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레나 우크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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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젤레나 우크라이나(우크라이나어: Зелена Україна)[1] 는 러시아 내전의 혼란기를 틈타 잠깐 만들어진 여러 민족주의 세력 중 하나로, 1920년부터 1922년까지 러시아 극동에 존속한 국가였다. 그 영역은 아무르 강부터 태평양에 걸쳐있었다. 확실히 민족주의적 공동체 정부를 천명한 대의명분은 있었지만 실상은 러시아 백군이 보호해주는 작은 세력에 불과했다. 1922년에 볼셰비키 적군에 의해 멸망한다.
젤레나(Зелена)는 우크라이나어로 녹색이라는 의미이다. '녹(綠)우크라이나', '젤룐니 끌린(Зелений Клин, 뜻은 아래 참고)'라고도 한다. '''극동에 있으므로 영토만으로는 유럽에 있는 우크라이나와 관계가 없다.'''
2. 상세
2.1. 건국 이전
러시아 제국은 17세기부터 태평양 연안에 진출하였다. 주변의 경쟁국들을 사이에서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시베리아 지역을 병합한 러시아는 19세기 중반 우수리 강 인근까지 영토를 확장한다.
그러나 극동지역은 러시아 제국으로서도 쉽게 통치하기 힘든 지역이었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제국은 빠르게 산업화를 진행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서유럽 국가들보다 그 수준이 낮았다. 유럽 동쪽에서 아시아 북쪽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관통하는 교통망이 부재했고, 극동에는 쇠퇴하였으나 여전히 얕볼수 없는 청나라와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일본 제국이라는 경쟁국들이 있었다.
유럽 러시아 지역이 극동의 영토들을 지원하기 힘든 현실을 러시아 정부도 통감하고 있었다. 따라서 극동에 경제, 사회, 군사적인 자생력을 갖춘 자국민 공동체를 확보하고자 하였고, 이는 자연히 자국민의 극동 이주 정책, 이른바 식민이주(переселение)로 이어졌다. 19세기 중반에 이뤄진 식민이주는 많은 지원이 이뤄졌으나 오히려 생각보다 많은 지원과 이주에 놀란 당국의 제한과 적극성 결여, 불편한 교통여건, 이주 지역에 대한 정보 부족 및 주 이주민인 농민들의 봉건적 여건 때문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후 새로운 영토를 확보한 페테르부르크 당국에 의해 지역의 군사력 강화, 군 주둔지 건설을 추진되고 이주민들의 자유 이주와 자유지를 제공하는 등 특혜를 주었다. 이에 따라 제국을 구성하는 많은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들, 그리고 일부 벨라루스인들이 극동으로 새롭게 이주하였다.
특히 우크라이나인들의 이주가 압도적이었는데, 아무르 강과 태평양 사이에 위치하는 이곳을 당대 우크라이나 이주민들은 녹색 쐐기를 의미하는 젤룐니 끌린(Зелений Клин)이라고 불렀다.
2.2. 건국
1917년 10월 혁명이 발발한 이후 러시아는 한동안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특히 혁명의 중심지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진 극동은 극심한 혼란으로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극동에 거주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 제국을 대신하여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해줄 새로운 국가인 '극동 우크라이나 공화국' 수립을 처음으로 논의하였다. 이듬해인 1918년 건국을 위한 여러 회의가 열렸다. 1918년 2월부터 4월까지 세차례에 걸친 회의를 개최했고 독자적인 군대를 편성하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 제국의 지원을 받아 볼셰비키 적군 세력과 대치하던 카자크족 출신 백군 사령관 그레고리 세묘노프(Григо́рий Миха́йлович Семёнов, 1890~1946)[2] 가 민족 자결을 주장하며 젤레나 우크라이나를 지지하였다.
1917년 11월 17일 러시아 혁명으로 건국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은 1920년 4월 6일, 시베리아를 점령한 일본과의 완충지대를 설립할 필요성을 느껴, 극동 공화국을 설립하였다. 신생 소비에트 정부는 선진자본주의 국가와의 경제 협력을 통해 내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당시 일본 제국은 아시아 지역의 선진국이었으므로 소비에트 정부는 일본 제국과의 정치, 경제적인 관계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은 이미 대한제국을 강점하고 대륙으로의 진출을 감행하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 혁명 이후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는 극동 시베리아 지역을 장악한 일본군은 이 지역의 정치적 지도를 바꾸려고 시도하였다. 연합국 사이에서 유일하게 철군하지 않았고, 도리어 백군을 비롯한 반혁명 세력을 지원하는 일본 제국은 소비에트 러시아에게도 잠재적인 위협이었다.
따라서 소비에트 정부는 폴란드를 위시한 서유럽의 백군 지원 세력과 일본 제국이 버티고 있는 극동이라는 양면의 위협을 완화하기 위해 극동 공화국 건설이 불가피하였다. 한편 일본 제국 역시 극동 공화국의 존재를 인정하고 시베리아 내륙에서 철수하였다. 만약 일본 제국이 극동 공화국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위기 고조와 서유럽 열강과의 대립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이 신생 소비에트에게 득만 되지는 않았는데, 극동이라는 지역적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완충국 건설은 해당 지역의 반발을 불러왔다. 극동 우크라이나인들은 소비에트의 완충국인 극동 공화국을 인정하지 않고 동년 4월 11일 독자적으로 건국을 선언하였다. 극동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자였던 유리 글루시코모바(Юрій Глушко-Мова, 1882~1942)가 의장을 맡았다.
2.3. 멸망
그러나 젤레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내전의 혼란기에 반짝 만들어진 중앙아시아나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튀르크계 등지의 온갖 민족주의 세력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내전에서 볼셰비키 적군이 우위를 차지하자 태생적인 한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소비에트 정부가 안정화되고 일본 제국과의 전쟁 위험성이 사라지기 시작하자 완충국이었던 극동 공화국 역시 소비에트 러시아에 합병하였다. 결국 1922년 적군이 극동 지역을 점령하자 그대로 멸망하고 말았다.
3. 참고 문헌
- 홍웅호, '극동공화국 건설에 나타난 소련의 동아시아정책의 한 단면', 2005
- 양승조, '19세기 후반 제정 러시아의 극동 지역 식민정책 - 유즈노우수리 지역 식민이주 정책을 중심으로', 2016
- Jonathan D. Smele (2015),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ian Civil Wars, 1916-1926', Rowman & Littlefield
- worldstatemen.org(영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