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참신앙

 

'''증산참신앙 역사'''
증산도
(안세찬·안중건)

증산도
혁명
(안병섭
안정주)

증산참신앙
(이석남·노상균·이흔순·정연준)

증산참신앙·증산선도 (노상균)
증산법륜도
(이흔순·정연준)

청주 김일환파
-
증산도 혁명 (안병섭·안정주)
증산도 (안중건)

증산참신앙(증산선도)


신옥단소
안원전의21세기담론
증산도혁명
1. 소개
2. 탄생 배경
2.1. 안세찬 사후 증산도의 형제의 난
2.2. 창교주 논쟁과 증산참신앙 태동
3. 증산참신앙의 성장과 안중건 형사고소
3.1. 이흔순, 정연준의 합류
3.2. 노상균의 교리 재해석과 성지답사
3.3. 증산도 교주 안중건 민·형사고소
3.4. 플랭카드 재판
3.5. 진혜원 교단의 발견과 도관vs마패 논쟁
3.6. 마패검증 패배와 2기 운영진 출범
3.7. 이흔순의 옥단소 사이트 개설
3.8. 대전 중앙도장 개창
4. 민·형사고소 패배와 증산참신앙의 분열
4.1. 검찰의 불기소 처분서
4.2. 노상균의 3대 대표 선출과 증산법륜도의 분파
4.3. 증산법륜도의 증산도교육문화회관 방문 사죄와 단체 해산
4.4. 신옥단소 출범
4.5. 김일환의 청주 도방 개창
4.6. 노상균의 실체가 유튜브를 통해 밝혀짐
5. 평가


1. 소개


주로 증산도에서 탈퇴한 신도들로 구성된 증산계통 종교다. 증산계통 종교에서 자리를 굳힌 증산도를 상대로 형사고소를 하여 교주 안중건을 경찰, 검찰에 출석시키는 등 제법 굵직한 일들을 해냈지만 분열로 인해 현 교세는 미미하다.

2. 탄생 배경



2.1. 안세찬 사후 증산도의 형제의 난


안세찬은 슬하에 7남 2녀를 두었고 대부분이 증산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으나 3남 안중건, 4남 안병섭(안원전), 5남 안정주가 교단 발전에 크게 힘썼다. 안세찬은 2011년에 3남 안중건에게 후계를 맡기고 2012년에 만 89세(91살)를 일기로 사망한다.

그러나 안병섭과 안정주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형 안중건에게 반란을 일으킨다. 당시 증산도 내부는 이른바 '대두목' 이자 '태극제'[1]로서 강증산ㆍ고판례와 더불어 거의 신앙의 대상이나 다름없던 안세찬이 개벽도 보기 전에 사망하자, 증산도 신도들은 큰 실망과 충격에 휩쌓였다.

안정주는 안병섭이 운영하고 있던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사이트의 증산도 게시판에 '혁명가'라는 닉네임으로 증산도를 혁명하겠다고 선포하고 증산도 신도들에게 동참을 호소했다. 증산도가 바뀌길 바라는 舊ㆍ現 신도들이 다수 있었으므로, 신도들이 받은 충격을 틈타 안정주는 잠시나마 일부 신도들을 끌어모으는 데 성공했다.

또한 증산도의 초창기 시절부터 신앙해온 노영균[2], 노상균[3] 형제가 안정주의 쿠데타에 가세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노상균은 증산도의 수석간부를 역임한 경력자이며 대내외적인 교리강사였으므로 증산도 내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2.2. 창교주 논쟁과 증산참신앙 태동


한창 기세등등하게 증산도의 문제점을 성토하던 2013년 4월 중반경, 안정주의 곁에서 쿠데타를 돕고 있던 장○○는 아내 신○○가 옛날 증산도 본부에서 근무하던 시절 증산도 초대교주 안세찬에게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다는 글을 양심선언 형식으로 올렸다.

안세찬의 성추문 소문은 2000년대 초, 증산도에서 갈라진 김준걸[4]의 풍류도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었다. 당시 풍류도는 자기네 주장을 입증하지 못해 주요 구성원 상당수가 처벌받았고 일부는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성추행 피해자의 남편이 직접 글을 올린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증산도 쿠데타는 안정주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2대 교주 안중건만이 아니라 초대 교주 안세찬까지도 공격의 대상이 되자, 안중건과 같은 핏줄인 안정주ㆍ안병섭이 증산도를 근본부터 개혁할 수 없다는 생각에 상당수가 공감했다. 안정주는 자신에게 불리한 분위기로 상황이 흘러감에도 불구하고 취중에 자신이 죽었으며 장례식은 모 병원이라는 장난문자를 보냈다. 사망문자 사건 때문에 역시 안 씨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광주 출신 이석남은 대학 시절부터 증산도를 믿었고 안세찬 사후 신앙에 회의를 느끼다 안정주의 쿠데타에 동참했다. 이석남은 안정주를 지켜보다 그 역시 증산도를 제대로 바로잡을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노상균 역시 같은 생각을 했으므로, 안면만 있던 둘은 의기투합하여 전국을 돌며 안정주에게 동조했던 사람들을 만나서 안정주를 버리고 새롭게 종교운동을 일으키자고 주장했다. 노상균과 이석남이 주도한 이 모임은 안정주에 동조한 이들의 80% 가량을 흡수했다. 처음에는 가칭 '참신앙 바로세우기 운동'으로 시작했으나, 곧이어 이석남을 대표로 하여 '증산참신앙'이라는 교명을 확정했다.

한편, 증산참신앙 태동으로 인해 증산도 내부신도는 물론 증산도에 등을 돌린 신도들에게도 인망을 잃은 두 형제는 현재 안병섭은 그대로 안원전의 21세기 담론에서, 안정주는 여러 번 사이트를 옮긴 끝에 증산도 혁명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안병섭ㆍ안정주 형제가 어떤 방향으로 증산도를 혁명하려 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증산도의 문제점을 폭로해 최대한 이탈자들을 모아 재단법인 증산도유지재단 접수를 노린 듯하다. 또한 두 형제의 시도가 실패했으므로 '증산도 쿠데타'라고 기술한다.


3. 증산참신앙의 성장과 안중건 형사고소



3.1. 이흔순, 정연준의 합류


경북 구미시에는 성금 수억 원을 증산도에 바친 이흔순이라는 약사가 있었다. 대구에 거주하는 정연준은 증산도 초창기에 입교해 30년 가량을 신앙한 경력자였다. 둘은 안세찬 사망 이후 형제의 난에 이어 증산참신앙의 태동에 이르기까지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다 노상균과 이석남에게 접촉해 증산참신앙에 합류했다.

이흔순은 증산도의 역사를 통틀어 성금을 많이 내기로 열 손가락에 들었던 열성 신도였고 경북ㆍ대구 지역에서 인망도 있어 영향력이 컸기에, 이흔순의 탈 증산도 선언은 노상균의 탈 증산도 선언에 이어 전국적인 파급을 일으켰다.


3.2. 노상균의 교리 재해석과 성지답사


노상균은 약 30년간 증산도를 신앙하며 대중강연과 교리연구를 해 왔다. 증산도의 강사였던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김형렬[5][6]의 묘소 참배를 시작으로 전국에 흩어져 있는 교단과 성지들을 답사하며 자신이 맹목적으로 믿었던 것들의 진위를 하나하나 조사하고, 그 내용을 증산참신앙 사이트에 동영상 또는 글로 게재했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증산법종교, 증산교 본부, 증산도, 대순진리회, 진혜원 등 증산계통 교단의 신앙의 대상은 조금씩 다르지만 강일순옥황상제미륵불 등으로 모시는 점만은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각 교단마다 신단에 모시는 영정은 모두 다르다. 노상균은 증산법종교에서 보관하는 강일순의 실제 사진을 바탕으로 범증산교단에 통용될 수 있는 표준 영정을 만들었다.

강일순 못지않게 고판례의 사진 또한 다양한데, 노상균은 선도신정경(仙道神政經)에 수록된 고판례의 사진을 바탕으로 최대한 실사에 가깝게 복원했다.

  • 강일순과 고판례의 무덤
증산도 도전 10편 142장은 강일순의 유골이 행방불명되었다고 서술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친딸 강순임이 1948년에 아버지 강일순의 유해를 수습하여 1952년에 영대(靈臺)를 짓고 그 안에 안치하여, 지금까지도 증산법종교 본부 영대에 있다. 증산법종교 참조.

증산도 도전 11편 424장에는 고판례의 유골을 용화교 신도 최정현이 교주 서백일의 지시를 받아 도굴했다는 언급까지만 나온다. 고판례의 뼈는 증산교 본부의 2대 교주 이정립이 애를 써서 제비산 기슭에 안장되었다.[7] 참고로, 고판례의 무덤에 세워진 비석 송덕문은 증산도 신도에게 살해된 홍성열이 지었다.[8] 이런 이유 때문인지 증산도는 고판례를 여자 하느님으로 모시는데도 불구하고 묘소 위치를 신도들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 교운 3변역사 재해석
강일순은 삼변성국[9], 즉 3단계로 판이 생기기라고 말한 바 있다. 증산도는 강일순의 말에 근거해 강일순 사망 이후 증산도에 이르기까지 100년의 역사가 1변 보천교, 2변 증산교를 거쳐 3변 증산도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증산교 교리에 따르면 강일순은 하늘과 땅을 뜯어고치는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통해 자기가 사망한 후 훗날 개벽에 이르기까지 특정한 때에 어김없이 반드시 특정 사건이 일어나도록 세계사 및 한국사의 흐름을 조정했다고 한다. 천지공사의 마디 또는 각론을 도수라고 부르는데, 증산계 종교들에 따르면 강일순은 제자들로 하여금 천상에서 인간세계에 영향을 미쳐 특정한 때가 이르면 반드시 도수가 실현되도록 각기 다른 임무를 부여했다고 한다. 증산도에서 주장하는 3변 역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증산도의 3변 교리
단계
1변
2변
3변
교단
보천교
증산교 본부
증산도
교주
차경석
이상호·이정립
안세찬
안세찬·안중건
주관자
차경석
안내성 + 문공신
도수
12점 도수
팔선녀 도수 + 정음정양 도수

증산도 도전 5편 204장를 보면 강일순이 개벽이후의 인류가 일부일처제로 살게되는 도수를 제자 문공신에게 맡겼음을 알 수 있다. 노상균은 위 성구에서 힌트를 얻어 증산도 도전 5편 204장이 삼변성국의 주관자 도수임을 주장했다. 차경석은 12개국에 아내 12명 두기를 원했고, 안내성은 그보다는 못하지만 아내 8명을 원했다. 훗날 안내성은 팔선녀 도수라 하여 아내를 많이 두었다. 문공신은 제일 젊은 나이임에도 '"하늘도 하나, 땅도 하나'"라는 이유로 아내를 한 명만 얻기를 원했다. 노상균은 이것이 차경석, 안내성, 문공신에게 각각 1변ㆍ2변ㆍ3변을 주관케 하는 공사라고 주장했고, 증산도는 물론 대순진리회와 통일교까지 포함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시각을 제시했다.

증산참신앙의 3변 교리
단계
1변
2변
3변
교단
보천교
증산교·'''증산도'''
대순진리회
통일교
증산참신앙
교주
차경석
이상호·이정립·'''안세찬'''
조철제·박한경
문선명
-
주관자
차경석
안내성
문공신
도수
12점 도수
팔선녀 도수
정음정양 도수

증산도뿐만 아니라 대순진리회와 통일교 등 종교가 통틀어 2변에 속하지만 2012년에 안세찬과 문선명이 사망하여 종료되었고, 안정주의 쿠데타를 계기로 탄생된 증산참신앙이 3변이라고 재해석했다. 노상균의 새로운 해석이 당시 증산종교계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 태을주의 태을천상원군太乙天上元君 주송법
강일순이 만든 주문인 태을주 주송법은 각 교단마다 조금씩 다른데, 유독 증산도만 '''태을천상원군'''을 '''태을천 상원군'''으로 읽는다. 즉 태을천太乙天의 상원군上元君이란 뜻. 증산도 초대 교주 안세찬은 1983년에 광주에서 전국신도들에게 태을 천상원군을 태을천 상원군으로 고쳐 읽으라고 지시했다. 증산도 이외의 모든 증산계통 교단은 '''태을 천상 원군''' 또는 '''태을 천상원군'''으로 읽는다. 이 문제는 노상균 이전에 안원전의 21세기 담론사이트에서부터 숱한 사람들이 지적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 용봉 독존석가불 재발견
웅장한 필체로 용龍과 봉鳳의 머리를 맞대어 용을 상단에 봉을 하단에 썼고 좌측에는 독존석가불獨尊釋伽佛[10]을 배치한 이 글씨는 강일순이 남긴 가장 유명한 글씨다. 이 글씨의 원본은 강일순이 박금곡에게 주었고, 박금곡은 천지개벽경의 저자 이중성에게 전했다. 홍성열은 이 글씨를 직접 찍어 범증산교사에 수록해 후세에 알렸다. 이후 이 글씨는 이중성이 오랫동안 가지고 있다가 김종용이란 사람에게 준 이후 현재는 행방을 알 수 없다.

대부분의 교단들이 용봉에만 촛점을 두었고, 독존석가불과 이 글씨를 전수받은 이중성에게는 주목하지 않았다. 현재 증산도태을도는 독존석가불 글씨는 빼놓고 용봉을 종통의 상징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특히 증산도는 용이 안세찬이며, 봉이 안중건이라는것이 내부 교리다. 노상균은 독존석가불이 합쳐진 용봉의 의미를 해석해서 발표했으며, 노상균이 대표로 있는 증산참신앙의 로고가 용봉 독존석가불이기도 하다.


3.3. 증산도 교주 안중건 민·형사고소


위 3변교운 재해석에서 알 수 있듯이, 증산참신앙은 안세찬 사후 2변 교운인 증산도가 끝나고 3변 교운의 주인공이 자신들이라 인식했다. 노상균과 이흔순 등 증산참신앙의 운영진들은 증산도에 대한 형사고소 소송단 모집을 공고하고 1996년부터 출간된 월간개벽지, 증산도 교리 서적, 안세찬·안중건 부자의 강의 동영상 등을 분석했다. 약 반년간의 준비 끝에 고소인 128명을 모아 2014년 11월 5일, 대전지방경찰청 앞에서 성명서 발표와 동시에 고소장을 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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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참신앙이 주장한 증산도 교주 안중건의 혐의는 다음과 같다.

  • 가. 살인교사[11]
  • 나.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등에 관한 법률위반 (사기)
  • 다.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등에 관한 법률위반 (횡령)
  • 라. 강간
  • 마.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집단, 흉기등 협박) 교사
  • 바. 사기
  • 사. 강제추행

곧 이어 이흔순은 23억에 대한 민사 소송도 시작했다.


3.4. 플랭카드 재판


증산참신앙 운영진 노상균 및 회원 강동훈이 증산도 신도가 일으킨 살인사건에 대해 증산도의 사과 또는 해명을 요구했다가 명예훼손 행위로 기소되었지만 완승했다. 홍성열 살인사건 참조.


3.5. 진혜원 교단의 발견과 도관vs마패 논쟁


2014년 겨울, 증산도 종도사 안중건은 강일순이 직접 만들었다는 '마패'를 2014년 동지대치성(2014년 12월 21일)을 맞아 공개하겠다고 선언했다. 강일순이 100년 후 대두목에게 전해질 신물을 제작했다니, 수많은 증산계 종교인들이 이목을 집중하였다. 2014년 동지절에 공개된 마패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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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통에 조화정(造化定)이라고 씐 날개 달린 말(馬)이 있고, 위에는 진혜원(眞慧院), 아래에는 남방객(南方客)이라는 글귀가 가로로 있다. 또다른 면에는 중앙에 관촉사 은진미륵과 비슷한 불상 부조가 있의 좌우에 정도광명생(正道光明生), 세존영세불(世尊永歲佛)이라는 글귀가 세로로 있다.
이 마패를 보고 증산참신앙 회원들은 분명히 강일순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만들었다고 확신했다.[12] 남방객ㆍ정도광명생이라는 글자를 단서로 조사하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미륵님 말굴레≫라는 책을 찾았으며, 이 책을 통해서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진혜원'''이란 또다른 증산교단을 발견했다. 진혜원 참조.


3.6. 마패검증 패배와 2기 운영진 출범


당시 증산참신앙 운영진들은 마패가 틀림없이 진혜원에서 만든 것이라 확신하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증산도는 마패를 공개하자마자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했다. 증산도 간부들은 마패냐 도관이냐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증산참신앙 운영진과 접촉해 진위를 가리자고 요구했다. 증산참신앙에서는 도관이 옳다면 증산도 종도사의 사퇴 및 대국민 사과 등을 요구했고, 증산도에서는 마패가 옳다면 소송 취하 및 사이트 폐쇄, 공개사죄 등을 요구했다.

그런데 증산참신앙 운영진들은 마패가 가짜고 도관이 진짜라고 너무도 확신한 나머지, 성분분석이나 연대측정, 또는 제작기법 등을 분석하는 과학적 검증이 아니라, 마패도관의 너비와 두께를 대조해 오차가 크면 마패가 옳고, 오차가 작으면 도관이 옳다는 단순대조법으로 진위를 가리기로 합의를 해 버렸다.

검증 결과, 도관과 마패의 치수 차이가 예상보다 컸기에 증산도의 승리로 끝났다. 과학검증을 하지 못한것이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마패검증 패배의 책임을 지고 노상균ㆍ이석남ㆍ이흔순ㆍ정연준이 운영진에서 사퇴했고, 김우재가 새롭게 대표를 맡되 김일환ㆍ이대학ㆍ조정국ㆍ배종우 등이 공동대표가 되었다.

증산도는 증산참신앙이 고소 취하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계룡산 인근 산장에서 열린 증산참신앙 행사에 난입해 약속 이행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증산도 간부 4명이 예배방해죄로 벌금을 받았다. 경찰도 마패검증의 결과를 알았지만 안중건의 혐의는 반의사불벌죄가 아니었기 때문에 계속 조사를 진행했고 2015년 4월 9일,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3.7. 이흔순의 옥단소 사이트 개설


2015년 2월 경, 이흔순은 독자적으로 '옥단소'라는 사이트를 만들었다. 이 사이트가 오픈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증산도 여자 간부였던 유○○과 강○○이 1990년대 후반에 서로 통화하는 녹음파일이 올라왔다. 당시 강○○은 미국으로 갔던 국제포교사인데 선배 신앙인 유○○에게 신앙의 괴로움을 토로했다. 그런데 그 괴로움이란 다름아닌 자신이 한국에 있을 당시 직접 겪은 성추문에 관한 내용이었다. 강○○의 생생한 육성 녹음에 많은 사람들이 성추문이 사실임을 확신했다.
그보다 더 충격적이게도 안세찬이 사망한 직후 찍었다고 추정되는, 입을 벌린 채 숨을 거둔 시신 사진이 옥단소에 올라왔다. 이 사진이 어떻게 유출되었는지는 현재도 불명. 사진을 가진 사람이라도 링크하지 말 것!!!

증산도는 진작부터 누가 옥단소를 만들었는지 파악했다. 이흔순은 자신이 옥단소를 만들지 않았다고 강변했지만, 증산도 간부들은 감을 잡고 구미에서 이흔순이 운영하는 약국을 여러 번 찾아와 항의했다. 그 와중에 이흔순은 로그인 실수로 인해 자신이 옥단소 운영자임이 발각되었다. #(댓글참조)


3.8. 대전 중앙도장 개창


증산참신앙은 2015년 9월 13일, 대전 중구 선화동에 도장을 개창했다. 그러나 이 날 직후, 증산참신앙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4. 민·형사고소 패배와 증산참신앙의 분열



4.1. 검찰의 불기소 처분서


2015년 9월 24일, 검찰은 안중건에 대해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증산참신앙은 항고에 이어 재정신청까지 시도했으나 모두 '''무혐의'''로 끝났다. 이후 이흔순 및 기타 여러명의 민사재판도 모두 패소했다.

형사고소가 무혐의로 끝나자 증산도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증산도는 명예훼손 혐의로 노상균ㆍ이흔순ㆍ이석남 등에게 민형사 고소를 걸었고, 2015년 12월 11일 경찰은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증산참신앙 대전중앙도장을 수색해 노상균의 컴퓨터 등을 압수했다.
기사, 정정보도


4.2. 노상균의 3대 대표 선출과 증산법륜도의 분파


민,형사고소가 모두 패소한 분위기 속에, 2016년 1월 조직쇄신을 위한 3대 대표를 선출했다. 증산참신앙의 회원 상당수가 모인 가운데 대표 후보로 노상균ㆍ정연준이 나섰으나 정연준이 사퇴해서 3대 대표로 노상균이 뽑혔다. '''그런데 이흔순ㆍ이석남ㆍ정연준 등이 절차를 승복하지 않고''' 격렬히 반발해 증산참신앙은 분열의 위기에 몰렸다.

당시 증산참신앙 사이트 소유자는 이흔순이었기에, 그는 일방적으로 노상균 및 노상균에게 '''동조하는 이들을 증산참신앙에서 퇴출'''한다고 공지했다. 곧이어 단체명을 '''증산법륜도'''로 바꾸고 증산참신앙의 도장을 점유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사업장으로 무단 등록해 허위로 사업자등록증을 발급받았다. 증산참신앙은 이에 반발해 민원을 제기했고, 세무서는 증산법륜도의 사업자등록증을 말소하였다.


4.3. 증산법륜도의 증산도교육문화회관 방문 사죄와 단체 해산


증산법륜도가 분파된 이후 이흔순ㆍ이석남이 피소된 재판은 매우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증산도는 이흔순ㆍ이석남의 부동산, 동산을 가압류하였다. 2017년, 결국 이흔순ㆍ이석남ㆍ정연준ㆍ김일환 4인은 증산도교육문화관을 방문해 무릎을 꿇고 사죄문을 낭독하며 자신들은 노상균에게 속았으며 증산참신앙ㆍ옥단소에서 주장했던 내용들이 전부 허위이니 용서해달라고 사죄했다. 증산도는 사죄동영상의 편집본을 2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 2달간 유튜브에 올리고 증산법륜도의 공지로 띄우라고 요구했다. 결국 동년 3월 31일을 홈페이지를 삭제하였으나, 동년 6월, 또는 7월 초에 소리소문 없이 다시 홈페이지를 개설하였다.

증산법륜도가 해산되자 증산참신앙은 교명을 '증산선도'로 변경하되, 당분간 '증산선도'와 '증산참신앙'이란 교명 2개를 동시에 쓴다고 발표했다. 웹에서 증산참신앙ㆍ증산법륜도 등 단어로 검색하면, 노상균의 증산참신앙이 증산법륜도에서 갈라졌다고 잘못 기재된 글들이 많다. 증산참신앙을 지탱해온 교리가 상당수 노상균에게서 나온 점, 증산법륜도가 초기의 주장을 모두 포기하고 증산도교육문화회관을 찾아가 무릎 꿇고 사죄한 것, 분열되기 이전 합심하여 세운 도장이 증산참신앙의 차지가 된 것, 증산법륜도 사이트 및 조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볼 때 '''정통성은 증산참신앙에 있다고 할 수 있다.'''


4.4. 신옥단소 출범


증산법륜도 운영진들이 모두 굴복했으나, 미국에 거주하는 마달숙은 포기하지 않았다. 마달숙은 증산도에 사죄함을 용납할 수 없었으므로 증산법륜도 운영진들과 마찰을 빚다가 제명당했다. 마달숙 역시 미국 소재의 증산도 법인에 고소를 당했으나 미국은 한국과 법체계가 다르므로 증산도의 공격이 쉽게 먹혀들지 않았다. 對증산도 재판에서 나름 개가를 올리던 마달숙은 신옥단소 사이트를 열어 자신의 재판상황을 공유하고 증산참신앙 사이트에 올라왔던 글들을 다시 게시하며 증산도를 비판하고 있다.


4.5. 김일환의 청주 도방 개창


증산참신앙 2기 공동대표이자 증산법륜도 부대표였던 김일환은 독자적으로 청주에서 도방을 개창하고 충북, 경기지역 신앙인들을 어느 정도 흡수했다.


4.6. 노상균의 실체가 유튜브를 통해 밝혀짐


사회 정의를 외치며 많은 사람들을 선동하던 노상균의 실체가 유튜브 밝혀졌다. 그 동안 노상균이 유튜브에 올린 교리 해석이 모두 자신이 대두목, 노천자임을 말하기 위한 큰그림이였으며, 그 큰그림은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였음이였다. 유튜브가 올라가자 증산참신앙의 몇 안되는 남은 소수의 인원들은 노상균을 증산참신앙에서 재명하였다. 이후 증산 참신앙은 '증산선도'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나, 큰 의미 없는 일이다. 증산참신앙은 노상균이 증산도의 비리를 주장하며 노상균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지고 운영된 모임이었으나, 노상균의 실체가 들어남으로써 이 모임의 모든 명분은 사라졌다.

5. 평가


한때 웹에서 강일순 관련 자료를 검색해보면 상당수가 증산도 관련 자료였지만 증산참신앙의 탄생 이후 판도가 바뀌었다. 증산참신앙은 증산도의 진리독점에 맞서 상당히 많은 자료를 축적했고 증산도 도전의 주요 성구의 출처인 증산천사공사기ㆍ대순전경ㆍ천지개벽경ㆍ선정원경 등을 세상에 알린 공이 크다. 한때 대순진리회ㆍ증산법종교ㆍ증산교 본부ㆍ오성산 교단 등 증산계통 교단이 증산참신앙에 주목했고, 증산계통 교단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강일순의 원형 말씀 및 최초 기록을 상당수 밝혀내어 그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1] 증산도는 동양우주론의 무극,태극,황극의 삼극설을 차용해 무극은 강증산과 고판례, 태극은 안세찬, 황극은 안중건이라고 내부적으로 가르친다. 안세찬 영결식 당시 관에는 '태극제 안운산 종도사'라는 명정이 덮혀 있었다. 증산도 참조.[2] 경희대 졸, 강증산이 '알음은 강절의 지식이 있나니'라고 평했던 소강절의 책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의 번역자.[3] 1961년생, 성균관대 졸, 현 증산참신앙 대표. 한때 증산도 산하 상생방송의 메인 강사였다.[4] 1970년생, 호 단예, '大道에 이르는 書' 등의 저자[5] 1862~1932, 호는 태운장太雲長. 강일순의 수석제자. 증산도의 증산도 도전, 대순진리회의 전경 등 주요 증산계통 교단 경전의 뿌리되는 '대순전경'의 저자 이상호에게 강일순의 행적을 증언해주었다. 불교로 말하면 아난다쯤 된다고 볼 수 있다.[6] 참조[7] 서적 '용화도장지킴이' 참조[8] 홍성열 살인사건 참조.[9] 삼변성도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삼변성국이 맞다.[10] 이때 한자가 獨尊釋迦佛이 아니라 獨尊釋伽佛이다. 가(迦/伽)자가 다른데, 석가모니의 한자표기에서는 주로 迦를 쓰긴 했으나 伽를 쓴 사례도 없잖이 있다. 예를 들어 고려시대 부석사원융국사비(浮石寺圓融國師碑)에서도 釋伽라는 글자를 사용하였으며, 조선시대 용재총화에서도 釋伽란 표기를 몇 번 사용하였다. 1921년에 나온 잡지 개벽 제14호에 실린, 임노월(林蘆月)이 쓴 '미지의 세계'란 글에서도 釋伽란 표기를 사용하였다. 강일순이 釋伽佛이란 표기를 사용해도 무슨 깊은 이유는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11] 홍성열 살인사건 참조[12] 일단 '마패'의 제작기법이 절대 조선시대 대장간에서 가능한 수준이 아니다. 또한 가로로 씐 글귀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 조선시대식이 아니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 현대식이었다. 이러니 구한말 사람인 강일순이 만들었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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