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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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01.04~2002.03.09(세수 68세,법랍 41세)
대한민국의 승려이자 화가, 시인이다. 속명은 고창률(高昌律)이며 중광(重光)은 법명이다.
1. 생애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3살 되던 1936년 원적지였던 제주도 북제주군으로 돌아가 함덕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제주고등농림학교(현 제주고등학교)를 중퇴하였다. 이후 1960년 경상남도 양산시의 통도사에 출가하였다. 그러나 후술할 온갖 기행으로 결국 1979년 승적이 박탈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승복과 삭발은 계속 하고 다니는 바람에 승적이 박탈되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다만 한국보다는 외국에서 더 유명하다. 외국에서는 '''한국의 피카소'''로 불렸다고. 흠좀무. 그리고 리즈시절이었던 1980년대에는 시인 천상병, 소설가 이외수와 같이 기인 3인방으로 불리웠다. 세 사람 다 애주가, 애연가였다는 사실은 굉장히 유명하다. 그러나 말년에는 폭음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술을 끊었고 2002년에 경기도 광주시의 기거하던 벙어리 절간에서 입적했다. 참고로 입적 이후에는 승적이 회복되었다고 한다.
2. 일화
1977년 영국 왕립 아시아 학회에 초대되어 시를 낭송했는데 이 시가 바로 <나는 걸레>이다.이 시로 인해 걸레 스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출가했었지만 온갖 기행으로 승적이 박탈되었는데 어떤 기행이었냐면… 자신의 제사를 지내거나, 성기에 붓을 매달아(…) 그림을 그리고 외국에 강연을 갔다가 여학생한테 키스를 하는 등의 기행이다. 자서전에서는 출가 이후에도 여성들과 성관계를 맺었다거나(…) 담배 피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 화장실에서 주워도 피웠다거나 한 경험담도 적어 놓았다. 심지어는 ‘내 생활 전부가 똥이요, 사기다’라는 말까지 남겼다고 한다.
이남이와 이외수와도 면식이 있었다는 모양이다. 가수 이남이가 사랑과 평화 탈퇴 이후 중광 스님의 절에서 10년간 수행(?)하면서 살았었다는듯 하다.[1]
광복 이후 대처승으로 표현되는 일본 불교의 잔재 청산[2] 과 10.27 법난 같은 독재정권의 불교계 장악 움직임 등 불교계가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에서 저런 기행을 대놓고 하고 있었으니 승적 박탈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단순히 기행만 놓고 보자면 정신나간 사람이 아닌가 생각이 들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대인이다.''' 1997년에 옥시크린 싹싹 cf를 찍었었는데[3] 이때 출연료로 받은 5천만원을 모두 지인의 치료비로 기부했고, 2000년에 치뤄진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전의 수익금도 모두 불우한 이웃에게 기부했다고. 또한 중광 스님의 지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집에 찾아온 사람을 절대로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이 아끼는 그림도 아낌없이 내주었다고 한다.
1986년에 만들어진 영화 <중광의 허튼 소리>가 바로 중광에 대하여 다룬 영화이다. 그러나 당시 공연윤리위원회의 무자비한 사전검열로 작품이 완전히 난도질되면서 흥행과 비평 양쪽 모두 실패했고, 감독인 김수용은 분노하여 영화활동을 쉬기도 했다.[4] 다행히 DVD론 복원판으로 나왔다. 정동환 주연에 최불암이 구상, 정진이 천상병 시인 역으로 카메오 출연했고, 명창 공옥진 여사도 카메오로 등장한다.
1990년 개봉된 <청송 가는 길>에도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