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필산 전투

 

'''주필산 전투
駐蹕山戰鬪'''

'''시기'''
645년 음력 6월
'''장소'''
고구려, 주필산
'''원인'''
고구려 야전군의 대당(對唐) 안시성 구원전.
'''교전국'''
고구려

'''지휘관'''
<^|1>고연수
고혜진
고정의
당태종
아사나사이
장손무기
이도종
이세적
설인귀
설계두[1]
양홍례[2]
유홍기[3]
'''병력'''
15 ~ 25만 명[5]
불명[7]
'''피해'''
6,500명 ~ 56,500명[8]
피해 규모 불명
'''결과'''
군의 승리 및 안시성 포위.
1. 개요
2. 주필산 전투의 배경
3. 주필산 전투 전개
3.1. 개전 직전, 고구려군
3.2. 개전 직전, 당나라군
3.3. 개전
3.4. 고연수의 항복
3.5. 후일담 및 기타
3.6. 고구려군 선봉대와의 전투?
4. 주필산 전투와 관련한 대중 매체의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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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45년(보장왕 4년), 고구려의 안시성 근교 벌판에서 벌어진 전투로 제1차 고구려-당 전쟁의 전투이다. 주필산 전투라고 명명된 이유는 이 전투 당시 당군이 진을 친 산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고구려에서 당나라의 군사를 물리치기 위해 15만의 대병력을 동원하였으나 결론적으론 패하였다.

2. 주필산 전투의 배경


당태종은 집권한 이래 고구려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친당 정책을 취하던 영류왕을 몰아내고 보장왕을 옹립하며 사실상 실권자로 집권하자, 명분을 찾은 당태종은 쿠데타를 트집잡아 전쟁을 일으킨다.
당나라는 전쟁 발발 후 이세적, 이도종 등이 이끄는 군대가 개모성, 장량이 이끄는 수군이 비사성, 당 태종이 직접 요동성, 백암성 등 4개의 성을 함락시키는 등 여수전쟁 당시 수나라보다 상대적으로 나은 성과를 거두지만, 백암성 함락 이후로는 공세가 한풀 꺾인 모습을 보인다.

3. 주필산 전투 전개



3.1. 개전 직전, 고구려군


15만 군대가 내달리고 깃발이 30리에 뻗쳤다.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닿은 것이 누런 뱀이 흙먼지를 토하듯 하였고 기병들이 들판을 뒤덮은 것이 마치 붉은 개미떼와 같았다(有徒十五萬, 連旗三十里. 烟火稽天, 若黄虵之吐霧. 彀騎横野, 邁赤蟻之爲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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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당문》 권7 태종황제 破高麗賜酺詔'''}}}
이 시기에 연개소문은 대군을 보내 당나라 본대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하였다. 대대로 고정의, 북부욕살 위두대형 고연수, 남부욕살 대형 고혜진 등이 지휘하는 15만 대군은 안시성 외곽에 도착하여 사방 40리에 뻗친 진용을 갖추었다.
양측은 개전에 앞서 작전 회의에 들어갔다.

"진왕(秦王)은 안으로 여러 영웅을 제거하고, 밖으로 오랑캐를 복속시켜 독립하여 황제가 되었으니, 이는 한 시대에 뛰어난 인재이다. 지금 나라 안의 무리를 거느리고 왔으니 대적할 수 없다. 나의 계책으로는 병력을 멈추고 싸우지 않고 세월을 허송하며 오래 버티어 견디며 기습 병력을 나누어 보내어 그 식량을 보급하는 길을 끊는 것만 같지 못하다. 양식이 이윽고 떨어지면 싸우려고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곧 이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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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제21 고구려 본기 제9 보장왕'''}}}

“지금 고연수에게 전략이 있다면 그것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 병사를 이끌고 직접 앞으로 나와서 안시성과 연결되는 보루를 쌓고, 높은 산의 험한 지세에 의지하여 성 안의 곡식을 먹으면서 말갈군을 풀어 우리의 마소를 약탈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공격한다고 해도 빨리 함락시킬 수 없고, 되돌아가려 해도 늪지에 가로막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군사들은 가만히 앉아서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되니, 이것이 상책이다. 둘째, 성 안의 무리를 이끌고 야간도주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중책이다. 셋째, 자신의 지혜와 재능을 모르고 우리와 대적하는 것이니, 이것이 하책이다. 그대들은 두고 보라. 그가 반드시 하책을 가지고 나올 것이니, 그들을 사로잡게 되는 작전이 내 눈 앞에서 벌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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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제21 고구려 본기 제9 보장왕'''}}}
계급에 걸맞은 능력을 가진 인물인 대대로 고정의는 당나라군과의 정면대결을 피하고 지구전을 해야한다 하였다. 당태종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눈앞에 둔 탓인지[9] 고연수와 고혜진은 이 작전에 따르지 않았다. 고연수는 군대를 거느리고 안시성 외곽 40리에 진군하였고 곧바로 다시 안시성 외곽 8리까지 진격, 당나라의 돌궐 기병 1,000명을 격파한다. 고연수 및 고구려군은 ‘다루기 쉽다’ 하며 기세가 올랐다고 한다.

3.2. 개전 직전, 당나라군


고구려의 초유의 대군을 맞아 전력으로 싸우기 위해 우선 제장들은 지휘권을 이세민에게 반납하고 작전 회의에 들어간다. 이세민은 고지에 올라 형세를 살펴보았는데 40리에 뻗친 고구려 대군을 보고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이때 강하왕 이도종은 별동대 5,000명을 보내 평양을 기습공격하기를 청하였으나 기각되었고 이세민은 고연수에게 우선 사신을 보내 싸울 의사가 없다는 거짓 의사를 보여 고연수의 방심을 유도한다.

태종이 밤에 문무백관을 불러, 몸소 지휘하여 이적의 욱기(勖騎) 15,000명을 적의 서쪽 고개에 진치게 하고[10]

장손무기는 장군 우진달 등을 이끌고 정예병 11,000명을 기병(奇兵)으로 하여, 산의 북쪽에서 협곡으로 나와 적의 등뒤를 치고, 태종은 스스로 기병(會騎) 4,000명을 이끌고, 고각(鼓角)과 기치를 숨기고 적의 진영 북쪽 높은 본우리 위에서 달리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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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부원귀》''' 권116}}}
기록마다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이세적, 장사귀 등은 서쪽에 진을 쳤고, 장손무기와 우진달(牛進達)은 정예군을 기습병으로 삼아 산의 동쪽, 혹은 북쪽에서 협곡으로 나와 후면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세민 본인은 직접 기병을 이끌고 북과 나팔을 옆에 끼고 깃발을 눕혀서 산으로 올랐다.

3.3. 개전


고연수 등이 이세적의 군대가 홀로 포진한 것을 보고 군사를 정돈하여 싸우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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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 권198, 정관 19년 6월 22일 무오}}}

'''주필산 전투에서 6군(친위대)은 고려에게 제압당하였고, 태종이 흑기(이세적의 대장기)를 살펴보라 명하였는데, 척후병이 흑기가 포위되었다 보고하니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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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가화(隋唐嘉話)上, 中華書局 10~11쪽}}}
6월 22일, 날이 밝으면서 전투가 시작된다. 고연수가 이세적을 먼저 깨트리느냐, 이세민이 먼저 고연수의 후미를 쪼개느냐, 이것은 얼핏 허무해보이기까지 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당나라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 충분했다. 장창으로 벽을 쌓은 이세적의 진은 고연수의 돌격에 밀리다가 마침내 사방에서 포위당한 형국이 되었다. 이세적의 군대가 포위되고 친위대까지 위태로우니 당태종이 크게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또한 말갈 기병의 칼날이 이미 당태종의 본진을 쑤시고 있었다.

태종은 장손무기의 군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것을 보고 명하여 고각을 울리고 기치를 일제히 들게 하였다. 연수 등이 크게 놀라 장차 대처하려 했지만 그 진이 어지러워졌다. 그때 번개가 쳐서 당군의 위세를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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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부원귀》''' 권116}}}
하지만 이세적의 군대가 와해되는 것보다 장손무기의 군대가 고연수의 후미에 쐐기를 박는 것이 먼저였다. 그리고 이세민이 이끈 친위기병 역시 고연수의 군대를 쪼갰다. 흰 옷에 화극과 화려한 화살통을 무장한 무사가 천둥 번개와 함께 무쌍을 찍으면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는데 그가 바로 설인귀다. 이 틈을 타 모루의 역할에 성공한 이세적의 부대가 역습에 나섰고, 고연수의 군대는 셋으로 쪼개져 당나라군과 대응하였다.
이때 당군은 출구 쪽을 어느정도 띄워 두어 고연수군이 퇴로를 찾아 몰리도록 하였는데 고연수는 이를 따라 잔군을 거느리고 탈출한다. 고구려군의 시체와 비명과 통곡이 산골짜기를 메우고 개울이 붉게 물들었으며 뼈와 창검이 쌓였다고 한다. 고연수는 산에 의지하여 진을 쳤는데 당나라군은 이들을 포위하고 퇴로를 차단하였다.

3.4. 고연수의 항복


황제가 모든 부대에 명령하여 우리를 포위하게 하고, 장손무기에게는 교량을 전부 철거하여 우리의 귀로를 차단하게 하였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자신의 군사 36,800명을 이끌고 항복을 청하면서, 당나라의 군문에 들어가 절하고 목숨을 살려달라고 빌었다. 황제는 욕살(褥薩) 이하의 지휘관 3,500명을 선발하여 당나라의 지역으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여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말갈인 3,300명은 전부 땅에다가 파묻었다. 말 5만 필, 소 5만 두, 명광(明光) 갑옷 1만 벌을 빼앗았으며, 기타의 장비도 그에 달할 만큼 빼앗았다. 황제가 올랐던 산의 이름을 고쳐서 주필산(駐蹕山)이라 하였으며, 고연수를 홍려경(鴻臚卿)으로 삼고, 고혜진을 사농경(司農卿)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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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제21 고구려 본기 제9 보장왕'''}}}

산의 이름을 주필산으로 명하였고, 파진도를 그리고 중서시랑 허경종에게 글을 써서 돌에 새기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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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서》''' 고려전}}}
6월 23일에 고연수, 고혜진은 군대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이 전투에서 좌둔위 장군 왕군악이 도끼에 맞아 두동강이 났으며[11] 이세적과 이세민의 친위대 모두 제압당하여 위기를 맞았다. 이에 대한 응징이 필요했다.
당태종은 말갈 병력을 3,300명을 가려뽑아 땅에다가 파묻어 버렸다. 황제의 진을 공격하여 공포에 떨게 한 복수였고, 동시에 고구려에 복속된 여러 종족들에 대한 경고였다. 그리고 고구려군 가운데 장교 3,500명을 가려뽑아 포로로 삼았다. 이들은 당나라 벼슬을 받고 당군에 편입 된 후 당나라 내지로 끌려갔다.
이외에 병졸들은 모두 석방하였다고 기록되어있는데 포로의 숫자는 3만에서 16만까지 고무줄처럼 제각각이다. 상식적으로 안시성 공략전 이전에 수만에 달하는 고구려군 포로들을 모두 석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포로의 규모가 당나라의 전공을 과장하기 위해 숫자를 끼워맞춘 감도 없잖아 있으며 말이 장교 3,500이지 실제로는 포로 전부를 합쳐서 3,500일 가능성도 크고 말갈병을 제외한 나머지 고구려군 포로일 가능성도 크다.

3.5. 후일담 및 기타


고구려군은 살수대첩을 능가하는 전과를 꿈꾸다가 오히려 예상치 못한 패배를 당했다. 주필산 전투의 여파로 안시성 근처에 위치하는 후황성, 은성 등의 소규모 성에 주둔하던 고구려군이 달아났고 이 일대가 모두 산개되었다고 한다.
다만 당군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고 볼 만한 정황들이 다수 존재한다. 이후 바로 코 앞에 있는 안시성 공략 착수에 이르기까지 50여 일간 기록의 공백이 생긴다.[12] 이 공백에 대해서는 주필산 전투에서의 피해 수습,[13] 대대로 고정의, 혹은 그 이외의 총사령관이 이끄는 고구려군 본진과의 후속 전투 발생,[14] 고구려의 역습 및 교두보와 물자 탈환,[15] 고구려와 설연타족의 연계 등이 제기된다. 다만 자세한 사항은 사서에 기록되어있지 않아서 사료들의 교차검증을 통한 유추만이 가능할 뿐이다.
어찌되었던 공통적으로 사실상 이 회전을 끝으로 당나라군의 대대적인 공세는 눈에 띄게 수그러들기에 이르렀고 고구려 공략이라는 전략적 목표는 멀어지고 있었다.

'''신성(新城), 건안(建安), 주필(駐蹕)에서의 세 차례 큰 싸움에서 우리의 군대와 당나라의 병사 중에 전사자가 많았으며, 말들도 많이 죽었다.''' 황제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고 탄식하면서 말했다. “만일 위징(魏徵)이 있었다면 나에게 이번 원정을 못하게 하였으리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상

(전략)유공권(柳公權)의 소설[16]

에서는 ‘주필산 전쟁에서 고구려가 말갈과 군사를 연합하여 그 군사가 바야흐로 40리나 뻗쳤다. 태종이 이를 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황제의 6군이 고구려 군사에게 제압되어 거의 꼼짝 못하였다. 영공(이세적)의 휘하에 있는 검은 깃발이 포위되었다고 척후병이 보고하였을 때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다.’'''라고 하였다. 비록 끝내는 스스로 탈출했으나 저와 같이 겁을 내었거늘 『신ㆍ구당서』나 사마공(司馬公)의 『자치통감』에 이를 기록하지 않았으니, '''나라의 체면 때문에 말하기를 꺼린 것이 아니겠는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하편

대체로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 다만 중국의 역사서에서, 한 번 골라 베낌으로써, 모든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였고, 심지어는 유공권의 소설을 끌어 와서 당태종이 포위되었던 사실을 입증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사마광자치통감에도 죄다 그 기록이 보이지 않으니, 이는 아마도 그들이 중국의 수치를 숨기기 위한 것인 듯하다.

그러나 우리나라 땅에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실을, 감히 단 한 마디도 쓰지 못했으니, 그 사실이 미더운 것인 건 아니건 간에, 죄다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열하일기

워낙 남은 기록 자체가 뒤가 구린 전쟁이라 그런지 이를 곧이 곧대로 믿지 않고 오히려 고구려가 이긴 것으로 보는 사가들도 한반도에선 일부 제기되기도 했다. 중국 측에서도 당태종 등을 개인적으로 달래고 띄울 때나 언급되지 대체적으로는 안시성 전투와 당태종의 비참한 패전에 묻히는 경향이 많다. 단순히 명시된 기록 그대로만 읽어보자면 당태종이 중원을 평정하던 시절에도 찾아보기 힘든 신묘한 무공인데 많지 않은 언급이나 문맥을 보자면 졌잘싸 중 잘싸, 내지는 드라마틱한 위기 탈출 정도.
주필산 전투의 주인공인 당태종은 물론이고 이를 기록하라고 명한 허경종 둘 다 역사왜곡으로 유명한 인물이라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기록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게 주필산 전투의 전공은 당대에는 고구려군 포로가 전투에 참가한 15만의 고구려군 수를 초과하는 16만까지 과장되다가 정사가 편찬되면서 3만까지 교정이 들어간다. 중국 사관들이 보기에도 뭔가 아니다 싶었던 것.
일부 네티즌들 사이에선 이념까지 섞은 과장된 인식도 보인다. 멀리 갈 것 없이 이 문서의 옛날 버전 내용만 봐도 이 전투로 고구려의 주력이 증발하고 야전능력이 완전 상실되었다든가, 연개소문의 무능으로 고구려의 숨통이 끊어진 전투라든가, 단합 없이 지리멸렬 분열된 졸장들의 대환장 파티 등의 근거없는 내용이 다수 서술되어 있었다.

3.6. 고구려군 선봉대와의 전투?


주필산 전투 이후에도 말갈이 진을 침범하니 이(세)적 등이 힘써 깨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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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명신주의》'''}}}

양홍례는 주필산 싸움에서 기병과 보병 24군을 인솔하고, 나아가 적(고구려)이 뜻하지 않을때에 공격을 하여 깨뜨리는 바가 많았다.''' 이세민이 산위에서 양홍례가 무리를 인솔하는 것을 내려다 보았더니, 군대가 모두 사력을 다하고, 적을 죽이고 포로를 잡는 바가 많아서 심히 장쾌하게 여겼다. 허경종등에게 말하기를 월공아랑(양홍례)는 과연 훌륭한 가풍을 타고 났구나라고 하였다.

유홍기를 전군대총관으로 삼았다. 고연수를 주필산에서 치는데 따라서 공격하여 힘써 싸워 공이 있으니 태종이 거듭 노고를 치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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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서》''' 열전 양홍례, 유홍기}}}
주필산에서 고구려의 대군을 이끈 것으로 흔히 알려진 고연수 및 고혜진과 두 사람에게 충고를 했다고 알려진 고정의는 각각 위두대형, 대형의 관등과 대대로의 지위에 있었다고 여러 사서에 나와 있다. 십수만 대군의 사령관이 각각 고구려의 1,2위 관등인 대대로와 태대형이 아니고 5위 관등에 불과한 위두대형이라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로 치면 준장, 대령 둘이 국방부 장관과 4~5성장군을 포함하여 수십만 대군을 통솔했다는 것인데 이러한 해석이 맞는지에 대한 상당한 의문이 제기된다. 이게 사실이라면 고구려군은 걸프전 당시 중장 1명에게 100만 명의 지휘를 맡긴 이라크군급의 막장이란 이야기인데 이후 고구려의 행적을 본다면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일이다. 물론 당시 대대로의 직함에 있던 고정의가 직함만 총사령관직을 가져가고 고연수와 고혜진이 실제 전쟁 수행을 했을 가능성이 있기는 하다.[17] 어찌되었든 훨씬 더 높은 대대로의 지시를 무시하고 전쟁에 나섰다는 것은 꽤 의아한 부분인데, 어쩌면 고연수나 고혜진이 그들 개인이나 일부 파벌의 사병을 이끌고 전쟁에 참여해 고정의가 그들이 지휘하는 병력에 직접적인 명령을 내릴 형편이 못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고연수의 군대가 아사나사이의 기병 1,000기를 추격하면서 하루에 30리가 넘게 이동한 것도 고연수의 군사들이 고구려군의 본진이 아니었다는 추정을 뒷받침한다. 대열만 40여 리나 뻗칠 정도의 대군이 기동성이 좋은 1,000여명 남짓의 돌궐 기병을 30여 리를 추격하면서 이동했을 확률은 정황상 없기 때문이다.
또한 위의 기록을 보면 신당서나 자치통감에서의 주필산 전투에 관한 기록에서 등장하지 않는 병부시랑 양홍례는 24군을 거느리고 주필산에서 고구려군과 전투를 한 기록이 확인되며 능연각 공신 중 하나인 유홍기 역시 전군 대총관으로 등장한다. 24군의 숫자는 유동적이지만 최소한 편제상으로만 본다면 고연수와의 싸움에서 등장한 이세적, 장손무기의 당나라군의 규모와 대등하거나 더 큰 규모이며 유홍기 역시 대총관이라는 직책으로 볼 때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고연수, 고혜진은 고구려 대군의 총사령관이 아니며 6월 21~23일 이후의 기록의 공백 시기 동안 후속적으로 당나라군의 발목을 잡는 별도의 부대, 내지는 총사령관의 본대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아니면 그 둘이 실제로 총지휘를 했지만, 추후 고정의나 다른 인물이 패전한 병력을 수습해서 당나라군을 견제했을 가능성도 있다.

4. 주필산 전투와 관련한 대중 매체의 묘사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고구려 장수들이 고구려군이 15만이나 있으니 당나라군 아무것도 아니라고 무시하다가, 당 태종이 직접 자기 스스로를 미끼삼아서 고구려군을 함정에 빠뜨려서 고구려군이 간단하게 항복하고, 당나라군이 가볍게 승리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안시성에서도 처음에 등장한다. 이쪽은 연개소문과 달리 초반에 매서운 기세로 몰아붙이다, 양동으로 당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다만 아예 전멸한 것으로 묘사한 부분은 학계에서도 이견이 있다. 그럼에도 이런 설을 차용한 건 아마도 안시성의 우주방어를 더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1] 구당서, 신당서에는 나오지 않으나 삼국사기 설계두 열전에 주필산 전투에 참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 당나라 병부시랑[3] 능연각 공신중의 하나이며 보국대장군 역임[4] 저희들은 고구려의 10만여 명의 병력을 가지고도 황제의 깃발을 보는 것만으로 사기가 꺾여 허물어졌으며, 백성들의 간담이 서늘하였습니다[5] 거의 대부분의 기록은 15만, 《양당서》 설인귀 열전에는 20, 25만으로 나와있다. 포로가 된 고연수의 말을 보았을 때[4] 15만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6] 당 태종의 본군을 제외하고 선봉대에 불과한 요동도행군(6만)과 평양도행군(4만 3천) 만을 합친 규모이다.[7] 책부원구에 따르면 이세적의 군대 15,000명, 장손무기와 우진달의 군대 11,000명, 당태종의 군대 4,000명을 종합하여 3만 명 정도의 군사가 등장하지만 『전당문』에는 각 방면마다 행군총관이 수십 명이 등장하고 구당서 양홍례열전에는 병부시랑 양홍례가 마보(馬歩) 24군을 이끌었다는 기록이 나오며 전군대총관 유홍기도 주필산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는 서술이 있다. 추가로 파편화된 여러 사서의 기록을 보자면 총관 수십명 규모의 군대가 추가로 등장하거나, 아예 당나라 본군이 등장하는 등 하나의 사서만을 고려하여 주필산에서의 당군의 총병력을 추산하기는 어렵다. 다만 고구려의 15만 대군을 고려해 보았을 때 주필산 전투 당시 당군의 총병력은 수십만 단위의 대병력이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1차 고당전쟁에 참전한 당나라 전 전투병력이 10만이라 기록되었지만[6] 당 태종의 친정군을 고려하여 실제로는 더 많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과 마찬가지로 봐야 할 것이다.[8] 《구당서》(945) 고려전: 포로 156,800명, 사망자 10,000명. 《당회요》(961) 고구려전: 포로 36,800명, 사망자 20,000명. 《신당서》(1060) 고려전: 포로 36,800명, 사망자 20,000명.《자치통감》(1084) 645년 6월 기미일조: 포로 36,800명, 사망자 20,000명 [9] 서영교, 주필산(駐蹕山) 전투와 안시성(安市城)[10] 책부원귀에는 전원 기병, 기타 기록에는 보병, 기병 혼합이라 기록되어있다. 이는 당시 말에서 내려 보병으로 일시 전환하는 전술이 동아시아에서 유행하고 당에 수입된 것에 주목하여 주필산 전투에서도 같은 전술을 구사하였으리라 추정되기도 한다. 실제로 이세적도 이를 구사하여 기병을 상대한 경험이 있다.[11] 신라 출신의 용병인 설계두도 전사하여 둘 다 나란히 대장군으로 추증된다.[12] 주필산 전투 이후 당군이 안시성을 포위하는 데만 50일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고연수가 당군에 항복한 시점은 645년 6월 23일이지만 당군의 안시성 공격은 645년 8월 10일로 기록되어있다. 주필산 전투가 벌어진 곳과 안시성의 거리는 10리 남짓으로 길어봤자 반나절 거리이나, 실질적으로 당군이 안시성 근처로 이동한 것은 7월 후순이다.[13] 구당서에 따르면 7월 13일, 당군은 전사자의 시신에 표시를 하고 별도의 부대가 귀환할 시기에 같이 수송한 기록이 있다.[14] 후술되는 병부시랑 양홍례와 고구려군과의 전투가 그것이다.[15] 실제로 이즈음부터 당나라의 보급이 끊기고 나타날 리가 없는 식량 부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16] 삼국사기에는 유공권의 소설이라고 했지만 정확히는 당 현종 때 사람인 유속이 쓴 수당가화이다. 남북조 말기에서 수나라를 거쳐 당 현종 때까지의 여러 일화를 수록하고 있다.[17] 출전 이후 고정의가 몸이 안 좋아졌거나, 실제 전쟁경험에서 고연수와 고혜진이 더 인정을 받았다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