과 고기는 달라 서로 합치되지 않는다. (후)한서의 틀린 것이 어찌 (이와 같은가?)】

'''《삼국사기》 제15권 고구려본기 제3 태조대왕'''

자치통감에서는 122년의 기사에서 태조왕의 뒤를 이은 수성을 고구려 왕이라 표기하면서 차대왕이 한인 가운데 살아있는 자들을 돌려보내고 현토에 와서 항복했으며, 이후 예맥이 따라서 항복해 동쪽 변방에는 사건이 적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태조대왕의 재위기간과 연령문제에 대해 체계적으로 검토한 노태돈은 『고구려사 연구』에서 정작 후한서의 이 기록에 대해 왕계에도 오류가 있는 중국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 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4.2. 왕계 교체설


아버지 재사의 연령 문제에 관해서는 태조대왕부터 해씨가 아닌 고씨가 왕위에 올랐다는 점, 《삼국사기》에 태조대왕을 국조왕(國祖王)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된 점[29] 등을 들어 태조대왕은 사실 유리명왕과 혈연 관계가 없는 새로운 왕조의 시조이며 이전의 왕과 무리하게 혈연 관계를 주장하다가 설정오류가 생긴 것이라는 주장[30]도 있다. (노태돈의 견해)
유리명왕이 다 해씨 성을 사용했다는 점을 들어 아예 초대 왕 고추모(동명성왕, 추모왕)와 2대 왕 해유류(유리명왕)가 혈연 관계가 아니었고 이후 모본왕이 실각하고 추모왕의 후손인 재사의 아들 궁이 왕위에 올라 계루부의 왕위가 다시 이어졌다고 보는 설도 있다. 해씨 고구려설 참조.[31]

4.3. 학계의 정설


노태돈의 『고구려사 연구』에서 제기된 설을 토대로 하는 학설로, 동명성왕부터 모본왕까지의 왕가는 태조대왕 이후 왕가와 별개의 계통이었는데 모본왕 피살 후 긴 왕권 다툼이 발생해 최종적으로 계루부의 태조대왕으로 왕계가 바뀌었고, 후대에 인위적으로 두 왕계를 연결시키면서 태조대왕의 수명과 재위 기간이 비정상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출처
단, 동명성왕계에서 태조대왕계로의 왕가 교체가 연노부와 계루부 간에서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계루부 내부에서 일어난 일인지는 논쟁이 있는 편. 노태돈은 왕가 교체가 계루부 내부에서 일어났다고 보았다.

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태조대왕 본기'''
一年冬十一月 태조왕이 즉위하다
三年春二月 요서에 성을 쌓아 후한의 침략에 대비하다
三年秋八月 남부 지방이 해충으로 곡식이 피해를 입다
四年秋七月 동옥저를 정벌하고 영토를 넓히다
七年夏四月 붉은 날개가 달린 흰 물고기를 얻다
七年秋七月 국내성 지역에 큰 홍수가 나다
十年秋八月 사냥을 나가서 흰 사슴을 잡다
十年秋八月 남부 지방이 풀무치 피해를 입다
十六年秋八月 갈사국 왕의 손자가 나라를 들어 항복해오다
十六年冬十月 겨울에 천둥이 치다
二十年春二月 조내를 정벌하다
二十年夏四月 국내성에 가뭄이 들다
二十二年冬十月 주내를 정벌하다
二十五年冬十月 부여가 신기한 사슴과 토끼를 바치다
二十五年冬十一月 국내성 일대에 눈이 많이 내리다
四十六年春三月 책성을 순수하고 돌아오다
四十六年冬十月 책성에서 국내성으로 돌아오다
五十年秋八月 사신을 보내 책성 지역의 민심을 안정시키다
五十三年春一月 부여가 호랑이를 바치다
五十三年春一月 요동을 침략하였으나 요동 태수에게 패하다
五十三年秋九月 요동 태수 경기가 맥인을 쳐부수다
五十五年秋九月 자주색 노루를 잡다
五十五年冬十月 동해 곡수가 붉은 표범을 바치다
五十六年 가뭄으로 농작물을 거둘 수 없어 백성이 굶주리다
五十七年春一月 후한에 사신을 보내다
五十九年 현도군에 속하기를 청하다
六十二年春三月 일식이 일어나다
六十二年秋八月 남해 지역을 순수하다
六十二年冬十月 남해에서 돌아오다
六十四年春三月 일식이 일어나다
六十四年冬十二月 눈이 많이 내리다
六十六年春二月 지진이 일어나다
六十六年夏六月 현도군을 공격하다
六十六年秋七月 황충과 우박 피해를 입다
六十六年秋八月 현명하고 착한 사람을 천거하게 하다
六十九年 후한이 침략해왔으나 수성이 이를 막다
六十九年夏四月 고구려가 후한 요대현을 공격하다
六十九年冬十月 태후의 사당에 제사지내고 불쌍한 백성들을 위로하다
六十九年冬十月 숙신에서 사신이 오다
六十九年冬十一月 수성에게 나라 일을 맡기다
六十九年冬十二月 후한 현도성을 공격하여 포위하다
七十年 후한 요동을 공격하였는데 부여가 후한을 도와 실패하다
七十一年冬十月 좌보와 우보를 임명하다
七十二年秋九月 일식이 일어나다
七十二年冬十月 후한에 조공하다
七十二年冬十一月 국내성에 지진이 일어나다
八十年秋七月 수성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건의하다
八十六年春三月 수성이 질양에서 사냥하다
八十六年秋七月 수성이 동생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다
九十年秋九月 환도에 지진이 일어나다
九十年 표범이 호랑이 꼬리를 물어 끊는 꿈을 꾸다
九十四年秋七月 수성이 왕위를 도모하려다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을 죽이다
九十四年秋八月 서안평을 공격하다
九十四年冬十月 우보 고복장이 수성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말도록 건의하다
九十四年冬十二月 태조가 수성에게 왕위를 물려주다
재위 초반부는 부여태후의 섭정 기간이고 재위 69년차부터는 이게 태조대왕의 기록인지 차대왕의 기록인지 모를 지경. 차대왕 기사를 보면 왕이 즉위하자마자 우보 고복장과 막근태자를 죽이는데, 후한서를 신뢰하여 차대왕막근태자가 모두 태조대왕의 아들이었다고 보면 초기 고구려의 형제상속 원칙에 따라 차대왕의 태제는 막근태자로 지명되었으나 이를 부자상속으로 바꿈에 따라 막근태자가 숙청되었고 이 시점이 차대왕의 즉위로 표현되는 146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6.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1] 어릴때 이름[2] 정실부인. 고막근, 고막덕의 어머니. 조선상고사에서 고막근, 고막덕을 태조대왕의 적자로 본 견해를 따름.[3] 측실. 차대왕, 신대왕의 어머니. 조선상고사에서 차대왕, 신대왕을 태조대왕의 서자로 본 견해를 따름.[4] 다만 후한서에서는 태조대왕의 태자가 차대왕으로 나오기 때문에, 결혼 순서는 정실부인보다 빨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국내 사서에서 차대왕과 신대왕을 태조대왕의 아들이 아닌 형제로 서술한 만큼, 수계혼이 이뤄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5] 후한서에 기록.[6] 후한서에 기록.[7] 후한서에 기록. 정확한 세대수를 파악하기 힘들다.[8] 삼국사기의 기록.[9] 후한서의 기록.[10] 후한서의 기록. 일단 47년 태어났다는 삼국사기의 서술은 분명히 틀렸다.[11] 태조인 대왕, 다음 대왕, 새로운 대왕.[12] 중원고구려비에 의하면 장수왕은 고려대왕으로 비석에 쓰여있다. 여러 사서들을 보아도 고구려 왕은 성왕, 태왕, 명왕 등의 여러 호칭을 가지고 있다.[13] 아마도 이 때의 고구려는 진(秦)나라진시황, 진이세, 진삼세처럼 이런 방식의 왕호를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14] 이럴 경우, 태조왕 - 차대왕이 부자 지간이고 차대왕 - 신대왕이 부자 지간이고 태조왕 - 신대왕이 조손 지간이라는 말이다.[15] 북사에서는 차대왕에 관한 기록이 빠져있는데 궁(태조왕)이 죽고 아들 백고(신대왕)가 즉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6] 현재의 톈진, 베이징 지역이다. 고구려가 요동을 넘어 요서를 공략한 기록은 고구려 초기의 모본왕에도 나와 요동의 정확한 위치를 비롯해 역사학자들을 골치아프게 한다.[17] 만일 이 태조왕이 진짜 고구려의 건국자라면 주몽 신화도 설명이 가능하다. 왜 에서 나왔는지에 대한 것도 실제로는 태조왕의 기나긴 재위 기간에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다.[18] 신라의 태조는 어떤 왕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는 관계로 학자들 사이에 여러 설이 있다.[19] 호삼성에 따르면 고구려 태조왕 때에 이르러 점차 강성해 자주 변경의 요새를 공격했으며 이때 고구려는 요동성 신빈현에 도읍했다.[20] 이 때 용단과 공손포는 몸으로 채풍을 호위했으나 모두 사망하였다.[21] 태조대왕, 장수왕과 달리 반대로 국내 왕들 중 가장 단명한 왕은 고려창왕으로 한국 나이로 겨우 10살의 나이에 주살되었다.[22]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은 서로 형제로 언급되는데 각각의 나이차는 24살, 18살. 그러니까 태조왕과 신대왕의 나이 차이는 40살로 통상적인 생물학적 형제가 되기에는 불가능한 나이가 되는 것인데 노산도 정도가 있는 거다. 그래서 차대왕과 신대왕이 태조왕의 아들이라는 설과 이들이 각자 아들, 손자 관계라는 설이 있다.[23] 수렴청정을 했다는 부여태후는 기록을 보면 고재사의 아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남편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여자가 섭정을 한 게 특이하다.[24] 물론 모본왕이 죽었을 때 35살인 사람이 스스로 연로하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나이는 이보다 많았을 것이다.[25] 이는 고구려가 가장 먼저 고대 국가의 기틀을 잡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 중 고구려 관련 기사가 가장 소상한 편이고 백제, 신라와 달리 중국 측 사서와 교차검증이 가장 잘 되는 편이다. 물론 중국 입장에서는 육로로 접해있고 국가꼴을 갖춘 고구려만 실어준 것이고 본토에서도 멀고 삼한의 소국에 지나지 않았던 백제와 신라 쪽은 적어주지 않은 탓도 있다. 그나마 풍납토성, 나정 등의 발굴 성과로 인해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이 팽배하던 예전과 달리 현재는 백제와 신라의 초기 기록이 비판적으로 수용되는 편이다.[26] 북한에서는 이미 고구려가 기원전 2세기, 3세기에 세워졌다고 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남쪽 구석에 있던 신라가 부여를 이은 고구려보다 먼저 세워졌으니 조선 시대부터 의혹이 생길 만하다. 다만 한국 사학계에서는 신라와 백제의 건국 연대가 끌어올려졌다는 데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공감대가 형성되었지 고구려의 건국 연대가 끌어내려졌다는 데에 있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우세한 편이다.[27] 고구려 왕 중에는 장수한 인물이 매우 많다. 다른 왕조에서는 1~2명 보일까말까한 70대 왕들이 여럿 보이기도 하고 왕이라는 직업이 스트레스와 과로로 장수하기 어렵다는걸 생각해보면 고구려 왕가는 장수하는 집안이었을 확률이 높다. 장수는 유전자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28] 사실 장수왕의 나이는 현실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고 사서로도 교차검증까지 되니 이견의 여지가 없지만 애초에 명림답부는 교차검증도 안되거니와 당대의 기록에 불과하니 진실이라고 볼 여지는 거의 없다.[29] 김부식이 인용한 '해동고기'의 구절에도 국조왕으로 표기하고 있다.[30] 두로라는 사람이 모본왕을 죽인 후 태자는 '불초하다'는 이유로 왕위를 잇지 못하고 태조대왕이 대신 왕위에 올랐다. 이 기록은 명백하게 쿠데타를 연상시킨다.[31] 이런 의심을 가능케 하는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 유리왕~모본왕까지 4명의 왕을 기록할때 꼬박꼬박 '''성은 해씨이다.''' 라고 기재했다. 그런 성에 대한 기재가 생략된 게 태조왕 때부터다. 소수림왕의 경우 소수림왕 옆에 소해주류왕이라는 표기를 병기했으나, 굳이 성이 해씨라고 짚어 기재하지는 않았다. 참고로 동명성왕 고주몽의 경우 부여 왕가에서 자라긴 했지만 고구려 관련 전승에서 부여 왕가의 조상뻘이 될 수도 있는 해모수의 자손이라고 했지 부여 왕가의 자손이라 언급한 건 단 한 건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