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

 


'''문선명'''
文鮮明 | Sun Myung Moon
[image]
'''생애'''
1920년 2월 25일[1] ~ 2012년 9월 3일[2] (향년 92세)
'''출생지'''
일제강점기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
'''사망지'''
대한민국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송산리 460 청심국제병원[3] 8층 특별병실
'''매장지'''
대한민국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송산리 14-1 천정궁박물관 외부 본향원[4]
'''국적'''
[image] 일제강점기 조선
[image] 대한민국[5]
'''본관'''
남평 문씨 의안공파[6]
'''아명'''
용명(龍明)
'''학력'''
오산보통학교(졸업)
정주공립보통학교#(졸업)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졸업)
와세다대학 부설 고등공학교# 전기과(졸업)
'''입국금지'''
[image] 일본 1978년 11월 10일 ~ 1992년 3월 26일
[image] 영국 1981년 7월 7일 ~ 2005년 11월
[image] 독일 1995년 11월 9일 ~ 2007년 6월 12일
서유럽 14개국(솅겐조약)[7] 1995년 ~2007년
'''부모'''
부 문경유(文慶裕)
모 김경계(金慶繼)
'''형제'''
7남 6녀. 장녀 미상,[8] 차녀 미상, 장남 문용수(文龍壽), 3녀 문효순(文孝淳), 차남 본인, 4녀 문효심(文孝心), 5녀 문효수(文孝壽), 6녀 문효선(文孝善), 3남 문용호(文龍浩), 4남 문용관(文龍官), 5~7남 미상
'''자녀'''
10남 7녀
문성진, 문희진, 문예진, 문효진, 문혜진, 문인진, 박사무엘[9], 문흥진, 문은진, 문현진, 문국진#s-2, 문권진, 문선진, 문영진, 문형진, 문연진, 문정진
'''종교'''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신체'''
177cm (추정)[10]
'''서명'''
[image]
1. 개요
2. 일생
3. 주요 활동
4. 가족관계와 후계 구도
4.1. 비공식 자녀
4.2. 공식 자녀
5. 학위 및 수상
6. 여담
7. 관련 문서
8. 관련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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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통일교의 창시자'''. 언론 등 대외적으로는 주로 '총재'라는 호칭을 쓴다.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출생. 아명(兒名)은 용명(龍明).
박정희 정부의 코리아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미국에서 특히 더 유명세를 치렀다. 해외에서는《자칭 메시아이자 창교자인 종교 운동가》(뉴욕타임즈),#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방대한 종교 및 기업제국을 창건하다》(워싱턴포스트),#《1970년대 미국을 휩쓴, 가장 논란이 되는 종교지도자》(LA타임즈), 《수천 쌍 합동결혼식의 주재자》(가디언), 《거대 기업제국의 창시자》(TIME)등으로 표현되는 기사들이 나온다. 심지어 토마스 해리스의 소설 한니발 극초반에 "이 인간에게 FBI가 건물을 싸게 임대했네 어쩌네"하는 구절이 나온다.
서양에서 문 목사(Rev. Moon)라고 하면 대부분 문선명을 뜻한다.
어찌보면 자수성가의 끝판왕. 6.25전쟁 직후 부산에서 밥 구걸하며 하꼬방 살이를 하던 사람이, 전 세계 몇 백만명의 추종자를 두고 수많은 기업들을 이끌며 으리으리한 궁전에서 살다 죽었다.
참고로 이그노벨상 경제학상의 수상자이기도 하다. 합동결혼식이 경제적 가치를 인정 받았다고.[11]

2. 일생


[image] [image][12]
1920년 1월 6일[13]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德彦面) 상사리(上思里)의 '문촌(文村)'으로 불리던 남평 문씨 의안공파 집성촌에서 문경유(文慶裕)와 김경계(金慶繼)의 6남7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본래 대대로 유교집안이었으나, 열 살 무렵, 그의 형인 장남 문용수(文龍壽)와 누나인 3녀 문효순(文孝淳)이 정신질환을 앓아 치유를 위하여 가족들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였고, 정주군 덕언면 덕흥동의[14] 덕흥장로교회(德興長老敎會)를 다니며,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문용수와 문효순의 정신질환은 이후 완치되었다.
그의 집안은 조부모 때만 하여도 꽤 부유하였지만, 그의 작은할아버지 문윤국(文潤國)이 개신교 목사이자 독립운동가로 집안의 전 재산을 독립운동자금으로 헌납하며 평생을 독립운동에 매진하여 가세가 점점 기울어갔다.
문윤국은 당시 이승만과 친밀한 사이였다고 한다. 또한 정주군 일대에서 3.1 운동을 주도하여 2년간 옥고를 치른 바 있다.#
열여섯 살의 문선명은 1935년 4월 17일 부활절 새벽, 정주의 묘두산(猫頭山)에 올라 기도 하던 중 문선명 앞에 예수가 나타나, 예수가 문선명에게 "고통받는 인류 때문에 하나님이 너무 슬퍼하고 계시니라. 지상에서 하늘의 역사에 대한 특별한 사명을 맡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물론 본인 피셜. 이 사건을 계기로 문선명은 자신이 메시아라고 자각했다고 한다.
그는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세 곳의 서당을 다녔다.[15] 1934년, 15살 때 사립 오산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이후 졸업하였다. 1935년 정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38년 졸업하였다. 그런데 1938년 3월 25일,[16] 그 졸업식에서 문선명이 졸업생 대표로 소견발표를 하게 되었다. 문선명은 경찰서장, 군수, 면장 등이 모인 자리에서 "일본인들은 하루빨리 보따리를 싸서 일본으로 돌아가라."며 일제의 식민정책을 비판하는 연설을 '''일본말로''' 했다. 때문에 그 이후부터 문선명은 일제의 감시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1938년 경성상공실무학교[17] 전기과에 입학하여 1941년 졸업하였다. 재학 때에는 서울 동작구 흑석동의 하숙집에서 하숙을 했다. 그런데 그 하숙집의 주인인 이기봉(李奇峰)은 당시 용산구 서빙고동의 서빙고오순절교회[18] 다니고 있었고, 문선명도 그 교회에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됐다. 또한 이기봉의 어머니인 강숙경(康淑卿)은 종로구 내자동의 자택에서 '내자동 새예수교회'를[19]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문선명은 내자동 새예수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이 때 김백문[20]이 교회에 문선명과 같이 다녔다. 그러던 1939년 강숙경은 흑석동 명수대에 교회 건물을 지었고, '조선예수교회 명수대예배당'이라는 간판을 걸었다. 이 교회 신축 과정에 문선명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교회 완공 후 문선명은 주말마다 그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1941년, 21세 때 일본 와세다대학 부설 고등공학교(高等工學校) 전기과로 유학을 가 1943년 9월 30일 제 25회로 졸업하였다. 유학을 가기 위해 처음 창씨개명을 하였었다. 창씨개명한 이름은 에모토 류메이(江本龍明). 유학 중 한인 친구들과 '한인유학생회'(밀칭: 엽전회)라는 비밀 결사단체를 만들어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일왕 암살 계획을 도모하는 지하활동을 벌이기도 했다.이 때 문선명은 자주 경시국 도츠카(戸塚)경찰서[21]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1943년 10월 중순에 문선명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문선명은 약혼자이던 최선길과 결혼하였고, 이전에 하숙하던 서울 흑석동의 이기봉의 하숙집에 신혼집을 차렸다. 당시 문선명은 서울 용산구 한강로에 있었던 '가시마구미(鹿島組)'라는 토목건설회사에서 근무했다. 그러던 1944년 10월, 서울 흑석동에 살고 있던 문선명의 집에 경기도경찰부 특고(特高) 형사들이 들이닥쳐 문선명을 체포했다. 문선명은 '독립운동을 한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경기도경찰부 경성본정(本町)경찰서'로[22] 연행되었다. 당시 문선명의 측근이던 곽노필의 증언에 의하면, 공산주의를 신봉하던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의 한 학생이 징병을 거부하며 조선으로 도망쳐왔다가 경찰에 붙잡혔다고 한다. 그 학생이 취조 중 문선명의 이름을 언급하여 문선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고 한다. 문선명은 4개월간 경성본정경찰서에 '구류'되어 1945년 2월 석방되었다.
해방 후 1945년 10월 하순, 문선명은 고향 정주에 내려갔고, 서울에서 일하고 받은 월급으로 과일을 샀다. 그런데 뜬금없이 위조지폐를 썼다고 고발을 당했다. 그래서 정주경찰서 곽산지서에서 일주일 가량 유치되었다가 풀려났다.
1945년 10월 4일, 자신이 메시아라는 말을 알아줄 사람들을 찾아, 당시 한국에서 가장 신령하다고 알려진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위치한 김백문(金百文)의 '이스라엘수도원'[23]에 들어가 6개월간 봉사생활을 한다.
이렇게 들으면 김백문은 문선명보다 대단히 위면서 나이 많아보이나, 당시 문선명은 25세, 김백문은 28세였다. 즉 당시 둘 다 20대 청년이었으며, 김백문과 3살 차이였다. 또한 둘은 해방 전에도 서울 내자동의 '새예수교회'에 같이 다니던 구면이었다.
결국 1946년 3월 초, 김백문이 문선명에게 "솔로몬왕의 영광으로 오신 분"이라며 증거했다카더라. 그러나 김백문의 신도들 중 문선명의 설교를 들으러 빠져나가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자, 김백문이 "내가 바로 성령상대주님이다.'라며 문선명을 내쳤다.
문선명은 이스라엘 수도원에 있는 동안 "평양의 어떤 정신 나간 할머니가 자기가 하나님의 부인이라고 한다더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 얘기를 듣고 문선명은 평양에 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또한 문선명은 "평양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계시도 받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수도원을 나온 문선명은 당시 소련군정의 평양으로 갔다. 당시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24]으로 불릴 정도로 기독교 뿌리가 깊은 곳이었다.
문선명은 1946년 6월 6일 평양에 도착하여 재림주 타이틀을 걸고 우선 길거리 전도부터 시작했다. 그렇게 신도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그러던 중 기존 기독교 목사들이 "허호빈의 복중교와 유사한 단체의 지도자이며, 이승만의 첩자"라며 문선명을 공산당국 경찰에 고발했다. 그리하여 8월 11일 문선명은 북한 경찰에 체포되었다. 문선명은 유동보안서에서 고문당하고 평양 대동보안서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11월 21일에 무죄로 풀려났다.
대동보안서에서 풀려난 후, 문선명은 1947년 자신이 '하나님의 부인'이라 주장하는 평양의 '박을용'에게로[25] 갔다. 문선명은 박을용의 옆집으로 이사갔고, 40일간 박을용의 집을 왕래하며 김백문 때처럼 봉사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박을용이 문선명을 "하나님의 종(從)의 종,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양자, 하나님의 서자, 하나님의 아들, 하늘나라의 총리대신(總理大臣), 예수님, 하나님의 대상실체"라며 총 8번을 문선명을 증거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문선명이 박을용에게 "그럼 이제부터 나한테 경배하고, 당신이 나를 따르라"고 했다. 그러나 박을용은 이를 거부하며, 되려 문선명에게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그렇게 문선명은 박을용으로부터 빠져나와 다시 전도생활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 또 다시 83명의 기존 기독교 목사들이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하며, 부녀자의 재산을 갈취하며, 이승만의 스파이다."라며 북한 경찰에 고발해 1948년 2월 22일, 평양내무서에 구금되었다. 이후 4월 7일 공판이 열려 '사회질서문란죄'로 5년형을 언도받아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었다.
5월 20일 흥남 감옥으로 이감되었다가, 2년 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UN군의 폭격으로 감옥이 무너져 탈출하였다. 전쟁통에도 평양에 다시 가서 신도들과 같이 남하하려 했으나, 신도들은 모두 문선명을 쌩깠고, 김원필(金元弼)과 박정화(朴正華), 이 제자 2명만이 따랐다.[26] 이리하여 3명이 자전거 하나만 갖고 부산까지 같이 남하했다.
부산에 도착한 문선명은 흙으로 매우 아담한 토담집 을 지었다. 문선명은 그 토담집 안에서 통일교 최초의 교리서인 '원리원본'을 직접 연필로 갱지에 저술하였다. 1952년 5월 10일까지 약 1년 동안 총 690여 쪽을 저술하였다. 그 후 1954년 5월 1일에 서울로 올라가 정식적으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이 단체가 바로 우리가 아는 통일교이며,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이전 명칭이다. 이 이후의 문선명의 생애는 통일교의 역사와 거의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문서의 역사 항목 참고.
1955년 7월 4일, 장충동의 통일교회에 갑자기 형사 2명이 나타나 그곳에 있던 문선명을 체포해갔다. 문선명은 '병역법 위반과 불법 감금 및 간통'의 혐의로 서울중부경찰서에 구금됐다. 며칠 후 김원필, 유효원 등 문선명의 제자들도 잇따라 경찰에 체포되었다. 7월 13일 서울지검에서 문선명과 제자들은 전원 기소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9월 20일 서울지방법원에서 문선명과 제자들의 재판이 열렸다. 재판에서 '불법감금 및 간통'은 사실근거가 없어, 21일 결심공판에서 '병역법 위반 및 징발특별조치령 위반' 혐의만 인정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던 10월 4일 언도공판이 열려 문선명과 제자들은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11월 21일 판결공판에서도 검찰공소는 기각되었다.
1981년 10월 15일, 미국 뉴욕 검찰청은 통일교의 헌금에 붙어야 할 소득세 16만 2천 달러를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탈세 혐의로 당시 미국에 있던 문선명을 기소했다.# 문선명은 법원에 수차례 자진출두하여 '모든 미국의 종교인들이 소득세를 안 내는데 자신에게만 소득세를 부과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기소가 부당함을 주장했다. 그러나 1982년 5월 18일 문선명은 뉴욕 연방지방법원에서 징역 18개월과 벌금 2만5천 달러를 선고받았다. 이에 문선명은 미국 대법원 3심까지 갔으나, 모두 패소하여 그대로 형을 받게 되었다. 1984년 6월 26일 문선명은 미국 국회 상원 헌법소원위원회의 청문회에서 당당히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4년 7월 20일, 미국 코네티컷 주 댄버리의 댄버리 연방교도소에 수감되었다. 투옥 중 기독교 우파단체 Moral Marjority의 수장 Jerry Lamon Falwell 목사, 연합감리교회[27] 목사이자 미 남부기독교리더십컨퍼런스[28]의 회장인 Joseph Echols Lowery 목사, 미국침례회[29], 미 전국교회협의회,[30] 미 전국흑인가톨릭성직자회[31] 등 미국의 40여개 교단의 '''기독교 목사들이''' 문선명의 무죄와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제 210회 미국 독립기념일이던 1985년 7월 4일, 댄버리에서 출소하여 뉴욕 변두리의 '브루클린 하프웨이하우스'로 이감되었다. 이후 모범수로 선정되어 5개월 감형을 받아 1985년 8월 20일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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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care if he's turned 'em all into moonies! Just get him out of here before he calls a mass wedding!"
해석: "그가 (이 감옥의) 모두를 통일교인으로 만들었다해도 상관없어! 그가 합동결혼식 얘기를 꺼내기 전에 어서 그를 내보내줘!"

뉴욕 포스트의 1985년 7월 5일 만평. 댄버리 교도소의 문선명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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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19일, 문선명과 그의 가족들 16명이 탄 헬기가 경기도 가평군의 장락산 부근에서 불시착하여 폭파되었지만 아무런 인명피해도 없었다.
2012년 8월 15일, 문선명이 폐렴과 그에 따른 합병증으로 상태가 위독하여 중환자실에 입원하였다.# 이후 8월 31일 현대의학으로는 낫기 어렵다는 진단이 나와# 결국 9월 3일 오전 1시 54분 사망하였으며 통일교 총본산격의 궁전인 천정궁의 '본향원'이라는 산소에 시신이 안치되었다. 향년 만 92세.

3. 주요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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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사진은 윤기복 조평통 부위원장의 대답이다. 만수대 의사당에서 북한 최고위 간부들 모아놓고 하나님 믿으라고 하는거 보면, 배짱만큼은 정말 두둑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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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의 만남.
'''지금부터 등장하는 문선명의 방북(불법월북행위)에서의 일화들은 문선명의 자서전에만 나오는 내용으로, 기타 객관적인 매체에서 이를 다룬 기록이 전혀 없으므로 교차검증이 불가능하여 사실인지 허풍인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문선명의 방북은 불법적 월북이다. 따라서 아래 내용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는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1990년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을 만난 바 있었고, 1991년 11월 30일 문선명이 정부의 허가 없이 불법적으로 북한을 방문해 여동생을 상봉한 뒤 흥남 마전 주석공관에서 김일성과 금강산 개발투자 등을 협의하려고 회담을 열었다고 한다. 이때 문선명이 북한의 국회격인 만수대 의사당에서 노동당 간부를 비롯한 여러 북한 요인들을 앞에 두고서 "남쪽에 심어놓은 고정 간첩 2만 명을 전부 자수하도록 지령하라. 그러면 내가 하나님 주의로 그들의 사상을 바로잡아 민족을 위해 헌신하도록 만들겠다.", "한국전쟁은 북침이 아닌 남침이다. 전 세계 앞에 남침을 사과하라.", "주체사상을 포기하고 하나님주의를 해야 한다.", IAEA 핵협정에 조인하라.", "이산 가족 상봉시켜라." 라는 발언을 그것도 탁자를 내리치며 거의 호통조로 연설했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문선명을 친절히 안내해주던 김달현 부총리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고 다른 북한 간부들이 야유를 보내는 등 분위기가 상당히 안 좋았다고.
이에 대해 같이 갔던 박보희 세계일보[32] 사장이 김일성과 만나는 건 물건너갔다고 체념하자 문선명은 도리어 내가 이런 말 했다고 김일성이 안 만나겠다면 쩨쩨한 거지. 그래서 안 만나겠다면 만날 필요 없어."라고 대꾸했는데, 김일성은 김달현 부총리로부터 이 발언을 보고받자마자 껄껄 웃으며 "저런 배포를 가진 사람이라면 만나야지." 라면서 문선명과 단독 회동을 했고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친해졌다. 특히 이때 오찬도 겸했는데 김일성이 내놓은 건 언감자국수. 두 사람 다 고향이 평안도였는데[33] 언감자국수가 평안도 음식이라 서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잘 먹었다고.
아무튼간에 1994년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국가보안법을 무시하고 남측에서 유일하게 조문을 보낸 단체 역시 통일교였다. 당시 세계일보 회장 박보희를 베이징을 거쳐 북한으로 보내려했는데 주중 북한 대사관이 조문을 안 받는다며 난색을 표하고 이를 문선명에게 보고하자 문선명은 "뭐라고? 조문을 안 받아? 내가 보내는 사람은 달라. 끝끝내 조문을 안 받는다고 하면 압록강헤엄쳐서라도 들어가 조문해!"라며 호통을 쳤다고 주장한다.
결국 주중 북한 대사가 김정일에게 이를 보고했고 김정일은 통일교 관계자들을 잘 모셔오라고 얘기해서 조문이 성사되었는데, 이 때문에 박보희는 나중에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 위기에 놓이면서 5년간 해외에서 유랑(...)생활을 하다가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야 겨우 입국할 수 있었다고. 아무튼 이래저래 북한과 사이는 꽤 좋은 편.
한편 시사IN에서는 1994년 북핵위기 때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해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 낸 것이나, 2000년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던 것이나 노무현 대통령2007 남북정상회담을 열었을 때도 통일교가 훨씬 전부터 갖고있던 대북 핫라인의 도움을 받았다는 기사를 내었다.링크
2011년 김정일 사망 당시 북한에 조화를 보냈고, 2015년 8월 30일 김정은이 문선명의 3주기를 앞두고 유족들에게 애도의 메시지를 보냈다. 참고로 김정은은 문선명의 사망 당시에도 조전을 보낸 바 있다. 2019년 지금까지도 북한 고위 관료나 통일교 고위 공직자가 죽으면 서로서로 죽은 당일 바로 조문을 주고 받는다. 참고로 조문에서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아시아태평양평화통일위원회'라고 칭하며, 통일교는 '세계평화'''련'''합'이라고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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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 4일 펠레와 찍은 사진. 웃기게도 1994년 김일성이 곧 죽을 거라고 예언했다며 월간조선이 대문짝만하게 보도한 무속인 심XX이 1995년 문선명이 오래 안 가 곧 죽을 것이라고 책에서 주장했는데 17년이나 걸렸다. 2003년 이라크 전쟁 후 '종교 화합'을 목적으로 '이스라엘 평화대행진'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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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2월 14일 경기 가평군 설악면 청평수련원에서 열린 '평화의 왕' 추대식. 이날 참아버님과 참어머님으로 진정한 만왕의 왕으로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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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15일 '2005 피스컵코리아' 개막전에서 박근혜와. 이 사진이 후일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진 이후 세계일보최순실 단독 인터뷰건과 엮여 - 일당과 통일교의 유착 의혹이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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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0월 30일 경기 용인시 '''맥콜공장'''에서 열린 그 유명한 합동결혼식(의 대기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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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의 90살 생일 때는 김정일이 생일선물로 90년근 산삼 등 선물을 보내주었다.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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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모르겠으나 김대중 대통령이 통일교 행사에 축하 영상을 보냈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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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 사망 당시 현직 대통령이던 이명박은 장례식장에 근조화환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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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모르겠으나 전두환이 문선명 장례식장에 근조화환을 보냈다. 사진 오른쪽. '제 12대 대통령 전두환'이라고 써 있다. 2012년 당시 국회의장이던 강창희도 껴있는 걸 볼 수있다.

4. 가족관계와 후계 구도


처 한학자와의 사이에서 '''7남 7녀''', 거기다 사생아 3명까지 하면 자식이 '''10남 7녀'''로 '''17명'''이나 된다. 그러나 문선명이 설령 우주대왕이라 하더라도 자식농사만큼은 기가 막히게 못 지었다. 10남 7녀의 자식 중 대를 이을 사람이 없어 손주 중에서 후계자를 찾고 있다.
문선명은 40세인 1960년에 17세인 한학자와 결혼했다. 이는 완전히 키잡[35] 수준에 더 충격적인 건 이 결혼은 재혼이었다. 전처 최선길과의 사이에는 아들 문성진 1명이 있다. 허나 문선명의 선교활동 몰입과 북한에 있을 때 탄압으로 인한 문선명의 로동수용소 수감이 원인이 되는 장기간의 별거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1953년에 전처의 가족들에게서 강제로 이혼을 당했다. 이는 사실 전처의 (기독교 목사인) 오빠의 강한 압력 때문. 근데 나중에 전처 및 전처 소생의 아들도 통일교 신자가 된다. 더구나 결혼 이후 한학자를 몇 년 동안 가혹한 환경에서 고생시키는 것을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물론 부부는 서로 배려하는 것이며 이렇게 안 하면 통일교 신자들 사이의 여론이 좋지 않았을 것이라는 등의 발언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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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의 가족사진.
문선명과 한학자 사이에는 슬하에 총 7남 7녀가 있었다. 문선명의 아들 중 장남인 문효진은 마약 논란 등 사생활에서 많은 문제를 보이면서 첫 부인 홍난숙과 이혼했는데, 홍난숙이 미국에서 '''문선명 가족과 통일교의 내부 문제를 고발하는 수기를 출간해''' 통일교가 큰 타격을 입으면서 자연스레 후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여담으로 문효진은 음악, 특히 헤비메탈에 재능이 있어 평생 만 곡 이상을 작곡했다는 말이 있고, 몇몇 곡은 한국 헤비메탈 음악 사상 최고의 곡들이라고 칭송받기도 한다. 음악적 재능 하나만큼은 진짜배기였던 셈이다.실제로 상당히 좋다. 들어보자. 전처 홍난숙이 미국 방송과 인터뷰한 영상을 보면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 뺨치는 충공깽이다'''.
차남 문흥진은 20세가 되기도 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36], 자식 중 그나마 가장 정신상태가 올곧았던지라 문선명은 이 아들을 지극히 사랑하고 아껴했었다.
이후 이미 세계재단 리더로 사업경영 수완이 좋고 처가가 통일교 재단 내에서 위치가 높았던 3남인 문현진이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문현진은 문선명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하며, 통일교라는 종교 자체를 부정하여 사실상 파문당했다. 이제 사이즈 불릴 만큼 불렸으니 종교적 아이덴티티로 헛짓거리 하지 말고 재벌로 정체성을 굳히고 나가자고 하다가 불경죄를 쳐맞은 셈이다. 문현진은 파문당한 김에 통일교 재산을 최대한 많이 싸들고 통일교를 박차고 나갔다. 당연히 우주황제 맥콜킹 참아버지 문선명은 대노했고(...) 이 일은 '''"가족의 가치"'''를 교리상에서 강조하는 통일교에 꽤나 상징적인 타격을 입혔다. 그 뒤로 기존 통일교와 문현진 측이 재판으로 치고 받고 싸우는 중이다.
결국 통일교는 7남인 '''문형진'''을 종교 담당 후계자로, 4남 '''문국진'''을 기업 담당 후계자로 각각 삼았다.# 그리고 문국진은 문현진의 UCI재단과 여의도의 2조짜리 땅뙈기를 놓고 법정공방을 벌이다 패소하여 자리에서 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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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문선명의 7남이자 2008년 취임한 통일교 세계회장 문형진(1979. 09. 26~ ). 하버드 대학교 비교종교학 석사 출신이라고 한다. 세계회장이라곤 하지만 실권은 어머니 한학자가 쥐고 있으며 문형진 본인은 얼굴마담이라고 볼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문형진이 불교를 좋아해서 기독교 계열의 신학대학을 다닐 시절에는 자기가 다니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게 기독교 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삭발하고 승복을 입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장로교 신학대학을 다니면서 스님처럼 하고 다녔다는 얘기. 위의 우주대왕 즉위식(...) 사진에서 삭발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다. 헌데 2015년 한학자에 의해 세계회장 직책에서 짤렸다. 문형진이 한학자의 기존 통일교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파문하겠다고 선포했는데 당연하게도 기존 통일교의 교세가 훨씬 막강했던지라 되려 문형진이 통일교 세계회장에서 짤리게 된 것이다. 후임으로는 문형진의 누나이자 문선명의 5녀인 문선진이 취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문선명의 아들들은 모두 죽거나 차단당했다. 통일교의 입장에서는 여러가지 부분에서 문선명의 차남 문흥진의 죽음이 뼈아팠다. 문흥진이 살아있었다면 문흥진을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형성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문형진은 통일교 세계회장에서 보직해임 당하자 바로 여러 통일교 원로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생추어리 교회를 차렸는데 이 종교도 엄청 골때린다. 교리부터가 "마귀 사탄과 대적하기 위해서는 총기로 중무장해야 한다" 이다. 그래서 신도들은 전원 총기를 소지하고 있으며 문제는 '''실제로도 군사훈련을 한다'''는 점이다. 아예 자기 신도들로 사설부대를 만들어 놓았다.# 이에 대해 문형진의 어머니인 한학자는 "저 후레자식이 아버지가 남긴 명예를 먹칠하고 있다"면서 아들인 문형진을 맹비난하고 있다. 그러자 이에 발끈한 문형진은 이미 사망한 아버지와 자신과 적대관계인 어머니를 이혼시키고 뜬금없이 다른 여성과 영혼결혼을 시키는가 하면 문선명 동상을 만들어서 퍼레이드를 시키는 기행을 보이며 이미지가 더 나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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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도 당시 남동생 문형진이 쫓겨난 후 후임이 된 누나 문선진.
문선명의 자녀들은 다음과 같다. 총 10남 7녀.

4.1. 비공식 자녀


'''이름'''
'''생몰년'''
'''생모'''
'''슬하 자녀'''
문성진
1946년생
최선길(1925 ~ 2008)
1남 2녀
문희진
1955 ~ 1969
김명희(1930 ~ 2020)
요절해서 자녀 없음
박사무엘
1966년생
최순화(1936년생)
불명
최선길(崔先吉)(1925.음03.21~2008.양11.16)(1944년 결혼, 1957년 이혼)과의 사이에서 낳은 1남
- 최선길은 해주 최씨로,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觀舟面) 관삽동(觀揷洞)의 기독교 신앙이 뿌리 깊기로 유명한 집안의 딸이었다. 문선명 자서전에 따르면 문선명은 1942년 초, 기도 중 결혼할 때가 되었음을 계시받고, 중매를 잘 서는 이모에게 중매를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유학을 마치고 1943년 10월에 귀국하여 12월에 맞선을 보고 약혼을 했다. 그리고 1944년 5월 4일 결혼을 했다. 결혼 당시 문선명은 24세, 최선길은 19세였다. 신혼집은 문선명이 전에 하숙을 하던 서울 흑석동의 이기봉의 하숙집이었다. 이후 문선명은 아내와 아이를 두고 월북을 한다. 자세한 건 위의 일생 항목 참고. 이후 6.25전쟁이 터지고 피난 내려온 문선명은 최선길과 아이를 부산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최선길은 문선명에게 "그놈의 교회 관두고 지금부터라도 같이 단란하게 살자. 교회야, 가정이야?"같은 주장을 했다. 그러나 문선명한테는 교회가 우선이었고, 부산에서도 매일같이 전도생활을 했다. 최선길은 이에 우리 이혼하자고 했고, 문선명은 이를 거부했다. 그래서 최선길은 문선명의 교회에 찾아가서 자주 이혼 도장을 찍어달라고 깽판을 피웠다고 한다. 그래서 문선명은 할 수 없이 이혼했다고 한다. 최선길이 이렇게까지 한 건 기독교인인 오빠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최선길은 이후 통일교와 연을 끊었으나, 이후 최선길, 최선길 오빠를 비롯한 최씨 일가 전체가 통일교로 개종하였다.
  • 장남 문성진(文聖進)(1946.04.02~)
    • 김동숙(金東淑)과[37] 결혼
    • 1남 문신일(文信一)(76년생)
      • 구니토키 시오리(国時志織)[38]와 결혼
    • 1녀 신미(信美)(77년생)
      • 이형진(李亨鎭)과 결혼.
      • 1남 순남(淳男)(08년생)
      • 1녀 순옥(淳○)(??년생)
    • 2녀 신숙(信淑)(84년생)
      • 오오츠카 코우코우(大塚洪孝)[39]와 결혼
      • 1녀 순미(淳○)(10년생)
김명희(金明熙)(1930.음10.23~2020.04)(결혼하지 않음)와의 사이에서 낳은 1남
- 김명희는 평안북도 삭주군에서 1930년 음력 10월 23일에 태어났으며, 언더우드계 장로교 선교사의 양딸이었다. 1952년 연세대에 입학했으며, 1953년 9월 서울에서 문선명을 처음 봤고, 1954년 1월 통일교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1954년 연세대학생이던 김명희와 문선명이 관계를 가져 문선명의 아이를 임신한다. 현 부인 한학자는 고등학교 2학년 나이에 임신했다는 걸 생각하면... 김명희는 이후 연세대를 휴학하고 서울 성동구 북학동[40]의 세대문교회 등지에서 전도생활을 했다. 문선명에 따르면 김명희는 신약시대 마리아의 입장으로서,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갔듯이, 김명희도 아들 문희진과 일본으로 가서 일본을 개척하고 승리해서 한국으로 돌아와야 문선명과 결혼할 수 있었다고 한다.(선집 037권-055쪽) 문선명은 김명희에게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오면 결혼할 것을 약속했다. 그래서 당시 임신 8개월이던 김명희는 문선명의 명으로 1955년 6월 24일 연세대 동창이기도 한 오승택(吳昇澤)이라는[41] 보조인과 함께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갔다. 출발 전 김명희는 문선명과 함께 사루비아 꽃이 피어있는 공원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김명희는 밀항에 성공하여 나가사키현 와카마쓰(若松)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도쿄로 향했다. 그녀는 도쿄도 세타가야구 오쿠사와(奥沢)의 사쿠라소(さくら荘)에서 8월 17일 문희진을[42] 낳았다. 김명희는[43] 아직 수교도 되지 않은 나라의 불법체류자였기 때문에 의사도 부르지 못하고 혼자 문희진을 낳았다. 몇 개월 후 김명희는 문선명에게 선교사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래서 문선명은 최봉춘이라는[44] 사람을 일본에 선교사로 밀항시켰다. 이 최봉춘이 바로 통일교 최초의 해외 선교사이며, 이 일이 통일교 최초의 해외 선교이다. 그러나 최봉춘이 김명희의 요청으로 파견되었다는 것을 아는 신도는 드물다. 최봉춘은 1958년 7월부터 지속적으로 밀항을 시도했으나 계속 실패하였다. 그러던 중 김명희와 그의 아들은 불법체류자라는 사실을 들켜 나가사키의 오무라(大村) 입국자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1959년 4월 1일 한국에 강제로 돌려보내졌다. 또한 그러던 중 최봉춘은 밀항에 성공하여 1959년 4월 하순 일본에 도착한다. 결국 그렇게 둘은 만나지 못했다. 문선명이 준 사명에 실패한 김명희는 문선명과 결혼할 수 없었다고 한다.(선학역사편찬원 참고) 최봉춘은 어찌 됐던 선교를 하러 왔으니 일본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그렇게 1959년 10월 2일 최봉춘은 도쿄 신주쿠에서 일본 통일교를 발족했다. 김명희는 이후로 독신생활을 했으며, 1999년 '제 1차 3억6천만쌍 합동결혼식' 때에 소크라테스영혼결혼식을 하였다. 참고로 문선명의 결혼은 전부터 문선명이 40세가 되는 1960년으로 예정하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명희와 결혼할 수 없게 되자 문선명은 1년 남짓한 시간 안에 신붓감을 새로 찾아야 했다. 그것이 한학자이다.
  • 장남 문희진(文喜進)(1955.08.17~1969.08.01)
    • 중학교 2학년이던 1969년 8월 1일, 하계개척전도를 위해 기차를 타고 가던 중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는데 때마침 지나던 전신주에 머리를 부딪쳐 사망하였다. 이후 1998년 6월 13일 이혜신(李惠信)과[45] 영혼결혼 함.
최순화(崔淳華)[46](Annie Choi)(1936?~)(결혼하지 않음)와의 사이에서 낳은 1남
- 최성모 • 이득삼(李得三) 슬하의 딸. 그녀의 남동생은 신동아그룹의 前 총수이자 63빌딩을 건설한 최순영(崔淳永). 언니는 최순실(崔淳實).[47] 1955년 통일교인이란 이유로 이화여대에서 퇴학당한 최순화(당시 국문과 1학년)와[48] 동일인물인지는 불명이다. 박사무엘의 주장에 따르자면 문선명은 본래 1967년 즈음 한학자와 이혼하고 최순화와 결혼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순화가 "이미 아이가 넷이나 있는 어머니(한학자)를 어떻게 내칠 수가 있냐"며 거부했다고 한다. 이 스토리는 박사무엘 본인 피셜이며, 공식적인 근거는 없다. 그러나 박사무엘이 문선명의 혼외자식이란 것만큼은 사실로 보인다.
  • 장남 박사무엘(Samuel Park)(1966~)
    • 문선명이 한학자와 결혼생활 중이던 때에 낳은 문선명의 혼외자식.### 문선명의 오른팔인 박보희에게 입양되었다. 2010년 7월 26일 미 애리조나 주 마리코파카운티(Maricopa County) 법원(상사중재원)에서 있었던 관련 재판에서 박보희(통일교 측)의 논조는 문선명의 아들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왜 11년 전 이를 비밀로 하자고 한 합의를 안 지키냐는 것이었다. 그 재판에서 판사가 박보희에게 "박사무엘의 친부가 누구인가?"라고 묻자 박보희는 "나는 정확히 모른다."라고 답변했다. 또한 박보희는 "박사무엘은 1966년에 미혼이던 최순화가 낳은 자식이다."라는 진술도 하였다. 최순화가 문선명과 결혼했다면 박사무엘의 이름은 문경진(文慶進)이었을 것이다. 문선명이 최순화에게 친필 편지로 《復敬의 道上에서 외로이 걸어가는 스승의 마음에 빛이 되어다우. 뭔지 전하지 못하고 서울 가니 섭섭하다. 보희 부처(夫妻)한테 伝(傳)하여 慶 • 姸 字를 가운데 둠. 항렬 딸아(따라) 한다고 알고 伝하여라. 지금 방콕 나나호텔.》 이라며 아기가 남자면 경(慶), 여자면 연(姸) 자를 붙여 문 씨 가문의 전통을 이어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실제 박사무엘의 한국 이름은 박진(朴○慶)이다. 홍난숙의 고발 영상에서 문선명의 4녀 문은진이 말한, 문선명의 혼외자식 1명이 바로 이 박사무엘이다. 문은진은 영상에서 그를 새미(Sammy)라고 표현했다. 영미권에서 새미는 사무엘이라는 이름의 별칭이다. 즉 한학자가 낳은 자녀들도 박사무엘이 문선명의 혼외자식이란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단 것이다. 문은진이 영상에서 박사무엘을 언급한 것은 2008년이었다.

4.2. 공식 자녀


한학자(韓鶴子)(1943~)(1960년 결혼)와의 사이에서 낳은 7남7녀
- 청주 한씨로, 한승운(韓承運)과 홍순애(洪順愛)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3곳의 초등학교를 옮겨 다녔으며[49], 선정중학교를 다니고, 서울시 중구 중림동에 있던 '성요셉간호학교'[50]에 재학 중 문선명과 결혼했다.
'''이름'''
'''생몰년'''
'''배우자'''
'''슬하 자녀'''
문예진
1961년생
홍진휘(이혼)
3남 1녀
문효진
1962 ~ 2008
홍난숙(이혼)
문연아(재혼)
5남 5녀
문혜진
1964 ~ 1964
요절해서 미혼
나영신(사후 영혼결혼)
없음
문인진
1965년생
박진성(이혼)
벤 로렌첸(재혼)
5남 1녀
문흥진
1966 ~ 1984
요절해서 미혼
문훈숙(사후 영혼결혼)
없음
문은진
1967년생
박진헌(이혼)
로드니 젠킨스(재혼)
2녀
문현진
1969년생
곽전숙
3남 5녀
문국진
1970년생
유순주(이혼)
박지예(재혼)
4남 3녀
문권진
1975년생
전화연
없음
문선진
1976년생
박인섭
없음
문영진
1978 ~ 1999
유화정(이혼)
진지예(사후 영혼결혼)
없음
문형진
1979년생
이연아
4남 1녀
문연진
1981년생
얀 도브
자녀여부 불명
문정진
1982년생[51]
조셉 몰리카
1녀
  • 장녀 문예진(文譽進)(1961.01.27~)
    • 홍진휘(洪珍輝)와[52] 이혼.
    • 1남 신복(信福)(82년생)
      • 유연선(兪姸善)과 결혼
    • 2남 신군(信君)(83년생)
    • 1녀 신화(信華)(88년생)
      • 강영웅알렉산더(姜英雄 Alexander)[53]와 결혼
      • 1녀 신미(10년생)[54]
    • 3남 신춘(信春)(91년생)
  • 장남 문효진(文孝進)(1962~2008)
    • 홍난숙(洪蘭淑)과[55] 이혼. 먀약 중독 논란. 홍난숙의 고발영상으로 충공깽. 고발영상이란 미국 방송 인터뷰 영상을 말한다. 문연아(文姸娥)와[56] 재혼.
    • 홍난숙과의 자녀
      • 1녀 신정(信貞)(83년생)
      • 2녀 신영(信英)(86년생)
      • 1남 신길(信吉)(88년생)
      • 3녀 신옥(信玉)(89년생)
      • 2남 신훈(信勳)(94년생)
    • 문연아와의 자녀
      • 1남 신출(信出)(99년생)
        • 장지우(張智堣)와 결혼
      • 2남 신흥(信興)(01년생)
        • 이리야마 유메(入山有恵)[57]와 결혼.
      • 1녀 신여(信汝)(02년생)
      • 2녀 신순(信順)(04년생)
      • 3남 신진(信振)(07년생)
  • 차녀 문혜진(文惠進)(1964)
    • 태어난 지 8일 만에 숨졌다. 2000년 2월 13일 나영신(羅榮新)과[58] 영혼결혼 함.
  • 3녀 문인진(文仁進)(1965~)
    • 박진성(朴珍成)과[59] 결혼, 노르웨이인 벤 로렌첸(Ben Lorentzen)과 불륜관계 후 사생아 출산. 이후 박진성과 이혼, 문인진은 벤 로렌첸과 2013년 10월 12일 재혼. 이후 박진성은 축복2세인 에이카 데이비스(Eika Davis)와 동거.
    • 1남 신명(信明)(86년생)
      • 크리스타(Christa?)와 결혼
    • 2남 신권(信權)(89년생)
    • 1녀 신선(信善)(90년생)
    • 3남 신열(信烈)(93년생)
    • 4남 신평(信平)(96년생)
    • 벤과의 아이 1명(남자아이)
  • 차남 문흥진(文興進)(1966~1984)
    • 교통사고로 사망. 문훈숙[60] 영혼결혼.
    • 1남 신철(信哲)(92년생)(현진으로부터 입양)
    • 1녀 신월(信越)(03년생)(효진으로부터 입양)
  • 4녀 문은진(文恩進)(1967~)
    • 박진헌(朴珍憲)과[61] 이혼, 로드니 젠킨스(Rodney Jenkins)라는, 통일교 신도가 아닌 일반인과 연애결혼(재혼). 홍난숙의 고발영상에 따르면 문은진은 전 남편 박진헌으로부터 폭행에 시달렸다고 한다. 박진헌은 이후 '히라이 키와'라는 여성과 재혼.
    • 1녀 신연(信姸)(90년생)
    • 2녀 신지(信芝)(94년생)
  • 3남 문현진(文顯進)(1969~)
    • 곽전숙(郭全淑)과[62] 결혼. 통일교 재산을 들고 통일교로부터 탈주함.
    • 1남 신원(信元)(88년생)
      • 요시다 신와(吉田進和)와 결혼
      • 1남 정남(定男)(09년생)[63]
    • 1녀 신애(信愛)(89년생)
    • 2남 신중(信重)(93년생)
    • 2녀 신하(信夏)(98년생)
    • 3녀 신예(信禮)(00년생)
    • 3남 신광(信廣)(01년생)
    • 4녀 신향(信香)(04년생)
    • 5녀 신은(信○)(08년생)
  • 4남 문국진(文國進)(1970~)
    • 유순주(劉順珠)와[64] 이혼, 박지예(朴智銳)와[65] 재혼, 문형진과 함께 통일교로부터 탈주함.
    • 1녀 신아(信兒)(98년생)(문영진-유화정 가정으로부터 입양)
    • 박지예와의 자녀
      • 1녀 신래(信來)(05년생)
      • 2녀 신수(信受)(06년생)
      • 1남 신국(信國)(07년생)
      • 2남 신천(信天)(08년생)
      • 3남 신편(信便)(11년생)
      • 4남 신주(信主)(12년생)
  • 5남 문권진(文權進)(1975~)
    • 전화연(全和延)과[66] 결혼. 자녀를 하나도 안 낳음. 후계에 전혀 관심 없음.
  • 5녀 문선진(文善進)(1976~)
    • 박인섭(朴仁涉)과 결혼.[67] 자녀를 하나도 안 낳음. 영어 화자이며, 한국어 불가. 명목상 세계회장이지만 2대 교주 할 생각은 없음.
  • 6남 문영진(文榮進)(1978~1999)
    • 유화정(柳和庭)과[68] 이혼 후 추락사고로 사망. 이게 사고사인지 자살인지 논란이 있는데, 유언 편지도 낌새도 없이 갑자기 호텔 베란다에서 떨어진 것이라 교단 입장에서는 사고사로 본다.(선 312-255). 2020년 10월 1일, 정심원에서 추석절 차례 직후, 이명관(李命官) 부원장의 사회, 이기성(李基誠) 신한국 회장의 주례로 진지예(秦○○)[69]와 영혼결혼 함(재혼). 그럼에도 영혼결혼한 소식을 잘 알리지 않는 것은 의문점.
  • 7남 문형진(文亨進)(1979~)
    • 이연아(李姸雅)와[70] 결혼. 통일교에서 탈주하고 총들고 합동결혼하는 분파를 만듬
    • 1남 신팔(信八)(98년생)
      • 오노 모토에(小野素栄)와 결혼.
    • 2남 신만(信萬)(00년생)
      • 진동희(陳東姬)와 결혼.
    • 1녀 신궁(信宮)(02년생)
    • 3남 신준(信俊)(04년생)
    • 4남 신득(信得)(06년생)
  • 6녀 문연진(文姸進)(1981~)
    • 통일교 신자가 아닌 얀 도브(Jan Daube)라는 일반인과 연애결혼. 통일교에 관심 없음.
  • 7녀 문정진(文情進)(1982~)
    • 동성애 영상을 제작.## 통일교 신자가 아닌 조셉 몰리카(Joseph Mollica)라는 일반인과 연애결혼. 통일교에 관심 없음.
    • 1녀 신비(信飛)(2018~)
이렇게 써놓고 보니 장녀 문예진은, 7남 문영진부터는 어머니인 한학자보다도 나이차가 많이 난다. 장녀인 문예진과 어머니인 한학자는 17년 차이인데 장녀인 문예진과 6남인 문영진과는 18년 차이, 그리고 막내인 문정진과는 22년 차이가 난다.[71] 즉 '''부모와 자식보다 형제자매 간의 나이차가 더 많은 것이다'''. 또 나이가 어린 자녀일수록 미국에서 쭉 생활한 경우가 많다보니 한국말을 잘 못하는 경우가 많고, 문선명은 영어를 잘 못해 아버지와 자식간에 의사소통 자체가 안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6녀 문연진(영어 이름 Kat Moon)은 2006년 미국 서바이벌 프로그램 Survival of the Richest에 출연하여 스스로 문 총재의 딸이라며 재산이 수십억 달러라고 밝혔다.[72] 다소 냉소적인 표정의 그는 첫 회에서 탈락했다. 이 프로그램은 너무 돈이 많아 한 번도 일해 본 적이 없는 일곱 명의 재벌 2세들과 가난한 청년 노동자들 일곱 명이 한 지붕 아래서 합숙하며 한 팀을 이뤄 힘든 일에 도전하는 내용이다. 우승 상금은 20만 달러이다. 그런데도 나오는 건 이유가 있다. 재벌 2세는 자기 명성을 높이러, 청년 노동자들은 상금을 받으러 나오는 것이다. 명성이란 돈 주고 사올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1981년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뉴욕대에서 신문방송학과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려는 포부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리드 온'이라는 영화에서 다이앤 역으로 출연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IMDB에서도 그런 영화는 찾을 수 없었다. 조선일보 기사. 통일교 홈페이지.
자녀들 중 일부는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가족과는 거리를 두거나 심지어는 통일교를 거부하고 가족과의 인연을 끊고 사는 이도 있다. 이미 사망한 장남 이외에도 통일교 교리에서는 엄격히 금지되는 혼외정사 등으로 구설수에 오른 인물들도 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는 거야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가족을 강조하는 통일교의 가르침을 교주의 가족부터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5. 학위 및 수상


  • 미국 리커대학# 명예 법학박사 (1975.12.09)
  • 미국 뉴스위크에서 1976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됨 (1976.6.14)
    [image]
  • 아르헨티나 라플라타가톨릭대학#[73]명예 법학박사 (1984.11.15)
  • 미국 기독교침례회 쇼신학대학# 명예 신학박사 (1985.05.11)
  • 미국 버나디언대학교# 명예 법학박사(1985.05.15)
  • 브라질 훈장학회 국민문화공로십자상 수상 (1986.09.18)[74]
    [image]
  • 미국 블룸필드대학# 명예 인문학박사 (1990.02.01)
  • 미국 브릿지포트대학# 명예 인문학박사 (1995.09.07)
  • 키르기스스탄 국립민족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2000.02.10)
  • 세계평화초종교초국가연합 2000 총회(뉴욕 UN본부) 만국평화상 수상(2000.08.18)
  • 이그노벨상 경제학상 (2000년)
  • 미국 통일신학대학원# 명예 신학박사 (2001.06.21)
  • 선문대학교 명예 문학박사, 명예 신학박사 (2002.04.14)
  • 천주평화연합 창설대회(링컨센터) 천주평화대훈장 수상 (2005.09.12)
  • 베네수엘라 산타마리아대학# 명예 문화인류학 박사 (2006.09.12)
  • 키르기스스탄 국립과학아카데미# 명예 언어학박사 (2006.10.13)
  • 북한 조국통일상 수상 (2012.09.08)
  • 한국 K리그 공로패 수상 (2012.12.03)

6. 여담


  • 통일교 교리상 문선명은 메시아이기는 하지만 영생인 존재는 아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메시아임을 주장하는 교주가 사망했는데 어떻게 종교가 유지되는지 이해가 안 가겠지만 교주 사후에도 어쨌든 큰 문제 없이 조직 자체가 유지되는 것은 메시아관의 차이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문선명은 언제나 영(靈)적으로 모두와 함께하고 있다고 한다. 통일교의 모든 기도에는 마지막에 '이 모든 말씀, 축복중심가정 ㅁㅁㅁ의 이름으로 보고드리고 아뢰었사옵니다.'라는 구절을 넣게되었다.
  • '문선명'을 로마자Sun Myung Moon이라고 쓴다. [75] 표준 로마자 표기법을 따르면 Mun Seonmyeong. 하지만 정작 영어권에선 통일교인들을 조롱하는 어투로 무니(Moonie)라고 부른다. 이런 신조어가 탄생한 까닭에 영어사전에 등재된 거의 유일한 한국인인 게 아이러니. 손바닥만 한 콘사이스 사전에도 있을 정도다. 때문에 통일교와 아무 관련도 없는 반기문 UN 총장이 선출 당시 '문선명 친척 아냐?\' 하는 오해를 사기도 했었다. '반기문'의 공식 로마자 표기를 'Ban Ki-moon' 이라고 쓰는데 Ki-moon을 Ki 씨와 Moon 씨가 합한 것으로 보아서인 듯... 그래서 오래된 정보에는 반기문의 종교에 '통일교' 라고 되어있는 것도 있다. 공식적으로는 무종교이나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신자인 것을 확인한 책이 있다. 그나저나 문씨라는 이유만으로 통일교인이라고 오해받는다니 우리나라 40만 문씨들은 어이없을 듯. [76]
  • Moon(月) + Sun(日) = Myung(明)이라는 평도 있다. 특히 미국은 통일교 신도들을 가리켜 'Moonies'라고 부른 바 있다.
  • 1998년 조사로 문선명 일가의 추정자산은 약 2조 원. 다만 어디까지나 추정자산이며 당시 경제거품까지 생각해보면 실제로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왕족 자식들에게 다 나눠졌겠지만 역시 삼성일가보다 높은 거 아니냐는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당연히 그 정도급은 안 된다. 실질 자산을 보면 국내자산순위 20위권이 안 된다. 애당초 사이비 종교가 커도 전문적인 기업인한텐 안 되는지라 삼성은 고사하고 권혁빈[* 스마일게이트 창업자. 재산이 7조 원으로 국내 3~4위를 다툰다.] 한 명만 나서도 문선명 일가는 물론 이만희 일가까지도 작살낼 수 있다. 애당초 통일교의 돈지랄도 재벌들이 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비효율적으로 쓰고 싶지 않아서 안 하는 거다. 재벌들은 돈이 엄청나게 많은 대신 돈을 조금이라도 잘못 쓰면 계열사 1~2개가 날아간다. 계열사 관리 차원에서도 돈을 짜게 써야만 하는 입장이다. 종교인이라서 돈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문선명과는 다르다.
  • 김진명이 2017년에 ≪예언≫이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작중에 서술된 문선명의 행적이 책을 읽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화제가 되었다.
  • 예술과 엔터테인먼트에 관심도 가져서 리틀엔젤스, 유니버설발레단[77], 선화예술고등학교[78] 등을 창립했다. 그리고 오! 인천[79]이라는 영화를 통해 문선명이 대배우 로런스 올리비에를 구해줬고 그 외의 이 영화 제작에 참여한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자선사업을 했다고 주장한다. 어느 정도냐 하면 주요 배우들의 개런티를 매일마다 헬기에 가득 실어서 공수했을 정도라고 비유한다.
  • 덕분에 영화 똑바로 살아라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된다. 물론 나쁜 의미로.
  • 1982년 5월 17일에 NBC에서 속보로 보도되었다. 11:20 쯤에 나온다.
[youtube]
  • 어마어마한 축빠였다. 1988년만 해도 k리그는 팀이 5개밖에 없었는데 축구를 좋아한 문선명 총재가 축구판에 뛰어들어 1989년 통일그룹을 모기업으로 성남 일화를 창단했다. 초창기에는 신생팀의 한계 때문에 성적이 나오지 못했지만 92시즌부터 본격적으로 성남 일화에 투자를 했고, 순식간에 명문구단으로 뛰어올랐다. [80]문선명 총재 사후 부인인 한학자와 통일그룹 실권을 쥔 4남 문국진#S-2은 축구에 애착이 없었고, 결국 매물로 내놓은 구단을 성남시가 인수해 시민구단인 성남 FC로 변했다.
  • 정부과천청사, 세종문화회관, 유니버설아트센터 등을 디자인•설계한 건축가 엄덕문은 문선명과 와세다대학부설고등공학교를[81] 같이 다닌 문선명의 친구이다. 실제 엄덕문은 통일교 초기 핵심 멤버였다. 실제로 선문대학교, 선화예고, 청파동 舊 통일교 본부[82] 등의 건물은 모두 엄덕문이 디자인•설계한 것들이다. 또한 지금도 간간히 보이는 A자 모양의 초록색 지붕에 벽돌로 된 건물을 볼 수 있다. 이 역시 엄덕문이 디자인한 것이다. 이는 사진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문선명의 부산 피란시절의 토담집 의 형태를 거의 그대로 따와 설계한 것이다. 그래서 지붕의 비율이 과하게 크다. 엄덕문은 2012년 7월, 문선명이 죽기 두 달 전에 사망하였다. 엄덕문의 장례식은 한국건축가협회장으로 진행됐다. 통일교 신도들이 이에 조문을 갔다고 한다.

7. 관련 문서



8. 관련 학교



[1] 음력 1월 6일[2] 새벽 1시 54분 사망. 음력 7월 17일.[3] 현 HJ매그놀리아국제병원. 도로명 주소는 미사리로 267-177. [4] 산소. 현재 도로명 주소는 미사리로 324-275.[5] 미국 영주권을 갖고 있다. 문선명은 1973년 4월 30일에, 부인 한학자는 1973년 2월 26일에 각각 미국 영주권을 얻었다.[6] 운조부는 '''문시발'''(文時發), 잉조부는 문두창(文斗昌), 곤조부는 문흥도(文興道), 내조부는 문광빈(文光彬), 현조부는 문수명(文守命), 고조부는 문성학(文成學). 증조 대는 정(禎), 조부 대는 국(國), 아버지 대는 경(慶), 문선명 대는 용(龍), 문선명 자녀 대는 진(進), 손주 대는 신(信), 증손주 대는 순(淳) 자 돌림이다. 문선명의 원래 이름은 돌림자를 따라 문용명이었다.[7] 1995년, 솅겐조약 가입국이라면 모두 문선명을 입국금지하기로 결의함.## 그래서 이후 솅겐조약에 가입하는 나라들은 문선명을 입국금지함. 그 중 네덜란드는 2005년에 문선명의 입국을 허용. 2007년 솅겐조약 가입국들의 입국금지가 풀린 건 통일교가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에 위헌소송을 걸어 승소했기 때문. 2004년 기준, 위에 서술한 독일을 제외하고 벨기에, 프랑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그리스, 덴마크, 핀란드,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스웨덴의 14개국이 문선명의 입국을 금지함.[8] 미상이라는 것이 실존한 인물인지 모른다는 게 아니고, 정확한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다.[9] 박보희에게 입양보내져 박 씨이다.[10] 문선명의 신체정보는 밝혀진 게 없으나, 다른 사람들과 찍은 사진을 볼 때 키가 175cm인 고르바초프보다 크고, 179cm인 아이젠하워보다 작으므로 177cm정도로 추정된다. 1920년생 동양인 치고는 꽤 큰 편이다.[11] 이그노벨상은 병맛 같고도 엄청난 연구들을 선정하여 수상한다.[12] 학창시절 문선명. 정가운데에 서 있는 사람이 문선명.[13] 양력 2월 25일[14] 당시의 동은 읍면보다 작은 리(里) 정도의 단위였다.[15] 문형청의 덕흥동 몰음마을 서당 → 김창제와 정신택의 덕성동 장산박촌 서당 → 박기호의 상사리 문촌 서당[16] 일본은 한국과 달리 4월부터 새 학년이 시작되기 때문에 3월 25일 졸업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17] 현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고등학교[18] 하나님의 성회,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그 오순절교회다. 한국에는 럼시, 펄선 등에 의해 오순절 성령운동이 처음 전파되었고, 일제시대에는 위축된 상태였다. 현대 한국의 오순절 교단은 해방 이후에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다.[19] 참고로 새예수교회는 백남주, 이용도, 이호빈 등이 세운 이단이다. 통일교 말로는 동쪽 남성계 신령교단.[20] 이스라엘수도원을 세운 한국 이단의 중시조급 인물이다. 문선명의 통일교, 유재열의 장막성전과 그 후신(?)인 이만희의 신천지 등 국내에서 발생한 기독교 이단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21]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도츠카마치(東京都 新宿区 戸塚町). 와세다대학 근처에 있다.[22] 현 서울중부경찰서. 당시 경기도 경찰부는 서울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문선명이 잡혀들어간 경찰서가 경성본정경찰서였다는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그 경찰서가 세종로 총독부 청사 앞쪽에 있었다는 증언을 볼 때, 총독부 청사 앞에 있던 경찰서는 주위에 경성본정경찰서밖에 없었다.[23]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섭절리(현 율곡리)가 본부였으며, 상도동은 두번째로 생긴 집회소였다. 참고로 이스라엘수도원은 세번째 집회소를 채 만들지 못하고 망했다. 지금도 극소수의 신도들이 모여 이스라엘수도원을 추종하고 있다. 파주가 본부라지만, 당시 김백문은 상도동에 주로 있었다.[24] 여담으로 대구는 동방의 모스크바였다. 정교회가 흥해서 그런 게 아니라, 공산주의 색이 가장 짙어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25] 그녀의 이름은 을용, 월령, 월례, 운녀, 운내, 노파, 태영 등 자료 상 차이가 많다. 1890년생. 당시 57세. 남편은 청주 한씨로, 슬하에 10남매가 있었으며, 그 중 박을용이 25세 때 평양에서 낳은 '한인하'가 있다. 그 한인하가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의 아내이다. 즉 박을용은 박흥식의 장모인 것이다.[26] 다른 북한 신도들도 같이 남하했다는 서술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지승도, 옥세현 등 북한 신도들은 남하 이후 문선명과 부산 등에서 재회한 것이다.[27] United Methodist Church. UMC.[28] 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 SCLC.[29] American Baptist Churches USA. ABCUSA.[30]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NCC.[31] National Black Catholic Clergy Caucus.[32] 통일교 계열사이다.[33] 김일성은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문선명은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출신이다.[34] 아마도 햇볕정책 추진을 위한 대북접촉 과정에서 통일교의 도움을 받은 것이 인연이 된 걸로 보인다.[35] 실제 자서전을 보면 완벽한 키잡이다.[36] 뒤에 타고있던 절친 2명을 살리고 자신을 희생했다.[37] 36가정 김원필(金元弼)-정달옥(鄭達玉) 가정의 딸[38] 1800가정 구니토키 아키히코(国時昭彦) 가정의 딸[39] 오오츠카 가츠미(大塚克己) 가정의 아들[40] 현 중구 신당동[41] 36가정 집안의 청년. 열성 통일교인.[42] 일본이름은 나카무라 다케노부(中村竹信)[43] 일본이름은 나카무라 요시에(中村好江)[44] 일본 이름은 니시카와 마사루(西川勝)[45] 72가정 이제희(李濟熙) 가정의 딸[46] 崔淳花, 崔順華 등으로 표기한 블로그 글도 있으나, 집안 돌림자가 淳 자이기에 崔淳華가 옳은 것으로 보인다.[47] 최순실게이트의 그 최순실이 아닌 동명이인.[48] 이 학생은 기록 상 崔淳嬅이다.#[49] 서울 용산구 효창동 효창초등학교 → 제주 서귀포시 효돈동 효돈초등학교 → 강원도 춘천시 약사동 봉의(鳳儀)초등학교[50]가톨릭대학교 간호대학의 전신.[51] 당장 친남매 중 맏이인 큰언니 문예진과도 '''21살'''이나 차이가 나고, 이복 남매들까지 더하면 이복남매들 중 맏이 문성진과 '''36살'''이나 차이가 난다. 문성진의 자식들(문정진의 조카들)보다도 나이가 어리다. [52] 36가정 홍성표(洪性杓)-유길자(柳吉子) 가정의 아들[53] 1800가정인 한국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 모두 독일에서 통일교 목회 활동을 하고 있다.[54] 이유는 모르겠으나 돌림자가 아니다.[55] 36가정 홍성표(洪性杓)-유길자(柳吉子) 가정의 딸.[56] 777가정 최윤기 가정의 딸. 본래 최연아였으나 성을 바꿈.[57] 이리야마 세이키(入山聖基) 본부 전도교육부장 가정의 딸[58] 72가정 나임열(羅林烈)-김정탄 가정의 아들.[59] 36가정 박보희(朴普熙)-윤기숙(尹基淑) 가정의 아들.[60] 36가정 박보희(朴普熙)-윤기숙(尹基淑) 가정의 딸. 박훈숙이었으나 성을 바꿈.[61] 36가정 박종구(朴鐘九)-최금순(崔金順) 가정의 아들.[62] 36가정 곽정환(郭錠煥)-윤정은(尹貞恩) 가정의 딸.[63] 이유는 모르겠으나 돌림자가 아니다.[64] 430가정 유정옥(劉正玉)-조명원(趙明元) 가정의 딸.[65] 430가정 박정현(朴正鉉)-양반임 가정의 딸. 2003년 미스코리아 선(善)에 당선되었던 인물이다.[66] 1800가정 전인승(全寅昇)-김옥기(金玉基) 가정의 딸.[67] 430가정 박중현(朴重眩)-최현숙(崔賢淑)가정의 아들.[68] 간혹 보이는 유화연(柳和延)이라는 자료는 틀린 정보이다. 1800가정 유종소-이상난 가정의 딸.[69] 진성배(秦聖培) 현 효정학술원장 겸 통일사상연구원장의 죽은 딸[70] 777가정 이승대-주은정 가정의 딸.[71] 특히 문정진은 그의 나이 '''61세'''에 얻었다. 사실 남자는 나이와 상관없이 임신이 가능하다고 한다. 비슷한 나이에 얻은 유퉁, 이창하만 봐도 그렇다.[72] 하지만 실제 수십 억 달러의 재력가라면 대한민국에서도 손꼽히는 재력가이기에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2018년 현재 10억 달러(1조 이상)의 자산을 보유하고있는 한국인이 30명이다. 또한 실제 10억 달러 이상의 자산가라면 경제지에서도 이름이 올랐을 것이며 포브스나 블룸버그 같은 출판사에서 뽑는 빌리어네어 순위에 이름이 등재되어 있어야 한다. 물론 자기 아버지인 문선명의 재산을 자기 재산이라고 말했다면 일단 말은 된다. 문선명의 재산은 실제로 수십억 달러 수준은 된다. 그래서 오 인천 같은 짓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73] '국립라플라타대학'과는 다른 대학이다.[74] 아래 사진의 출처인 뉴시스에서는 1991년이라고 나오나, 통일교 공식 사이트 등을 볼 때, 문선명은 1991년에 상을 받은 바 없다. 따라서 미루어 볼 때 1986년의 수상임을 짐작할 수 있다.[75] 실제로 선문대는 통일교재단에서 운영하는 대학교이다.[76] 문재인 대통령은 가톨릭 신자이다. 그리고 문씨라도 Mun으로 쓰면 전혀 문제없다. 다만 문재인 대통령은 Mun으로 쓰지 않는다.[77] 대한민국 3대 발레단 중 하나. 나머지 둘은 대한민국국립발레단, 서울발레시어터[78] 대한민국 3대 예고 중 하나. 나머지 둘은 서울예고, 계원예고. [79] 문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괴작을 넘어 할리우드 진출한 한국영화의 수치다. 로런스 올리비에를 구해줬다는 이 항목의 서술 역시 오! 인천!의 맥락을 안다면 실소를 금할 수 없는 내용.[80] 덕분에 구단주로의 문선명을 까는 축구팬은 거의 없다. 아쉬운 게 있다면 최고의 팀을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마케팅 면에서는 소홀해 팬층을 확장하지 못했다는 정도를 들 수 있다.[81] 엄덕문은 건축과, 문선명은 전기과였다. 일제강점기 얼마 없는 한인 유학생인지라 둘은 학창시절 서로 많이 의지하며 지냈다고 한다.[82]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