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포 해전

 


진포해전(진포대첩)
'''시기'''
우왕 6년 1380년 8월
'''장소'''
전라북도 군산, 충청남도 서천
'''원인'''
고려 말 왜구의 침입
'''교전세력'''
고려 [image]
왜구
'''지휘관'''
나세
심덕부
부원수 최무선
<^|1>지휘관 불명
'''병력'''
전선 약 100 척
전선 약 500 척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함대 궤멸
'''결과'''
'''고려 수군의 대승'''
'''영향'''
고려의 대왜구(對倭寇) 해상전에 전환점 마련.
1. 개요
2. 어떻게 해적들이 500여척의 함대를 꾸렸나?
3. 최무선과 고려 수군의 정비
4. 최무선의 화포가 불을 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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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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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포대첩은 왜적을 화포를 사용해서 바다에서부터 적극적으로 제압해야 한다고 하는, 왜구 금압(禁壓)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전투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즉, 고려 정부가 수 십 년 동안 지속되었던 왜구에 대하여 총사령관 나세 장군을 중심으로 한 고려군이, 최무선이 발명한 화포를 사용해 큰 타격을 가함으로써 왜구의 금압에 일대 전기가 마련되었던 역사적인 사건인 것이다.

'''─ 홍산·진포·황산 대첩의 역사 지리학적 고찰 中'''[1]

鎭浦 海戰
고려 말 왜구의 침입 시기, 우왕 6년에 벌어진 대규모 해전. 당시 고려 남쪽을 어지럽히던 왜구를 격파한 전투로 황산 대첩과 더불어서 고려 말의 전투로 유명하다. 동아시아 혼란기의 막바지를 보여준 싸움 중의 하나로 분류하기도 한다.
1380년 8월, 500척이 넘는 왜구의 대규모 선단이 진포에 침입해 큰 밧줄로 배를 묶어 두고 이를 기지로 삼자, 고려는 해도원수(海道元帥) 나세(羅世), 심덕부(沈德符) 그리고 최무선에게 전함 100척을 주고 진포로 내려보내 왜구를 막게 했다. 이때 최무선이 개발한 화포를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화약고기(火藥庫記)》[2]에 따르면 화통(火通)과 화포(火砲)가 왜군의 배를 불태우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 어떻게 해적들이 500여척의 함대를 꾸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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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왜선 500여척은 왜구의 역사를 통틀어도 가장 압도적인 규모에 속한다.[3] 어떤 식으로 대함대가 등장했는지 확실히 알긴 어렵지만, 큐슈남조 세력이 다카기·아마쿠사 일대의 선박을 대피시키기 위해, 그리고 남조의 본거지 기쿠치 일대가 포위당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병량미를 얻기 위해서 생겨났다는 의견이 있다. 이런 견해를 따르자면 이 1380년의 왜구는 다카기·아마쿠사 지역의 수군 세력은 물론, 규슈 최남단의 오오스미 지역의 호족 네지메씨 주변의 남조 세력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당시의 일본 남조는 북조의 큐슈 공격이 시작되어 무너져 내리는 상황이었으므로 '''활로'''를 뚫기 위한 최후의 발악이라고 볼 수 있다.[4]
물론 왜구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워낙 견해가 상이해서 확실한 결론은 없다. 일본에서는 고려 말의 왜구가 내륙의 행정 시스템까지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으로 볼 때, 일본인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닌 고려인의 지방 세력이 다수 포함되었다는 정 반대의 주장도 있다. 또한, 남조의 운명이 멸망 직전에 몰린 상황에서 대함대를 보낸다는 것은 정신이 나간 행동이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참고로, 고려 사람들이 아기발도라고 불렀던 왜구 장수는 몽골과 고려인의 혼혈이라는 이야기도 있다.[5]
이렇듯 당시의 왜구들은 이질적인 형태를 띄었다. 이들은 전략 전술을 비롯한 행동 양식이 교육을 받은 군대에 가까웠으며, 일부에서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기병을 운용할 때는 유목 민족이랑 비슷한 기록도 많이 발견된다. 이런 설을 따른다면, 원명 교체기에 갈 곳을 잃은 해양 세력 + 남조편에 섰다가 궁지에 몰린 왜구들이 최후의 명운을 걸고 고려로 진출했다는 가설도 존재한다.[6]
분명한 것은, 진포에 나타난 500여척의 함대가 상당한 규모였다는 점이다. 이 엄청난 군단은 큰 밧줄로 서로 잡아매고 있다가 여러 주(州)ㆍ군(郡)으로 갑자기 흩어져 마음대로 불태우고 노략질을 하니 '''고려 백성들의 시체들이 산과 들에 뒤덮이는(屍蔽山野)'''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그렇게 노략질한 곡식을 질질 끄며 운반을 하느라 땅에 널부러진 쌀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3. 최무선과 고려 수군의 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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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崔茂宣)'''
고려 말 왜구의 침입. 왜구 토벌에 있어 기념비적인 사건은 바로 이성계의 등장, 그리고 기술적으로는 화약 병기의 실전 배치였다. 고려 말의 최무선(崔茂宣)은 평소에 방략(方略)이 많으며 병법(兵法)을 즐겨 말하는 편이었는데, 스스로 당시의 상황을 분석해보니 "왜구를 제어하는 일은 화약 만한 게 없다." 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로 그는 열악한 여건에서도 화약 병기를 만들기 위해 분골쇄신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최무선의 성과가 결실을 맺은 것이 바로 진포대첩이지만, 고려 조정에서 화약 무기를 어떻게 써보려는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다. 1373년 10월 공민왕은 화전(火箭)과 화통(火筒)을 시험해보기도 했으며, 그 해 11월 명나라 중서성(中書省)에 병기·화약·유황·염소(焰焇) 등을 좀 보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화약 만드는 노하우를 알게 되고 직접적으로 투입된 것은 우왕 시기, 진포 대첩을 기점이라고 보아야한다.
왜구의 끝없는 침입이 계속되던 1380년 8월, 마침내 장장 '''500여척의 왜선'''은 진포(鎭浦) 어귀에 정박해 있었으며, 고려 측에서는 수군의 숙장이자 해도원수(상원수 대우) 나세(羅世) 장군이 정지[7] 작전 계획에 따라, 부원수 심덕부(沈德符), 최무선 장군과 함께 총 '''100여척'''으로 구성된 전함대를 이끌고 공격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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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포 대첩이 벌어진 위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일반적으로 전해지는 충청남도 서천 남쪽 즈음으로, 일반적으로는 이곳이 진포 대첩이 벌어진 곳으로 이해되며 국사 교과서 등에서도 그렇게 표기하고 있다. 당시 군산 금강변에 조창(漕倉)인 진성창이 있었으므로 전라북도 군산이 진포대첩의 위치였다는 또 다른 설이 있는데, 군산시는 이 설을 이용해서 진포대첩 기념비 등을 만들어 놓았다.[8] 어찌되었건 500여 척이므로 좁은 지역은 아니였고, 금강 하류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였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해 이전에는 최영이 '''2천척을 더 만들자'''라고 했다지만, 4월 경에 최영이 함선이 백여척 밖에 없다고 한 것을 보면, 3개월 ~ 4개월만에 극적인 증강이 이루어졌다고 보긴 힘드니 이 백여척의 함선은 '''당시 고려가 가진 전 해상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 고려군은 정치의 혼란과 연속으로 침략하는 군벌들을 상대하느라 일부 정예군을 제외하면 병력 자원이 바닥난 상태였다. 이작도 해전에서는 훨씬 압도적인 고려 수군이 어이없이 패배하여 수군 전력 자체가 쇠퇴한 적도 있었다. 즉 반드시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4. 최무선의 화포가 불을 뿜다


한반도의 명운을 건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압도적인 규모였던 왜구는 고려군이 화약이 있는 줄도 모르고, 큰 밧줄로 500여 척에 이르는 함선들을 서로 연결해 두고, 약탈하기 위해 상륙하였다. 이때 고려군의 화포가 불을 뿜어댔는데, 큰 밧줄로 연결되어 있던 함선들이 격침되고 연기와 화염이 하늘에 넘쳐 흘렀으며 함선을 지키던 왜구들은 거진 타 죽거나 바다에 빠져 죽는 자들도 많았다. 이어 도주하기 시작한 왜구를 공격한 고려군은 큰 배를 아홉 척을 빼앗았고,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2년 4월 14일 5번째 기사와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334명의 포로를 구출해 내었다.
현대에는 당시의 화포를 분석하여, 화약 무기들이 별로 도움이 안 되었거나 전과가 과장되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당시의 왜구들이 배를 묶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미처 화약을 생각치 못했기에 화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또한, 당시의 배들은 대다수가 작은 크기였기에 화포가 위력적으로 통용되었다는 점도 감안해볼 수 있다. 다만 이 당시의 주력 화포가 우리가 흔히 화포 하면 떠올리는 대포가 아니라 커다란 수류탄 비스무리한 투척식 무기였다는 견해가 있다. 확실히 대포의 형상을 가지는 총통류 화기의 존재 자체는 공민왕 때부터 확인이 된다.[9] 그러나 총통류 화기가 본격적으로 대량 생산이 된 것은 조선시대 태종이 화통군을 조직했을 무렵으로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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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것은 500여척의 대함대가 100여척 밖에 안 되는 고려 수군에게 격파되었다는 기록 뿐이다. 아무튼 전세가 절망적이 되자 왜구는 '''잡아놓았던 어린 아이들을 처참하게 도륙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그 시체가 산처럼 쌓여 지나는 곳마다 피의 물결이 되었다.''' 이런 참극을 피해 겨우 3백 30여명 정도만이 도주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절요에 보이는데, 양 기록을 합쳐보면 왜구의 학살을 피해 간신히 도주한 사람들이 300여명 가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포로를 잡고 있으려면 군대의 규모도 많이 필요한데, 겨우 피한 일부의 포로조차도 300여명이나 되었으니 살아남은 왜구들도 규모가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고려군은 신무기 화포의 힘을 빌려 위기에 놓였던 전황을 돌파해내었으며, 압도적인 숫자의 왜선을 격파한 이 사례는 이후로도 해상에서 왜구를 격파할 수 있다는 하나의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 따라서 군사적인 의미에서 진포대첩의 승리는 정말 거대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로부터 왜구가 점점 덜해지고 항복하는 자가 서로 잇달아 나타나서, 바닷가의 백성들이 생업을 회복하게 되었다.

'''- 조선왕조실록 최무선 졸기'''

고려 수군이 사용한 화약 때문에 왜구들의 함대가 어이없이 전멸하자, 가까스로 육지에 상륙한 도망간 왜구들은 고려 중앙군이 보낸 병력에 의해 토벌되었는데, 이때 이성계가 활약한 황산 대첩이 벌어지며 내륙으로 퇴각한 왜구들은 모두 격멸 된다. 이후 상황은 황산 대첩 항목 참조.
고려말 조선 초의 관료인 권근은 이 진포해전에서의 최무선의 전공을 찬양하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권근은 이 당시 유배중이라 왜구의 위협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제목은 하최원수파진포왜선<賀崔元帥破鎭浦倭船>('진포에서 왜선을 깨뜨린 최 원수를 축하하며').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공의 지략이 때맞춰 일어나니 明公才略應時生

삼십 년 왜란이 하루 만에 평정되었네 三十年倭一日平

바람 실은 전함은 나는 새가 못 따르고 水艦信風過鳥翼

진(陣) 무찌른 화차는 우레 소리가 무색하네 火車催陣震雷聲

주유갈대에 불지른 게 가소롭고 周郞可笑徒焚葦

한신배다리 만들어 건넌 것은 자랑도 못 된다네 韓信寧誇暫渡甖

이제부터 큰 공이 만세를 전하고 말고 豐烈自今傳萬世

능연각에 초상 걸려 여러 공경 중 으뜸이리 凌煙圖畫冠諸卿

화포 만든 공의 지혜 하늘이 열어 주어 天誘公衷作火砲

한번 뱃싸움흉한 무리 쓸어냈네 樓船一戰掃兇徒

허공에 뻗친 적의 기세 연기 따라 흩어지고 漫空賊氣隨烟散

세상 덮은 공명은 해와 함께 빛나도다 蓋世功名與日鋪

긴 맹세 어찌 긴 세월 후를 기약하리 永誓豈惟期帶礪

응당 정벌 맡아 군사의 대권을 맡으리라 專征應亦賜弓鈇

종묘사직 안정되고 나라도 안정되어 宗祧慶賴邦家定

억조 창생의 목숨이 다시금 소생하리 億萬蒼生命再蘇


[1] 일반론적인 시각은 보통 그렇고, 다만 당시의 사건 해결에 화포가 그리 큰 역할을 끼치지 않았다는 식의 의견도 제시되고는 있다. 다만 당시의 작고 조잡한 함선들의 크기를 본다면, 거의 백병전이나 불화살을 주고 받았던 규모의 싸움에서는 화전이나 화통이 제법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2]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정이오(鄭以吾)가 쓴 책.[3] 노량해전 당시 집결한 규모가 300척이었다. 다만 왜선의 규모의 차이는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4] 고려 말 왜구와 남조 : 경신년(1380년)의 왜구를 중심으로 中, 이영[5] 아기발도는 다른 왜구들에게 존경받는 지휘관이었다고 한다. (고려 포로와 주민들의 기록.) 그런데 아기발도의 아기는 명백하게 한국어의 아기라는 설이 대세. 발도는 몽골의 바아토르(지휘관)을 뜻한다. 즉 아기 장수라는 뜻이며, 해적의 별칭이라고 하기에는 좀 괴상하다. 당시 제주도는 원 제국이 목초지로 삼으면서 몽골 사람들도 많이 살았다. 원명 교체기에는 제주도의 고려인과 몽골인들의 혼혈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최영이 직접 제주도로 가서 이들의 기마 부대를 진압해야했다. 이후 몰락 직전까지 쇠퇴했던 고려를 괴롭힌 것은 왜구의 대규모 기병 부대였으며, 왜구들의 지휘관은 놀라운 기동 전략을 보여주었으니 제법 유사한 점이 있다. (...)라는 말도 안되는 설이 각주로 달려있지만 단 한마디로 그의 이름에 관한 논란을 잠재울 수 있다. 아지발도라는 이름은 고려 사람들이 그 왜구 장수를 지칭하던 별명이었다. 이런 관계도 따지지도 않고 아지발도 혼혈설이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다니..[6] 같은시기 홍건적, 원의 잔존 세력, 이전에는 금나라의 여진족과 요나라의 거란족도 고려를 정벌하여 재 부흥을 노리겠다는 목적으로 수만 단위의 침략군을 파견한 전례가 있었다. 참고로 전자는 동시대였다. 그러니까 고려는 '''남북으로''' 목숨을 걸고 침략을 감행하는 수만 단위의 군대를 연달아 상대해야하는 북로남왜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7] 역시 숙장이자, 새로운 수군 창설을 주도한 사람이다.[8] 퇴역한 미제 군함을 이용한 전승기념관이 구 군산역 구내였던 진포해양공원에 정박해 있다. 군산시 항목 참조.[9] 고려사에 총통으로 전(箭,화살)을 쐈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