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울 발렌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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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oul Wallenberg[1]
1912년 8월 4일 ~ 1945년 '''실종''' [2]
1. 소개
2. 이전 행적
3. 영웅의 탄생
4. 실종, 이후의 행적 추적 노력
5. 사망 인정
6. 여담
7. 매체에서


1. 소개


스웨덴외교관이며, 헝가리 주재 스웨덴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중 다수의 유대인들의 생명을 구했다. 헝가리의 여러 중립국 대사관들과 같이 유대인들을 구하였다. 이 인물로 인해 보쉬 스캔들(발렌베리 문서 참조)로 욕을 잔뜩 얻어먹은 발렌베리 가문은 가까스로 까방권을 획득하게 된다.

2. 이전 행적


유럽 최대(最大), 그리고 최고(最古) 재벌발렌베리 가문에서 태어나 8개월간의 군복무를 마친 후 파리에서 유학한 후 미시간 대학교 건축학과에 가게 된다. 당연히 집안은 부자였지만, 잡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시카고 만국박람회 때는 인력거를 끌기도 했다. 심지어 미국에서 히치하이킹 도중 강도까지 당했다고.
그후, 은행원이라던가 집안 일, 중유럽스웨덴을 오가는 무역회사 일을 하다, 나치유대인들을 학살하는 걸 보고 이에 분개하여 외교관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생전에는 한 번도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받은 적이 없다. 그 이유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재혼해서 그 집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3. 영웅의 탄생


1944년 헝가리[3]에 들어온 라울 발렌베리는 헝가리 주재 스웨덴 대사관에서 유대인들에게 가짜 서류[4]와 스웨덴 비자를 발급해 주는 식으로 2만 명의 유대인의 목숨을 살리고, 1만 3천명의 유대인들에게 은신처(이른바 'C구역'이라고 불리던 안전 지대)를 마련해 주었다. 또한 독일군 사령관인 슈미트 후버를 협박하여 거주지에 갇힌 유대인 7만 명이 나치의 손에 끌려가는 것을 방지하였다. 이런 행적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당시 철강을 수입하던, 또한 인종적으로 매우 우수하다고 여겼던 스웨덴과의 우호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아 이러한 발렌베리의 태도를 눈감아 주었다[5]. 심지어 홀로코스트의 실무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과 대면한 적도 있는데, 어느 귀족 집을 빌려서 아이히만을 비롯한 나치 고관들과 호화로운 저녁 식사를 벌인 뒤 집의 불을 모조리 끄고 창 밖으로 소련군의 진격을 보여주면서 이들을 대놓고 비판했다고 한다. 이에 아이히만은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으며, 오히려 발렌베리를 협박했다. 그리고 며칠 뒤 나치 친위대 트럭이 발렌베리의 승용차를 '고의로' 깔아뭉개는 일이 발생했는데, 다행히 발렌베리는 차에 타고 있지 않았기에 목숨을 건졌다.

4. 실종, 이후의 행적 추적 노력


1945 년 1 월 17일, 발렌베리는 전후 유대인 문제 등으로 소련군을 찾아갔다 독일 스파이로 오해받아 NKVD에 체포되고, 그 후의 행적은 전혀 알 수 없게 되었다. 사실, 그의 행적이 워낙 비밀스럽게 진행되다 보니, 한동안 그의 행적에 대해 잊혀지는 듯 했지만, 상술했던 그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차츰 사회의 훌륭한 인플루언서들로 성장한 후,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 추적하려는 노력들이 재개되기 시작했다.
이후 다양한 추측들과 그를 만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증언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으로는 아래와 같다.
  • 1945 년 3 월 8 일, 소련이 통제하는 헝가리 라디오는 발렌 베르크와 그의 운전사가 데브 레첸으로가는 도중 살해 당했다고 발표했으며, 이는 그들이 화살 십자 당이나 게슈타포에 의해 살해 당했음을 암시한다.
  • 1957 년 2 월 6 일 소련 정부는 1947 년 7 월 17 일자 문서를 발표했는데, 거기에는 발렌베리가 그 날 밤 수감 도중 심장마비로 갑자기 숨졌다고 한다. 당시 이 문서를 기입한 자에 의하면 정확한 사인을 확인하기 위해 상부에 부검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해서 결국 부검없이 화장해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 이오시프 스탈린 사후 소련에서 영국으로 망명해 온 전 NKVD 요원에 따르면 NKVD가 독일 첩자로 오해받은 발렌베리를 자기네 편으로 포섭하려다 거절당하고 결국 발렌베리는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심장병 약으로 위장된 독약을 강제로 섭취당하여 독살당했다고 한다.
  • 1980년대까지 루비안카 등 여러 감옥에서 발렌베리를 보았다는 증언이 쏟아졌다.
  • 1991년 러시아의 정치 과학자 Vyacheslav Nikonov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발렌베리는 1947년 루빈카에서 사망했으며, 당시 소련의 비밀 독/화학 기관의 실험체로 사용되다 중독사했다고 주장했다.
  • 2000년 러시아의 정치학자였던 Alexander Nikolaevich Yakovlev는 발렌베리가 1947년 루빈카에서 처형되었다고 주장했다.[6]
  • 2016년 8월, KGB 책임자였던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세로프(1905 ~ 1990)의 손녀에 의해 발견된 세로프의 일기장에서 발렌베리는 1947년 사망한게 틀림없다고 기재되어 있었다.
결국 어디까지나 당시의 사람들이 그를 언제 봤고, 언제 죽었다고 기록만 했을 뿐, 정확한 원인과 그 과정까지 명확히 설명하는 자료는 찾을 수 없었고, 워낙 정보가 패쇄적이던 구 소련과 현 러시아의 자료 공개가 명확히 이뤄지지 않는 한 그의 행적과 죽음에 대해서는 사실상 영구미제로 남을 것[7]으로 보인다. 심지어 그의 이복 형이었던 前 스웨덴 물리학자 가이 폰 다르델(1909 ~ 2009)과 이복 누이인 스웨덴 사업가 니나 나거그렌(1921 ~ 2019)도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데 평생을 보냈지만, 결국 찾아내질 못했다.

5. 사망 인정


결국, 조국 스웨덴 국세청에서는 2016년 3월 29일 라울 발렌베리가 사망한 것 같다고 청원서를 제출하고, 동년 10월 14일 이전까지 생존 신고를 하지 않으면 사망으로 인정하겠다는 발표를 했고, 결국 신고가 나오질 않자 2016년 10월에 합법적으로 그의 사망을 공식 인정했다. 그들이 인정한 공식 사망연도는 상술한 여러 주장들 중 가장 많이 언급이 되고 있는 1947년 사망설을 채택해 그보다 5년후인 1952년 7월 31일에 사망한 것으로 공식 기록하고 있는 중이다.
1947년 사망이 맞다면 그는 향년 34세로 요절한 셈이며, 스웨덴 정부가 인정한 공식 사망연도로 쳐도 향년 39세가 되는 셈이다.

6. 여담


이 사람의 조카딸(정확히는 어머니와 새아버지의 딸이 낳은 딸)이 전 UN 사무총장 코피 아난과 재혼하였다.

7. 매체에서


고르고 13은 죽은 줄 알았던 발렌베리가 사실은 소련에 억류되어 있다는 설정으로 고르고 13이 구출작전을 펼친다. 발렌베리가 구해 준 사람들의 후손들이 합류해 대대적인 구출작전을 벌여 구출에 성공. 그러나 발렌베리를 워렌버그라고 영어식으로 읽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1] 발렌베르크가 아니다. 스웨덴어에서 어말의 g는 독일어 j로 발음한다.[2] 정확한 사망연도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3] 당시 헝가리는 나치 독일과 동맹 관계였으나 당시 헝가리의 지도자 호르티 미클로시 섭정은 확고한 귀족주의자로 국내 파시즘 세력을 대놓고 때려잡을 정도로 좋게 보지 않았기에 유대인 학살을 하지 않았고, 이에 헝가리는 유대인들의 피난처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전황이 악화됨과 동시에 섭정이 10월 소련과 단독으로 비밀 협상을 가지자 나치는 헝가리에 쳐들어가 섭정을 강제로 실각시키고 파시스트이자 독일의 말을 잘 듣는 살러시 페렌츠를 그 자리에 앉혔다. 그는 반유대주의자로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적극 동참했고 이후 수많은 헝가리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만화 쥐(소설)에서 언급된 바에 따르면, 1944년 갑자기 수많은 헝가리 유대인들이 열차로 아우슈비츠에 끌려왔는데 너무나 많이 끌려온 나머지 가스실 근처(당시 소련군의 진격으로 존더코만도 등 수용소 인원들이 가스실을 해체하던 상황)에 큰 구덩이를 파고 거기다 헝가리 유대인들을 던져넣고 휘발유를 부어 불을 질러 모조리 태워 죽였다고 한다. [4] 이른바 '슈츠패스(Schutzpass)'라는 가짜 여권을 메인으로 이 외에 기타 서류들도 동원되었다. 특히 슈츠패스의 경우 헝가리 영사에게 뇌물은 물론 협박까지 동원해 무려 13,500장을 발급하는 데 성공했고, 이른바 '여권 돌려막기'를 통해 한 사람을 구하면 그 여권을 다른 사람에게 쥐어주는 형식으로 구했으므로 그가 구한 유대인은 상당히 많다.[5] 발렌베리는 나치에게 스웨덴이 독일 편을 들어주는 중립국(?)임을 적극적으로 어필하며 유대인들을 끌고 가는 걸 직접 막았다고 한다. 심지어 운전수가 체포당하자 직접 악명 높은 나치 사무실에 쳐들어 가기까지 했다고. 이걸로 보면 성깔 좀 있었던 듯하다.[6] 후술할 스웨덴 정부가 사망으로 인정하는 근거는 이 주장을 채택하고 있다.[7] 물론, 러시아 측에서는 2012년 당시 러시아 연방 보안국 국장에 의해 발렌베리 사건은 여전히 진행중에 있다고 주장해서, 은폐 의혹은 부인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