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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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御刀
고려 말 ~ 조선 초기의 도검. 이방원이 태조 이성계에게 선물한 검이라고 한다.
원래 창덕궁에 소장되어 있었다가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한국 도검의 특징적인 양식을 지녀 역사성과 학술성, 예술성을 인정받는다.
길이는 무려 147cm에 달하고 칼날인 도신은 92.0cm, 자루 길이는 55cm이다. 칼집 길이도 103cm에 이르는 거대한 장검이다. 손잡이는 상어 가죽으로 감싸고 머리에는 용의 머리를 조각했는데, 채색한 뒤 붉은색 매듭 끈을 드리워 장식했다. 검의 끝부분이 역날검처럼 생겨 오해하기 쉽지만, 역날검은 아니며 끝부분 만이 양날인 의사도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크기를 볼 때 실전용이 아닌 지휘도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는데 후술할 전설이나 검이 모조품이라는 것을 미루어보면 전어도의 원본은 이유야 어찌 되었건 한번 부러졌다는 소리가 되며 이는 실전에서 쓰이지 않은 칼로써는 좀처럼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칼의 끝부분만 양날로 만드는 것은 베기 외에 찌르기에도 적합하게 만들면서 칼날 전체를 양날로 만드는 것에 비해 내구성이 좋다는 강점을 가지는데, 그러한 칼날이 부러졌다는 것이다. 이성계가 활동했던 고려 말기 시절 일본은 전어도처럼 칼날 길이가 90cm를 흔히 넘기던 노다치가 이미 등장한 시점이며 이 시기 왜구는 정규병에 가까웠다. 한참 나중에 벌어진 임진왜란에서 노다치 및 길이가 더 긴 일본도에 대응하기 위해 환도의 길이가 다시 늘어나고 명나라로부터 쌍수도[1] 를 들여왔던 걸 보면 이러한 길이의 칼은 고려 말기에서도 흔히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2]
칼의 모양이 워낙 특이하다 보니 전어도가 사실은 후세에 만들어진 창작품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러시아 체르냐찌노 발해 고분에서 크기나 형태가 전어도와 상당히 유사한 철검이 발굴됨에 따라 이러한 주장은 쏙 들어가게 되었다. 두 검의 관계에 대해서 이런저런 추측이 나오는 중.
또한 일본 정창원에서 보관 중인 당태도[3] 유물 중에 칼끝의 모양은 다르지만, 전어도처럼 끝부분만 양날인 유물이 존재한다.[4] 어쩌면 전어도는 발해 - 고려식 당태도로 분류해야 할지도 모른다.
최초 기고글 (추정)[5]
아래의 전설은 2006년 네이버 블로그에서 시작된 이야기로 '''실제로 전래되는 전설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블로그 글 자체도 이미 출처불명인데 거기다 사진참사검 부분은 명확하게 '''해당 글이 넷상에 퍼진 이후 누군가가 덧붙인 내용'''이다. 그러니 반쯤 흘려듣는것을 추천한다.
전어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 대사가 함흥을 지날 때 한 묏자리를 보고 왕이 날 자리라 하였다. 마침 이성계의 종이 그 말을 듣고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에게 고했다. 이자춘은 나옹 대사를 찾아가 이를 재차 물었으며, 나옹 대사는 굳게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동자승 무학이 이자춘에게 슬며시 알려주어 즉시 그 묘 자리로 조상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땅을 파자 칼 한 자루가 나왔다. 찬란한 금빛에 용머리로 되어있는 칼자루 끝은 예사롭지 않았고 이자춘은 임금이 될 자의 칼이라며 크게 기뻐하고 아들 이성계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성계 일파가 우왕을 죽일 때 용의 후손이라 그 어떤 무기도 통하지 않자, 이성계가 이 검으로 손수 베어 죽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 뒤 우왕이 가지고 있던 사진참사검이 저주를 내려 이성계의 수하들이 피를 토하며 죽어가자 무학대사의 조언에 따라 사진참사검 옆에 이 검을 꽂아 저주를 막았고, 두 칼은 3일 밤낮으로 싸우며 울다가 전어도는 박살나고 사진참사검은 금이 갔다고 한다.
사진참사검은 비록 망가졌지만, 이성계의 혈통에 내린 저주가 남아 있어서 그것을 막기 위해 조선 왕실에서는 용의 기운을 가진 사진참사검과는 정 반대로 호랑이의 기운이 담긴 사인참사검을 신하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정기적으로 제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전어도와 사진참사검은 무학 대사가 거두었고 현재는 행방이 묘연하다고 하는데, 어디까지나 야사인 만큼 믿거나 말거나…
傳御刀
1. 개요
고려 말 ~ 조선 초기의 도검. 이방원이 태조 이성계에게 선물한 검이라고 한다.
원래 창덕궁에 소장되어 있었다가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2. 특성
한국 도검의 특징적인 양식을 지녀 역사성과 학술성, 예술성을 인정받는다.
길이는 무려 147cm에 달하고 칼날인 도신은 92.0cm, 자루 길이는 55cm이다. 칼집 길이도 103cm에 이르는 거대한 장검이다. 손잡이는 상어 가죽으로 감싸고 머리에는 용의 머리를 조각했는데, 채색한 뒤 붉은색 매듭 끈을 드리워 장식했다. 검의 끝부분이 역날검처럼 생겨 오해하기 쉽지만, 역날검은 아니며 끝부분 만이 양날인 의사도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크기를 볼 때 실전용이 아닌 지휘도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는데 후술할 전설이나 검이 모조품이라는 것을 미루어보면 전어도의 원본은 이유야 어찌 되었건 한번 부러졌다는 소리가 되며 이는 실전에서 쓰이지 않은 칼로써는 좀처럼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칼의 끝부분만 양날로 만드는 것은 베기 외에 찌르기에도 적합하게 만들면서 칼날 전체를 양날로 만드는 것에 비해 내구성이 좋다는 강점을 가지는데, 그러한 칼날이 부러졌다는 것이다. 이성계가 활동했던 고려 말기 시절 일본은 전어도처럼 칼날 길이가 90cm를 흔히 넘기던 노다치가 이미 등장한 시점이며 이 시기 왜구는 정규병에 가까웠다. 한참 나중에 벌어진 임진왜란에서 노다치 및 길이가 더 긴 일본도에 대응하기 위해 환도의 길이가 다시 늘어나고 명나라로부터 쌍수도[1] 를 들여왔던 걸 보면 이러한 길이의 칼은 고려 말기에서도 흔히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2]
칼의 모양이 워낙 특이하다 보니 전어도가 사실은 후세에 만들어진 창작품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러시아 체르냐찌노 발해 고분에서 크기나 형태가 전어도와 상당히 유사한 철검이 발굴됨에 따라 이러한 주장은 쏙 들어가게 되었다. 두 검의 관계에 대해서 이런저런 추측이 나오는 중.
또한 일본 정창원에서 보관 중인 당태도[3] 유물 중에 칼끝의 모양은 다르지만, 전어도처럼 끝부분만 양날인 유물이 존재한다.[4] 어쩌면 전어도는 발해 - 고려식 당태도로 분류해야 할지도 모른다.
3. 전설
최초 기고글 (추정)[5]
아래의 전설은 2006년 네이버 블로그에서 시작된 이야기로 '''실제로 전래되는 전설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블로그 글 자체도 이미 출처불명인데 거기다 사진참사검 부분은 명확하게 '''해당 글이 넷상에 퍼진 이후 누군가가 덧붙인 내용'''이다. 그러니 반쯤 흘려듣는것을 추천한다.
전어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 대사가 함흥을 지날 때 한 묏자리를 보고 왕이 날 자리라 하였다. 마침 이성계의 종이 그 말을 듣고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에게 고했다. 이자춘은 나옹 대사를 찾아가 이를 재차 물었으며, 나옹 대사는 굳게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동자승 무학이 이자춘에게 슬며시 알려주어 즉시 그 묘 자리로 조상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땅을 파자 칼 한 자루가 나왔다. 찬란한 금빛에 용머리로 되어있는 칼자루 끝은 예사롭지 않았고 이자춘은 임금이 될 자의 칼이라며 크게 기뻐하고 아들 이성계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성계 일파가 우왕을 죽일 때 용의 후손이라 그 어떤 무기도 통하지 않자, 이성계가 이 검으로 손수 베어 죽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 뒤 우왕이 가지고 있던 사진참사검이 저주를 내려 이성계의 수하들이 피를 토하며 죽어가자 무학대사의 조언에 따라 사진참사검 옆에 이 검을 꽂아 저주를 막았고, 두 칼은 3일 밤낮으로 싸우며 울다가 전어도는 박살나고 사진참사검은 금이 갔다고 한다.
사진참사검은 비록 망가졌지만, 이성계의 혈통에 내린 저주가 남아 있어서 그것을 막기 위해 조선 왕실에서는 용의 기운을 가진 사진참사검과는 정 반대로 호랑이의 기운이 담긴 사인참사검을 신하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정기적으로 제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전어도와 사진참사검은 무학 대사가 거두었고 현재는 행방이 묘연하다고 하는데, 어디까지나 야사인 만큼 믿거나 말거나…
4. 기타
- 현재 전해지는 유물은 이성계가 실제로 사용한 진품이 아니라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만든 레플리카라고 한다. 아쉽긴 하지만, 소유주와 만들어 바친 인물의 이름 값을 생각하면 지금 전해지는 복제품도 충분히 원본에 필적하는 가치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5. 대중매체
- 2020년 개봉한 한국영화 도굴에서 이 전어도가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영화에서는 선릉 안에 잠들어 있는 것으로 나온다.
6. 같이보기
[1] 왜구가 사용하던 노다치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명나라식 복제품이다.[2] 일부에서는 주 무기가 활이었고 전투가 주로 성에서 벌어졌기에 이러한 길이의 칼을 사용할 일이 없었다고 주장하나, 당장 황산대첩만 보더라도 마지막 전투는 진흙탕 위에서 벌어진 정신없는 난전이었다. 이성계는 이 전투에서 한번 죽을 뻔도 하고, 화살도 한 발 맞고, 여러 번 포위도 당하고, 말만 적어도 두 번은 바꿔탔다. 당연히 보병 간 백병전도 흔하게 벌어졌을 텐데, 조선과는 다르게 날 길이 차이에서 오는 불리함에 대한 기록이 딱히 없다. 그리고 이 정신없는 난전에서 고려군은 별로 꿇리지도 않았다.[3] 당나라 시절의 무기로 전어도처럼 칼날의 길이가 매우 긴 칼인 노다치 및 타치의 기원이다. [4] [image] [5] 해당 게시글이 출처로 언급하고 있는 글은 현재 삭제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