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중(춘추시대)

 

'''채중
祭仲
'''

''''''
(姬)
''''''
(祭)
''''''
(仲)
''''''
중족(仲足)
'''최종직위'''
상경(上卿)
''' 고향'''
채읍(祭邑)[1]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743년 ~ 기원전 682년
1. 소개
2. 생애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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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춘추시대 정나라의 중신으로 벼슬은 상경(上卿)이었다. 는 중족(仲足)으로 채족(祭足) 또는 제족(祭足)이라고도 한다.

2. 생애


원래 정나라는 동주 시대 초기 왕실을 보필하며 가장 큰 세력을 누린 제후국이었다. 그러나 정나라를 후원하던 평왕(平王)이 죽고 그 손자 환왕(桓王)이 등극하자 정나라는 왕실의 소외를 받게 된다. 당시 정나라 군주였던 장공(壯公)은 이러한 처지를 부당하다 여겨 왕실을 대신해 태산(太山)에 제사지내는 역할을 스스로 포기해 버렸다. 거기다 주변 제후국들을 침략하자 환왕은 크게 노해서 제후국을 소집해 정나라를 토벌했지만 장공은 채중과 고거미(高渠彌)를 보내 이를 물리쳤으며 축담의 화살에 맞아 환왕의 어깨에 부상까지 입힌다. 주나라 군대를 패배시킨 채중은 장공의 환대를 받았으며 이후에도 정나라의 실력자로 부상한다.
장공이 사망하자 채중은 소공(昭公)의 후견인이 되어 (宋)의 후원을 받고 있던 공자 돌의 견제를 물리치고, 소공이 정나라의 군주가 되는 일을 돕는다. 하지만 송나라의 군주 장공(壯公)은 크게 노하여 채중을 사로잡아서 공자 돌을 즉위시키지 않으면 살해하겠다고 협박하였다. 이에 채중은 소공을 몰아내고 공자 돌을 옹립하니 곧 이가 정 여공(厲公)이다. 소공 역시 백성의 신망을 얻지 못한 군주였기에 여공은 어렵지 않게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여공은 군주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채중을 제거하고 국정의 실권을 쥐려고 했다. 여공은 제중의 사위인 옹규(雍糾)를 시켜 채중을 암살하게 했지만 옹규의 아내인 채중의 딸이 이를 채중에게 발설하여 옹규가 먼저 살해당했다. 이에 채중은 여공을 쫓아내고 다시 소공을 군주의 자리에 앉혔다. 여공은 낙으로 도망쳐 송나라의 후원을 받으며 자신이 진정한 정나라의 군주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소공은 일찍이 장공이 고거미에게 벼슬을 주는 것을 반대했기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소공이 복위한 지 2년 후, 고거미는 중신들이 다 함께 참여하는 수렵에서 소공을 시해했다. 채중은 이에 당황하였으나, 그렇다고 자기가 몰아낸 여공을 다시 불러들이면 당연히 쫓겨나게 된다는 걸 알고 있어서 소공과 여공의 동생인 공자 미를 군주로 세운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제나라양공(襄公)이 제후들을 회맹했다. 하지만 양공은 과거에 자미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채중은 회맹에 참가하지 말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자미는 끝내 고거미를 데리고 회맹에 참가했고 채중의 예상대로 양공에게 피살당한다. 채중은 소공의 막내 동생인 영을 즉위시키고 그의 재상으로 실권을 잡아 정치를 계속하다가 사망했다.

3. 여담


훗날 여공이 영을 죽이고 다시 복위한 시점까지 살아있었더라면 다른 나라로 망명갔거나 아니면 멸족을 면치 못했겠지만 이미 그 때는 이미 죽고 없었다. 다만 채중의 행동을 볼 때 어떻게든 여공의 복위를 막거나 여공을 역관광태웠을 가능성도 있다.
열국지에서는 제족으로 등장하는데 거의 비슷하게 나오며 일세대를 풍미한 권신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