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조명록
조명록 | Jo Myong-rok'''

'''출생'''
1928년 7월 12일
일제강점기 조선 함경북도 연사군
'''사망'''
2010년 11월 6일
북한 평양직할시
'''국적'''
[image] 북한
'''학력'''
[image] 만경대혁명학원 (졸업)
소련 공군대학[1]
'''계급'''
[image] 차수
'''직업'''
군인, 외교관, 정치가
'''주요경력'''
최고인민회의 6~12기 대의원(1977~2010)
조선인민군 공군사령관(1980~1995)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1995~2010)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1998~2010)
조선로동당 정치국 상무위원(2010)
'''주요서훈'''
[image] 김일성훈장(1982)
'''정당'''
[image]조선로동당
1. 개요
2. 상세
2.1. 초기 이력
2.2. 김정일의 2인자
2.3. 선군의 외교사절
2.4. 말년
3.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군인 및 정치인.

2. 상세



2.1. 초기 이력


1928년 7월 함경북도 연사군에서 출생했다.[2] 1938년경부터 김일성의 빨치산 부대에서 전령병, 호위병으로 근무했으며 광복 이후 김정숙, 김정일과 웅기항으로 입북하는 등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김일성과 김정일과 함께 고락을 함께했던 빨치산 1세대이다.
광복 이후 만경대혁명학원에 들어갔고, 1950~1952년 사이 소련 공군대학에 유학하였다. 귀국 후 공군 비행사로 6.25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중앙당학교를 다녀 당간부가 되었다. 1975년 반항공부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1975년 11월,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77년 11월 최고인민회의 6기 대의원, 80년 10월, 김정일 후계 체제가 완성된 조선로동당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 겸 군사위원회 위원, 조선인민군 공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80년을 기점으로 괄약하게 승진한 조명록 등의 신진 장교들을 1980년 그룹이라고 한다. 이들 1980년 그룹에는 조명록 외에도 총정치국 부국장 리봉원, 해군사령관 김일철 등이 있었다. 1982년 2월 7기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4월에 김일성훈장을 받고 85년 5월에 공군 상장으로 승진했다. 86년 8기 대의원, 90년, 9기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88년 4월 동독을 방문한 후 1992년 4월 공군대장으로 승진했다. 김일성 사망후 장의위원을, 오진우 사망 후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4년 공군대표단장으로 이란, 쿠바를, 1998년에 시리아를 방문했다.
참고로 1980년 당대회에서 선출된 19명의 군사위원들은 30년 동안 충원이 없어서 2010년에 이르면 6명을 제외하고 죄다 늙어죽거나 숙청당해서, 2010년 8월 시점에는 김정일, 조명록, 리을설, 김영춘, 리하일, 김명국만 남은 상태였다. 사실 노동당 조직 대부분이 이 꼬라지라서 정치국 상무위원회만 해도 상무위원들이 김정일 빼고 다 늙어죽은 상태였고, 검사위원회는 구성원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2.2. 김정일의 2인자


이때까지만 해도 유력한 장군 중 한명 정도였으나, 조명록은 김정일 집권 후 북한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 된다. 1995년 10월, 노동당 창건 50주년을 기념하여 오진우가 차지하던 인민무력부장과 총정치국 장리의 분배가 이뤄졌는데, 조명록은 차수로 승진 후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에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무려 15년간 직책을 유지하였다.[3] 1998년 10기 최고인민회의가 소집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체제가 성립하면서 야전군 사령관 출신들을 선호한 김정일의 의도에 따라 김명국, 현철해, 박재경, 리명수, 김영춘 등과 함께 김정일을 보좌하는 군부 측근 그룹을 형성했으며 10기 대의원 겸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94년 김일성의 장례식 시점에서 공식서열 89위에 불과했던 조명록의 지위는 빠르게 상승하여 1996년 김일성 2주기 중앙추모대회에서 11위로 상승했으며, 1998년 9월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 주석단 서열에서 7위, 1999년 최고인민회의 10기 2차 회의에서 김정일과 김영남의 뒤를 이은 공식서열 3위에 올랐으며, 죽을 때까지 제1부위원장 자리와 대의원 자리에 유임되었다. 북한 국가 운영의 중핵인 국방위원회의 2인자, 그리고 인민군대의 정치사업을 담당하는 총정치국의 수장 자리를 차지하여 김정일의 뒤를 잇는 북한의 2인자로 자리매김하였다. 이 시기 정치사업을 강조한 김정일의 의도 덕분에 총정치국장이 처음으로 인민무력부장의 서열을 추월하였다. 그러나 김정일은 인민무력부장 김영춘과 중앙위원회 군사부장 리하일에게도 그에 버금가는 권력을 실어줌으로 조명록이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조치했다.

2.3. 선군의 외교사절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방북했을 때 김정일과 함께 순안비행장에 나와 그를 영접했으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북 때도 참석했다. 그가 국제적인 무대에서 제일 유명해진 순간은 2000년 10월, 김정일의 특사로 워싱턴을 방문하여 빌 클린턴 대통령과 접견한 사건이었다. 당시 미국과 북한 관계는 여러 악조건이 겹치면서 뒤숭숭한 상황이었다. 북한은 미국에 테러지정국 해제를 요구했으나 클린턴 행정부는 2000년 5월 1일 발표한 연례테러보고서에서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유지하였으며, 2000년 9월, 김영남이 유엔 밀레니엄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으로 가던 중,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미국 아메리칸 항공의 보안검색에 항의하여 평양으로 돌아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북한으로부터 미사일 수출의 중단, 장거리 미사일 개발 계획 포기를 받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역시 소득이 없던 미국 정부는 몇몇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해 미국 정부와 관계가 없음을 강조하였다. 9월 27일, 뉴욕에서 개최된 김계관-카트먼 회담은 북한이 미국 법률요건을 충족시키면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한다는 <국제테러에 관한 미북 공동성명>에 합의하고 조명록의 방미를 논의하였다. 김정일은 북미관계의 전환을 위해 2인자 조명록을 특사로 보내기로 결정하였고, 김대중도 클린턴에게 조명록을 만나줄 것을 부탁하였다. 미국이 승낙하면서 이 소식은 전 세계에 공포되었다.
1999년 페리 보고서를 발표 이후 주로 팔레스타인 문제에 매달리느라 북한 문제에 소극적이었던 클린턴 행정부가 조명록을 만나기로 한 것에 미국의 북한 전문가들과 아시아 언론은 다들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미국 쪽에서는 차기 미국 대통령 선거에 정신이 팔려 조명록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4] 조명록은 10월 10일,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만났다. 올브라이트와 회담할 때까지만 해도 양복을 입고 있던 조명록은 백악관으로 가기 전, 군복으로 갈아입는 퍼포먼스를 보였다. 올브라이트는 그와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국무부에서 나와 만날 때 조명록은 회색 양복 차림이었다. 하지만 30분도 채 안돼 백악관에 도착했을 때 그는 군복으로 성장하고 있었는데, 옷에 견장과 훈장(적어도 그중 하나는 베트남에서 미군과 전투를 벌이고 받았을), 그리고 기장까지 빠짐없이 달고 있었다. 그는 과장된 동작으로 김정일의 서신을 전달하며 대통령에게 평양으로 오라고 초청했다. 대통령은 이 제안을 검토해보겠지만, 어떤 방문이라도 그것이 성사되려면 사전에 조정해야 할 것들이 있다고 말했다. 조명록은 좀 더 명확한 답변을 요구했다. 대통령은 내게 사전 준비를 위해 먼저 가는게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조명록은 대통령과 장관이 함께 온다면 "우린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조명록은 클린턴에게 북미 관계정상화, 북한 로켓을 3국이 발사해주는 것에 대한 국제사회의 재정지원을 조건으로 내걸며 미국이 이를 받아들이면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포기할 용의가 있다고 제안했다. 클린턴과의 회담 후, 조명록은 올브라이트 장관,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과 회담을 재개하였고 이후 10월 12일, 북미 코뮤니케가 발표되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 북한은 사실상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포기할 것을 선언하여 미사일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음.
  • 2. 북미 양국은 상호 적대관계를 포기하고 경제 교류, 협력을 확대할 것이며 미국은 북한의 체제를 보장하고 경제를 지원할 것임.
  • 3. 정전협정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4자회담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방안을 활용할 것임.
  • 4. 클린턴 대통령의 북한 방문을 가능한 준비하기 위해 올브라이트 장관이 평양을 방문할 것임.
코뮤니케 발표 후 조명록은 올브라이트가 당황할 정도로 과격하게 술을 마셨다. 이후 올브라이트는 약속대로 10월 23~25일 사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과 2차례 회담을 가졌다. 조명록은 그때도 나와 올브라이트를 맞이하였다.
2001년 3월에는 중국 공산당 대표단 접견식에 참석하였으며, 2001년 9월 장쩌민 중국주석의 방북을 맞이했고, 2003년 4월에 중국을 공식방문하여 후진타오 주석과 면담했다. 그외에도 중국, 쿠바의 군사 관계자들과 면담하면서 군사외교를 수행했다.

2.4. 말년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황순희 등과 함께 마지막으로 남은 항일 빨치산 1세대의 일원으로, 나이가 너무 든 상태였기 때문에 중병설, 사망 임박설이 계속 나돌았으며 김정일이 군부의 중핵인 조명록을 잃을까봐 우려하고 있다는 분석도 계속 나왔다.
실제로 이 시기에 들어서 조명록은 골골거려서 김정일의 현지지도 수행도 하지 못했으며, 총정치국장직은 총정치국 제1부국장 김정각]이 사실상 대행하고 있었다. 2009년 4월에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12기 1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의 권한이 강화되는 김정일 헌법이 통과되면서 제1부위원장인 조명록도 수혜를 볼 수 있을... 까 싶었는데 앞서 말했듯이 90대의 고령이라 12기 최고인민회의에 참석도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아서 의미가 없었다. 김정일은 선군정치의 살아있는 상징과 같은 조명록의 죽음에 대비하기 위해 국방위원회를 대대적으로 확충하고 장성택, 주상성, 우동측, 주규창, 김정각을 새로 국방위원으로 영입했다. 2010년 4월, 김중린 당비서가 사망하자 빈소를 방문한 것이 마지막 공식활동이었다.
2010년 9월에 열린 조선로동당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최영림, 김영남, 리영호와 함께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되었으나 군사위원회에서는 마찬가지로 골골대는 영감인 리을설과 함께 물러났고, 불과 몇달 후인 11월 6일, 노환으로 사망한다.

3. 참고문헌


  • 간대욱, 「김정일 시대 북한 권력엘리트의 특성」 『사회과학연구』 17(1) (2001.12)
  • 김구섭, 차두현, 『북한의 권력구조와 엘리트』(서울: 한국국방연구원, 2004)
  • 김국신, 『미국의 대북정책』(서울: 통일연구원, 2000)
  • 매들린 올브라이트, 『마담 세크러터리』 2권(서울: 황금가지, 2003)
  • 박형중 외, 『김정일 시대 북한의 정치체제: 통치이데올로기, 권력엘리트, 권력구조의 지속성과 변화』(서울: 통일연구원, 2004)
  • 이교덕 외, 『김정은 체제의 권력엘리트 연구』(서울: 통일연구원, 2012)
  • 이승철, 「조명록의 방미와 올브라이트 방북」『관훈저널』 60(3) (2018.9)
  • 정성장, 「김정일 시대 북한 국방위원회의 위상·역할·엘리트」 『세종정책연구』6(1) (2010)
  • 통일부 정세분석국 정치군사분석과, 『2020 북한 인물 주요정보』(서울: 통일부, 2020)


[1] 1940년에 설립된 소련의 공군대학. 1968년 가가린 공군대학으로 개명되었다.[2] 1924년 만주 연길 출생설도 돌았다.[3] 인민무력부장은 최광이 차지.[4] 당시 미국 정부 차원에서도 팔레스타인 문제에 완전히 정신이 팔려 있었고, 클린턴 회고록에서 조명록에 대한 얘기는 일언반구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