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소공

 


'''정(鄭)나라 4,6대 국군[1]
소공
昭公
'''
''''''
희(姬)
''''''
정(鄭)
''''''
홀(忽)
''''''
만백(曼伯)
'''아버지'''
정장공(鄭莊公) 희오생(姬寤生)
'''어머니'''
등만(鄧曼)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695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701년 5월 ~ 9월[2]
기원전 697년 ~ 기원전 695년[3]
1. 개요
2. 생애
2.1. 세자 시절과 재위 초창기
2.2. 복위와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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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춘추시대 정나라의 제4,6대 군주. 정장공의 장남. 정여공, 공자 미, 공자 영의 이복 형. 세자 시절 정장공의 명을 받들어 정복 활동에 공로가 컸다. 그러나 군주가 된 뒤에 상대국인 송나라의 간섭에 의해 폐위 되었다가 복위 되었으나 공자 미와 가까운 고거미(高渠彌)에 의해 살해당했다.

2. 생애



2.1. 세자 시절과 재위 초창기


정 장공 23년(기원전 720년), 주평왕이 정나라와 인질을 교환할 때 왕자 호와 그가 각기 주나라와 정나라에 인질로 갔다. 이때 주평왕이 죽어 세자 홀은 정나라로 돌아갔다.[4]
정 장공 30년(기원전 713년), 정 장공이 제나라, 노(魯)나라와 송나라를 칠 때 세자 홀은 나라를 지켰다. 송나라는 급한 상황을 면하고자 사마 공보가(孔父嘉)[5]에게 위나라와 함께 정나라의 수도인 신정을 치게 했다. 세자 홀은 채중과 함께 성을 굳게 지켜 정나라를 위기에서 지켜냈다.
정 장공 38년(기원전 706년), 북융족이 제나라를 치자 제나라가 사자를 정나라에 파견해 구원을 요청했다. 정 장공은 세자 홀을 보내 제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6월 북융을 쳐부수고 노획물을 제나라에 주었다. 당시 제나라의 군주였던 제희공(齊僖公)은 자신의 딸인 문강(文姜)을 시집 보내려 했으나 세자 홀이 이렇게 말하며 거절했다.
"정나라는 소국이고, 제나라는 대국입니다. 그러니 격에 맞지 않는 결혼으로 사료됩니다."
정 장공 43년(기원전 701년) 5월, 정 장공이 죽자 제족은 세자 홀을 추대했다. 그가 바로 정 소공이다. 채중이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갔는데, 송장공은 자신의 외조카인 공자 돌을 즉위시키라고 협박했다. 그리하여 9월 공자 돌은 송나라의 원조를 받아 정나라의 군주가 되니 그가 바로 정여공이다. 정소공은 위나라로 망명했다.

2.2. 복위와 최후


정 여공 4년(기원전 697년), 정여공이 채중의 권력이 큼을 경계해 옹규를 시켜 채중을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옹규가 죽었고, 채중은 정 소공을 복위시켰다.
정 소공 복위 2년(기원전 695년), 그가 고거미에게 살해당했다. 그 이유는 정 장공이 살아 있던 시절 그를 경에 올리지 못하게 간한 탓이었다. 고거미는 그것에 앙심을 품고, 정 소공이 사냥을 나갔을 때 그를 척살하고 공자 미를 군주로 모셨던 것이다.
[1] 폐위되었다가 복위 되었다[2] 초기 재위 기간.[3] 복위된 후 재위 기간[4] 그리고 왕자 호는 정나라에 적응하지 병으로 죽어, 그 아들인 주환왕이 즉위한다.[5] 공자(孔子)의 조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