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옥진

 

1. 소개
2. 생애
3. 업적
4. 기타

孔玉振
1931년 8월 14일 ~ 2012년 7월 9일 (향년 80세)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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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판소리 명창·민속 무용가. 1931년 8월 14일 전라남도 영광군 출생. 2012년 7월 9일 타계. 그야말로 이 곧 인생이고, 인생이 곧 춤인 한국무용계의 전설이자 한국의 대표적 무용가.

2. 생애


전라남도 지방 문화재 공대일의 4남매 중 둘째로 출생,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에게 을 배우기 시작했다. 10세 전후해서 당대의 무용가 최승희 휘하에 들어갔는데, 최승희의 밑에서 정식으로 춤을 배운 것이 아니다. 공옥진의 부친이 징용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한 돈을 마련하고자, 돈 천 원에 딸인 공옥진을 최승희에게 몸종으로 팔아 버렸다고 한다.
여기서 겪은 고초는 이후 1人 창무극 '심청'에서 구구절절이 묻어나온다. 진짜 최승희가 제대로 부려먹었다고 한다. 공옥진의 인생을 다룬 책 <병신춤을 춥시다>를 읽어보면, 최승희가 좋아하는 를 가지고 오다가 전철 승강장에서 가방 끈이 풀려 승강장에 전부 굴러갔는데 주변의 일본인들은 "조선 아이가 배가 흩어졌다고 운답니다"라고 웃기만 하며 도와주지도 않고, 최승희는 "배가 꼴이 왜이러냐"고 힐책했다고. 참고로 최승희는 평소에 제자들에게 자기 발을 씻기게 할 정도로 제자들을 자기 하녀 부리듯이 마구 험하게 부려먹었다고 하는데, 하물며 공옥진은 정식 제자도 아니고 몸종으로 팔려온 신세였으니 그 고초가 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옥진은 무용을 훔쳐 배웠고[1], 최승희는 공옥진이 춤을 배우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춤을 조금씩 가르쳐 주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조선인에게 공옥진을 돈 2천원을 받고 다시 넘겨 버렸다. 다행히 태평양 전쟁 와중에 귀국할 수 있었다.
귀국 후 여러 극단을 전전하며 공연했다. 임권택 감독의 증언에 따르면 이 시기 판소리의 매력을 알려주려 한 먼 친척 어른과 찾은 기생집에서 공옥진의 공연을 보기도 했다고 한다. 에 한번 들어 간 적도 있는데 고기가 너무 먹고 싶어서 고기 구워먹는 등산객들에게 '병을 앓고 있는데 고기 먹는 게 최고라더군요'라고 하여 고기를 얻어먹고, 고기 냄새가 날까 봐 생쌀을 씹어서 고기 냄새를 감추려 했다고 한다.
이후 계속적으로 1인 창무극과 민속 무용 연기 모방춤, 곱사춤(병신춤) 등등의 공연으로 다양한 활동을 보였지만, 두 차례의 뇌졸중과 한 차례의 교통사고로 인한 건강 악화와 노환으로 2012년 7월 9일 향년 81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3. 업적


에 있어 우리 고유 민속 무용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는 게 놀라운데, 곱사춤의 명인이라 불렸음은 물론, 원숭이·퓨마 등 동물을 모의한 춤까지 선보여 전통 연예인이면서 예술적 표현력의 왕성함을 보이는 창작인이기도 하다.
특히 공옥진하면 빼놓을수 없는 것이 바로 '''1인 창무극'''과 '''병신춤(곱사춤)'''[2]이다. 1인 창무극의 경우 심청전·흥부전 등을 일인극으로 엮어 노래와 춤, 연기 모방춤으로 이끌어내는데 심청전의 경우 일생을 살아오면서 겪었던 평지풍파가 그대로 묻어내며 관객들을 웃고 울게 만들었다.
병신춤의 경우 본래 경남 밀양시 지방에서 오랫동안 농민들이 추던 춤을 연기하였는데 이후 매스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장애인을 희화화했다고 하여 그들에게 비판의 목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오히려 직접 그들에게 직접 다가가 자신이 병신춤을 공연한 것에 대한 뜻을 이야기하고 또한 그들 앞에서 직접 공연까지 했다. 그날 춤을 추는 사람, 보는 사람 모두 그 자리에서 그대로 울고 웃었다고. 참고로 공옥진 본인도 지체장애인으로 일생을 보낸 동생이 있었고, 평생 그 동생을 보살폈다고 한다.
그러나 병신춤이 비판받는 이유는 장애인의 몸짓으로 양반을 희화화한 춤이기 때문이다. 공옥진이 장애인 가족을 도왔다고 해서 병신춤이 장애인 비하라는 비판이 부적절한 것은 결코 아니다. 유래부터 양반 희화화일지언정 장애인의 몸짓으로 희화화한 춤인 건 맞는다. 즉 공옥진이 장애인 가족을 도운 것과, 엄밀하게 말하면 명백히 장애인 비하적인 병신춤을 춘 것에 대한 비판은 다른 문제다.[3] 물론 과거 국가기록물로서 영상으로 찍어 보존할 필요성은 있지만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이를 상업적 공연이나 대중들 상대로 자유롭게 추는 것이라면 전혀 얘기가 다르다.
공옥진의 1인 창무극은 전수 중인 수제자가 없어서, 결국 1인 창무극의 맥은 끊기고 말았다. 엄밀히 말해 제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일하게 남은 제자인 한현선(1인 창무극 전수자)도 1인 창무극이 아닌 판소리로 전공에 통과했다.
게다가 윗전에서는 이전부터 전래되어 오던 '전통 무용'이 아닌 공옥진 자신의 '창작 무용'이라는 이유로 인간 문화재 지정이 거부되었었다. 이 사실이 KBS 일요스페셜을 통해서 널리 알려지고 공론화되자 2009년 영광 군청 측에서는 전남도청에 문화재 지정을 다시 신청한 상태이며,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공옥진의 집에 직접 방문해 약속하는 등 긍정적으로 검토된 끝에, 결국 2010년 5월에 드디어 1인 창무극이 전남 무형 문화재에 등재되었다(관련 기사).
허나 아직 1인 창무극의 경우 '심청전' 하나만이 지정되었을 뿐이고, 나머지 1인창극 '흥보가'와 동물춤 - 병신춤 등은 아직도 문화재 등재가 안 됐다. 하지만 일단 공옥진 선생 본인이나 지지자들은 1인 창무극의 명맥이 제대로 이어지게 됐으니 이거 하나라도 지정된 것만이라도 다행이라고 하는 중이다.

4. 기타


2010년 6월에는 고향에서 대학교에 나가서 공연을 했는데, 그 치열한 데모판 한가운데에서도 공연하지 않은 대학이 하나도 없다고. 때문에 당시 대학에 다니던 사람들은 공옥진에 대한 기억이 확실히 박혀있다.
공옥진이 선보인 춤이 병신춤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본인은 병신춤이라는 명칭을 비하로 여겨 아주 싫어했고 곱사춤이라고 불리길 원했다. 공옥진의 동생은 벙어리, 조카는 곱사등이었으며, 곱사춤을 만들어 추게 된 것도 장애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라고 밝힌 바 있다. “사람들은 내춤을 병신춤이라고 하는데, 그거 아니여. 곱사춤이여.”
2NE1공민지가 공옥진의 조카손녀[4]인데, 집안 내력인지 '''춤''' 하나는 최고라는 평가를 듣는다. 하지만 공옥진과의 혈연 관계가 화제가 됐으면서, 공옥진이 기초생활수급자로 어렵게 지낼 땐 별 도움 없이 인증샷(…)만 찍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에 공민지의 나이(10대)가 나이인 만큼, 어린애를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좀 지나치다는 의견이 있고, 종손녀는 4촌으로 사실 꽤나 먼 친척이다. 무엇보다, 공옥진의 '''직계 가족(딸[5])'''은 만년의 모친을 정성스레 모셨다고 하는 만큼, '''화제가 된 집안 사람'''보다는, '''도리를 다한 자식'''의 모습에 찬사를 보내는 게 옳다고 본다.
공옥진의 조카 공명규[6]아르헨티나태권도 사범으로 갔다가 탱고를 배워 마에스트로라는 호칭을 얻었다. 국내에 돌아와 탱고 공연을 여러 차례 열고 텔레비전 출연도 했다. 공옥진과 같이 공연을 하기도 했는데 이때 조카와 탱고를 추기도 했다.

[1] 문틈으로 최승희가 춤을 추는 모습을 훔쳐 보고 따라 하다 걸리면 매우 심하게 맞았다고 한다.[2] 후술하겠지만, 공옥진 여사 본인은 곱사춤이라는 명칭을 선호했고, 병신춤이라는 명칭은 비하로 여겨 아주 싫어했다.[3] 그럼 탈춤도 장애인 비하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텐데 웬만한 사람들이 탈춤을 보고 안면장애인 비하라고 쉽게 연상되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병신춤은 누가 봐도 그게 아니다(...). 잘 모르는 외국인들조차 병신춤보고 끔찍하다는 반응을 보이지만 탈춤보고 비슷한 감정을 들어하지는 않는다.[4] 공옥진 여사의 남동생의 친손녀가 공민지이다.[5] 공민지에게는 종고모(당고모)뻘 된다.[6] 공민지 아버지의 친동생이다. 즉 공민지의 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