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하블리첵

 


[image]
'''보스턴 셀틱스 No. 17'''
'''이름'''
존 조지프 하블리첵
(John Joseph Havlicek)
'''출생'''
1940년 4월 8일
'''사망'''
2019년 4월 25일
'''국적'''
미국
'''출신지'''
오하이오 주 마틴스 페리
'''신체 조건'''
196cm, 93kg
'''포지션'''
슈팅 가드, 스몰 포워드
'''드래프트'''
1962년 드래프트 1라운드 7순위
보스턴 셀틱스에 지명
'''선수경력'''
'''보스턴 셀틱스 (1962~1978)'''
'''수상내역'''
NBA Champion 8회 (1963-1966, 1968, 1969, 1974, 1976)
NBA Finals MVP 1회 (1974)
All-NBA First Team 4회 (1971-1974)
All-NBA Second Team 7회 (1964, 1966, 1968-1970, 1975-1976)
NBA All-Defensive First Team 5회 (1972-1976)
NBA All-Defensive Second Team 3회 (1969-1971)
NBA All-Rookie First Team (1963)

'''등번호'''
17번
'''1974년 NBA 파이널 MVP'''
윌리스 리드

'''존 하블리첵'''

릭 베리
'''보스턴 셀틱스 영구결번'''
'''No. 17'''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image]
'''존 하블리첵'''
헌액 연도
1984년
1. 개요
2. 커리어
3. 은퇴 후
4. 플레이 스타일
5. 만능 스포츠맨
6. 여담


1. 개요


'''HONDO[1] '''
NBA 농구선수. 보스턴 셀틱스에서만 커리어 전부인 16시즌을 보냈으며, 커리어 초반 7시즌은 식스맨으로 활동하고 70년대부터는 1969년에 은퇴한 빌 러셀을 대신해 보스턴의 에이스 역할을 했다. 식스맨의 중요성을 알려준 레전드이자 '''역사상 최고의 식스맨'''.[2] 플레이오프때 더욱 날뛰던 큰 경기에서 강한 선수였다.

2. 커리어


하블리첵은 리그 내 최고의 클러치 플레이어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로 데뷔 이후 7년이나 식스맨의 롤을 받고 활동했던 매우 이례적인 사례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하블리첵은 자신을 벤치멤버로 기용한 아워백 감독의 결정에 순응했다.[3]
하블리첵이 1962-63시즌 루키로서 팀에 입단했을 당시에는 이미 보스턴 셀틱스는 4연패를 달성한 상태였다. 팀에는 밥 쿠지, 빌 러셀, 빌 셔먼, 샘 존스, 프랭크 램지라는 우주 방위대급 선수들이 있었고, 신인이었던 하블리첵은 주전자리는 꿰차지 못했지만 벤치멤버로서 위기상황마다 출장, 좋은 활약을 펼쳤다.
루키 하블리첵은 인상적인 허슬플레이와 수비를 보여주었으나, 팀 동료인 밥 쿠지는 "하블리첵은 결코 슈터가 아니다." 라는 반응을 보였다. 결국 하블리첵은 루키 시즌이 끝난 후, 고향에 내려와 슛과 드리블 연습에 매진하였고, 다음 시즌에 향상된 슈팅으로 평균 19.9점으로 거의 20점에 가까운 득점을 올리며 쿠지의 비판을 무색케 한다.
1964-65시즌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보스턴은 괴물 윌트 체임벌린과 명예의 전당 멤버 할 그리어, 쳇 워커 등이 이끄는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를 상대하게 되었다. 첫 경기는 보스턴이 가져갔으나, 이후로 양 팀이 한 경기씩을 번갈아서 가져가며 시리즈는 7차전에 접어들게 된다. 역시 팽팽하게 진행되던 7차전은 경기 종료 5초가량을 남기고 보스턴이 110-109로 한 점의 살얼음 리드를 지키고 있었고, 필라델피아는 작전타임을 불렀다.[4] 필라델피아의 돌프 셰이즈 코치는 보스턴 선수들이 자유투가 좋지 못한 체임벌린에게 신경을 쏟는 와중에 다른 선수에게 인바운드 패스를 하여 자유투를 얻어내는 변칙 작전을 지시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공격에서 필라델피아가 코트에 공을 투입하는 순간, 하블리첵이 쏜살같이 공을 스틸해내며 샘 존스에게 패스했고, 샘 존스가 그대로 시간을 흘려보내며 경기가 끝났다. 하블리첵의 이 스틸은 플레이오프 하이라이트에 끊임없이 나오는 단골 명장면.

격양된 해설도 일품.[5]
1969-70시즌에는 과거 8연패의 위업을 이룩한 러셀과 샘 존스 등 왕조 주축 선수들이 은퇴하게 된다. 코트를 떠나게 된 러셀은 하블리첵에게 "보스턴은 너의 팀이다." 라는 말과 함께 보스턴의 정신적 지주 자리를 넘겨준다. 이후 본격적으로 스타팅 멤버가 된 하블리첵은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세 분야의 기록에서 모두 팀내 리더가 되면서 팀의 에이스로 거듭나게 된다.
하블리첵은 이후로도 꾸준한 활약을 펼치며 데이브 코웬스, 조 조 화이트 등의 선수와 팀을 이끌었다. 1974년 플레이오프에서는 평균 27.1점 6.4 리바운드 6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카림 압둘자바가 이끄는 밀워키 벅스를 7차전 끝에 누르고 다시 한 번 NBA 정상에 올라 파이널 MVP까지 수상하고 최고의 시즌을 보낸다.
하블리첵은 마지막 시즌인 1977-78 시즌까지 평균 16.1 득점으로 기량을 유지하며 은퇴했다.

3. 은퇴 후


패스트푸드 체인점인 웬디스의 창업 당시 투자했는데 웬디스가 큰 성공을 거두며 하블리첵도 많은 이익을 거뒀다고 한다. 그래서 프로 농구선수의 수익이 크지 않을 때에 선수 생활을 했음에도 하블리첵은 은퇴 후 일평생 직업을 가지지 않고 평온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말년에는 파킨슨병으로 투병했으며, 2019년 4월 25일 향년 79세로 타계했다.

4. 플레이 스타일


현대 농구의 스윙맨 스타일을 60년대에 구사했던 선수다.

5. 만능 스포츠맨


하블리첵은 어려서부터 달리기를 좋아하고 자전거가 없어서 친구들의 자전거를 달리기로 따라잡았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유년기를 보냈던 탓에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야구, 미식축구, 농구 세 종목 모두 주 대표로 뽑힐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미식축구에서 80야드 가까이 공을 던지는 강한 어깨덕에 쿼터백 유망주로 꼽히기도.
대학 1학년 때는 야구에서 4할 가까이 치는 야구 재능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농구에 전념하면서 1960년 NCAA를 패권을 차지. 시간이 흘러 하블리첵은 1962년 드래프트에 참가하는데 NBA뿐만 아니라 NFL에도 지명된다. 이때 하블리첵을 지명했던 클리블랜드 브라운스는 그를 와이드 리시버로 쓸 예정이었다.

6. 여담


원래 통산 야투 실패 1위 (13,417개) 기록을 보유하고있었지만, 2014년 11월 11일 코비 브라이언트가 그 기록을 넘어섰다.
사실 하블리첵의 통산 야투율은 43.6%로 언뜻 낮아보이지만 그의 시절엔 농구 기술과 전술의 부족으로 현재 상식으로 이해가 안 갈 정도로 필드골 성공률이 전체적으로 낮았다.[6] 일단 1960시즌 전까지 시즌 야투성공률이 5할을 넘어본 적이 있는 선수는 단 한명도 없었으며, 1967시즌에 가자미 모드로 변신한 윌트 체임벌린이 의도적으로 득점을 자제하며 비상식적인 야투율을 기록하기 전까지 리그 야투율 1위 선수들이래봤자 5할 초반대에 그쳤다. 하블리첵이 기록한 야투 성공률은 현대로 따지면 4할 후반대~5할 초반대까지도 볼 수 있는 괜찮은 기록인 셈. 전체적으로 야투 성공률이 올라간 현대에 이 기록을 깬 건 어찌보면 코비의 위엄(?)이다.
필 니크로의 동네친구라고 한다.'''기사'''
[1] 존 웨인 주연의 동명의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 속의 존 웨인을 닮아서 생긴 별명[2] 하블리첵은 통산 우승 8번 중에 6번을 식스맨으로 뛰었으며 나머지 2번은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여 우승했다. 특히 7번째 우승인 1974년에는 '''파이널 MVP'''까지 받았다.[3] 현대농구로 비유하자면 마누 지노빌리, 오클시절 제임스 하든이 비슷한 경우.[4] 여기도 뒷얘기가 있는데 이때는 원래 ''보스턴 셀틱스'''의 공격권이었다. 리드하고 있는 상황에서 인바운드해 시간만 끌면 되는 상황에서 클러치에 강하기로 유명한 빌 러셀은 "아무한테도 못 맡긴다!"며 자진해서 인바운드 패스를 맡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때가 있는지 러셀이 패스미스를 저지른 것. 하블리첵의 슈퍼플레이로 겨우 살아난 러셀은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느낌이었을 듯.[5] 이때 해설자가 외친 "Havlicek stole the ball!!"는 한국에선 그다지 유명하지 않지만 워낙 임팩트가 크기 때문에 미국 팬들 사이에선 굉장히 유명한 외침/장면이다. ESPN에서 조던이나 타이슨 등 여러 스포츠의 전설들의 생을 돌아보는 Sports Century란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는데 (한 에피소드 당 한명을 다루고 50분 정도 분량. 영광의 순간 뿐 아니라 흑역사화된 부분까지 당시 관련인들의 인터뷰와 함께 상세히 다뤄 퀄리티가 꽤 높다) 이 프로그램 인트로에서 로고와 함께 미 프로 스포츠에서 역사적인 순간의 유명한 해설멘트들이 나온다. 이때 나오는 멘트 중 하나가 바로 하블리첵스톨더 볼. 같이 나오는 멘트는 조지 포먼이 조 프레이저를 쓰러뜨릴 때 나왔던 마찬가지로 전설적인 멘트인 "Down goes Frazier! Down goes Frazier!" 그만큼 전설적인 순간이었던 것.[6] 따라서 리바운드도 현대농구에 비해 상당히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