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공

 


'''정(鄭)나라 5,9대 국군[1]
여공
厲公
'''
''''''
희(姬)
''''''
정(鄭)
''''''
돌(突)
''''''
자원(子元)
'''아버지'''
정장공(鄭莊公) 희오생(姬寤生)
'''어머니'''
옹길(雍佶)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673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701년 5월 ~ 9월[2]
기원전 697년 ~ 기원전 695년[3]
1. 개요
2. 생애
3. 초기 재위 기간
3.1. 폐위된 뒤에 일어난 일
3.2. 2차 재위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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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춘추시대 정나라의 제5,9대 군주. 정장공의 차남. 정소공의 동생. 공자 미, 공자 영의 형. 정문공의 아버지.[4] 어머니는 송나라 여자 옹길이다. 주혜왕을 복위시키는 업적을 세웠다.

2. 생애



3. 초기 재위 기간


정 장공 43년(기원전 701년), 제족의 도움으로 세자 홀이 대를 이었다. 그가 바로 정소공이다. 송장공(宋莊公)이 사신으로 온 제족을 위협해 공자 돌을 세우니 그가 바로 정 여공이다.
정 여공 원년(기원전 700년), 정여공은 노환공과 무보에서 회맹했다.
정 여공 2년(기원전 699년) 2월, 송나라가 정나라에 과도한 공물을 요구하자 정여공은 견디지 못해 기(紀)나라, 노(魯)나라와, 제(齊)나라, 송(宋)나라, 위(衛)나라, 연나라와 맞섰고 그들을 격파했다. 같은 해 정여공은 노나라와 우호를 다졌다.
정 여공 3년(기원전 698년) 정월, 정여공은 노환공과 조(曹)나라에서 회맹했다. 여름 정여공은 자인은 노나라로 보내 노나라 중온 땅에서 우호를 다지고, 곧 조나라와 회맹했다. 12월, 송나라는 제나라, 채(蔡)나라, 위나라, 진(陳)나라와 함께 정나라를 쳐서 신정의 거문을 불사르고 동쪽 교외에서 패배했다.
정 여공 4년(기원전 697년), 정여공은 전권을 장악한 권신 채중에게 위협을 느껴, 채중을 살해하려 했으나 옹규가 채중의 딸인 그 아내에게 누설해 결국 옹규는 그 대가로 살해당했다. 가을에 정여공은 역읍으로 달아나 역읍의 대부 선백을 죽이고 그곳을 차지해 그곳에서 은거했다. 채중은 그를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정여공이 송나라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채중은 대신 정소공을 세웠다.

3.1. 폐위된 뒤에 일어난 일


그러나 정소공은 금방 사이가 나쁜 고거미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그 고거미는 공자 미를 정나라의 군주로 모셨다. 그는 달리 정자 미(鄭子亹)라고도 불린다. 공자 미는 고거미와 함께 정나라를 다스렸으나 제양공이 그들을 불러 제거해버렸다. 이에 제족은 그 아우인 공자 영을 세웠다. 그는 달리 정자 영(鄭子嬰)이라고도 불린다.
공자 영 14년(기원전 680년), 정여공은 정나라의 수도를 쳐서 대부 부하를 포로로 잡고, 공자 영을 죽이겠다는 약조를 받고서 6월에 정여공은 복위에 성공했다.

3.2. 2차 재위 기간


정 여공 복위 5년(기원전 675년), 연나라와 위나라가 주 혜왕을 몰아내고 왕자 퇴를 추대해 혜왕이 온읍에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 여공 복위 6년(기원전 674년) 봄, 주 혜왕은 정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하니 정여공은 주 혜왕을 돕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왕자 퇴를 치는데 실패했다.
정 여공 복위 7년(기원전 673년), 괵나라와 함께 왕자 퇴를 죽이고, 주혜왕을 복위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해에 정여공이 죽으니 그 아들 희첩(姬踕)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정문공(鄭文公)이다.
[1] 폐위되었다가 복위 되었다[2] 초기 재위 기간.[3] 복위된 후 재위 기간[4] 후일 정나라의 군주 자리는 정여공의 후손이 계승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