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종훈

 

'''장종훈의 틀'''
[ 펼치기 · 접기 ]




'''장종훈의 수상 경력'''
[ 펼치기 · 접기 ]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9'''








'''1991, 1992 KBO 리그 MVP'''


'''1991 KBO 리그 최다 안타왕'''


'''1990, 1991, 1992 KBO 리그 홈런왕'''


'''1990, 1991, 1992 KBO 리그 타점왕'''


'''1990, 1991, 1992, 1995 KBO 리그 장타율왕'''


'''1995 KBO 리그 출루율왕'''


'''장종훈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 펼치기 · 접기 ]



<color=#373a3c> '''빙그레 / 한화 이글스 등번호 35번'''
이군노

'''장종훈(1987~2005)'''[61]

'''영구결번'''
<color=#373a3c> ''' 한화 이글스 등번호 82번'''
결번

'''장종훈(2006)'''

강성우(2010~2012)
<color=#373a3c> ''' 한화 이글스 등번호 85번'''
결번

'''장종훈(2007~2011)'''

결번
결번

'''장종훈(2013~2014)'''

김재현(2015~2016)
<color=#373a3c>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73번'''
강경선(2014)

'''장종훈(2015~2017)'''

김태룡(2019)




'''한화 이글스 No.35'''
'''장종훈(張鍾熏 / Jong-hoon Jang)'''
'''생년월일'''
1968년 4월 10일 (56세)
'''출신지'''
[image] 충청북도 [image] 영동군
'''본관'''
흥덕 장씨
'''국적'''
[image] 대한민국
'''종교'''
개신교[1]
'''학력'''
용담초-세광중-세광고
'''신체'''
185cm, 83kg
'''포지션'''
'''1루수''', 지명타자[2], 유격수[3]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6년 '''연습생''' 입단 (빙그레)[4]
'''소속팀'''
'''[image][image]빙그레-한화 이글스 (1986~2005)'''
'''지도자'''
[image][image]한화 이글스 2군 타격코치 (2006~2008)
[image]한화 이글스 1군 타격코치 (2008)
[image]한화 이글스 2군 타격코치 (2009)
[image]한화 이글스 1군 타격코치 (2010~2011)
[image]한화 이글스 2군 타격코치 (2011)
[image]한화 이글스 2군 타격코치 (2013)[5]
[image]한화 이글스 1군 타격코치 (2013~2014)
[image]롯데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 (2015~2016)
[image]롯데 자이언츠 2군 타격코치 (2016~2017)
[image]한화 이글스 1군 수석·타격코치 (2018)
[image]한화 이글스 1군 수석코치 (2019~2020)
[image]한화 이글스 육성군 총괄코치 (2020)
1. 소개
2. 선수 시절
3. 지도자 경력
3.1. 한화 이글스 1기 시절
3.2.1. 2015년
3.2.2. 2016년
3.3. 한화 이글스 2기 시절
3.3.1. 2018년
3.3.2. 2019년
3.3.3. 2020년
3.4. 코칭스타일
4. 기타 사항
5. 연도별 성적
5.1. KBO 최초로 달성한 기록들
6. 관련 문서

[clearfix]

1. 소개


'''"긴 시간, 과분한 사랑에 감사합니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다시 야구선수가 되겠습니다."'''

2005년 9월 15일 은퇴식에서

빙그레 이글스 - 한화 이글스 소속의 야구선수이자 前 한화 이글스의 코치.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중반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했던 최고의 홈런 타자이며, KBO 리그 '''최초의 단일시즌 40홈런''' 달성자이자 KBO 역대 우타자 최다 홈런 2위[6][7]에 올라 있는 이글스의 레전드이다. 또한 '''고졸 연습생 신화'''의 대표격 인물로, 홈런 시대 이전에 홈런을 대표하던 선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라인드라이브를 넘어 엄청난 속도로 정말 총알같이 담장을 넘기는 홈런이 전매 특허.[8] 정말 총알같은 타구라는 말이 여기서 생겼다 할 정도로 타구를 강하게 치는 선수로 유명했다. 가장 유명한 일화가 유격수가 점프해서 아쉽게 못잡았는데 그게 펜스 상단에 "뻑"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좋은 선수는 좋은 코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코치이기도 하다.

2. 선수 시절


[image]
충북 영동이 고향인 장종훈은 이수초등학교 시절 유도를 했지만 야구선수로 전향했다. 세광중 3학년이던 1982년에는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야구소년 장종훈에게는 나도 언젠가는 프로선수가 되고싶다는 꿈이 자라났다. 하지만 환경은 썩 좋지 않았다. 한국에서 야구란 서울과 항구도시를 거쳐 내륙의 대도시에서 성행한 스포츠다. 충청북도는 강원도와 함께 대표적인 야구의 볼모지로 통했다.
장종훈이 1983년 진학한 세광고는 전해 창단 29년만에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이라는 경사를 누렸다. 혜성같이 나타난 좌완 송진우의 활약 덕분이었다. 송진우는 장종훈이 입학한 1983년에도 팀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준우승으로 올려놨다. 그러나 우승주역들이 졸업한 뒤 세광고는 야구 변방으로 물러났다. 장종훈은 세광고의 4번 타자로 뛰었지만 어느 스카우트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1986년 2차 지명은 지금과 달리 무제한으로 선수를 뽑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전국대회 4강에 한번도 들지 못한 세광고 3학년들은 누구도 부름을 받지 못했다. 전국대회 4강 실적이 있는 선수가 우선적으로 대학에 입학하는 제도의 희생양 이기도 했다. 이 해 한희민, 곽영진, 오덕환 등 세광고 출신들이 지명을 받긴했지만 이들은 모두 대학이나 실업야구 소속이었다.
세광고 졸업 후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하자, 세광고 이한구 감독이 배성서 감독에게 적극 추천해 입단 테스트를 받고, 7번째 구단으로 출범한 신생 팀 빙그레 이글스에 연봉 3백만원의 연습생으로 입단했다. 월급 45만원짜리 배팅볼 투수었다.
장종훈이 프로 지명을 못 받은 건 당시 고졸 선수들은 웬만큼 뛰어나지 않은 이상 신인드래프트에선 뽑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장종훈도 대학을 갔다면 지명을 노릴 수 있었겠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학을 가지 못했다. 또한 장종훈은 고교시절만 해도 그냥 평범한 내야 유망주에 불과했다. 결국은 지명받지 못하고 당장 어려웠던 집안 형편 때문에 연습생으로 입단했지만, 이 일은 오늘날의 장종훈을 있게 했다.
장종훈은 연습생으로 간혹 불펜 포수 노릇도 했고 훈련이 끝나면 장비도 챙기는 등 선수들을 뒤치다꺼리를 하며 틈날 때마다 훈련에 매진했다. 특유의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실력을 키워나갔으며 이 훈련은 고졸 연습생 신화를 이룩하는 큰 밑거름이 되었고, 배성서 감독과 이재환 코치에게 싹수가 보이는 선수라는 인상을 주었다.
1986년 시즌이 끝난 후 장종훈은 구단 측에 연봉을 6백만원으로 100% 인상에 계약금도 6백만원을 달라며 요구했고, 그렇잖아도 창단 첫 해를 최하위로 마친 상황에서 대대적인 선수단 개편을 위해 칼을 갈고 있던 구단에서는 ''''요놈 봐라? 그저 뛰게만 해 달라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연봉 올려주고 계약금까지 달라고? 오냐 네놈부터 모가지#s-1.1를 쳐주마'''' 라고 벼르게 되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이재환 코치는 구단 고위층 인사에게 허리를 숙이면서 '''"잘만 키우면 반드시 큰 재목이 될 선수이다. 아량을 베풀어 자르지 말고 1년만 지켜봐달라"''' 며 통사정 했고, 이에 마음이 바뀐 빙그레 구단은 장종훈이 바란 대로 1987년 시즌 연봉을 6백만원으로 올려 주었지만 계약금은 나중에 '''하는 거 봐서''' 주는 것으로 장종훈의 방출 의사를 철회하고 정식선수로 등록시켰다.
그렇게 선수 생활을 유지하게 된 장종훈은 2군에서 계속 훈련에 매진하며 기량을 키워나가던 중, 1987년 4월, 주전 유격수였던 이광길이 부상으로 결장하면서 장종훈이 대신 주전으로 출전하게 되었고,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으며 빙그레의 주전 유격수 자리를 꿰찼다. 1987년 시즌 규정타석 미달이긴 했지만 2할 7푼의 타율과 8홈런, 출루-장타율 3-4할을 기록하면서 이재환 코치가 예상한 대로 가능성을 보였고, 이후 1988년부터 풀 타임 주전으로 승격하며 각종 타격 부문에서 10위 이내를 마크했으며, 이듬해인 1989년 타율 0.254, 홈런 18개(4위), 46타점을 기록하며 연습생 신화를 써나가기 시작한다.
유망주들이 고졸 후 프로 직행을 택하는 경향이 많은 2000년대 이후와는 달리 당시에는 웬만큼 기량이 있다면 무조건 대학을 거쳐 프로에 입단했기 때문에 고졸 신화로 유명했다.[9][10]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유격수로 출장하며 빙그레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일원으로 성장했고, 1988년 유격수 주전을 꿰찬 이후 1990년 28개의 홈런포를 쏘아 올리며[11] '''유격수로는 최초'''[12]'''로 홈런왕-타점왕을 동시에 거머 쥐었다'''.
하지만 고질적인 수비불안으로 인해 1991년 유격수에서 1루수/지명타자 포지션으로 이동한다. 포지션을 전환한 데는 아무래도 1989년 한국시리즈 2차전 당시 알까기 실책이 큰 영향을 끼쳤음을 부정하기 힘들 듯.[13] 이외에도 1988년 이동석노히트 노런 당시 실책으로 주자를 진루시키는 등 유격수 위치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었다. 그나마 1루수로 전향해서는 유격수를 보았던 경험을 살려 병살을 잘 잡는 등의 활약을 보여줬는데, 어쩌면 전화위복인 셈.
[image]

참고로 저 유일한 2위를 기록한 출루율 부문에서 1위를 달렸던 이는 당시 36세의 나이[14]로 장종훈의 동료 이정훈과 타격왕 경쟁을 했던 장효조(.452).
최전성기는 1990년부터 1992년까지의 3년으로, 이 기간동안 '''홈런, 타점 부문 타이틀을 3연패'''했으며 연도별 주요 타이틀 및 기록을 보면...
1990년 : 타격부문 3관왕(홈런, 타점, 장타율), '''최다타점 신기록(91타점)''', 골든글러브(유격수 부문)
1991년 : 타격부문 5관왕(최다안타, 홈런, 득점, 타점, 장타율), '''최다안타 신기록(160개), 최다홈런 신기록(35개), 프로야구 최초 100타점 돌파(114타점), 사상 첫 100득점 돌파(104득점)''', 20-20클럽 달성, 골든글러브(지명타자 부문)[15]
1992년 : 타격부문 4관왕(홈런, 득점, 타점, 장타율), '''사상 첫 40홈런 돌파(41홈런)''', 골든글러브(1루수), '''최다타점 신기록(119타점), 최다득점 신기록(106득점)'''
등의 먼치킨스러운 기록을 남겼다.
타격 부문에서 도루 부문을 제외한 전 부문에서 최상위권에 랭크되었으며, 특히 홈런, 타점, 득점 등의 기록을 스스로 매번 갈아치우는 기염을 토했다. 30홈런도 드물던 시절에 홀로 41홈런을 기록하였으며, 이 기록은 98년 타이론 우즈의 42홈런이 나올때까지 부동의 역대 홈런 1위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이 3년간 기록한 평균 성적은 타율 0.312 홈런 34.7개 타점 108개로 '홈런타자=장종훈'이라는 인식이 명백하게 박혀, 일본의 야구만화인 '4P 타나카군'을 아이큐 점프에서 연재할 때 4번타자 왕종훈이라는 제목으로 현지화할 정도였다.
특히 장종훈이 활약했던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은 극악의 투고타저 시기로, 이런 시기에 30~40홈런을 쳤다는 것은 1999년 이승엽이 친 50홈런과 맞먹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99년 이승엽이 50홈런을 기록한 시즌은 타고투저 베스트에 들어가므로 장종훈의 40홈런이 이승엽의 50홈런에 필적한다는 것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다만 2003년은 평년에 가까운 해라서 직접 비교하기는 무리가 있다.
28개의 홈런을 친 1990년 시즌이 끝나고 기자들이 내년의 목표를 묻자 자신의 등번호인 35개 치는 것이 목표라 하였는데, 정말로 35개를 쳐버렸다. 1991년 시즌 후에 또 다시 내년의 목표를 묻자 이번엔 40개라 대답했고, 기어코 40개를 넘게 쳐버렸다. 1993~97년 까지의 홈런왕들은 모두 20개중반~30개초반의 홈런을 기록하였고, 20개 언저리만 쳐도 홈런타자 소리를 듣던 시절에 그 두 배를 넘겨 버렸으니...
그러나 1993년 시즌 전 무릎 통증으로 연습량이 부족했고[16], 시즌에 들어와서는 허리 부상으로 인해 제대로 된 시즌을 보내지 못했다. 결국 17홈런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여야 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1994년 팔꿈치에 공을 맞아 부상을 당하게 되었고, 이 부상으로 인해 배트스피드가 감소하게 되어 다시는 전성기 수준으로 기량을 회복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빙그레 전성기를 같이 이끌었던 이정훈, 이강돈의 몰락은 투수들이 장종훈을 집중 견제하는 양상으로 이어졌고, 강병철 감독이 발탁한 경험이 일천한 신인 타자들을 홀로 이끌어야 하는 부담까지 떠안아야 했다.
1990년대 중후반기 빙그레-한화의 자랑이던 다이너마이트 타선은 사라져 이정훈은 삼성으로 보내버리고 OB에서 은퇴하였고 이강돈 역시 96년 후 은퇴를 했다. 고원부는 태평양으로 이적을 하고 유승안은 아예 노쇠화가 왔는지 빠른 판단으로 코치직을 맡았다. 그리고 믿을 수 있는게 밖에 없어진 상황에서 장종훈은 홀로서기에 나서 타선에 혼자 고군분투해야 했다. 이 시기 타선을 말하자면 거의 식물 타선에 장종훈 혼자 야구하는 사람이었다. 나중에 약간 비슷하게 송지만이 활약하며 집중견제와 부담을 분산시켜 주기야 했지만, 여튼 이 시기를 비유하자면 8-9-9를 찍던 꼴칰 시절 김태균 급. 그럼에도 부상당했던 1994년을 제외하고는 1995년까지 타출장 3-4-5라는 스탯을 찍어왔고, 암흑기가 끝날 때까지 매년 10~20홈런씩 꾸준히 쳐왔다. 이민호나 정영기 같은, 시즌마다 각성한 선수들이 나오긴 했어도, 장종훈처럼 꾸준히 두 자릿수 홈런을 쳐 온 타자들은 없었으며 그나마 1996년 데뷔한 송지만이 이에 필적할 만 하다. 90년대 ~ 02년도 이 시기 장종훈의 존재란, 단연코 이글스 타선의 한 줄기 빛이라 해도 과히 손색이 없다.
1994년 시즌 후 장종훈은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1995년 수술을 마치고 부상에서 회복한 장종훈은 타율 0.326 홈런 22개 78타점 출루율 0.424(1위) 장타율 0.562(1위)를 기록하면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 때는 타격왕 경쟁을 하며 9월까지 3할 3푼으로 1위를 마크했으나, 안타깝게도 김광림의 각성과 혼자 이끄는 타선, 후속 타자들의 불운, 집중견제 등으로 인해 3할 2푼으로 떨어져 2위를 하게 되었다. 홈런도 김상호의 25개에 단 3개 차이로 뒤지는 바람에 2위를 기록. 안타깝지만 출루율/장타율 1위를 기록한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하지만 1996년 다시 부진과 부상으로 인해 90경기밖에 소화하지 못하며 15개의 홈런과 57타점을 기록했다.
1997년 시즌 타율 0.293 홈런 22개 76타점을 기록하면서 다시 좋은 성적을 냈다. 이 때 뭔 맛이 들렸는지 중견수로 잠시 알바간 강석천과 2년차 신인 송지만과 다시 뛰는 야구를 했지만, 소위 말하는 한화의 막장 타선 덕분에 타점 손해를 꽤나 받았다 그러면서 구단에서는 강석천, 구대성, 송지만과 연봉이 상승되었다.
그리고 1998년에는 타율 0.275 홈런 17개 66타점으로 97년 보다는 약간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작년과 똑같이 롯데와 같은 순위를 찍고 이번엔 연봉이 까이면서 좀 욕을 먹었다. 그나마 용병으로 온 마이크 부시 덕분에 덜 먹었다.[17]
한화 이글스 유일의 우승 시즌이기도 한 1999년에 그는 주로 5번에 기용되어 댄 로마이어, 제이 데이비스 외국인 선수 듀오와 함께 클린업을 구성, 타율 .284, 홈런 27개, 86타점을 기록했다. 이 해에 프로야구 통산 최다 홈런과 2루타, 타점, 득점 신기록을 세우며 언론으로부터 재조명받았다. 한국시리즈에서는 타율은 낮았으나 중요한 상황에서의 활약이 빛났다. 2차전 1회 선제 3점 홈런으로 4:3 승리를 가져왔고, 4차전은 1:1로 맞선 상황에서 결승 타점으로 기록되는 희생플라이를 쳐 2:1로 승리를 결정지었으며, 마지막 5차전, 결승 타점으로 기록되는 희생 플라이를 쳐냈다.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 한화가 올린 4승 중 3승의 결승타의 주인공이었으며, 한국시리즈에서 기록한 7타점은 양팀 타자를 통틀어 최고기록. MVP는 1승 3세이브를 기록한 구대성에게 돌아갔지만, 전체적으로 투수전 양상을 띈 한국시리즈였기에 타선에서는 그가 제일 좋은 활약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2000년 시즌에도 홈런 28개와 81타점을 기록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2001년 시즌 4월 한달 동안 타율 - 홈런 - 타점 1위를 기록하면서 좋은 페이스를 유지했지만[18], 손목에 공을 맞고 타격페이스가 무너져 타율 0.273 15홈런 54타점으로 아쉬운 성적을 기록했다.
이후 체력적인 열세를 보이며 하향곡선을 탔고, 2002년에는 김태균이 유례없는 부진에 빠지자 한동안 이영우, 송지만과 개고생했다. 2003년에는 유승안 감독 취임 이후 세대교체의 희생양이 되었다. 후계자라고 불리던 송지만이 어처구니 없는 트레이드로 떠나고, 강석천을 대신하여 3루수로 뛰던 김태균을 갑작스럽게 수비불안이 있다는 이유로 1루 수비로 옮겨 놓았다. 그리하여 장종훈은 1루수 자리를 빼앗겼고, 지명타자에 기용되는 빈도가 늘어갔다. 3루 수비는 유격수를 보던 백재호가 잠시 알바를 뛰었다가 한상훈이 받았는데 수비는 좋았지만, 타격이 시망이라 기용되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 리빌딩 차원에서 이범호가 3루수를 맡았지만 본인은 유격수를 원해서 그렇게 2004년 한 해만 이범호를 유격수로 보냈는데... KBO 단일 시즌 유격수 실책 30개가 넘는 에러를 범하는 등 팬들마저 눈뜨고도 못 볼 수비를 보여주면서 이듬해부터 3루수에 정착시켰다.
결국 2005년에 현역 은퇴를 선언, 9월 15일에 대전구장에서 성대한 은퇴식을 치르며 선수 생활을 마감한다.[19](자신이 친 타구가 담장을 넘지 않는걸 보고 은퇴를 결심했다는 신화가.....)
[image]
2005년 그의 성적은 11타수 1안타 1홈런. '''마지막 안타가 홈런'''이었다.[20][21] 올스타전 마지막 경기를 뛸 수 있었던 해였는데 라인업에 없었지만, 9회에 대타로 나왔다. 자세한 것은 김재박 항목을 참고.
한화 구단 최초로 배번(35번)이 영구결번되었으며, 한국프로야구에서는 역대 5번째 영구결번이었다.
삼종훈 삼총사 중 두번째이며,[22] 데뷔년도과 은퇴년도도 중간정도.[23] 당연하겠지만 커리어로 보나 인지도로 보나 장종훈 선수가 압도적이다 단 한국시리즈 한정으로는 의외로 인지도가 가장 없는 김종훈이 우위다
다만 불행하게도 삼종훈 삼총사 중 우승 커리어가 한 개밖에 없다(1999년). 이는 빙그레 이글스의 4번의 준우승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 만일 그가 빙그레 시절을 포함해서 5번이나 우승을 했다면 우승 커리어면에서도 앞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24] 이만수와 마찬가지로 한국시리즈에서의 불운의 선수. 그나마 1번의 우승이라도 있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자. 그래도 장종훈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했지만 이만수는 공식적인 우승을 하고도(1985 전후기 통합우승)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거두지 못했고, 코치가 되어서야 메이저리그 시절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월드시리즈 우승과 SK 코치로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볼 수 있었다.

3. 지도자 경력



3.1. 한화 이글스 1기 시절


한화 2군 타격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 2008년에 1군 타격 코치로 승격되었다. 2군 코치 당시는 존재감이 희박했으나 그 동안 철저하게 선수분석 자료를 수집했다고 한다.
이후 1군 코치로 올라오자마자 김태균, 이범호의 상승세와 더불어 김태균에 가려 있던 유망주 김태완을 지명타자에 안착시켜 클락-김태균-이범호-김태완의 클린업 쿼텟이라는 공포의 타선을 선보여 '종훈매직'이라고 칭송받았다. 하지만 올림픽 브레이크 이후 클락이 거짓말처럼 박정권과 충돌 후 발목부상을 당하면서 아예 타율이 6푼을 까먹으면서 나락으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시작으로 타선 전체의 침체가 오면서 미완의 매직으로 끝났다. 저 시기에는 류현진이 선발 투수진에서 고군분투 했으나 나머지 2선발~5선발이 아예 막장이였고 당시 투수진도 초토화가 되었다. 그나마 막내조 역할 하던 윤규진이나 유원상 같은 애들이 선발 갔다가 2군갔다가 중간계투 갔다가 신나게 굴러먹혔고 감독은 김인식인데 재활 공장장이라는 별명이 있었으나 한화에 와서 몇 몇 선수들을 조져버리고 이 정신나간 스카우터들은 드래프트 픽 하위권은 아예 버리고 상위 몇 놈만 잡아오고 2군엔 투자도 안했다. 프런트라는 놈들은 그나마 메이저에서 뛰던 용병들 몇 명 잡아오나 이들도 신통치 못하였다.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한화 이글스가 한화 치킨스가 되어버린 현재 2017년에도 흑역사가 되었고 현재도 가을야구를 못하는 9년을 넘은 10년째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오프시즌에 팀 체질 개편을 선언한 한화의 인사 개편으로 2군 타격 코치로 돌아갔다가 2010 시즌 다시 1군으로 복귀해 타격 코치를 맡았다. 타격라인이 괴멸된 한화의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2010년 겨울부터 아예 체급별로 장타자와 교타자를 나누어 양분화시킨 구조로 개편해버렸다.
타격진을 양분화시키는 극단적인 구도의 개편은 타자가 타석에 선 순간 똑딱이를 노릴 지 한방을 노릴 지가 고스란히 노출되며 병살타의 위험과 도루실패 확률이 커지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데, 2011년 한화 타격진이 개판이라 병살타의 위험은 기본이고 도루는 할 사람이 없어서 문제점이 문제점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똑딱이가 제대로 똑딱여주거나 뜬금포가 한방 터져주면, 당한 상대는 알고도 당했다는 충격을 안겨주어 기싸움에 유리해졌다. 2011년 시즌 극초반의 시즌 최초 연타석 홈런, 시즌최초 10안타, 시즌 최초 출루 5할기록등이 한화에서 나온걸 보면 이 극단적인 양분화가 꽤나 먹혀들어갔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세월이 흐른 2010년대 중반에 되돌아보면 타격기술의 발달에 따라 타자도 분업화하여 교타자와 장타자가 확실히 분리되는 라인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볼 때 꽤나 시대를 앞서갔던 타자진 구성.
하지만 투수로 믿었던 류현진이 무너지고 2011년 6월초 초, 투수자원이 풍부한 두산 베어스가 중간계투들의 활발한 교체를 대처법으로 제시하여 사실상 파해되고 말았다. 투수의 멘탈을 깎아내리는 디버프 효과를 활발한 투수교체로 대처해버린 상황.
2011년 시즌 중반 구단쪽에서 트레이드와 용병고용을 알아볼 때 타자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였고 용병 카림 가르시아가 한화 이글스의 유니폼을 입는데 일조했다. 그리고 가르시아는 2011년 한화에서 쏠쏠히 활약해주었다. 근데 또 다시 버림받았다.[25] 팬들도 가르시아 만큼은 제계약을 원했으나 알다시피 이글스 사상 최악의 먹튀 용병으로 꼽히는 브라이언 배스와 전년도에 홀리오 데폴라의 대체 용병으로 뛰던 데니 바티스타를 데리고 야구를 했다. 한화는 용병을 데려오기 전까지는 2013년도에도 역시 투수 위주로 꾸리다가 참패를 당했다.
2012년 시즌에는 소프트 뱅크 2군 타격코치로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 이 해에 잠시 강석천이 타코를 임시로 맡음으로 꽤나 실질적으로 피로했다.
2012년 10월 김응용 감독이 부임한 후, 2013년 초엔 2군에 있다가 7월 18일 1군으로 콜업되었다. 팀 성적이 워낙 바닥인 탓에 주목을 받진 못했지만,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송광민을 안정적으로 라인업에 안착시키고 이양기 등 2군에서 묵혀두기만 했던 선수들을 재발굴하면서 차기 시즌을 대비하였다.
'''그러나...'''

3.2. 롯데 자이언츠 시절


[image]
김성근 체제 하에서 수많은 코치들이 야인이 되는 과정에서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코치 중 한 명이 되었다.
하지만, 12월 7일 장종훈도 한화를 떠나는 선택을 하였고, 롯데 자이언츠 타격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한화팬들 모두가 멘탈 붕괴를 일으키며 장종훈의 행동에 어마어마한 충공깽에 빠졌다. 칰무원들이 다 나가길 바랬던 한화팬들도 장종훈은 남아주길 바라고 있었다. 장종훈마저 떠나면서 '''한화의 영구결번 선수들은 모두 한화를 떠나게 되었다.''' 송진우정민철은 해설위원으로, 장종훈은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김성근 사단의 야구가 주로 단타 위주와 스퀴즈 뛰는 야구 즉, 스몰볼이였다. 장타자였던 장종훈과 조금 안맞는 부분이 있었다는 추측이 있다. 그런데, 타격 보다는 수비를 좀 더 집중적으로 지도했다고 하는데, 답이 없는 한화의 수비를 생각하면 틀린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3.2.1. 2015년


코치 자리를 옮긴 초반부터 평가를 내리기에는 이르지만 3월 19일 한화 롯데전에서 롯데가 한화를 12:0으로, 3월 20일에는 13:2로 두들기고 시범경기 팀홈런 2위를 기록하면서 15시즌에 재평가 받을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일단 5월 까지는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팀 장타력이 크게 향상되었고, 무엇보다도 2년동안 강극혐 소리 듣던 강민호강혜자로 부활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 다만, 우타에 비해 좌타 코칭은 다소 약한게 아닌가 하는 평가도 있지만 손아섭이 귀신같이 3할 타자로 돌아오면서 이 문제도 개선될 기미가 보이고 있다. 타선이 터질 땐 빵빵 터지지만 숨죽일 땐 숨죽이는 기간이 긴 게 문제로 거론되기는 하나 원래 타격이 투구나 수비에 비해 기복이 큰 편이라 큰 문제는 되지 않는편이다.
시즌 초반 삼진율이 높은데다 동일하게 빅볼 스타일인 박흥식 코치 시절에 비해서 볼삼비도 더 악화되었기 때문에, 당장 좋아도 기복이 심할 위험이 있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일단은 페이스가 정말 좋다. 전임자보다 롯데에 더 잘 맞는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26] 한화 코치 시절 억울하게 받았던 저평가를[27] 다 털어버리고 있다.
다만 한화 시절에는 확실히 뭔가 부족한 타격 코치가 맞았다. 이건 한화 선수진이 나쁘다는 것보다도 스타일의 문제인데, 일단 한화는 힘은 좋은 빅뱃 유닛이 많긴 하지만 대신 아예 맞히지 못하는 경향이 심했다. 즉, 여기는 장타력에 초점을 맞췄다가는 선풍기질만 하기 딱 좋았다는 거. 적어도 배트에 맞혀야 안타든 홈런이든 나올 텐데. 강석천이 1군 타코로 올라오면서 팀 타율이 2푼, 평균 득점이 1점 이상이나 올라간 것도 당연하다. 어쨌든 맞히기만 하면 멀리 쳐낼 선수들이라 장타보단 컨택에 더 집중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실패를 겪으면서 한층 더 성장하고 특유의 연습생 근성으로 코칭 스타일도 더욱 정착이 되어 가면서, 롯데 선수들에게는 큰 시너지를 발휘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6월 되면서 팀 공격순위가 전부 최하를 기록하며 '''이종운과 함께 까임의 대상이 되었다.''' 6월 한달간 롯데 자이언츠가 기록한 팀 스탯은 다음과 같다.
'''팀타율 .242(9위), 팀 홈런 22개(6위), 타점 73(10위), 득점 79(10위), 팀 OPS .693(9위)'''
출처 : kbreport
7월 중순까지는 타격관리를 왜 그 따위로 하냐고 팬들에게 까임을 받고 있다. 부분 빼고 다 롯데 선수들이 또 파업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중.
그래도 꼴무원인 염레기박현승보다는 그나마 성과가 보였던 코치인데다, 지금도 착실히 하는 모습을 계속 보여줘 이승화와 강민호가 받았던 까임과 비슷한 류의 까임이 주류이지. 이종운에게 가해지는 까임의 계열은 '''의외로 소수다.'''
'''후반기 시작과 동시에 빠따는 상당히 살아났다. 원래 투수진보다 타선이 더 기복이 심한 물건인 것을 감안하면 아직도 팀 홈런 2위라는 등 방망이는 상당히 잘 만들어 놓은 것이다.''' 가장 부진했던 6월의 스탯은 저모양이지만 8월까지 시즌 전체 스탯을 보면 팀 OPS, woba, wrc 등의 타격스탯이 전부 5위, 즉 4강팀을 제외한 6팀 중에는 어쨌든 가장 낫다. 스탯만 보았을 때는 롯데가 8위인 이유는 kt를 제외하고 독보적 9위인 투수진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
물론 시즌 초반에 기세를 올리다 타선의 기세가 꺾인 것은 부정할 수 없고, 장종훈식 빅볼의 최대 단점인 높은 삼진율과 '''적은 볼넷''',[28] 그로 인한 심각한 기복, 양민학살 패턴과 비교적 많은 병살타, 적은 희생타로 인해 짜내기가 안 되는 타격이 팬들에게 답답함을 주기도 한다. 통계에 비해 비판받을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 하지만 델골퍼황재균과 강민호를 혹사시켜 타선마저 말아먹고 있는 것까지 감안한다면 지금껏 장종훈 코치에게 가해지는 비판은 어쨌든 과도한 면이 있을 수 있다.
긍정적인 면이 분명히 있지만 부정적인 면도 뚜렷한데, 삼진율은 단일시즌 최고치를 향해 달려나가고 있고, 병살은 8월 12일 현재 100개 이상 적립을 해 역시 단일시즌 최고치를 향하고 있다. 선수들이 소위 말하는 붕붕스윙으로 당겨치기를 선호하게 되자 삼진과 병살이 뚜렷하게 증가했고, 초구를 치는 성향이 뚜렷해져 롯데전에 유독 힘을 얻고 자신감을 획득하는 투수들이 상당하다. 대표적으로 박종훈, 이태양, 임정우, 이동걸, 심재민, 홍성용, 배영수, 김진우, 이동현, 윤지웅, 류제국, 송창식 등등 상당히 많다. 특히 LG 트윈스 투수들이 만만히 본다. 그 중에서도 임정우가...
2015년 10월 8일 이종운 감독이 갑자기 잘리고 그 자리를 조원우SK 와이번스 코치가 메우게 되자 장종훈의 거취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장종훈의 롯데 영입을 적극 추진했던 사람이 이종운 감독이었고, 한화 타격코치 시절 제자였던 조원우가 감독이 되는 애매한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 장종훈이 롯데에 남느냐, 한화로 돌아가느냐, 아니면 제3의 팀으로 가느냐를 놓고 롯데 팬들과 한화 팬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은데 아직 공식적인 기사는 나오지 않았다.
2015년 10월 13일 장종훈의 롯데 자이언츠 잔류 기사가 공식 보도 되었다. 코치진 개편의 칼바람 속에 현 1, 2군 코치들이 대다수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으나, 혼자 능력을 인정 받아 내년에도 롯데 자이언츠와 함께 하게 되었다.

3.2.2. 2016년


2016 시즌에도 롯데 팀타격은 득점 3위 OPS 2위 woba 2위를 기록중이지만 여전히 욕먹는다. 투수진 때문에 팀 성적이 개판이고 영웅스윙으로 클러치히팅 안된다고(...). 이 점은 타격성적 상당히 상승시켜놓고도 까이는 전임 박흥식과 비슷. 그래도 한동안 4할타자로 뛰었던 김문호가 개인적으로 감사를 표할 만큼 코치로서 육성에는 힘을 많이 쏟은 듯 하다. 또 2군에는 훌리오 프랑코가 한국으로 와서 코치로 뛰었는데 2군에서 맹활약 했던 선수들이 1군 타격 리듬에 이어 잘 전수 받은 듯하다. 애초에 롯데가 2010년데에 들어 투수가 병신이였고 오히려 타자들이 잘해왔던게 증평
2016년 8월 현재 롯데의 거의 모든 타격지표가 꼴찌만 겨우 면하는 수준의 하위권을 맴돌고 있고, 특히 장타율이 폭망했다. 여름 지나 홈런은 고사하고 2루타 한 번 구경하기도 어려운 타선이 되면서 타격감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한 점 뽑기도 힘든 타선이 되어버렸다. 예전에는 교타자 육성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이미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1군에서 하는 일이 뭔지 의심받는 상황이다. 중심타선을 꿰차는 1군 붙박이 중고참급 선수들에 비해 몇 경기 반짝이긴 하지만 2군에서 갓 올라온 신인타자들이 프랑코 코치의 지도 아래 타격감을 끌어올렸다는 것이 단적인 예.
롯데 재임기 통틀어 성장시킨 타자가 강민호 단 한명 뿐 이다. 강민호는 데뷔 초부터 김태균의 토탭-로테이셔널 히팅에서 착안해 극단적인 풀배팅을 즐겨했던 타자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경우 타자의 무게중심은 뒤 편에 있기 때문에 공을 더 오래볼 수 있지만, 강민호는 애초에 공을 많이 보는 타자가 아니다. 커리어 통산 BB/K가 1은 커녕 0.50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결국 부상의 여파가 겹치며 강민호의 타격 메커니즘은 아예 무너졌다.
'''이에 장종훈은 강민호에게 스탠스를 좁히고 상체를 세운 뒤 디딤발을 여는 형태로 타격폼을 뜯어 고쳤다.''' 장종훈이 지도자로 나선 이후로 이 정도로 타격폼을 뜯어 고친 사례는 없었는데, 심지어 배트를 쥐는 위치까지 머리 뒤편에 있던 걸 포수 머리 위편까지 당겨오는 등 가히 환골탈태에 가까운 교정을 했다. 이로써 강민호는 무게중심을 앞으로 옮겨오면서도 스탠스가 오픈되며 몸쪽 공에 대처하기 용이해졌고, 커리어 최초로 30+ 홈런을 기록하게 된다. 이전보다 몸쪽 공에 대처하는 능력이 향상되며 본인의 장점인 풀히팅을 적극 발휘한 덕에, 강민호는 장종훈의 코칭과 본인 스스로의 연구를 더해 커리어 하이 시즌을 찍었고, 그해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링크1링크2
결국 분위기 쇄신차원에서 2군으로 내려갔다. 반대급부로 올라온 코치는 2군에 있던 홀리오 프랑코 코치.

3.3. 한화 이글스 2기 시절



3.3.1. 2018년


한화, 한용덕 신임 감독 내정…수석코치는 장종훈
2017 시즌 후 한용덕 감독의 부름을 받아 송진우와 함께 한화 이글스에 복귀했다. 수석코치와 타격코치를 겸임한다. 등번호는 그의 영구결번 35번을 쓰면서 12년만에 35번이 부활한다.
그리고 한화 이글스는 5월 7일 현재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팀 타율은 심각한 수준. 5월 팀 타율은 9위에 머무르고 있고 출루율, 장타율, 팀 홈런 등이 하위권에 머무르고 있어 그의 코치 능력에 대해 의문을 갖는 팬들이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초구를 두려워하지 말고 치라는 '노 피어' 야구는 본디 본능으로 야구하는 타입이었던 송광민을 제외하곤 전혀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기술적으로 완성되어 있지 않은 젊은 선수들은 초구 아웃되어 공격이 끊기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하주석은 5월 WAR가 마이너스에 육박할 정도인데, 타격에서 전부 까먹는 것이 크다. 게다가 최소한의 팀 배팅조차 되지 않아 많은 팬들이 지적할 정도. 한화 팬들은 수석 겸 타격 코치를 하는 장종훈은 수석 코치에 집중하고 1군에 타격 코치를 구해야 한다는 의견을 지속적으로 피력할 정도. 단적으로 김태균은 장점인 선구안과 높은 출루율마저 무너지고 타자들의 문제점을 전혀 수정하지 못하는 무능 그 자체로 낙인찍힌지 오래다.[29]
타격이 심각하게 침체된 상황은 6월에도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6월 3일 경기에서 영봉패당하였다. 타선이 살아나지 않으면 순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결단이 필요한 상황이다. 2군에서 갓 올라왔을 땐 존이 잘 잡혀있던 선수들이 1군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붕붕 휘둘러대다 맥없이 아웃 당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팬들은 타격 코치든 인스트럭터든 데려오고 수석코치만 맡아달라는 의견을 내는 중.
문제는 이 사람은 한화 레전드라서 김성근을 보내버린 박종훈도 함부로 못 건드린다는 것.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현재 감독인 한용덕, 같은 레전드 선수 출신이자 코치인 송진우, 그리고 한화 회장님 뿐인데...기대는 말자. 김승연 회장은 야구단 경영을 분석해보면 '''야구를 좋아하긴 하나 잘 알진 못하며''' 한화 사훈인 '의리와 신용'을 야구단 운영에 반영해 한화의 레전드들이 코치로 돌아와서 한화 선수들을 이끌어 우승한다는 로망을 품고 있어서 레전드 출신 코치 건드릴 사람이 아니다. 감독 한용덕은 1군과 2군 사이 코치직 이동이 두산 시절 별다른 도움이 안되었다고 밝힌 바가 있으며, 타격이 부진했던 2018년 8월 4일 경기때도 오히려 장종훈에게 '타격 보조 전술을 연구하지 못해 장종훈 코치에게 미안하다'라고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을 했다. 송진우는 투수들을 지도할 시간조차 모자란 입장이며, 전문 분야가 아닌 타격에 훈수를 둬봤자 장종훈이 귀담아 들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후반기 들어서 지친 불펜이 계속해서 실점하게 되면서 장종훈의 코칭 능력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장종훈이 풀타임 코치를 맡았던 2010년, 14년의 경우 팀 타격이 최하위권에 머물렀다는 것이 재발굴되면서 더더욱 비판받고 있다. 참고로 2018년 7월 기준 한화의 WRC+는 25시즌 중 24위[30] 머무를 정도로 최악인 88.9이며, 2018시즌 팀 타격지표는 9~10위를 오갈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말이 없지만 언젠간 다시 잘하게 될 것이라는 장종훈 코치의 인터뷰로 인해 그의 무능력함이 완전히 드러나 버렸다.종훈실록
현 시점에 가장 긍정적인 기대는 일단 시즌 종료 때까지 기다린 다음, 예전에 투수코치로 말아먹은 이상군을 월급 꼬박꼬박 나오지만 직접적으로 선수를 만지지는 않는 육성군 총괄로 보냈던 것처럼 겸직에 어려움이 있어 수석코치직에 전념 하기로 했다는 언플로 모양 좋게 타격에서 손 떼게 만드는 것.[31]
팀의 공격력 자체의 문제도 있지만 그 적은 공격 찬스에서 조차 '''팀배팅'''이 최하위권 수준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단순히 타격이 안되는 거라면 고육지책으로 짜내기라도 할 텐데 무조건 적극적 스윙만 주문하고 팀 배팅이 전혀 안되니 짜내기도 안 된다. 7월 기준 주자 잔루율은 2위, 시도도 적은 번트 성공률은 꼴찌, 희생플라이 9위, '''2사 이전 주자3루 상황 득점 타격 성공률 꼴찌, 무사 주자2루 상황 추가 진루 성공률 9위''' 등등 주요 팀배팅 상황에서 말도 안되는 배팅을 보여주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비교적 쉽게 득점을 올릴 상황은 흘려버리고, 어렵게 어렵게 득점을 올리는 경기가 많다는 것이다. 번트는 장종훈이 선수시절 번트를 댄 적이 거의 없기에 제외한다고 쳐도 나머지는 타격코치로써 실격이다.
장종훈식 코칭의 정점은 8월 4일 경기에서 드러났다. 1사 1,3루에 하주석이 타석에 들어서면서 한용덕 감독과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정작 타격코치를 전담하는 장종훈은 등을 돌리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면서 한화 팬들의 비판은 더욱 커졌다. # 수석코치도 그만두라는 반응이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단지 팀자체의 기량 탓으로 생각하는 팬도 있는데, 장종훈이 타격코치로 활약(?)하던 15, 16년의 롯데 팀배팅 지표는 현재의 한화와 '''상당히 유사'''[32]한 팀배팅 스타일을 보여준다는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장종훈이 타격코치를 담당했던 10, 13, 14년은 WRC+ 역대 하위권에 포진했을 정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재평가 아닌 재평가를 받고 있다. 심지어 2018시즌 WRC+는 13년보다 낮고 10년보다는 높은 수준이다 보니 그의 무능한 코칭이 더더욱 드러나고 있다. 7월 31일 8회말 무사 2,3루에서 호잉의 고의사구로 만들어진 무사 만루 찬스와 9회말 1사 1,2루 찬스에서 1점도 못낸채 4대 5로 패하자 아예 사퇴하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
장종훈에 대해서 재고 혹은 경질을 요구하는 발언은 온라인에서나 활발할뿐, 오프라인에서는 거의 거론되지 않는 실정이다. 경기장 관람석에서 장종훈에 대해 비판하는 플랜카드를 내거는 일조차도 전혀 없다.[33][34] 다만 일명 진성칰으로 불리우는 빙그레 유니폼과 올드 유니폼을 입은 아재팬들 사이에서도 장종훈의 코칭에 대한 성토여론은 의외로 꽤 심한편이다.
최근 한용덕 감독과 송광민과의 갈등, 정민철 해설위원이 직접 라인업을 짠다고 언급한 만큼 많은 팬들은 지금 장종훈은 팀에서 나가는게 답이라고 한입으로 말하고 있다.[35]
결국 팬들의 우려는 가을야구에서 터져버렸다. 준플레이오프 1차전 넥센이 떠먹여준 것이나 다름없는 경기를 타자들이 손으로 다 엎어버렸다. 4번의 주루사는 그렇다 쳐도 매 이닝마다 쌓이는 주자들이 들어오지 못했고 겨우 2득점만 했었기 때문. 타격의 정점은 1사 만루에서 이용규의 초구 내야 플라이 아웃이었다. 이 경기로 한화를 포함한 10개구단 앞에서 장종훈의 무능함이 그대로 드러났고 타팀으로의 이적도 쉽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2차전에서도 1차전과 마찬가지로 찬스가 계속 걸리는 상황이었으나 중심타선이 제대로 말아먹으며 오늘도 답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4차전이 되자 득점권 타율은 1할대로 떨어졌고, 상대는 활발한 작전야구, 특히 스퀴즈로도 점수를 낼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준 것과 달리 한화는 번트 하나 제대로 못대면서 점수를 쥐어짤 생각도 못하게 만들었다. 결국 가을야구에서 무기력한 타격만 보여주고 광탈당하면서 9개구단 앞에서 비웃음만 사게 되었다.
다 필요 없고 '''장종훈''' 이름 석 자면 18시즌 한화 문제점 절반은 설명된다.
위의 논리는 상당히 비약적인 논리이다. 투수진의 약진으로 상위 지명은 근 몇년동안 투수위주로 뽑을 수 밖에 없었고 게다가 한화 타선의 핵인 김태균은 부상과 노쇠화로 제 역활을 못해주었다. 그런 상황에서 코치 하나만을 타격의 문제로 삼을 수 없다.
물론 장종훈코치가 핵심적으로 해야하는 그나마 있는 신진세대(대표적으로 하주석)의 타격 증진을 못하였다는 것 만으로 욕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한화 타선의 전반적인 타격은 그저 선수들이 못한 것일 뿐 이를 코치의 탓이라 한 것은 과대망상이며 이는 타나베 코치가 부임한 이후에도 나아지지않는 타격 모습을 보면 드러난다.
11월 1일부터 미야자키 마무리 캠프에 합류하기로 되었는데 수석코치로만 이름을 올렸다. 새 타격코치가 누구로 선임될지는 미정이다.
2018 시즌 장종훈은 팬들에게 이글스 역대 최악의 타격코치이자, 준플옵 광탈의 원흉으로 전형도와 함께 경질 1순위 코치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2019 시즌 타격코치가 교체된 후 팀 타격이 더 하락하면서 코치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음이 증명되었다.

3.3.2. 2019년


2018년 11월 14일 박종훈 단장은 새 타격코치를 찾고 있다고 밝혔다. '원래부터 겸직시킬 계획은 없었으나 사람을 못 구해서 장 코치가 고생했다. 시즌 중에 마음고생이 심했다'라며 모양 좋게 처리했다. 레전드에 대한 예우를 중시하는 이글스의 성향은 그대로이지만, 과거처럼 예우라는 이름 아래 무능한 코치를 계속 그 자리에 두는 기행은 더 이상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2019년 1월 2일, 2017년 초에 타격 인스트럭터로 초빙되었던 타나베 노리오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감독이 타격코치를 맡으면서 수석코치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그런데 팀 타격지표가 타코 교체에도 별 차이가 없다는 게 함정이다... 원래 하위권 팀 팬들은 항상 변명을 찾기 마련이고, 그 변명들은 백이면 백 다 정신승리이다. 직설적으로 말해서, 롯데 시절 백인천 감독이나 신연봉제 시행 당시 LG 프런트와 같은 극단적인 케이스 혹은 단순한 불운이 아닌 다음에야 팀이 못하는건 절대 다수의 경우 그냥 전력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경우다. 팀의 선수단 구성 자체가 노답이라는 명백한 팩트를 부정하려고 하니까 선수단 바깥에서, 혹은 코칭스태프들에게서 ‘원흉’을 찾고 그 원흉에 대해 마녀사냥을 가하지만, 타팀팬 혹은 중립적인 야구팬이 보기에는 그저 추한 변명에 불과한 것이다.

3.3.3. 2020년


6월 6일 팀이 12연패에 빠진 와중에 뜬금없이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되면서 팬들의 의구심을 샀는데 분위기 쇄신을 위한 말소였다고 한다. 헌데 문제는 2군에서 대체 인력이 올라오지 않아 감독이 혼자서 타격, 투수 부분을 모두 맡는 상황이 펼쳐진 것. 이때문에 프런트에서 경질했다고 대놓고 말하기는 싫으니 감독의 수족을 자르는 방식으로 자진사퇴를 강요하려는 게 아니라는 의견이 있다.[36]
당일 팀이 13연패를 찍은 뒤 수석코치에서 육성군 타격코치로 강등되었다는 소식이 떴다.
11월 6일 코치에서 물러났다.

3.4. 코칭스타일


코칭 스타일은 타자 본인의 타격폼에 손을 대지 않고 개성을 존중하면서[37] 타격의 기본적인 문제점(퍼져나간다든가, 팔꿈치가 붙어나오지 않는다든가)만을 찾아내서 교정하는 정도에 그치는 대신,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고 멘토 역할을 하면서 타자 본인의 잠재력을 이끌어낸고 설명한다. 알다시피 이런 유형은 조금만 자기개발이 부족하면 바로 박수셔틀, 사람만 좋은 공무원이 되기 쉽다.[38]
김인식 시절에는 초보 코치였고 당시 한화 코치진이 워낙 상태가 나빠서 대비효과를 얻어 평가가 나쁘지 않았다. 레전드 예우와 김인식 연줄을 통해 들어온 낙하산들의 소굴이었던[39] 한화 코치진에서 나름대로 빅 뱃 유망주들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키워주려고 노력은 했기 때문.
송광민연경흠의 자질에 주목하고 그들의 기를 세워주려 했고, 전임 우경하 타격코치의 잘못된 지도로 인해 타격폼이 무너진 김태완의 스윙을 교정했고 어떻게든 키워주려 했던 최진행은 딱 한시즌이었지만 30 홈런을 칠 수 있는 타자로 성장했다.[40]
하지만 거기까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장타력을 갖춘 유망주를 선별하는 능력은 있으나, 타격 스킬을 다듬어 성장시키는 능력은 보잘것 없으며 교타자 육성능력은 아예 전무하다. 제대로 된 육성이론 없이 적극적 스윙만 강조해서 '''장타자&교타자 불문하고 선구안을 망가뜨린다.''' 한화에서 3년간 노력해서 나름의 육성법을 만들었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고, 그 문제는 롯데에 가서도 해결되지 않았다. 2016년 김문호가 한때 4할까지 쳐 봤지만 그 이후로 점점 타격 페이스가 떨어지는 바람에 도로아미타불이 되었고, 특히 예전부터 지적된 퍼져나오는 스윙을 끝내 고쳐내지 못했다. 이 퍼져 나오는 스윙은 한화 1기때 빅뱃 유망주들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문제점으로 장종훈 떠난 뒤에 포텐터진 송광민 말고는 아무도 극복못했다.[41]
롯데 재임 시절, 유일하게 티칭에 성공한 선수는 사실상 강민호 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무너졌다.[42]
공부도 안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도 큰 문제인데 '''타격이 부진한 선수에게 일부러 말을 걸지 않는 괴상한 코칭법을 고수하고 있다.''' 타격침체에 빠진 선수에게 괜히 이거저거 주문해봐야 심란해하기만 하고 별 도움이 안된다면서 제대로 조언을 안해준다. 오죽하면 하주석이 해설자들 찾아다니며 조언을 구했을까. 야구관이 확실하고 경험이 많은 김태균이나 이용규 같은 톱스타라면 이 황당한 코칭법이 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선수들은 각자가 처한 상황이 전혀 다르며, 같은 사람이라도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대응할 수도 있다. 철저하게 돌아가는 상황과 선수의 성격을 따져서 가끔씩 적용해야 될 코칭법을 일괄적으로 적용하는데 이런 지도방식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코칭 스타일은 타격 매커니즘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신인에게는 특히나 치명적이다.[43]
발사각 이론을 비롯한 최신 타격 이론이 도입되고 타고투저가 심화화 된 2010대 중반부턴 평가가 급격하게 나빠지고 있다. 코치 노릇 10년 넘게 하면서 선수의 타격 스킬 향상을 이뤄내지 못하고 있다는 건 결국 체계적인 공부 없이 자기 경험만 가지고 코치한다는 소리다. SK 정경배가 그렇게 욕을 먹으면서도 최신 타격이론 열심히 연구해 최소한 장타력에서는 확실한 성과를 낸 것과 천지차이.
심지어 소프트뱅크로 코치 연수를 다녀왔고, 롯데 자이언츠에서 코치 생활의 쓴맛도 경험했지만 변한 점이 없는 것을 볼 때 코칭능력은 선수로서의 능력과 달리 전무한 것으로 보인다.


4. 기타 사항



4.1. 오버 트레이닝


[image]
손바닥 굳은살 깎아내기가 취미였다고 보여주는 사진
나이가 들며 서서히 하향세를 탔고 연도별로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그를 최고의 자리로 끌어올리는데 일조한 '엄청난 연습량'이 양날의 검이 되어 부상으로 그를 괴롭힌 면이 크다. '''하루에 6천번의 이상 스윙연습''' 이라 했으니 스스로도 잘 알고 있고 야구계의 선배들이나 현재 감독들은 모두 장종훈의 일상을 이해하고 있다.
체계적인 트레이닝이나 스포츠물리학 따위는 없던 시절 엄청난 혹은 과도한 연습량이 되려 몸을 망친 것이다. 장종훈과 함께 빙그레 이글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악바리 이정훈도 부상 중에 오히려 훈련량을 늘리는 오버 트레이닝으로 몸이 망가지면서 쓸쓸히 은퇴했다. 사실 프로야구 초창기에 이런 식으로 사라져간 선수들이 한둘이 아니다. 선동렬의 사례처럼 아이싱을 해야하는데 뜨거운 팩을 어깨에 지져 놓으니 선수들이 망가지지 않을 수가 있나. 이 문제는 일본야구에서 시작 된 바탕인데 초창기 시절 일본 프로야구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한국에까지 이 잘못된 지식과 관습이 퍼진 것이다. 2010년 초반부터 조금씩 선수 혹사나 과도한 훈련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2018년 기준으로 투수의 어깨는 쓰면 쓸수록 강해진다는 식의 발언은 거의 먹히지 않는다.

4.2. 인성


촌놈이라 불릴 정도로 털털하고 꾸밈없는 성품이었으며, 사람좋고 인간적인 성격으로 유명하다. 타석에서 성질을 내거나 욕설을 내뱉지 않았고, 선수였을 때는 선후배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코치가 되어서는 지도한 선수들이 하나같이 공을 돌릴 정도로 인망이 높다. 한마디로 요즘 일컬어지는 대인배. 괜한 사람에게 인성을 문제로 뭐라하는 것이 문제다. 코치 역할을 하며 많은 욕을 먹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함부로 까기 어려운 것이 아래 사례에서도 나오듯이 많은 까방권을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다.
밑의 두 이야기는 그의 성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
  • 1994년 데뷔 시즌에 첫해부터 13승을 기록하며 승승장구하던 태평양 돌핀스최상덕. 데뷔 다음해인 1995년 6월 25일, 인천 숭의야구장에서 벌어진 대 한화 이글스전에서 선발 등판한 그는 한화의 4번 타자, 장종훈의 라인드라이브성 타구에 얼굴을 그대로 직격당해 앞니가 4개나 부러지고 잇몸이 찢어져 12바늘을 꿰매는 중상을 입었다. 이때, 인플레이 상황이였기 때문에 1루에 가면 내야안타로 세이프였음에도 쓰러진 최상덕을 보고 너무 놀라 1루가 아닌 마운드로 곧바로 올라가 최상덕의 부상을 염려하며 살폈고, 3피트라인 이탈로 인한 주자 자동 아웃으로 아웃되고 말았다. 이후 최근, 장종훈 코치는 당시 상황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어휴, 아직도 그때 생각하면 미안해 죽겠어요”라며 얼굴을 붉혔다. 최상덕은 그 해 2년차 징크스를 타면서 아예 시즌 아웃이 되었고 1996 시즌 개막 직전 해태로 트레이드로 되어[44] 1998 시즌에 재기에 성공,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해태 마운드를 나홀로 이끌다시피했다.

  • 1999년 7월 10일,대전구장, 쌍방울 레이더스 대 한화 이글스전. 투수는 선발등판한 쌍방울의 에이스 김원형. 타석엔 2회 선두타자로 나온 한화의 4번 타자 장종훈. 김원형이 던진 2구째 공을 장종훈이 정확히 강타했다. 타구는 좌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정확히 홈-투수-2루의 방향으로 라인드라이브로 나아가게 되었고, 투수 김원형이 이 무지막지한 파워의 라인드라이브성 타구에 얼굴을 그대로 직격당해, 왼쪽 광대뼈에 금이 가고 코뼈가 함몰당하는 중상을 입었다. 투수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투수의 얼굴에 맞은 공은 옆으로 흘렀다. 규정상 경기는 계속 진행 상태. 스톱이 아니다. 이런 경우 타자는 그냥 1루로 뛰면 내야안타로 세이프다. 그러나 그가 달려간 곳은 1루가 아니라 김원형이 쓰러져 있는 마운드. 그리고 3피트라인 이탈로 인한 주자 자동 아웃으로 아웃되었다.[45][46] 일단 먼저 1루에 도착한 후에 타임을 걸고 투수에게 달려가도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장종훈은 곧장 투수에게 질주해서 상태를 살폈다. 김원형은 그 후로 마운드에 있을 때 장종훈이 타석에 들어서면 항상 모자를 벗어서 경의를 표했다.

참고로 김원형은 이 때 맞은 타구로 인해 거의 1년간 그라운드에 돌아오지 못할 정도로 큰 부상을 당했다. 전성기때 장종훈의 타구는 라이너성으로 그야말로 총알같이 날아갔던 것으로 유명했으며, 그런 공에 얼굴을 직격당했으니 엄청난 고통이었을 것이다.[47] 그런 부상을 입힌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다니 김원형도 대인배지만, 그 사고 이후 장종훈이 그에게 어떻게 대했는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장종훈은 상기 제목에서도 언급된 바, '''연습생 신화'''의 대명사로 불리웠다. 당시 지명도 못 받고 입단해 홈런왕이라는 전무후무한 입지로까지 올라선 경우는 장종훈이 최초였다. 지금이야 김현수, 서건창 같은 신고선수 출신 스타플레이어도 많이 나왔으나, 80년대 당시 '''연습생(신고선수) 출신으로 1군 주전을 꿰차고 타이틀까지''' 딴 선수는 장종훈 하나밖에 없었고[48] 이것이 야구계에 큰 충격을 주면서 지금까지 쓰일 정도로 고착화된 것이다. 이 때문에 장종훈은 지금까지도 육성선수들의 롤모델로 꼽힐 만큼 존경받고 있는데, 최익성, 박경완, 김현수, 서건창 같은 신고선수 출신 스타 선수들도 장종훈의 일례를 들으면 늘 연습생 하면 넘버 원이라고 칭송하는 점에서 그것이 드러난다.
연습생 신화와 함께 꼭 붙어다니던 신화가 '''고졸 신화'''였는데, 사실 이 별명을 장종훈은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한다[49]. 이후 어느 정도 유명해진 장종훈에게 대전광역시목원대학교에서 입학 제의가 들어왔는데, 이를 정중히 거절하였던 아래의 사연에서도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사실 난 대학교에 가고 싶었어요. 나중에 아이들한테 대학교 나온 아빠로 기억되길 원했거든. 그런데, 나마저 대학교을 가버리면 그동안 날 좋아하고 열렬히 응원을 보냈던 고졸 출신들한테 바로 상처 주는 일이 되잖아요. 결국엔 대학교가는 걸 포기하고 고졸 출신들의 우상으로 남기로 했죠. 지금은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지금까지 고졸 연습생 신화에 가깝게 날린 선수... (후략)
(일요신문과의 인터뷰, 2005.7.3)


5. 연도별 성적


  •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글씨는 리그 5위내 입상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삼진
장타율
출루율
1986
빙그레
1군 기록 없음(신고선수 및 연습생)
1987
94
281
.270
76
15
0
8
34
24
1
30
'''62'''
(1위)
.409
.359
1988
'''108'''
(1위)
344
.241
83
'''20'''
(5위)
'''4'''
(3위)
12
57
53
3
43
'''95'''
(1위)
.427
.337
1989
112
256
.254
65
11
0
'''18'''
(4위)
46
49
6
33
55
.508
.351
1990
'''120'''
(1위)
411
.290
119
15
3
'''28'''
(1위)
'''91'''
(1위)
'''73
'''(2위)
8
'''69'''
(2위)
'''84'''
(1위)
'''.545'''
(1위)
'''.401'''
(4위)
1991
'''126'''
(1위)
'''464
'''(3위)
'''.345'''
(3위)
'''160'''
(1위)
24
4
'''35'''
(1위)
'''114'''
(1위)
'''104'''
(1위)
21
'''76'''
(1위)
'''88'''
(3위)
'''.640'''
(1위)
'''.450'''
(2위)
1992
125
431
.299
129
'''28'''
(2위)
2
'''41'''
(1위)
'''119'''
(1위)
'''106'''
(1위)
13
'''106'''
(2위)
'''99'''
(1위)
'''.659'''
(1위)
'''.446'''
(3위)
1993
97
339
.295
100
21
0
'''17'''
(3위)
58
58
12
'''58'''
(5위)
68
'''.507'''
(3위)
'''.405'''
(2위)
1994
한화
79
243
.267
65
11
3
10
34
33
5
36
60
.461
.365
1995
'''126'''
(1위)
420
'''.326'''
(2위)
'''137'''
(5위)
25
4
'''22'''
(2위)
'''78'''
(5위)
'''77'''
(5위)
8
'''68'''
(3위)
63
'''.562'''
(1위)
'''.424'''
(1위)
1996
90
289
.266
77
18
0
15
57
50
8
37
63
.484
.368
1997
121
427
.293
125
27
1
22
76
74
15
63
76
.515
.385
1998
118
437
.275
120
17
1
17
66
60
3
41
69
.435
.344
1999
126
465
.284
132
31
2
27
86
80
4
54
93
.533
.365
2000
127
447
.264
118
19
0
28
81
66
1
52
'''114'''
(5위)
.494
.354
2001
120
366
.273
100
16
0
15
54
55
11
45
87
.440
.356
2002
101
302
.248
75
15
0
12
42
38
2
24
88
.417
.306
2003
83
206
.243
50
8
1
6
24
21
1
21
56
.379
.317
2004
70
153
.255
39
10
0
6
27
21
0
10
31
.438
.301
2005
7
11
.091
1
0
0
1
1
1
0
0
3
.364
.091
<color=#373a3c> '''KBO 통산'''
(19시즌)
1950
6292
.281
1771
331
25
'''340'''
(4위)
1145
(8위)
1043
(10위)
122
866
(10위)
'''1354'''
(5위)
.504
.377

5.1. KBO 최초로 달성한 기록들


  • 유격수 홈런왕(1990년)[50][51]
  • 단일시즌 3할-30홈런(1991년)
  • 단일시즌 100타점(1991년)
  • 단일시즌 100득점(1991년)
  • 단일시즌 40홈런(1992년)[52]
  • 3년 연속 홈런왕(1990년~1992년)[53]
  • 3년 연속 타점왕(1990년~1992년)[54]
  • 3년 연속 최고 장타율(1990년~1992년)[55]
  • 3개 포지션 골든 글러브 수상(1992년)[56]
  • 단일 시즌 최고 장타율 4회 수상(1990~1992년, 1995년)[57]
  • 통산 300홈런(2000년)[58]
  • 통산 900타점(1999년)
  • 통산 900득점(2000년)
  • 통산 1,000타점(2001년)
  • 통산 1,000득점(2002년)
  • 통산 1,500안타(2000년)
  • 통산 1,700안타(2002년)
  • 통산 3,000루타(2002년)
  • 통산 300 2루타(2002년)
  • 통산 1,900경기 출장(2004년)
  • 15년 연속 두자릿수 홈런(1988년~2002년)[59]
  • 16년 연속 세자릿수 루타(1987년~2002년)[60]

6. 관련 문서


[1] 1999년에 방송된 장종훈 관련 다큐에서 임종한 아버지의 묘소 앞에서 가족 전체가 추도기도하는 모습이 나온다. 송지만도 인터뷰에서 자신과 같은 크리스천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2] 1991년 등[3] 입단 직후부터 1990년까지.[4] 1987년 정식 선수로 승격 후 2005년 은퇴[5] 2012년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코치연수를 갔던 해이다.[6] 통산 340홈런으로, 1999년 이만수의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하고 양준혁이 2009년에 깰 때까지는 10년간 KBO 전체 1위 기록이었다. 우타자로만 한정해보면 이호준(337홈런), 심정수(328홈런), 송지만(311홈런)도 은퇴할 때까지 장종훈을 넘지 못했다. 대신 해외진출한 KBO 우타자들의 기록까지 합치면 일본에서 4년, 메이저리그에서 1년을 뛰어 총 408홈런(KBO 312+NPB 98+MLB 14)을 넘긴 이대호가 있다.[7] 2020년 6월 18일 SK 와이번스최정이 341호 홈런을 기록하면서 오랫동안 지켜오던 우타자 홈런 1위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8] 반대되는 선수가 바로 해태의 김봉연. 김봉연이 홈런을치면 그 누구도 잡을 수 없을 만큼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오랜 시간동안 날아갔다고 한다.[9]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로는 당시 프로구단의 육성 노하우와 인프라가 부족하고 특히 2군의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아 고졸 유망주들이 기량을 갈고 닦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둘째로는 당시에는 FA제도도 없었고 선수생활을 10년 이내로 짧게 했는데다가 프로 선수라도 해도 대학을 나와야 인정해주는 분위기도 한 몫 했다. 그래서 장종훈은 한국프로야구 팀의 스타선수 중 거의 유일한 고졸 출신이었다.[10] 비슷한 시기 해태에서 활약한 고졸 출신 문희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임팩트는 선동열에 꽤나 가려져 있다. [11] 2020년 현재 144경기 체제로 환산하면 33.6홈런이다.[12] 최초이자 마지막. 전성기 이종범은 물론 2003년 유격수 최초로 100타점을 달성한 홍세완이나 2014년 유격수 최초 40홈런을 기록한 강정호도 홈런왕은 차지해보지 못했다.[13] 시리즈의 향방을 빙그레에서 순식간에 해태로 돌려버릴 정도의 임팩트였다. 결국 콩라인으로...[14] 당시 선수들 평균 은퇴나이가 30대 초반이였던 걸 감안하면 장효조 또한 대단하다[15] 타율과 출루율까지 타이틀을 가져왔더라면 이대호 이전에 타격 7관왕도 가능했던 성적이었다. 물론 야구에 만약은 없지만, 91년 시즌 당시의 타격왕은 .348의 이정훈으로 장종훈과는 불과 3리 차이였다. 출루율 1위 장효조의 성적은 .452로 장종훈과는 고작 2리 차이! 겨우 이 정도 차이로 인해 5관왕에 그치고 말았지만, 그 차이가 말 그대로 간발이었던 장종훈이라 이런 아쉬운 소리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16] 매년 연습량이 많았는데 93년 시즌 전 유독 부상이 심했을 뿐[17] MLB에서 뛰던 의 동료인데 한국에서는 다들 주목하던 용병이였다. 두산에서 뛴 타이론 우즈 보다도 주목을 받았으니 말다했다. 근데 홈런 10개치고 방출당했다. 타율이 안습이였다,[18] 프로야구 최초 통산 1,000타점 기록도 이때 세웠다.[19] 구단에서도 갖은 언플을 하며 좋게좋게 은퇴했다는 느낌을 주려고 애를 썼다. 장종훈이 김태균을 격려하면서 '다음은 너다'라고 말했다는 기사라든가, 김태균이 장종훈의 라커룸을 물려받았다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20] 그 마지막 홈런이 340호 홈런이다. 이는 나중에 양준혁이 경신한다.[21] 이후 2012년 7월 15일 이승엽이 장종훈과 홈런 통산 기록과 동률이 되었다가, 2012년 7월 29일 이승엽이 341호 홈런(한일 통산 500호 홈런이다)을 기록하면서 통산 홈런 3위로 밀려났다. 이후 최정도 2020년에 장종훈을 넘어서면서 최정이 우타자 통산 홈런 1위 타이틀을 가져갔고, 장종훈은 현재 통산 홈런 4위로 밀려났다. 참고로 같은 해 최정은 양준혁의 기록마저 넘어섰다.[22] 박종훈은 1959년생, 장종훈은 1968년, 김종훈은 1972년.[23] 박종훈 - 1983년~1989년, 장종훈 - 1986년(연습생)~2005년, 김종훈 - 1994년~2007년.[24] 물론 빙그레 4번 준우승, 한화 1회 우승과 맞 바꿔서도 해도 말이다.[25] 나이와 선구안 드립을 롯데에서 했던 걸 받아 왔는지 대놓고 말했다.[26] 박흥식 코치가 롯데에서 상대적으로 실적이 적고 김시진 사단의 삽질에 묻힌 것이지 커리어 상 한국에서 손꼽히는 타격코치인 것을 감안하면 장종훈 코치가 얼마나 호평받는지 알 수 있다.[27] 사실 최진행, 김태완 등 거포 육성에 일가견이 있다는 평가도 많았으나 한화 드래프트 삽질과 2군 시스템의 폐해를 타격코치 혼자 뒤집어쓴 것이라는 동정론도 많다.[28] 전임 박흥식 코치의 경우 높은 삼진율에도 불구하고 볼넷이 많아 볼삼비가 우수했다.[29] 오죽하면 타자 출신 해설자들이 한화 경기를 중계할 때마 한화의 타격을 비판할까? 예를 들어 김경기 해설위원은 타자들이 하나같이 전략 없이 타석에 들어온다고 맹디스를 했다. 김재현 해설위원은 한화 이글스 전 코치였던 만큼 선수 하나하나의 타격 문제점을 언급하였고, 하주석이 직접 타격 문제에 대해 상담을 했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안경현 해설위원은 대놓고 한화 타선의 지표가 좋지 않다고 이야기했고, 정근우가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몸이 들려서 타격한다고 지적하였다.[30] 참고로 25위는 송광민이 현역으로 입대하면서 김강과 추승우가 테이블세터, 전근표나 김태완이 4번 지명타자(...)를 맡을 정도로 답이 없던 2010 시즌.[31] 현재 팬의 분위기나 해설가들은 한화의 호성적은 탄탄한 불펜진, 호잉의 대활약으로 보고 있으며, 약한 타선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비판하고 있어 가을야구를 한다면 장종훈 코치보다는 송진우, 정민태, 강인권 코치의 성과로 볼 가능성이 높다.[32] 특히 위에서 언급된 2사 이전 주자3루 상황 득점 타격 성공률이 15년도 9위, 16년도 10위를 기록했다.[33] 사실 이건 한화 구단이 오랫동안 대전 홈구장에서 훌리건에게 시달렸던 탓에 경기장 치안 관리를 빡세게 하는 영향이 크다. 불과 2년전에 김성근의 경질을 요구하는 플랜카드를 내걸었다가 쫓겨난 관객들의 사례에서 드러나듯, 플랜카드를 걸어봤자 경기장 보안요원들에게 제지받고 쫓겨날 가능성이 높다.[34] 한성질 했던 대전 훌리건 아재들의 직관이 줄어들음으로서 관람객 세대 교체가 된것도 '보살 응원' 관람 문화로 바뀐 원인중에 하나이다. 80~2000년대 시절의 훌리건 아재들은 관계자가 제지하건 말건 완력으로 밀어붙였던 사람들이었다. 90년대 시절에는 한국시리즈에서 해태한테 패배하자 구단 버스를 태워버릴 만큼 화끈한 시절도 있었다.[35] 10월 4일 레일리 상대로 우타를 도배했지만 2번에 0.213 오선진, 3번에 어제 쓰리런 홈런을 쳤지만 타율은 오선진과 동일한 최진행을 기용하였고, 거기에 장종훈 양아들 소리를 듣는 김민하를 선발로 내세웠다. 그러나 초반부터 김민하와 최진행의 콜 미스로 실책이 나와 버렸고 결국 홈런을 내주면서 경기가 초반부터 분위기가 넘어갔고, 레일리 상대로 우타도배를 했음에도 정근우를 제외한 모든 우타들이 침묵하는 대참사가 나와버리며 두 자리수 삼진을 내주며 경기를 망쳐버리는 원인이 되어 버렸다.[36] 한대화, 김응룡 시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고 한대화는 중도 경질, 김응룡은 계약 만료로 쓸쓸히 떠나면서 팬들은 감독이 물러날 것이라 예견했고, 실제로 14연패(...)를 찍은 뒤 감독이 자진사퇴를 선택했다.[37] 고등학교 때 다들 4번을 치던 선수들이니만큼 기본적인 실력은 다 갖추고 있다고 인터뷰에서 말하였다.[38] 실제로 이 현상은 2018년도 한화 이글스 경기에서 아주 자주 보인다. 타 팀의 타격코치들은 선수들을 붙잡으며 다양한 전략을 주문하지만 장종훈은 감독 옆에서 벗어나질 않고, 박수만 치면서 큰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 실제로 타격코치의 역할을 이양기 타격 보조코치가 전담하는데, 이양기는 보조코치일 뿐 타격 전반은 장종훈이 전담하고 있어 적극적인 개입이 어렵다. [39] 고대 감독하면서 뇌물먹고 수감된 우경하가 1군 타코를 맡았었다. 1군 코치였음에도 불구하고 김태완의 타격을 조져 놓았고 멀쩡히 제 역할 하던 신경현의 타격감을 망쳐 놓은 걸로 유명하다, 그것도 모자라 불과 술, 담배 셔틀 시킨 것까지 폭로되자, 결국 우경하는 퇴출되었다.[40] 이범호의 스윙시 팔꿈치가 떨어지는 문제점을 교정한 후로 타격 실력이 일취월장했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장종훈이 타코할 때 이범호는 이미 리그 20+홈런이 가능한 수위급 3루수로 성적은 장종훈이 타코하기 이전인 04~05년이 더 좋았다.[41] 송광민은 극단적인 배드볼 히터로, 초구 타격율이 순위권에 들 정도로 초구를 선호하는 선수이다. 사실상 누가 가르쳐준 기술이 아닌 자기 감에 의해 치는 선수라는 것.[42] 상술했듯, 김문호는 퍼져나오는 스윙을 극복하지 못해 결국 주전경쟁은 물론, 백업경쟁에서도 완전히 밀려버렸다. 조원우감독이 대타 요원으로 컨택보다는 파워 위주의 요원을 선호하는 경향 탓도 있으나, 기본적으로 컨택 조차 무너졌기 때문이다.[43] 실례로 올시즌 데뷔한 정은원은 조상우를 상대로 첫 홈런을 친 이후 선구안을 활용하여 볼넷으로 출루하거나 자기 존에 들어오는 공을 안타로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후반기 들어서는 장종훈의 적극적 타격으로 인해 선구안이 무너진 모습을 종종 보였고, 상대적으로 덜 경험한 언더/사이드암 투수의 어떤 공을 공략해야 한다는 모습을 못 보여주고 있다.[44] 이 때 최상덕의 트레이드 맞상대가 다름아닌 박재홍이다.[45] 이 타석으로 타격 1위의 성적이 3위로 떨어졌다고 하는 루머가 있는데, 성적과는 관계가 없는 평범한 타석이었다. 참고로 장종훈의 1999년 최종 타율은 0.284였으며, 그해의 타격왕은 그보다 타율이 1할 가까이 높았던(0.372) 롯데 자이언츠마해영이였다.[46] 일반적으로 알려진 '타격 1위를 포기한' 일화는 95년도 최상덕 때일 가능성이 높다. 1995시즌 장종훈은 타격 2위였고(.326, 1위는 김광림 .337), 사고가 난 6월 중순에는 김광림, 김기태와 함께 타격 1위 경쟁을 하고 있었다. 아마 사람들이 잘못알고 있는 사건이 99년도다.[47] 그의 전성기때 한번은 장종훈이 친 타구를 유격수가 점프해서 캐치하려 하였는데, 그 타구는 유격수 글러브 위를 살짝 지나가 그대로 뻗어나가서 스탠드에 꽃혔다.[48] 같은 팀이었던 한용덕 역시 연습생 출신으로 스타플레이어로 등극했지만, 이쪽은 타이틀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다.[49] 소위 '야잘잘'이라고 할 만한 대형신인들은 전부 고졸로 입단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스타 플레이어들도 대다수가 고졸 출신인 2010년대의 기준으로는 '고졸 신화'라는 말을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90년대까지는 지금과 반대로 오히려 고등학교에서 잘하던 선수들이 대학을 거쳐서 프로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실제로 20세기의 선동열, 양준혁, 이종범 등 올드스타들은 대부분 대졸 출신이라는 사실이라든가, 이승엽이 대학을 가지 않고 삼성 라이온즈에 바로 입단한 것이 지금이야 대수롭지 않은 뉴스겠지만 당시에는 이런저런 소문이 무성했던 등의 사례를 통해서 알 수 있다.[50] 장종훈만 달성한 기록[51] 가장 근접한 기록으로는 1997년 이종범의 30개로 당시 홈런왕 이승엽과 단 2개 차이였다. 만약에 성공했다면 KBO역사 최초로 홈런왕과 도루왕을 동시에 석권할수도 있었다.[52] 장종훈 이후 타이론 우즈, 이승엽, 댄 로마이어, 찰스 스미스, 트레이시 샌더스, 박경완, 심정수, 호세 페르난데스, 이대호, 박병호, 강정호, 에릭 테임즈, 야마이코 나바로, 최정, 김재환 등이 40홈런 고지를 밟았다. 그 중 이승엽은 무려 세 번이나 단일시즌 40홈런을 기록했다.[53] 장종훈, 이만수, 이승엽, 박병호만이 달성한 기록.[54] 장종훈, 이만수, 박병호만이 달성한 기록.[55] 장종훈만 달성한 기록.[56] 유격수, 지명타자, 1루수.[57] 장종훈만 달성한 기록.[58] 장종훈 이후 이승엽, 양준혁, 심정수, 박경완, 송지만, 박재홍, 이호준,이대호,김태균,최형우,이범호,최정,박병호등이 300홈런 고지를 밟았다.[59] 장종훈, 양준혁, 최정만이 달성한 기록.[60] 장종훈, 양준혁, 박한이만이 달성한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