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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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지도와 안시성의 위치
1. 소개
2. 위치
4. 이후의 행보
5. 창작물
6. 관련 문서


1. 소개


압록수(鴨淥水) 이북의 항복하지 않은 11개 성: (중략) '''옛날 안촌홀(安寸忽)[환도성(丸都城)이라고도 한다.]이었던 안시성(安市城).'''

鴨淥水以北 未降十一城(중략)安市城 舊安寸忽[或云丸都城]

'''삼국사기 제37권 잡지(雜志) 제6'''

고구려의 성. 한나라 요동군에 안시현이 있었는데, 광개토대왕의 영토확장기에 고구려가 그 지역을 접수하고 예부터 내려오는 이름을 그대로 붙여 사용한 듯하다. 험준한 지형과 방어하기 좋도록 지어진 고구려 성의 양식 때문에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난공불락이었다고 한다. 당나라의 명군 이세민이 끝내 함락시키지 못한 성이다.

2.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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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으로 추정되는 영성자산성 사진. 아직 안시성의 정확한 위치는 불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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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스페셜에서 복원한 안시성 이미지
안시성을 언급하는 사서마다 그 위치가 다르거나 부정확하기 때문에 확실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다.
'''물리학자''' 이종호 박사는 영성자산성이 안시성이 아니라는 데는 여러 근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1]
첫째, 산성의 지형이 험하지 않고 산도 높지 않으며 토성이어서 견고하지 않다. 성벽이 좁은 데는 너비가 2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당나라의 포차ㆍ충차의 경우 2미터 정도의 흙덩어리는 얼마든지 뚫을 수 있는데 이런 토성에서는 당나라 100만 대군의 공격을 3개월이나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지적이다.
둘째는 영성자산성의 규모가 너무 작다는 것이다. 성내는 주로 좁은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고 평탄한 곳이 적어 10만 명 군사가 주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 기록에 의하면 산성 동남쪽에 인공 토산이 있다는데 그 토산은 너비가 20미터도 채 안 되고 산등성 중간이 바로 동쪽 성벽의 토대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인공위성이 촬영했다는 영성자산성의 토산 흔적도 확실한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고 지적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성벽의 경우 인공 토산이 아니라 동쪽 성벽이 허물어진 흙더미로 추정하기도 한다.
박지원열하일기에서 의 지리지에서 안시성이 평양에서 5백 리 떨어져 있다고 했는데, 현재 학계에서는 위의 지리지에서 언급한 '평양'이 정확히 어떤 지역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현재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비정한 평양의 위치로는 안시성 동쪽으로 5백 리에 평양이 있다는 지지(地志)의 설명과 부합하지 않는다. 참고로 평양이 꼭 평양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봉황성이 평양일 경우 '평양 봉황성'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을 잃었는지 아닌지는, 비록 확인할 길이 없으나, 대체로 이 성을 '안시'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 당서를 살피면 안시성은 평양으로부터 그 거리가 5백 리이고, 봉황성은 또한 왕검성이라 붙는다고 한다. 또 지지(地志)에서는 봉황성을 평양이라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무엇을 이름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또 지지에서는 옛날에 안시성은 개평현의 동북 70리에 있다고 하였으니, 대개 개평현에서 동으로 수암하까지가 3백 리, 수암하에서 다시 동으로 2백 리를 가면 봉황성이다. 만일 이 성을 옛 평양이라 한다면 당서에서 이른바 500리라는 말과 서로 부합되는 것이다.

열하일기


3. 안시성 전투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하여 정권을 잡은 이후 안시성주가 연개소문에 반발하여 서로 전투까지 한 끝에 서로 타협하게 된다는 소문이 전투 초기에 언급된다.
안시성의 공략이 생각외로 오래 걸리자[2] 당군은 성벽보다 높은 토성을 쌓아 안시성을 공략하려 했다. 그러나 토산이 갑자기 무너져 성벽을 덮쳤고 고구려군이 이를 틈타 토산을 점령하자 결국 당군은 안시성 공략을 포기하고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 사서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이 당시 당태종이 한쪽 눈에 화살을 맞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최초의 기록은 고려 문인 이색의 '정관음'이라는 시에 등장하고, 이색의 아버지 이곡이 쓴 '가정집'에서도 나온다.[3] 송나라 사마광의 ‘자치통감’ 에서는 당태종의 사망을 두고 요동에서부터 병을 얻었다고 기록하였다. 조선에서는 송준길의 저서 '동춘당선생별집'과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도 나온다.#

4. 이후의 행보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어 고구려가 사실상 멸망한 후에도 당군이 안시성은 우회해서 지나가서인지 여전히 살아남았으나 나당전쟁 중이던 671년신라 방향으로 서서히 진격하던 당나라 장수 고간이 안시성을 쳐서 점령했다고 한다. 이 때 안시성에는 고구려부흥운동군 지도자 검모잠의 남은 무리가 지키고 있었다고 하는데, 당태종을 격퇴했던 그 안시성주가 이때까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26년이란 세월을 생각하면 가능성은 별로 없다.
고려나 조선의 문인들은 중국의 대병력과 당 태종에 맞서 이겼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그리고 대규모 병력에 맞서 수성전을 벌여 승리한 안시성 전투의 승리 요인을 찾아내려 관련 기록들을 자주 검토해 국정에 반영했다. 다만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조선의 문인들은 안시성의 정확한 위치 비정은 못하였는지 봉황성을 안시성이라고 부르거나 안주군이 안시성이라고 하기도 했다.
이런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이다 보니 중국 입장에서 결코 영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는 곳은 아니다. KBS 역사스페셜 취재팀이 안시성으로 비정되는 영성자산성을 답사하려고 했지만 '''중국 당국은 아예 한국 취재팀의 접근을 허가하지도 않았고''', 영성자산성을 답사하려던 한국인 학자에게 이곳을 안내해 준 현지 조선족이 '''그 가족 전체가 강제이주를 당하는''' 불이익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

5. 창작물



5.1. 대조영(드라마)


안시성 전투를 비롯하여 여러 번 비중있게 등장하는 장소이며, 작중 역할은 난공불락의 요새이자 고구려의 명예가 서린 곳. 후술하겠지만 주인공 보정을 무지막지하게 받은 대조영 일행마저도 큰 희생을 치루고서야 간신히 점령할 수 있을 정도로 공격하는 쪽 입장에선 공격하기 난감한 곳으로 묘사된다.
안시성 전투 당시엔 당나라 군이 토산을 쌓았으나 고구려군과 주민들이 몰래 산 밑에 땅굴을 팠고, 거기에 해자의 물이 스며들면서 토산이 무너지고 만다. 이때 수 많은 당나라 병사들이 생매장 당했고, 설인귀에게도 정신적 충격을 준 것으로 묘사된다. 나중에 설인귀가 이때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생생하게 남아있다고 언급할 정도. 주군으로 모시던 당태종을 위한 복수도 있고 해서 설인귀는 안시성을 반드시 함락시키기로 결심한다.
3차 고당전쟁 당시엔 안시성주는 대중상이었으며, 설인귀와 거란군은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이에 이해고 측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안시성을 점령해도 늦지 않다고 제안하였고 결국 설인귀 측은 고구려 군을 속이고 몰래 평양성으로 이동한다. 고구려 멸망 후 설인귀와 거란군은 다시 안시성을 공격하는데 숙영의 설득도 그렇고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대중상 측은 고사계가 유인계를 쓰는 동안 백성들과 함께 몰래 안시성을 빠져나간다. 무혈 입성하는 설인귀를 은근히 조롱하는 편지 한통을 남겨놓는건 덤.
이후 대조영 측이 거란의 지원을 받아 요동을 함락할 때 재등장한다. 다른 지역은 다 점령하고 안시성만 남은 상황에서, 대조영 측은 다른 성들을 공격할때와 달리 많은 준비를 하고 공성을 시작한다. 그동안 각종 지략과 주인공 보정으로 요동의 성들을 쉽게 함락시켜왔지만, 안시성 만큼은 주인공 보정받은 대조영 측에서도 굉장히 어려운 상대였던 것. 아니나다를까 장현우 측이 우주방어만 했음에도 대조영 측은 전사자가 1만에 부상자도 상당히 많은, 대 피해를 겪는다. 그나마 마지막 전투에서 고구려 백성들이 봉기하여 성문을 열어줬기에 간신히 점령에 성공한다.
대조영은 안시성을 본거지로 삼아 요동을 다스린다. 거란이 설인귀의 간계에 빠져 이해고와 상당 전력을 요동으로 파견한다. 이해고는 다른 성들은 다 무시하고 대조영이 있는 안시성을 공격하지만 쌍방 큰 피해를 입는다. 이때 거란의 수도 영주가 돌궐과 당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고, 이해고는 급하게 회군을 하지만 대조영은 이때를 노려 거란군을 박살내버린다. 이후 천문령에 가기 위해 대조영 세력은 안시성을 비워둔다.

5.2. 안시성(영화)


2018년 개봉한 영화로 안시성에서 일어난 안시성 전투를 모티브로 제작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5.3. 무미랑전기


해당 드라마에서 고구려는 '''북방반군(北方叛軍)'''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4] 안시성은 안암성(安巖城)으로 나오고 작은 성이면서도 함락시키지 못했다는 묘사를 통해 안시성 전투를 일부나마 묘사했다.
그러나 싸움이 길어지면서 겨울이 다가오는데다 군량미도 부족해지면서 전투에 참여한 무미랑과 오왕[5]이 보기에도 이 전쟁을 더 이상 길게 끄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당태종을 산책 시킨다는 이유로 다친 병사들을 보여주고 태종의 심기를 편하게 하기 위해 일부 전투에서 승리하고 7만 호를 장성 안으로 포함시키는 등의 성과를 얻었으니 승전했다고 말하는 등 사실상 설득력 없는 설득을 했지만 이미 승부를 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걸 알고 있던 당태종도 미랑과 오왕의 설득을 명분 삼아 그냥 별탈 없이 회군하는 것으로 나온다.
사족으로 태종이 항복한 적장 유백안(柳伯顔)과 그 휘하 3만 명을 포로로 잡고 유백안이 항복한 산 이름을 '학여산(鶴唳山)'으로 개명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장면이 등장하는 걸로 봐선 주필산 전투 또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6]
민감한 역사적 사건은 두루뭉술하게 처리하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6. 관련 문서




[1] 이 박사는 고구려가 흉노였다고 주장하며, 본업인 물리학이나 공학과 별개로 아마추어 역사가로도 활동한다. 전문 사학자가 아니므로 주장은 적절히 걸러서 들어야 한다. 역사가로서의 수준은 평범한 역사 애호가.[2] 안시성은 규모가 여타 고구려 성들에 비해 규모가 굉장히 작았다. 게다가 성벽의 대부분이 흙벽이라 전쟁 중 재빨리 보수할 수 있었다. 이런 수성의 유리함 때문에, 아무리 당태종이 공격자라고 해도 안시성을 일반 성처럼 쉽게 공략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3] 이곡은 원에서 급제하여 관리를 지냈고 이색은 원의 국자감에서 유학을 했다. 이 때문에 원에서 이 일화를 접했을 것으로 보인다.[4] 동북공정의 일환 내지는 한국과의 역사갈등을 피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황당한 건 대연회 당시에 같은 한반도의 국가인 신라는 잘도 언급이 된다는 점이다.[5] 무미랑이 부득불 가겠다고 하자 오왕이 자신의 휘하에 있게 했다.[6] 주필산 전투에서도 고구려의 장수인 고연수와 고혜진이 항복했으며 그들이 데리고 항복한 병사의 수도 36,800명으로 드라마에서의 언급과 비슷한 규모이다. 또한 당태종이 올랐던 육산(六山) 역시 황제가 말을 매어두었다고 해서 주필산(駐蹕山)으로 개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