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동식
1. 개요
일본, 한국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자.
2. 일본 프로야구 시절
1948년 도쿄 태생의 재일교포 야구인이며 일본식 이름은 '''우다 토쇼쿠(宇田東植)''' 이지만 한국 국적이라 보통 본명인 주동식으로 통한다. 다쿠쇼쿠대학 제일고교[1] -주오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야구 혼다 팀을 거쳐 1971년 드래프트 4위로 도에이 플라이어스의 지명을 받아 프로에 입문하였다. 언더핸드 타입으로 슬로커브와 역회전 공을 주무기로 삼던 주동식은 데뷔 초기엔 주로 패전처리 투수로 나섰으나 이스턴 리그(2군)의 최우수 평균자책상을 받는 등 잠재력을 발휘하였다.
1979년 선발로 39게임에 등판하며 데뷔 후 처음으로 규정이닝을 채웠고, 9승 3패 평균자책 3.47의 괜찮은 성적을 남기며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후 다시 중간계투로 떨어지며 이렇다 할 활약은 없었고 1981년 일본시리즈에서 아와구치 켄지에게 싹쓸이 2루타를 시원하게 쳐맞고 1982년 한신 타이거즈로 트레이드 되어 1시즌을 뛰었다.
3. 한국 프로야구 시절
1983년 대선배인 장훈의 권유를 받고 한국 프로야구로 적을 옮기기로 결심, 장명부가 KBO와의 1차 협상을 위해 한국에 입국 했을때 같이 입국했고 계약금 4천만원, 연봉 3천만원, 총 7천만원 이란 조건에[2] 해태 타이거즈로 배정되었다.[3][4] 당시 주동식의 나이는 35세로 당시 해태의 코치이던 조창수, 백기성 보다도 1살 많았고 투수코치 유남호와는 3살이나 연상이었지만 주동식은 누구보다도 성실히 동계훈련에 임하며 선수들의 귀감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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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세로 이미 은퇴에 가까운 나이였음에도, 투구 간격(interval)과 완급을 노련하게 조절하며[5]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1983년 주동식의 성적은 30게임 등판에 7승 7패 3세이브 평균자책 3.35로 기대치엔 못미쳤는데, 주동식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전반기에만 7승을 올렸지만, 후반기엔 본인이 던지고 싶다고 해도 구단에서 "넌 한국시리즈 때 쓰려고 아껴두는 거다" 라면서 일부러 등판을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10승을 하면 받기로 되어있었던 보너스'''와 연관이 있지 않겠느냐는 반응... [6] 장명부가 30승을 거두고 팀의 에이스이던 이상윤도 20승을 거두었는데 일본에서 뛰었다는 베테랑이 7승에 그치자 구단의 실망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찬찬히 따져보면 주동식은 그해 전기리그 막판에 삼미 슈퍼스타즈 와의 광주 3연전에서 김성한-이상윤에 이어 선발승을 거두며 시리즈 스윕을 확정지어 순위를 뒤집었고 이는 해태의 전기리그 역전 우승으로 이어졌다. 또한,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4승 중 2승을 혼자 따내며 맹활약, MBC 청룡을 물리치고 해태를 한국시리즈 제패로 이끌며 중요한 길목에서 제 몫을 해줬다.
시즌 후 주동식은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한 바를 감안하여 연봉 20% 인상을 주장하였지만 해태는 "시즌 7승에 그쳐놓고 무슨 소리 하는거냐?"면서 동결을 제시, 감정이 상한 주동식은 일본으로 돌아가 버렸고 전지훈련 차 일본에 온 해태 선수단에도 합류하지 않으며 신경전을 벌였다. 보다 못한 김응룡 감독이 내놓은 '''연봉 10% 인상(3천 3백만원)에 10승 달성시 보너스 3백만원 추가''' 라는 수정안을 구단이 수용하여 주동식에게 제시하였으나 주동식은 "그럼 보너스 지급 기준을 10승에서 5승으로 깎아달라" 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또 결렬.[7] 급기야 재일교포 선수를 보유하고 있지 않던 MBC 청룡으로 트레이드를 추진하기도 했으나 MBC가 주동식이 제시한 계약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이마저도 허사가 되었고, 결국 장훈의 중재로 시즌 개막을 20여일 앞두고 '''연봉 3천 3백만원[8] , 시즌 10승시 보너스 3백만원 추가'''라는 조건으로 간신히 계약을 매듭지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1984년 시즌을 맞이한 주동식은 그해 18경기 등판에 6승 5패 평균자책 2.27에 그쳤고, 특히 전기리그엔 단 3게임, 1패만 거두며 팀내 최고연봉 선수에 걸맞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후반기에 6승을 거두며 제 모습을 보이긴 했으나 팀은 5위에 그치면서 주동식에 대한 구단의 시선은 결코 곱지 않았고, 그에게 10% 삭감된 2천 7백만원의 연봉을 제시하자 주동식은 오히려 자신의 코치 승격과 연봉인상을 요구, 3천 6백 60만원을 달라고 맞서며 또다시 연봉 협상은 해를 넘기고 말았다.
주동식과 해태의 협상은 요구차를 좁히지 못하고 끝내 파국을 맞이하며 주동식은 은퇴를 선언, 일본으로 건너가 버리며 한국 프로야구와의 인연을 끊어버렸다.
4. 은퇴 이후
이후 주동식은 일본에서 야구해설가로 활동하였는데, 후배 재일교포 선수들이 해태에 관심을 보이면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며 쌍수를 들고 말렸다.[9] 주동식을 소개한 장훈도 해태의 태도에 실망하여 더 이상 재일교포 선수들을 소개해 주지 않았고, 그래서 해태의 재일교포 선수 계보는 1994년 전성철이 입단하기 전까지는 맥이 끊겼다.
그러나 해태가 KIA 타이거즈로 바뀐 후 주동식은 현역 시절 친하게 지낸 김성한 감독의 요청으로 2002년 KIA의 투수 인스트럭터로 영입되어 이듬해엔 정식 2군 투수코치로 계약, 약 2년간 KIA 투수를 지도하면서 예전의 악감정은 다 털어 버렸다고 한다.[10] 2013년 시즌을 앞두고 오키나와로 동계 훈련을 온 한화 이글스 캠프를 찾아가 옛 스승인 김응룡 감독과 절친 김성한 수석 코치를 만나 같이 식사도 했고, 한국에 오면 김성한이 운영하는 광주의 중국집을 종종 찾기도 하며 KIA 코치 시절 친해진 최해식은 술만 마셨다 하면 주동식에게 전화를 거는 등(...) 해태 시절의 야구인들과 아직도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일본에 거주하면서 종종 한국에 건너와 야구 관련 강연회도 여는 등 최근까지 야구계와의 연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현재는 일본식 주점 운영, 무역업 등 사업가로 활동 중이라 한다. 한국 국적은 아직 유지하고 있지만[11] 주동식의 자녀들은 결국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고 한다. 주동식의 인터뷰에 따르면 아들과 딸 모두 "아빠 죄송해요, 더 이상은 (불편해서)안 되겠어요." 라며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는데, 아버지의 입장에서 매우 섭섭했지만 자녀들의 생각을 존중해서 결국 허락해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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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는 성매매 영업 금지 구역에서 안마방을 운영하다 풍속영업법 위반으로 그 외 2명과 같이 체포당한 흑역사가 있다(...).
5. 연도별 성적
6. 관련 문서
[1] 1964년 고시엔 대회 3라운드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고 한다.[2] 같은 시기 삼미에 입단한 장명부와 같은 대우를 요구했지만 짠돌이 구단으로 악명높던 해태에겐 깜도 안먹힐 요구였고, 결국 해태 구단 관계자가 직접 일본까지 건너가 주동식과의 계약을 성사시켰다. 그래도 일본에서 한국 돈으로 약 2천 4백만원(일화 800만엔) 정도를 받던 주동식에게 연봉만 3000만원에 계약금 4000만원은 거액임에 틀림없었다...[3] 배정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일본 내의 재일교포들을 직접 접촉해서 영입할 능력이 없던 초창기 국내 구단의 실정상 장훈 소개 → KBO의 배정이 당시 재일교포 선수들의 일반적인 영입 방법이었다.[4] 히로시마 카프 2군 포수이던 김무종도 같이 입단했는데, 사실 이 둘은 1982 시즌 한국 프로야구 순위상 롯데 자이언츠에 배정되었어야 했으나 82년 해태의 선수난이 워낙 심각해 해태 타이거즈에 배정되었다. 롯데에는 최동원의 입단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점 또한 재일교포 선수 배정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5] 처음에는 갑작스레 빠르게 던져서 적응하지 못한 타자들이 헛방망이질을 하기 일쑤였다고.[6] 업계에서도 월급을 적게 주는 것으로 악명이 있긴 했다. . 허니버터칩의 생산은 2014년부터로 IMF 사태 및 구단의 매각보다 한참 후의 일이다.[7] 주동식은 뒷날 "5승 거두고 보너스 3백만원은 나로서도 낯간지러운 요구였지만 구단이 하도 짜게 굴어서 한번 개겨본 것" 이라고 털어놓았다.[8] 사실 3백만원은 보너스 형태로 주는 것이라 동결이나 다름없었다(...).[9] 실제로 1986년 해태가 야심차게 영입을 준비하여 입단 직전까지 갔던 김성길을 뜯어말려 계약을 무산시킨 바 있다. 결국 김성길은 이듬해인 1987년 라이벌 팀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다.[10] 아래 인터뷰에서도 "처음에 한국에 온 걸 많이 후회했지만 지금 와 돌이켜 보면 그것도 참 소중한 경험이고 추억이었다. 난 안 좋은 일이 있으면 버럭 화를 내도 금방 잊고 돌아선다. 다른 한국인들 처럼 말이다" 라면서 너털웃음을 지을 정도로 해태 시절에 대한 유감은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11] 주동식의 부친인 고 주광희씨는 민단 부단장까지 지낸 분으로 생전 민족의식이 강하여 외아들인 주동식은 부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