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엘 치멜리스
1. 개요
1998년 한화 이글스에서 활약했던 외국인 선수.
2. 선수 경력
2.1. KBO 리그 이전
1988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에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 지명되어 1991년까지 그 산하 마이너 팀에서 뛰었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산하 마이너 팀에서[1] , 1996년에는 뉴욕 메츠 마이너 팀에서 뛰었다.
그렇게 마이너리그만 전전하다가 1997년에는 대만프로야구의 슝디 엘리펀츠 (현 중신 브라더스)에서 뛰었고, 이후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에서 한화 이글스에 지명되어 한국으로 오게 된다.
2.2. 한화 이글스 시절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 지명 당시 치멜리스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경력이 없었기에 기대받지 못했고, 한화 구단 내적으로는 1라운드 지명된 마이크 부시에게 기대가 더 큰 상태였다. 부시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약한 전적이 있었기에 당시 드래프트에서도 최대어로 꼽혔고, 아무래도 메이저 경력이 없던 치멜리스보다는 확실히 부시가 기대받았다. 하지만 시즌이 개막하고 부시는...
치멜리스는 유격수로 시즌을 시작했지만, 중간에 수비불안을 이유로 2루수로 전향하게 된다.[2] 그러나 2루수로 자리를 옮긴다고 수비불안이 나아질 리는 없었고, 이는 재계약에 발목을 잡는 요인 중 하나가 되고 만다. [3]
전반기 타율 .254 8홈런 29타점을 기록, 후반기에는 타율 .302 9홈런 34타점을 기록하며 그나마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확실히 1인분 값은 해줬다고 평가받았다. 해서 최종은 타율 .279 17홈런 63타점. 17홈런은 장종훈과 함께 팀내 1위 성적이었다.
1999년 시즌 다시 실시한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에서도 한화에 3라운드 지명되었는데 데이비스와 로마이어가 교체될 경우에 대비해 뽑아 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이어와 데이비스는 엄청난 활약과 함께 우승반지를 끼게 되고, 그 이후 한국에서 치멜리스를 다시 보게 될 일은 없었다.
2.3. 이후
마이너리그로 돌아가 캐나다, 멕시코 등지를 전전하다 2002년 은퇴했다고 한다.
3. 은퇴 후
휴스턴 애스트로스 소속의 산하 싱글A팀 타격코치 일을 하며 UFC 자원봉사자 일도 하고 있다고 한다.
4. 이야기거리
- 입단 당시에 자신이 뛴 모든 리그에서 3할 이상을 쳤다고 말한 적이 있다.[4]
- 1998년 7월 13일 잠실 LG전부터 7월 24일 잠실 LG전까지 10경기 연속 타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야마이코 나바로가 2015년 7월 26일 대전 한화전에서 8월 7일 포항 SK전까지 11경기 연속 타점을 기록하기 전까지 KBO 리그 외국인 타자 연속 경기 타점 1위였었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6. 관련 문서
[1] 1995년 6월에 콜업되긴 했으나, 선수노조 파업 때 대체선수로 발탁되어 시범경기를 뛰었던 것 때문에 빅리그 선수들의 미움을 사 1경기도 뛰지 못하고 방출되었다(...)[2] 원래 마이너리그에서는 내야 유틸리티로 굴렀다. 외야수로도 3시즌을 뛰었고, 투수로도 등판한 적이 있다. 근데 마이너리그에서는 선수들에게 수비 포지션 실험을 자주 하는 터라, 저건 그냥 포지션 실험으로 모든 포지션에서 뛰어본 거고 실제 수비력은 그닥 좋지는 못했다.[3] 치매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4] 원래 이 당시에는 KBO 리그의 수준이 원체 낮았던지라 용병 선수들은 수준을 얕잡아보고 허풍을 떨기 일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