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릉비
1. 소개
판독문 해석본
신라의 제30대 국왕이자 삼국통일을 이뤄낸 문무왕을 기리는 비(碑). 비문은 급찬(級飡)[1] 국학소경(國學少卿)이었던 김▨▨[2] , 글씨는 대사(大舍) 한눌유(韓訥儒)[3] 가 썼다.
다른 여러 신라왕릉에도 부서져 조각난 왕릉비의 일부가 발견되었다. 따라서 신라 당대에는 신라왕릉의 능원에 그 왕의 업적을 새겨놓은 왕릉비를 같이 세웠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문무왕릉비는 비문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만큼 글귀의 많은 부분이 남았으므로 특히 주목받았다.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부족한 한국 고대사 기록을 채워주는 기록들이 눈에 띄여 한국고고학 연구에 중요한 유물이기도 하다.
2. 역사
2.1. 건립
《삼국사기》 등 문헌에는 문무왕릉비가 따로 언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문무왕릉비문이 발견되어 신문왕 재위 2년(682) 7월 25일에 세워음을 알 수 있다. 현전하는 파편이 경주시 동부동에서 발견되었지만, 문무왕릉비를 원래는 사천왕사에 세웠다고 추정한다.[4] 왕릉비는 당연히 왕릉 근처에 세우는 법이지만, 문무왕의 시신은 인도의 법도대로 불교식 화장을 해서 바다에 뿌렸으므로 흔히 생각하는 '왕릉'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경주 대왕암에 시신을 화장한 뼈와 재를 산골하고 문무왕이 창건한 사천왕사에 능비만 세웠다는 설, 화장한 재를 바다에 뿌려 왕릉이 없으므로 추모용 가짜 왕릉을 만들고 그 근처에 위치한 사천왕사 경내에 능비를 세운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문무왕의 유골을 화장하였기 때문에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창건한 사천왕사(四天王寺)에다 능비만을 따로 세웠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일부 학자들은 가짜 왕릉을 만들고 거기에 능비를 세운 것으로 보기도 한다.
2.2. 발견
신라 멸망 후 언젠가 파손 후 잊힌 왕릉비를 조선 정조 20년(1796) 경주부윤 홍양호(洪良浩)가 발견했다. 이후 청나라 유희해(劉喜海)가 탁본을 입수해 1832년에 편찬한 《해동금석원》[5] 에 실었다.
발견 당시엔 대편(大片: 큰 덩어리) 1개만 있었으나 2009년 경주시의 경주문화원(舊 박물관) 옆 주택가에서 문무왕릉비 상단부인 소편(小片) 1개를 찾아냈다. 집주인이 발견하여 문화재청에 신고했다고 한다(경향신문, "문무왕릉비 사실상 다 찾은 셈", 2009). 그런데 해당 발견 과정에서 집주인이 빨래판으로 썼다는 둥, 이렇게 빨래판으로 방치되어 있던걸 검침원이 발견했다는 둥 하는 중앙일보가 왜곡된 기사를 보도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집주인은 "2살 때 이 집으로 이사와 40여 년 살았지만 그 비석을 빨래판으로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무슨 내용인지는 몰라도 글자가 적혀있어 10년 전 관계부처에 신고했지만 묵살당했고, 7년 전엔 돌을 사가겠다는 사람이 있었지만 내놓지 않았습니다. 억울합니다."라고 토로했다.
이후 중앙일보 측에서 '더 극적인 이야기로 보이도록 몰아갔다.'고 자백하는 정정기사#를 내보냈으나[6] , 해당 기사로 인해 당국이 강제집행한 데다[7] 귀중한 문화재를 집주인이 빨래판으로 썼다는 오명을 오래도록 쓰게 했다.[8] 더욱 기가 막히는 부분은 정정기사랍시고 낸 기사에서 또 헛소리를 했다는 것. 충주 고구려비가 빨래판으로 쓰였다고 운운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충주 고구려비는 빨래판으로 쓰였던 적이 없고, 고구려비로 밝혀지기 전에도 마을 사람들이 신령한 돌로 중히 여기는 마을의 재산이었다. 변명한답시고 기본적인 사실 관계 확인도 없이 우선 엉터리 거짓말부터 해대는 엉망진창인 기레기의 수준을 볼 수 있다. 관련 글
3. 내용
한 면당 28행, 한 행당 38자[10] 로 이루어져 있다. 현존하는 비문은 훼손이 심해, 판독 가능한 문구가 적다. 다만 신라라는 나라에 대한 자부심, 당시 국성인 경주 김씨(金氏)에 대한 내력, 부왕 태종 무열왕의 업적, 삼국통일전쟁 당시 신라의 모습, 문무왕의 유언과 장례 방법이 기록되어 있음은 확인된다.
특히 눈에 띄는 장면은 성한왕의 소개와, 한무제의 총애를 받았던 흉노일족이던 김일제와 관련된 기록이다. 당시 신라인들이 자신들의 시조를 누구로 보고 있는 가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기에 신라사 연구에서 상당히 중요한 내용을 담고있다. 다만 학계에서는 성한왕은 김알지 혹은 그의 아들 김세한, 혹은 미추왕 등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흉노족 신라왕족설은 후대에 끼워맞춘 일설일 뿐[11] 실질적으로는 타당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흉노족 신라왕족설 항목 참조.
[1] 신라의 9등급 벼슬.[2] 이름 부분이 마모되어 본명을 알 수가 없다.[3] 신라 인물 중 이름이 전하는 유일한 한씨(韓氏)다.[4] 사천왕사지에 비석 밑단에 설치되는 귀부가 있는데 이곳과 크기가 맞기에 이런 가설이 나왔다.[5] 海東金石苑. 청나라 고증학자 유희해(劉喜海, 1794~1852)가 한반도의 각종 금석문의 탁본을 모아 편집한 책이다.[6] 정정기사라고는 하지만 해당 기사의 논조는 언론의 속성이 그렇다, 변명하자면 운운, 문화재가 원래 이렇다는 식의 4과문이라서 오히려 기레기는 기레기일 뿐이라는 사실만 확인시켜준다.[7] 즉 집주인에게 보상금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다![8] 실제로 해당 항목도 오랫동안 수정되지 않고 있었다.[9] 한국사DB에서 가져왔고, 2행 3자 後, 9행 2자 挹는 해동금석원으로 보충하였다. 1행의 인명 金▨▨이 바로 뒤의 奉과 이어진다는 전제 하에 두 동강 난 비를 다시 맞춘 것이다. ▨는 비문의 결락으로 인해 판독할 수 없는 자를, ▩는 원래 비문에 글자가 없었음을 나타낸다.[10] 다만, 비문이 國新羅文武王陵之碑로 시작하므로 앞에 몇 글자가 더 있었던 것이 확실시된다. 이 비의 정식 명칭을 '''대당낙랑군왕개부의동삼사상주국신라문무왕지비'''(大唐樂浪郡王開府儀同三司上柱國新羅文武王陵之碑)로 파악하는 견해가 중국에서 제기된 바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 행당 무려 14행이 유실된 것이 된다.[11] 한국사에서 다른 사례를 찾아보면 백제나 가야도 여러 버전의 시조전승이 동시에 전해지고 있고 고구려는 부여 동명왕의 시조설화를 복붙했다는 의혹이 있으며, 고려 왕건, 궁예, 견훤은 조상이 중국 황제나 백제 왕, 신라 왕이라고 무리수를 둔 전승이 여럿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