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 데이비스
1. 개요
한국프로야구에서만 7년 동안 뛴 외국인 타자로 '''한화 이글스의 팀레전드'''이자 타이론 우즈, 에릭 테임즈와 더불어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외국인 타자들 가운데 한명으로 꼽히며 현재도 외국인 타자 이야기가 나오면 자주 언급되는 선수이다. 타격, 주루, 수비[1] 가 모두 우수한 다재다능한 선수로 주 포지션은 '''중견수'''.
위에 언급된 다른 선수들에 비해 단일 시즌 임팩트는 약간 떨어지나 재적기간은 훨씬 길어 누적 기록은 다른 선수들을 압도한다. 통산 기록에 유일하게 이름을 올리고 있고, 역대 외국인 선수 중 통산 안타와 타점, 도루에서 1위, 홈런 2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스탯티즈 기준 '''외국인 선수 중 가장 높은 통산 WAR(36.64)'''를 기록. KBO에서 통산 순위가 집계되는 유일한 외국인 타자로 KBO 리그에서는 통산 순위의 기준을 3,000타석으로 잡는데, 이를 넘는 외국인 선수는 데이비스뿐이다.
대표적인 별명은 '검은 독수리'와 더불어 신라면을 좋아해서 한화팬들이 '남연이형'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한화에서는 가장 기억에 남는 외국인 선수로 회자된다.
2. 선수 경력
2.1. KBO 리그 진출 전
1989년 뉴욕 메츠에서 투수로 12라운드에 지명되어 선수 경력을 시작했다. 마이너리그에서 뛸 적에는 코너 외야수였으며 파워는 거의 없고 발만 조금 빠른편인 마이너 레벨에서도 평범한 선수였다. 한국 진출 직전인 97,98년도에는 텍사스-루이지애나 리그에서 뛰면서 대활약하는데 특히 98년도에는 OPS 1.175의 놀라운 활약을 했다... 하지만 당시 그 리그 자체가 타고투저에다가 대부분 24세 이하 어린 선수들이 뛰던 리그라서 데이비스의 성적은 잘 봐줘야 상위 싱글A 정도 폭격한 수준이었다. 어쨌든 데이비스는 이 성적으로 한국리그에 이력서를 들이밀 수 있게 되었다.. 마이너리그시절 스탯[2][3]
1999시즌을 앞두고 펼쳐진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에서도 데이비스는 눈에 띄는 선수가 아니었다. 1라운드 지명선수들은 메이저 리그 올스타 출신 펠릭스 호세를 필두로 대다수가 메이저 리그 경력이 있는 선수들이었고 2라운드급 선수들 또한 마이너 리그에서 잔뼈가 굵은 검증된 선수들이었다. 데이비스의 경쟁력은 드래프트 참가 선수들 중 비교적 젊은 나이였다는 것 정도...[4]
그런데 대다수 팀들이 외면하던 데이비스를 유심히 지켜보던 감독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삼성 라이온즈의 서정환 감독이었다. 이승엽과 김기태 두 좌타 거포를 보좌할 우타자 찰스 스미스를 1라운드에 지명한 서정환 감독은[5] 2라운드로 제이 데이비스를 지명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데이비스보다 더 빨리 뛰고 결정적으로 데이비스는 못 보는 센터 내야수[6] 도 볼 수 있었던 빌리 홀을 지명하기로 결정을 바꾸었고[8] 결국 데이비스는 거의 최하위 순번이었던 한화 이글스에 지명되었다.
그런데 이 결정은 한화 이글스의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만들어 냈을 뿐만 아니라 2000년대 중반까지 한화를 먹여살리는 탁월한 선택이 된다. 당시 이희수 한화 이글스 감독은 용병 타자로 댄 로마이어를 점찍은 후, 나머지 한 명으로 그 때까지 '껄렁껄렁하다며' 다른 구단이 주목하지 않았던 데이비스를 지명한다. 독한 선수가 필요했다는 판단이었다고...
2.2. 한화 이글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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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에 한화 이글스에 입단해 2003년을 제외한 2006년까지 7년동안 한화에서 뛰어왔다. 비록 우즈, 테임즈의 전성기에 비할 정도로 압도적인 활약을 보여준 시즌은 없지만[9] 꾸준히 제 몫을 해줌으로써 많은 사랑을 받은 용병 타자였다. 용병 중 가장 장수한 타자이며 한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한 선수 중 하나였다. 979안타 591타점으로 역대 외국용병 안타와 타점 1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10][11] 한국 리그 통산 타율 .313으로 3000타석 이상 출전한 선수 중 통산 타율 역대 9위에 올라있는 선수이기도 하다.
장타력있는 용병임에도 불구하고 중견수로 뛰었고 내구도와 수비력이 좋아서 더욱 가치가 높은 선수였으며 30-30 클럽에 올린 호타준족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홍현우, 박재홍, 테임즈와 더불어 3할-30홈런-30도루-100타점의 진기록을 기록한 몇 안되는 선수.[12] 화끈한 성격의 소유자로 처음에는 꽤나 말썽을 부리기도 했다.
2002년에 계약을 끝내고 멕시코리그에서 1년을 보낸 뒤[13] 2004년 다시 한화와 계약을 맺었는데 이 때부터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예전같은 말썽을 부리지 않고[14] 성실한 선수로 재탄생하며 한화를 대표하는 선수가 되었다. 다만 노쇠화로 인해 예전보다 성적은 살짝 저조해졌으며 2004년 이후론 두자릿수 도루는 기록하지 못했다. 그래도 매년 20개 이상의 홈런과 3할을 넘나드는 타율을 기록했던 선수[15] . 2005년에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도 수상했다.
공을 깎아치는 듯한 독특한 스윙궤적, 홈런#s-1을 친 이후에 하는 거수경례 세레모니가 데이비스를 대표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2006년 계약이 끝난 후 재계약을 하지 않았는데, 전년도에 비해 조금 떨어졌지만 여전히 준수한 성적이었음에도 명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채 방출되었고, 여러 가지 뒷말을 낳았다. 가장 유력한 원인으로 꼽히는 것은 많은 나이와 06한국시리즈에서 시리즈통산 1할을 친 부진. 그 외에 약물검사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흉흉한 소문도 있고...여튼 그렇게 KBO를 떠나고 그 뒤 멕시칸리그에서 선수생활을 하다 2008년 초에 은퇴했다.
그러나 데이비스라는 걸출한 외국인 선수를 보유했다는데 안심한 한화 구단은 중견수를 볼 수 있는 외야수 수급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렇게 리빌딩을 소홀히 한 결과, 그 후폭풍이 계속 이어져 노장 강동우라든가, KIA 시절 코너 외야만 보던 김경언이라든가 추승우 같은 선수들이 중견수를 보고 있는 게 현실이다. 어찌보면 지금 한화가 폭삭 망하게 된 원인 중 하나이다. 물론 선수의 잘못은 아닌 리빌딩에 소홀했던 구단의 책임이다. 결국 중견수는 2014년 FA 이용규를 영입하기전까지 한화의 고질적인 문제였었다.[16]
3. 이후
이인영 한화 스카우트 대리의 글에 따르면 제이 데이비스의 근황은 그리 밝지는 않은 듯 하며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고교 진학을 앞둔 아들이 농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아들로 알려진 앤서니 데이비스 주니어의 아버지는 '''당연히''' 앤서니 데이비스 시니어다. 아들이 그가 아니라 다른 선수인 듯 하다. 이인영 대리의 글에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다고 하는데, 앤서니 데이비스는 이미 University of Kentucky로 진학을 확정한 고등학교 3학년생이다. 이후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소속의 센터로 활동 중이다. 이런 오해가 생긴 이유는 박동희 기자 때문. 또 다른 기사에 의하면 이혼 후 위자료 등으로 인한 생활고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소문만 무성했는데 롤링스 히터스라는 베이스볼 아카데미에서 15세 이하 타격/주루코치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4. 여담
- 오랜 세월 동안 한국생활을 해서 그런지 한국어에 능숙했고 매운 음식에 거부감이 없었으며 특히 신라면을 매우 좋아해 '신남연' 이라는 별명도 생겨났을 정도다. 보통은 '데횽' 또는 '남연이횽' 이라고 불렸다. 실제로 미국에 있을 때 미국에서 파는 신라면은 맛이 없다면서 한국에서 만든 신라면을 공수해달라고 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신남연으로 쳐도 이 문서로 들어올 수 있다. 참고로 미국에서 파는 신라면은 현지화 때문에 맛이 미묘하게 다르다.
- 괴짜스러운 면모를 알 수 있는 일화로 출퇴근시 2가지의 이동수단을 이용하는데, 하나는 일반 자전거도 아닌 (어르신들이 타고 다니는) 쌀집자전거, 다른 하나는 스쿠터로 헬맷에 매직으로 스우시를 그리고 다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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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10월 8일 삼성 vs 한화 전에서 이승엽은 이미 54홈런을 쳐서 아시아 최다홈런 타이기록인 55호 홈런을 하나 남겨두고 있었다. 이 날 이승엽의 두 번째 타석에 친 홈런성 타구를 데이비스가 죽어라 달려가서 잡아내 대기록을 저지시킨 바 있다. 당시 55호 홈런볼에는 삼성상용차 트럭이 경품으로 걸렸고, 56호 홈런볼에 인터넷 경매업체에서 1억원이라는 거액의 상금을 걸었다. 더구나 이 날 경기 결과로 매직리그 1위 삼성과 2위 한화의 순위가 바뀔 수도 있었다. 이런 판국에 하필 그날 경기는 대구 원정 경기. 때문에 잠자리채 등을 잔뜩 들고 온 관중들이 열받아 물병과 우산을 투척한 일도 있었다. 데이비스 입장에서는 팀의 승리를 위해 당연한 행동을 한 건데... 이때 데이비스는 능청스럽게 우산을 줏어서 썼는데, 이것이 가끔 회자되는 데이비스 우산 사건이다.
5. 통산 성적
통산 타율 역대 9위[17] , 출루율 0.383[18] , 장타율 0.533[19] , OPS 0.915[20] 를 기록했다.
여기에 중견수로서 수비실력도 매우 뛰어나 KBO의 용병, 국내선수 통틀어 역대급 외야수로 불려도 손색이 없다. 투수 출신이라 그런지 강견을 자랑해 매년 보살 순위에도 빠지지 않고 들어갔었다. 거기에 성적이 들쭉날쭉하지 않고 꾸준했으며, 성격도 좋아서[21] 좋은 타자용병의 표본 같은 선수.
참고로 KBO는 통산 3000타석 이상을 기록한 타자 기준으로 통산 순위를 집계하는데 '''외국인 선수로서는 유일하게 데이비스만 포함되어 있다.'''
데이비스가 선수로 뛰던 시절은 투고타저 시절이라[22] 2010년대 중반 이후 타고투저 시절을 기준으로 하면 클래식 스탯이 그렇게까지 대단해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데 세이버 스탯으로 보면 가장 클래식 성적이 나쁜 해인 마지막 2006년조차 wRC+(조정득점생산력)는 147.3이고 WAR은 4.98이다.[23] 2016년 비교적 좋은 활약을 했다고 평가받는 윌린 로사리오의 wRC+가 131.0이고 WAR은 3.01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얼마나 좋은 활약을 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이상 스탯티즈 기준) 또한 한화에서 뛴 7년간 단 한번도 WAR이 4.00 이하로 내려간 점이 없다는 점에서 대단히 꾸준한 선수였다는 점도 분명하다.
6. 관련 문서
[1] 수비가 매우 뛰어난 선수인건 분명 사실이지만 역대 중견수 중 최고 급이냐면 그 정도는 아니다. 투수출신이라 그런지 타구판단이 좀 늦었고, 잔실수도 좀 있었기 때문. 그대신 발이 빨라서 수비 범위가 매우 넓었고, 총알같은 송구가 있었기 때문에 종합적으로는 매우 뛰어난 중견수라는 건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2] 참고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경력은 없다. 2003년도 한화에서 가출(?)한 데이비스는 AAA수준의 멕시칸리그에서 알바를 하게 되었는데 타고투저 리그라고는 해도 꽤나 인상적인 정확도와 파워를 보여주었다. AA레벨에서 빌빌대던 KBO 진출 전 시절을 생각한다면 괄목상대할만한 일이었다. 코너 외야수를 보며 2할 중반대에 10홈런도 넘기기 힘들어 하던 평범한 마이너리거가 KBO에선 리그 최강의 홈런도둑, 저격수 중견수이면서 리딩히터급의 타율과 30-30이 가능한 대괴수가 되었으니, 용병 신분으로 KBO에서 잠재력이 터진 드문 케이스이다.[3] 참고로 데이비스가 입단한 1999년에는 비록 2010년대 이후와 비교하면 외국인 선수의 네임밸류가 크게 떨어졌지만, 펠릭스 호세, 에드가 캐세레스, 브레트 바워스, 조지 카날리 같은 메이저리그 출신도 있었고, 찰스 스미스 같은 멕시칸 리그 홈런왕이자 마이너리그 올스타 출신도 있었다. 반면에 데이비스의 마이너기록은 AA에서 한 해 OPS .800이 제일 좋은 기록(위에 나온 텍사스-루이지애나 리그는 독립리그다.)으로 마이너 기록만 보면 당시 용병 중에서도 거의 최하 수준이었다. 하지만 데이비스의 KBO 리그 성적은 펠릭스 호세만이 비교할만 하고 다른 메이저 출신 선수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뛰어났다.[4]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쌩쌩한 AAAA급 용병이 오는 현재 프로야구와는 달리 당시엔 한물 간 왕년의 메이저리거 또는 마이너리그 죽돌이들이 많았기에 평균 연령이 높았었다.[5] 찰스 스미스는 사전접촉 의혹도 있었다.[6] 당시 삼성은 거포에만 집중하던 나머지 2루수, 유격수가 부족했다. 주전(정경배, 김태균)이야 있었지만 백업이나 플래툰 등으로 돌릴 수 있는 여분의 선수가 부족했다는 거다.[7] 김재걸은 당시 군 복무 중이었다.[8] 당시 센터 내야수가 정경배, 김태균, 그나마 써먹을 수 있던 백업 내야수로는 은퇴를 코앞에 두었던 류중일 정도밖에 없던 상황인지라[7] 서정환 감독의 이러한 결정은 당시로써는 현명한 선택이었으나, 문제는 홀이 예상외로 수비를 너무 못했다. 빠른 발의 이점을 살려 중견수로 전환시켰지만 외야도 수비를 못해 나중에는 주로 대주자 등으로 나갔다.[9] 99시즌의 30-30도 심한 타고투저 시절에 기록한 성적이라 평가절하당했고, KBO 골든글러브 시상식 때는 항상 한국 선수들에게 밀려나 수상에 실패하였다. 상복이 없었다 뿐이지 리그 최상위급 타자였다. 스탯만 봐도 역대 타자 가운데 타율 4위를 마크하고 있다.[10] 아직까지 그 기록들은 깨지지않고있다. 이 기록을 깰 가능성이 보이는 외국인 용병들은 대부분 일본리그나 메이저리그로 진출을 꾀하기 때문에 어지간해선 깨지지 않을 불멸의 기록이 될 것으로 보인다.[11] 2003년에도 활약했다면 1000안타는 가볍게 넘겼을지도 모른다.[12] 그런데 그 중 두 명이 골글을 못받았다(...).[13] 2002 시즌 후 감독으로 부임한 유승안 당시 코치에게 빠따로 맞아서 재계약을 거부했다(…)는 설이 있다. 참고 자료[14] 유승안 前 감독에게 빠따로 맞은 후(…) 쫄아서 그렇게 됐다는 설이 있다.[15] 실제로 중견수 한정 세이버 스탯을 살펴보면 WAR나 wRC+에서 박재홍, 라뱅 이병규와 동급.[16] 하지만 이용규도 어깨부상의 여파로 14시즌 내내 지명타자로만 뛰고 있으며, 결국 중견수 수비 문제는 또 다른 외국인 펠릭스 피에로 해결했다. 다행히 15시즌 부터는 부상에서 회복해 정상급 수비를 보여줬지만, 2차 FA 계약 후 구단과의 마찰로 1시즌을 통으로 날리는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졌다.[17] 2018년 기준으로 현역 선수인 김태균, 김현수, 서건창, 나성범, 최형우, 손아섭 포함시. 현역선수를 제외하고 집계하면 3위. 외야수 중 4위[18] 역대 15위, 외야수중 6위[19] 역대 3위, 외야수중 1위[20] 역대 8위, 외야수중 2위[21] 성격이 좋다고 하는데 순둥이와는 아주 거리가 멀었고, 심판판정에 불만이 있으면 맹렬히 항의하는 걸로도 유명했다. 다만, 야구 외적으로는 별 잡음이 없었으며 2004년 복귀 이후는 불같은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 대신 승부욕이 아주 강해서 팀 훈련 당시 항상 가장 먼저 나와서 훈련했으며, 복귀 이후에는 팀원들과도 아주 잘 융화되었고, 한국 생활도 잘 적응했다고 한다. 김인식 감독과 특히 사이가 좋았는데 '아빠'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22] 특히 06년은 굉장한 투고타저 시즌이었다. 이 해 준우승한, 그리고 데이비스가 소속된 팀이었던 한화에는 규정타석 3할타자가 없었고, 리그 전체에도 규정타석 3할타자가 5명. 이대호,이용규,이택근,장성호,양준혁이 전부였다.[23] WAR은 대체 수준 대비 승리 기여라서 얼마나 팀 승리에 기여를 했냐는 것을 말하는데, 데이비스가 선수시절에는 KBO리그의 경기수가 133/126게임이라 144게임 기준인 2010년대 중반 이후보다 WAR 수치가 적게 나온다. 데이비스의 말년 기록을 WAR/144로 조정하면 5.695이다. 이것은 2017년 대활약한 윌린 로사리오의 WAR 5.26보다도 위라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