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무선

 


[image]
'''성명'''
최무선(崔茂宣)
'''본관'''
영천 최씨
'''출생'''
1325년 고려 경상도 영주[1]
'''사망'''
1395년 조선 서해도 해주
'''국적'''
고려 ~ 조선
'''추존'''
증의정부좌찬성(贈議政府左贊成)

공의 지략이 때맞춰 일어나니 明公才略應時生

삼십 년 왜란이 하루 만에 평정되었네 三十年倭一日平

바람 실은 전함은 나는 새가 못 따르고 水艦信風過鳥翼

진(陣) 무찌른 화차는 우레 소리가 무색하네 火車催陣震雷聲

주유갈대에 불지른 게 가소롭고 周郞可笑徒焚葦

한신배다리 만들어 건넌 것은 자랑도 못 된다네 韓信寧誇暫渡甖

이제부터 큰 공이 만세를 전하고 말고 豐烈自今傳萬世

능연각에 초상 걸려 여러 공경 중 으뜸이리 凌煙圖畫冠諸卿

화포 만든 공의 지혜 하늘이 열어 주어 天誘公衷作火砲

한번 뱃싸움흉한 무리 쓸어냈네 樓船一戰掃兇徒

허공에 뻗친 적의 기세 연기 따라 흩어지고 漫空賊氣隨烟散

세상 덮은 공명은 해와 함께 빛나도다 蓋世功名與日鋪

긴 맹세 어찌 긴 세월 후를 기약하리 永誓豈惟期帶礪

응당 정벌 맡아 군사의 대권을 맡으리라 專征應亦賜弓鈇

종묘사직 안정되고 나라도 안정되어 宗祧慶賴邦家定

억조 창생의 목숨이 다시금 소생하리 億萬蒼生命再蘇

- 권근, <하최원수파진포왜선賀崔元帥破鎭浦倭船>(진포에서 왜선을 깨뜨린 최 원수(최무선)를 축하하며)

1. 소개
2. 화약을 개발하다
4. 그가 남긴 업적들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1. 소개



여말선초장수이자 화약/화포 개발자.
출신지는 경상북도 영천시.[2] 동시대 인물인 포은 정몽주와 같다.[3] 영천 출신으로 위인전에 실릴만한 인물이 2명뿐인데다가 영천 시내에 최무선의 이름을 딴 도로인 최무선로가 있을만큼 최무선을 모르는 영천 사람은 없을 것이다.

2. 화약을 개발하다


性巧慧多方略, 喜談兵法。 仕前朝, 官至知門下府事。 嘗曰: "制倭寇莫若火藥, 國人未有知者。"

천성이 기술에 밝고 방략(方略)이 많으며, 병법(兵法)을 말하기 좋아하였다. 고려조에 벼슬이 문하부사에 이르렀다. 일찍이 말하기를 "왜구를 제어함에는 화약(火藥)만 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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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실록, 태조 4년(1395) 4월 19일 임오

조선왕조실록에는 최무선에 대해 '일찍부터 병법에 관심이 많았고, 왜구를 제압하는 데는 화약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화약 개발에 나섰다.'고 했다. 당시에 송나라 등지에서 화약무기와 화포가 개발되어 무기로 쓰이고 있었는데, 최무선이 화약, 더 나아가서는 화포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대체로 중국 상인이나 지나가는 외국인의 이야기였다는 점과 나라의 지원이 없이 자체 연구를 통하여 개발하였다는 점[4], 어렸을 때 불꽃놀이를 보고 자기도 폭죽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던 것을 감안하면, 아마 최무선의 일가는 상당히 큰, 정부에도 입김을 넣을 수 있는 거대한 상인 가문이었던 것 같다[5]. 여튼 최무선은 당시 대왜구시대에 고려 백성들이 고통받는 현실을 보고 화약 나아가서 화포를 개발하기로 마음 먹었다.
다만 화약의 유입자체는 상당히 시기가 빠른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미 몽골이 송과의 전쟁 과정에서 기초적인 화약무기를 사용했고 몽골의 일본원정에 고려군이 적극 참여한 점. 그리고 고려 초의 기록에서 화약과 유사한 형태의 폭발이 기록된 점을 고려하면 이미 최무선 시기에 화약이라는 것은 고려에서도 익숙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최무선이 고려 최초로 화약을 만들었다기보다는 화약을 '''대량 생산'''하는 동시에 '''체계적인 무기'''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흑색화약의 주요 재료는 염초(질산칼륨), , 목탄인데 이중 황은 천연재료인데다 예로부터 사용해 왔고[6][7] 목탄을 의미한다. 염초는 특수한 토양에서만 채취되기 때문에 구하기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질산칼륨으로 정제하는 공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화약 제작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8] 따라서 중국의 화약계통 기술서에는 재료만 소개할 뿐 방법은 모든 재료를 적절한 양으로 적절하게 섞은 다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당연하지만 당시 최신 무기인 화약은 지도와 함께 '''국가기밀'''로 다뤄질 정도로 중요했다. 이는 당연한 이야기로 기밀이 아니었던 문익점의 목화드립에 비하면 훨씬 엄중한 기밀.[9] 더구나 고려의 국체를 보전해 주는 대신 고려의 군사력을 의도적으로 약화시키려 했던[10][11] 몽골이 고려가 화약을 개발하도록 내버려둘 리가 없다.
최무선은 이러한 여러 중국의 화약, 화포 기술서를 모아 분석한 후 직접 만들어 보기 시작하는데 그 방법이 매우 위험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중간에 사고사 당하지 않은 것이 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마다 차이가 존재한다. 무작정 위험한 방법만 사용한 것도 아니며, 이미 고려에서도 화약을 소규모로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량생산에 한계가 있을 뿐이지 무작정 밑바닥에서 연구를 시작한 것이 아니다. 때문에 과도하게 위험한 방법을 사용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후대의 가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무튼 이것 저것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 화약을 연구한 것은 확실하다.
여튼 그 후엔 자신과 평소 친분이 있던 강남에 살던 중국 상인(원나라 사람)이 최무선의 국가를 위한 목숨 건 개발 행위에 감복하여 그냥 가르쳐줬다고 하나 최무선 왈, '''이미 그 전에 대충 거의 다 완성했다고 한다.''' 이와 반대로 고려사에서는 원나라 염소장 '이원'에게서 화약 제조기술을 알아냈다고 하는데, 조선 시대의 최해산이나 최무선의 후손들은 중국인의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이미 화약의 체계는 완성했다고 언급하므로, 최무선이 독자적으로 화약의 원리나 제조법은 거의 완성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를 대량생산 그리고 체계화하기 위해서 중국 쪽 지식이 필요했던 정도로 학계서는 본다.
일단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가르쳐 준건 아니고 최무선이 이원에게 의복과 음식을 주어 구슬렸다는 기록도 있으나 최무선의 화약 개발에 대해서는 그 아들과 손자의 진술에도 차이가 있고, 왕조실록에서 권근 등 대신들의 견해도 조금씩 다르다.
아무튼 화약을 양산하는데 성공한 최무선은 이를 도평의사사에 보고하였고, 물론 처음에는 도평의사사에서 "어디서 사기를 쳐?"라며 최무선을 거짓말쟁이로 매도하며 코웃음쳤지만 이후 이를 시험해 확인하고는 화약국(화통도감)을 설치하고 최무선을 제조로 삼아 화약 무기를 개발하였다.

3. 진포 해전


이후 진포(지금의 전북 군산)에 쳐들어 온 왜구들을 상대로 부원수로 출진하여 자기가 개발한 화포를 가지고 왜구들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으며,[13] 이후 태조 이성계는 남아있는 온건파를 견제하기 위해 몇가지 수를 쓰는데 그중 하나가 최무선의 화통도감폐지였다. 결국 최무선은 몸져누워 세상을 떠났다.
이 진포해전을 지휘한 사람은 고려 수군의 숙장 상원수 나세 장군이고, 최무선 장군은 심덕부 장군과 더불어 부원수를 맡았으며, 역시 숙장이자 새로운 수군 창설을 주도한 정지 장군이 작전 계획을 입안하였다. 이 중 정지 장군은 왕조 교체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말년에 큰 고초를 겪었으며, 최무선 공도 막대한 경비 소요를 줄인다는 명분 하에 화통도감이 폐지되는 등 수난을 겪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여진족과의 갈등으로 북방이 어지러워지자 화기전담 부서가 다시 설치되었으며, 이때 최 공의 아들 최해산[14]이 관여해 개발한 화기의 위력을 절감한 조선 조정의 영향으로, 후대로 갈수록 최 장군의 명성이 커졌던 것. 아래 업적 항목에 링크된 고려말 왜구의 침입 관련 내용에 위 숙장들의 활약이 어느 정도 기재 되어 있으니 궁금한 사람은 검색해보시기 바란다.

4. 그가 남긴 업적들


及庚申秋, 倭寇三百餘艘至全羅道 鎭浦, 朝議崔公火藥, 今可試矣。 乃命爲副元帥, 與都元帥沈德符、上元帥羅世, 乘船齎火具, 直至鎭浦。 寇不意有火藥, 聚船相維, 欲盡力拒戰, 茂宣發火具盡燒其船。 寇旣失船, 遂登岸刼掠全羅以至慶尙, 還聚于雲峰。 上時爲兵馬都元帥, 與諸將殲盡無遺。 自爾倭寇漸息, 乞降者相繼, 濱海之民, 復業如舊。 雖由上德應天之所致, 茂宣之功, 亦不小矣。

경신년(1388) 가을에 왜선 3백여 척이 전라도 진포(鎭浦)에 침입했을 때 조정에서 최무선의 화약을 시험해 보고자 그를 부원수(副元帥)에 임명하고 도원수(都元帥) 심덕부(沈德符) · 상원수(上元帥) 나세(羅世)와 함께 배에 화구(火具)를 싣고 곧장 진포에 이르렀다. 왜구는 화약이 있는 줄도 모르고 배를 한곳에 모아 힘껏 싸우려 하였고, 무선이 화포를 쏘아 그 배를 다 태워버렸다. 배를 잃은 왜구는 육지에 올라와서 전라도와 경상도까지 노략질하고 도로 운봉(雲峯)에 모였는데, 이때 태조가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로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왜구를 남김없이 섬멸하였다. 이로부터 왜구가 점점 덜해지고 항복하는 자가 서로 잇달아 나타나서, 바닷가의 백성들이 생업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것은 태조의 덕이 하늘에 응한 까닭이나, 무선의 공도 작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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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 졸기, 태조실록 태조 4년(1395) 4월 19일 임오

그후 여러 화포테크와 주화신기전 테크까지 타는 등 최무선 이후 약 100년간 고려와 조선의 군사력은 차원을 달리 하게 된다.
사실 이 사람이 조선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최무선 덕에 조선 건국 이후 국방에 대한 개념이 '''병력의 수 중심에서 화력중심으로''' 바뀌었다. 물론 완전히 병력의 수를 고려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니다. 다만 기존에는 수량에 우세를 두든 질에 우세를 두든 하나에 열중했다면, 이 이후로는 화력과 수량의 적절한 조화를 추구했다. 이후 병력에 대한 인적 투자가 줄어들 수 있어서 산업에 대한 인력투자가 더 많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군사력에 투입된 인력은 전혀 생산성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둔전 개념 등이 있지만, 이것도 군 유지에 따른 생산성 손실을 메우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 즉, 화약무기를 통해 인력을 절감하고 생산에 더 전념할 수 있었다. 이는 당장 고려와 조선의 인구수와 상비군 숫자를 비교하면 금방 알 수 있다. 물론 그 부작용으로 임진왜란 쯤에는 오히려 국방력이 더 약해졌지만서도.[15]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 활약한 조선 수군의 주무장도 이 최무선-최해산 부자가 개발한 화포류였다. 거북선, 판옥선 등 조선 수군의 대표함들은 모두 조선 초기에 그 기본형과 무장이 정립되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나이가 많다는 이유[16]로 그다지 활약하지는 못했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최무선이 정몽주계에 속했을 것으로 추측을 하기도 한다. 태조 이성계는 최무선에게 검교참찬 벼슬을 주었고, 태조 4년(1395) 4월에 최무선이 죽자 태조는 슬퍼하며 최무선 집안에 후한 부의를 내렸으며 뒷날 우정승, 영성부원군에 추증했다. 최무선은 사망하면서 책 한 권을 부인에게 주면서 '아이가 크거든 이 책을 주라.'는 말을 남겼는데, 부인이 그 책을 가지고 있다가 아들이 나이 열다섯이 되어 그 책을 주었는데, 그 책은 다름 아닌 화약 제조의 비법이 적힌 책[17] 그 외였다고 한다.
최무선과 그 부인 이씨의 합장묘가 개성 오적동 승제문 밖 옥련사라는 절 부근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위치가 제대로 알려져 있지를 않다.
아들인 최해산(1380~1443)과 손자 최공손(생몰년 미상)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화포개발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최해산은 아버지와 다르게 평이 좋지 않은데 이유는 세종 4군 정벌 때 직무유기(정확하게는 최윤덕의 명령보다 늦게 진군을 했다)로 파면될 뻔 했으나 화포 제작의 공과 운빨(세종이 사면령을 내림)로 넘어가고, 이후 강계부사로 있는 도중 직무유기, 공금횡령 등으로 '4군' 중 여연[18]으로 귀양갔다는 사실이다.웃기는 건 저 행동들이 '고의'였다는 것이다. '''"변방에 있는 거 싫은데, 뻘짓해서 파직되면 고향에 갈 수 있겠지?"''' 이딴 생각을 한 것. 하지만 오히려 더 변방인 강계로 귀양 크리.[19]
그런데 생몰년을 보면 알겠지만 최해산은 최무선이 '''56세''' 때 얻은 늦둥이다. 아버지 비전의 화약제조법을 얻은 것도 그렇고, 실록에도 "아들로는 최해산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최무선의 후사는 그가 이은 것이 분명한데, 그 위로 다른 자녀가 있었으나 일찍 죽은 것인지 아니면 첫 장가를 너무 늦게 들어버린 건지 의문이지만 당시 50대 중반은 노인이나 다름없는 나이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흥미로운 부분.
손자인 최공손에 대해서는 듣보잡 수준으로 실록에 언급이 거의 없다. 단종 1년(1453년) 때 공병들을 기한 안에 역소에 보내지 못해 문책을 당했는데, 실록을 기록한 사관들은 성품이 어리석고, 사리가 어두운 인물이라고 깠다. 다만 줄타기는 잘 했던지 우의정 정분을 잘 따라 공조좌랑이 되었고, 이후 계유정난으로 정분이 실각하고 유배를 간 것과 달리 최공손은 원종 3등 공신이 되었다. 생몰년이 알려져 있지 않으나 성종때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그때까지 살아 있던 것으로 보인다.
화약 개발과 진포 해전에 대한 공로를 기리는 의미로 대한민국 해군에서는 209급 잠수함 중 하나에 최무선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참고로 진포 해전의 계획을 입안한 정지 장군도[20] 배수량 1800톤급 손원일급 AIP 잠수함의 2번함에 명명되었다.
소행성 중에 그의 업적을 기린 최무선(소행성)이 있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코에이칭기즈 칸/원조비사 한국판에도 시나리오 3의 재야 인재로 등장하지만 전투가 B라는 걸 제외하면 특출난 점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고려로 플레이할 경우 초반에 인재난에 허덕이므로 등용해 둘 필요는 있다. 징기스칸 4에서는 이성계와 함께 시나리오 4의 고려 장수로 등장하는데 화공 특기를 소유하고 있고 딱히 좋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무난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이 사람을 감안했는지 이 시나리오에서는 고려에 '화포법'이라는 아이템이 있는데 문화치를 올려주는 것 말고는 딱히 메리트가 없다.[21]
북한의 소설가 강학태가 쓴 소설 <최무선>이 국내에 발간되어 있기도 하다. 최근 북한이 핵개발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슬슬 띄워줄 기미를 보이고 있다.(출처: 연합뉴스, 네이버뉴스)
1976년 MBC에서 방영했던 대하사극 예성강은 최무선의 화약제조 과정을 극화한 것이다. 이은성 극본에 주연은 김호영. 여기서는 최무선에게 화약 제조 비법을 가르쳐 준 중국인이 사고에 휘말려 사망하는 걸로 나온다.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그의 아들인 최해산이 주요 인물로 등장해서 최무선에 대해서도 간접적으로 가끔 언급한다.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이인임최영의 대화에서 이름이 언급된다. 다만 바로 다음 사근내역 전투신에서 고려군이 썰려나가는건 덤. 물론 진포에서 타고 온 배 5백 척이 홀랑 불타버리는 바람에 퇴각할 길이 없어지게 된 왜구들이 내륙을 돌면서 더욱 깽판을 치며 그들이 지나간 곳에 남아난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기록이나, 퇴각로가 끊어진 왜구가 더욱 날뛰며 내륙을 돌아 남원 지역으로 몰려가서 그곳에서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 의해 궤멸된다는 스토리라인으로 이어지니만큼 왜곡이라고 하기도 어려울지도.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올랜덤 인물전에서 E급 영웅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매우 낮다.
참고: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1]경상북도 영천시 오계동 마단[2] 글로리아 위인전 등에서는 개경에서 태어났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이는 명백한 고증오류. 모 백과사전에 따르면, 최무선은 1325년 경상북도 영천시 오계동 마단에서 광흥창사(廣興倉使)를 지낸 최동순(崔東洵)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 역시 영천(永川)으로, 시조는 최한(崔漢)이며 아마도 증조부인 최익겸 때에 이르러 영천에서 과거를 통해 개경으로 진입해 들어간 것으로 추측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3] 정몽주의 본관이 영일이기는 한데 고향은 영천이라는 설과 포항이라는 설 2가지가 있다. 그런데 영천시는 포항시와 서로 우리가 정몽주 선생의 고향이라고 분쟁을 벌이기도 했다. 포항에는 정몽주 선생의 호를 딴 '포은'중앙도서관과 '포은'중학교, 정몽주로가 있다. 반면 영천시에는 '포은'초등학교와 '포은'고등학교(원래 금호여고였으나 2014년에 남녀공학으로 전환하면서 교명을 변경하였다.)가 있다. 어쨌든 현재로서는 영천이라는 쪽이 우세한 편으로 영천에는 임고서원과 가설 선죽교, 새로 복원한 포은 선생의 생가가 있다.[4] 개발의사를 타진했다가 거부당했다 한다.[5] 최무선은 광흥창의 책임자인 광흥창사 최동순의 아들이다.[6] 다만 한반도에서 유황 광산이 발견된 건 조선 현종때 일이었다. 그전까진 전량 (일본에서)수입해야 했다. 이 때문에 화약은 최고 귀중품 중 하나였고, 재정부담도 무시 못할 수준이었다. 여기에 총통 만드는 재료인 동철, 즉 구리도 수입품이어서 조선시대부턴 절간에 동종이 남아나질 않았다.[7] 다만 임진왜란 시기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중국 명나라에서 조선에 유황을 군수물자로 제공했다는 내용이 언급된다.#[8] 임진왜란 시기까지 조선의 염초 생산 방식은 민가의 오래된 부뚜막 흙을 긁어서 재료를 조달하는 방식이라 비용과 인력이 많이 들었고 민폐도 장난이 아니었다.[9] 그래서 문익점의 이야기가 최무선의 일화를 원작으로 윤색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항목 참조.[10] 대표적인 것이 일본원정이 실패로 끝난 뒤 고려의 수군을 해체한 것으로 고려는 이것 때문에 훗날 왜구의 침공에 제대로 저항 한 번 못하고 단단히 곤욕을 치렀다.[11] 훗날 조선의 상국이 된 청나라도 비슷한 경향을 보이긴 했으나, 원나라만큼 심하지는 않았다. 청나라가 상국이던 당시의 조선군은 원 간섭기의 고려군에 비하면 군대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한 편이었다. 어느정도 견제는 해두되 위급할 시 차출해서 써먹기 위함도 있다. 예시로 나선정벌 당시 조선에도 병력 보내라고 한게 있다.[12] 다만, 2020년 기준으로 군산 테마파크에 가면 아직도 저런 푯말이 붙어 있다.[13] 이 전투가 세계 최초의 해상에서의 화약 무기 사용이라는 얘기가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12] 세계 최초의 해상 화약 무기 사용은 백년전쟁 당시 1338년 Arnemuiden 전투에서 영국 함대가 대포핸드캐논을 쓴 것이 최초이다. 진포 해전에서 선체에 함포를 장착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당시 해적보다는 군대에 가까운 대규모의 왜선들을 격파한 기록은 도저히 화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에 가깝기에 이때 사용되었고 이를 통해 전세를 순식간에 뒤집었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현대식 함포와는 거리가 다소 멀다.[14] 선친이 저술한 화약수련법을 공부했으며 당대에 화기 연구로 명성이 있있다[15] 다만 이건 조선이 오랫동안 평화로워 북방에서 여진족들을 막을 궁기병만 있으면 충분할 정도로 군사의 필요성이 고려 때보다 낮아진 탓도 있다. 청나라의 팔기군도 17세기에는 매우 강했지만 평화가 지속되자 유명무실해진다.[16] 최무선은 이성계보다도 10살이 많다.[17] 화약수련법, 화포법으로 추정된다. 현재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 외 용화포섬적도라는 그림 또한 최무선의 증손자 최식이 성종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또한 최무선이 만들었다 한다.[18] 오늘날의 중강군으로, '''뉴스에서 겨울철마다 영하 20도 어쩌구 하는 그 압록강변의 그 중강진이다.'''[19] 사실 이런 막장 행동들은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화포 및 화약 제작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 실제로 무려 '''태종''' 앞에서 불경죄를 범하는 등, 다른 사람 같았으면 목이 여러번 날아갔겠지만 그의 화포 기술 때문에 여러 번 용서 받았다. 어쨌든 세종 대에 자신의 비법을 저서로 남겨 국방력 강화에 기여했으니 목을 붙여둔 값은 치른 셈이다. 한 마디로 재능은 아버지 뒤를 이을 만하지만 공직자로서의 자세 등은 호부견자에 가까운 인물.[20] 이 분은 다음 싸움인 관음포 해전에서 공을 세운다.[21] 차라리 고려가 대포를 탑재한 군선을 사용하게 해 주는게 나을 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고려에서 화포가 실전에 투입된 건 우왕 치세라서 그렇게 틀린 고증은 아니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