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제현 신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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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발견된 위치에서 찍은 사진, 중간은 보호각으로 이전한 후의 모습, 오른쪽은 탁본. 왼쪽과 중간 사진은 글자를 뚜렷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탁본을 친 후 촬영한 것이다.
1. 개요
2. 발견 경위와 내용
3. 의의
4. 비석은 조작되었다?
5. 관련 문서


1. 개요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 성현리[1]에 존재하는 비석으로, 현재 한반도에서 전해지는 비석 중 가장 오래된 비석이다. 낙랑군 점제현(秥蟬縣)에서 신에게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점제현 신사비의 발견으로 낙랑군에 속해 있던 25개의 현(縣)들 중 점제현의 위치를 알 수 있게 되었다.

2. 발견 경위와 내용


비석의 존재는 구한말부터 이미 알려져 있던 것으로 추정되며 1913년 조선총독부의 요청으로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이마니시 류(今西龍) 를 비롯한 일본인 학자들이 어을동토성(於乙洞土城)터를 조사하면서 토성의 동북쪽 약 150m 지점에서 발견하였다. 비석은 위쪽 가장자리 부분이 파손된 상태였으며, 글자도 마모가 심해 모든 글자를 판독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비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으며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는 ▨로 표시하였고 논란이 있는 글자는 괄호로 표기하였다.

▨▨▨年四月戊午秥蟬長(渤)▨ → ▨▨▨년4월 무오에 점제현의 장 (발▨)

▨建丞屬國會▨▨▨▨▨ → ▨건 승 속국 회…

▨神祠刻石辭曰 → 신사의 돌에 내용을 옮겨 새기니

▨平山君德配代嵩承天▨▨ → ▨평산군의 덕은 대산·숭산의 산신과 비견하고 승천…

(保)佑秥蟬興甘風雨惠閏土田 → 점제현을 보우하고 좋은 비바람을 일으키고 기름진 토지와 밭의 혜택을 내리시니,

▨▨壽考五穀豊成盜賊不起 → ▨▨이 장수하고 오곡이 풍성하며 도적은 일어나지 않고

▨▨蟄臧出入吉利咸受神光 → ▨▨숨어들고 길한 것과 이로움이 출입하여 모두 신의 광덕을 받게 하나이다.

내용을 풀어 살펴보면 고을의 수령에 해당하는 점제현장이, 시기는 알 수는 없으나 4월 무오에 회의를 주관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신사에 있는 돌에 새겨넣은 것으로, 그 내용인 즉 점제현에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란다는 것이다. 3번째 문장의 평산군(平山君)은 뒷 부분의 내용을 통해 유추해볼 때 사람이 아니라 산신을 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3. 의의


점제현 신사비의 발견으로 낙랑군의 25개 현 중 점제현의 위치를 알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다른 24개 현의 위치 비정에도 많은 참고가 되었다. 아울러 점제현 신사비 인근에 위치한 어을동토성은 점제현의 치소로 비정되었다.

4. 비석은 조작되었다?


유사역사학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봉니(封泥)와 더불어 계속 물고늘어지는 떡밥이다. 사실 비석의 발견시기가 일제강점기이고 최초 발견자 또한 일본인이라는 점 때문에 조작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용해먹기 딱 좋은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비석이 현재 북한에 있어 직접 확인할 수도 없다는 점은 더욱 조작설을 부추기는 요소가 된다. 또한 이는 비단 점제현 신사비에 국한되지 않고 한사군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좀만 살펴보면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분명하게 드러난다. 자세한 내용은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 참고.
여기서는 점제현 신사비가 조작되었다는 주장들 중 몇 가지만 살펴보겠다.
  1. 비석은 요서지역에 있었으나 오늘날의 평안남도 용강군으로 옮겨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본인들이 역사조작을 위해서 요서지역에 있는 비석을 용강군까지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뒷받침하는 뚜렷한 근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2] 조선총독부 관련 문헌을 살펴보면 점제현 신사비는 1913년 세키노 타다시 일행이 발견하기 전부터 현지인들 사이에 알려져 있던 비석이고, 심지어 비석의 내용은 보물의 위치를 표시해놓은 것이라는 구전 전설까지 있었다. 그리고 비석이 요서지역에서 옮겨졌다는 주장 자체가 한사군이 당연히 요서지역에 있었다는 기준을 세운 채 끼워맞춘 것에 불과하다. 즉, 답을 이미 정해놓고 거기에 수식을 끼워맞춘 격이다.[3] 한사군은 한반도 서북한지역에 위치하였다가 요서지역으로 교치(僑置)되었다는 것을 그들은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여담이지만 요서(遼西)라는 명칭 또한 요하 서쪽지역을 막연히 부르는 명칭이지 행정구역이 아니다.
2, 비석의 재질이 평안도 일대에서 확인되는 것과 다르며, 비석 바닥에 시멘트가 묻어 있다.
북한의 학자 김교정, 정강철이 주장했다는 것으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점제현 신사비의 돌을 분석해본 결과 평안도 일대의 것과는 크게 다르고 요하지역의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 주 내용이다. 따라서 비석은 요서지역 어딘가에서 만들어져 용강군에 옮겨졌다는 것. 아울러 비석 바닥에서 시멘트가 확인되었으니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연구성과는 100% 신뢰하기 어렵다. 북한은 다들 알다시피 더 이상 공산주의라고 불러줄 수도 없을 정도로 모순으로 점철된 주체사상 정권으로 변질된 지 오래이며 그런 북한의 역사학계 역시 윗선의 개입에 휘둘려 이미 학(學)으로써의 정체성을 잃어버린지 오래이다. 내놓는 자료마다 역사학과 아무 상관없는 김씨 찬양은 당연히 들어가고 대동강 문명설을 주장하거나 단군릉을 창작하는 등, 정권유지와 정통성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변해버렸다. 따라서 여전히 그런 북한 치하에 있는 점제현 신사비에 대한 검증에 앞서 북한 학자의 주장에 대한 검증이 먼저 필요하다. 비석 바닥의 시멘트는 보호각으로 이전한 후 비석을 세우기 위해 발라졌을 가능성도 있다.
3. 2000년 이상 존재를 몰랐던 비석을 일본인 학자가 하루만에 찾아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말인 즉, 한사군이 축출된 후 1913년이 될 때까지 아무도 존재를 몰랐던 비석을 일본인이 하루만에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비석이 계속 그 자리에 존재했다면 분명 기록이 있었을 것이고 존재를 알고 있었을텐데 왜 몰랐냐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 마을에서는 이미 비석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보물의 위치를 기록한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설령 비석의 존재를 2000년 이상 몰랐다고 하더라도, 이런 사례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별로 특이하지 않은 일이다. 당장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충주 고구려비가 1979년에 발견되기 전까지 그 존재 자체를 몰랐다. 비석이 세워진 시기가 장수왕대로 추정되는 만큼, 1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존재를 몰랐던 것이다. 경주시문무대왕릉비는 또 어떠한가? 조선시대 경주부윤 홍양호가 문무대왕릉비 조각들을 발견하였다는 기록이 있었으나 또 다시 행방이 묘연해졌고, 1961년에야 경주 동부동 주택가에서 비석의 하단부가 발견되었다. 상단부는 한참이 지난 2009년에 어느 주택의 앞마당 수돗가에서 수도검침원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
과거나 현재나 전문지식이 있거나 관심있게 돌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해당 돌이 글자가 새겨진 비석인지 단지 예쁘게 다듬은 돌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화강암 자연석은 거의 위장패턴에 가까운 무늬가 있으며, 오랜 세월이 지남에 따라 마모되어 글씨가 뚜렷하게 보이지도 않기 때문. 탁본을 치는 이유도, 글씨를 뚜렷하게 보기 위함이다.
점제현 신사비는 일제강점기일본인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점, 현재 우리가 비석을 확인할 길이 없다는 점 때문에 끊임없이 조작설에 휘말리고 있다. 이 문제는 남북통일이 되어 비석을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되면 끝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북한에서는 광복 이후 점제현 신사비를 국보급 유물로써 관리해왔으나, 2004년 이후부터는 관리 목록에서 빠져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황이다. 그러나 점제현 신사비를 제외하더라도 한반도 서북한지역에서 확인되는 무수히 많은 한나라계 무덤, 치소로 사용되었던 토성들이 한사군을 증명하고 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5. 관련 문서



[1] 북한 행정구역상으로는 온천군 성현리[2] 2번에서 언급하겠지만 비석의 재질이 평안도 일대에서 확인되는 화강암과 다르다는 주장이 있다.[3] 참고로 세키노 타다시는 1909년 평양 석암리 고분군에서 전실묘(벽돌무덤)를 조사하였는데 이를 고구려 고분이라 주장하였다. 이에 반대하는 도리이 류조(鳥居龍臧)와 논쟁을 벌인 바 있다. 이는 당시만 하더라도 '평양' 하면 고구려라는 인식이 강했다. 한사군은 사실상 아오안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저 당시만 하더라도 아직 고구려 고분, 낙랑 고분에 대한 개념이 확립되지 않은 시기였다. 1911년 황해도에서 장무이묘가 발견된 이후에야 전실묘(벽돌무덤)가 한사군의 무덤이라는 인식이 확립된 것이다. 본문의 '답을 미리 정해놓고 수식을 끼워맞추는 경우'와 대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