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조 페를라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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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유대인 탈출 작전
2.3. 전쟁 이후
3. 매체에서


1. 개요


Giorgio Perlasca
이탈리아가축 상인. 2차대전 당시 헝가리에서 홀로코스트로 인해 죽을 뻔했던 유대인들을 구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생애



2.1. 초기


1910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으며, 젊었을 땐 무솔리니를 지지하며 파시스트 편에 서서 열심히 싸웠다. 특히 스페인 내전 때 무공을 세워, 프란시스코 프랑코로부터 "'''비록 귀하는 이탈리아인이지만, 언제든지 스페인 공관에 와서 도와달라고 하면 발벗고 도와주겠다'''"는 허가증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왕정이었던 이탈리아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기치를 내걸었던 파시즘을 지지했기에, 1938년에 이탈리아가 나치 독일을 위해 유대인 차별 관련 법안을 제정한 것을 계기로 파시즘에 대한 환멸을 갖게 되었다. 이후 그는 사업차 헝가리로 파견되었다.
그가 헝가리에 있던 중인 1943넌에 이탈리아는 연합군에 항복한다. 이에 나치측에서 이탈리아인이었던 페를라스카를 잡아 가두었으나, 탈출 기회를 잡아 스페인 대사관으로 도망치게 되었다.

2.2. 유대인 탈출 작전


조르조 페를라스카는 예전에 프랑코가 준 허가증으로 호르헤 페를라스카가 되었고, 스페인 대사관의 대리대사였던 앙헬 산스브리스는 조르조에게 유태인을 중립국으로 빼돌리자고 제안하였다. 이를 받아들인 조르조는, 이 일을 하기 위해 산스브리스로부터 스페인 대사관 직원 신분증을 받고, 유태인을 구하는 일을 맡게 된다. 그가 맡은 임무는 스페인 대사관이 제공한 보호문서를 가진 유태인들이 험한 일 당하기 전에 보호 가옥을 만들거나, 중립국으로 유태인을 호송하는 일이었다.
1944년, 소련부다페스트 근처에 진주하자, 프랑코는 자기네 외교관이 소련에 넘어가는 걸 싫어하여 스위스로 다 빼버렸으며, 대리대사였던 산스브리스는 조르조에게 같이 가자고 하였지만, 조르조 페를라스카는 계속 부다페스트에 남아있었다. 스페인 외교관들이 철수한 후 헝가리의 파시즘 정당인 화살십자당이 들이닥치자, '''산스브리스는 곧 올 거고, 난 산스브리스가 임명한 대리인이다!''' 라고 뻥을 치고, 화살십자당 당수인 살러시 페렌츠에게 약 1천만 원의 뇌물을 건넸다. 이 일을 하는 동안 죽음의 열차를 관리하던 홀로코스트의 실무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 바로 앞에서 유대인을 빼돌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걸 본 라울 발렌베리가 저 사람이 아돌프 아이히만이라고 나중에 알려줬다(...).
그리고 1945년 1월 16일, 소련군부다페스트를 해방시킬 때까지 수천 명의 유대인들은 호르헤 페를라스카의 노력 덕분에 살아남았다. 그리고 1949년 5월 29일, 페를라스카는 이탈리아로 가기로 하고, 부다페스트 동부의 기차역에서 지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이런 글을 받았다.

당신이 우리를 살려주고 노약자들을 보살펴주었던 그 친절함에 바칠 수 없을만한 찬사는 없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절망에 빠져있을 때 용기를 북돋아 주었으며, 우리는 영원히 당신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전능하신 야훼께서 당신을 돌봐주시기를 바랍니다.


2.3. 전쟁 이후


전쟁이 끝난 후 조르조 페를라스카는 다시 생업에 복귀했다. 그는 가족들에게까지 이때의 일을 말하지 않았으며, 평범한 생활을 살았다.
1987년 페를라스카에게서 도움을 받은 유태인들이 결국 그를 수소문하여 찾아낸 것을 계기로 페를라스카의 이야기는 전 세계로 퍼지게 되었다. 이스라엘에서는 그에게 세계의 의인이란 칭호를 주었으며, 이탈리아, 스페인, 헝가리, 이스라엘에선 그에게 훈장을 추서했다.
1992년에 향년 8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3. 매체에서


이탈리아에선 그를 기리는 《Perlasca, un Eroe Italiano》[1]란 영화가 2002년 개봉되기도 하였다.

[1] 번역하자면 '페를라스카, 이탈리아의 영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