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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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초상화에 투구를 합성한 그림이다.
阿其拔都
(?~1380년)
1. 개요
2. 다른 기록
3. 정체에 대한 추정
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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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한반도 해안지방을 노략질한 왜구. 아지발도(阿只拔都)라고 쓰는 경우도 있지만 '아지' 역시 이두식으로 읽으면 '아기'로 읽기 때문에 마찬가지 뜻이다.
기록에 등장하는 대목에서 보여준 무용이 대단해서 유명한 점도 있지만, 그 무용 덕분에 '''조선 왕조의 개창자를 유명하게 만들어줘 더 유명한''' 인물이다. 다만 일본 측 기록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아서 그가 당시 일본이나 왜구집단 내에서 실제로 얼마나 비중이 있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홍산대첩, 진포해전에서 패배한 후 삼남의 내륙지방으로 침투한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파견된 이성계와 그의 의형제 이지란황산대첩에서 왜구의 무리와 대전하였을 때, 적진에 나타난 장수이다.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을 다루는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고, 고려사의 기록도 동일하다.

보기에는 나이가 겨우 15, 6세 되었는데, 골격과 용모가 단정하고 고우며 사납고 용맹스러움이 비할 데가 없었다. 흰 말을 타고 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달려 부딪치니, 그가 가는 곳마다 쓰러져 흔들려서 감히 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군사가 그를 아기발도(阿其拔都)라 일컬으면서 다투어 그를 피하였다.

태조는 그의 용감하고 날랜 것을 아껴서 두란(豆蘭)에게 명하여 산 채로 사로잡게 하니, 두란이 말하기를,

“만약 산 채로 사로잡으려고 하면 반드시 사람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아기발도는 갑옷과 투구를 목과 얼굴을 감싼 것을 입었으므로, 쏠 만한 틈이 없었다.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투구의 정자(頂子, 꼭지)를 쏘아 투구를 벗길 것이니 그대가 즉시 쏘아라.”

하고는, 드디어 말을 채찍질해 뛰게 하여 투구를 쏘아 정자(頂子)를 바로 맞히니, 투구의 끈이 끊어져서 기울어지는지라, 그 사람이 급히 투구를 바루어 쓰므로, 태조가 즉시 투구를 쏘아 또 정자(頂子)를 맞히니, 투구가 마침내 떨어졌다. 두란이 곧 쏘아서 죽이니, 이에 적군이 기세가 꺾여졌다. 태조가 앞장서서 힘을 내어 치니, 적의 무리가 쓰러져 흔들리며 날랜 군사는 거의 다 죽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1권 총서 66번째 기사'''

결론은 이성계의 활솜씨를 빛나게 해준 귀한 엑스트라 A. 삼국지로 치면 관우에게 썰리는 안량같은 포지션이다.

2. 다른 기록


동사강목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덧붙여져 있다.

당시 포로되었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아기발도가 이원수(李元帥)의 진(陣) 친 것을 바라보고는 ‘이 군대의 형세는 지난날에 비할 바가 아니니 각별히 조심하라.’ 했다.”

하였다.

백사집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언급도 있었다고 한다.

역대병요(歷代兵要)》를 상고하면, “고려 말에 아기발도(阿只拔都)가 장차 광주(光州) 금성에서 말에 먹이를 먹이겠다고 소리쳤다.”고 기록되었는데, 주(註)에는 지금 담양부에 있다고 하였다.

이 같은 언급을 참조하면 어린 나이에도 왜구 중에서, 적어도 고려를 침략한 왜구 중 지휘관에 상당하는 대단히 높은 지위에 있었던 인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 내내 이성계는 왕조의 창시자로서 찬양해야만 하는 대상이었기 때문에 그 이성계를 빛내는 업적으로 대표되는 아기발도 역시 후대에 이르기까지 태조와 관련해서 지속적으로 언급된다. 실록에는 선조가 이상과 같이 논의한 기록이 있다. 태조가 쓰러뜨린 적들 가운데 네임드급 중 하나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날 경연에서 고(故) 재상 이준민(李俊民)은 이야기가 변방의 일에 미치자, 말하기를 ‘상께서는 왜국을 근심하십니까? 왜인은 근심할 것이 못됩니다.’ 하였다. 내가 무슨 까닭이냐고 물었더니, 준민은 짧은 옷소매에, 단검(短劍)을 들고 맨발로 달리는 것은 잘하나, 그 밖에 다른 장기는 없으니 어찌 적(賊)이 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외숙 조식(曺植)도 항상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내가 ‘그렇다면 아기발도(阿只拔都)가 있는 것은 어쩐 일이냐?’ 하니, 말하기를 ‘아기발도는 주객(主客)의 형세를 헤아리지 못하고 적국에 깊숙이 들어왔으니 어찌 태조의 절제(節制)하는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호걸이 아닙니다.’ 하므로, 나도 그렇다고 답하였다. 준민은 유장(儒將)으로서 명망이 있는 자인데 그 말이 오히려 이와 같았다.

'''《조선왕조실록》선조 39권, 선조 26년(1593년) 6월 17일 경자 7번째 기사'''

승정원일기에는 고종이 각지의 관찰사와 이야기를 나눌 때 전남도 관찰사 조종필과 대화하며 이같이 언급된다.

"曾是太祖高皇帝破阿只拔都, 而其地有勝戰碑矣."

“일찍이 태조 고황제께서 아기발도(阿只拔都)를 격파하였는데, 그곳에 승전비가 있다.”

'''《승정원일기》140책, 고종 37년(1900년) 7월 7일 [양력8월1일] 10번째 기사'''

정약용이 황산대첩비를 읽고 그 감상을 시로 남겼는데 거기에도 언급된다.

3. 정체에 대한 추정


정사의 기록에는 인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아기발도의 아기가 우리말에서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붙이는 존칭사인 '아기'인 것이 확실하며[1] 발도(拔都)는 몽골어로 용사나 영웅을 가리키는 바투르(ba'atur)[2]의 한자 음차이다. 이성계의 일대기에는 오랑캐 장수 호발도 역시 등장하기 때문에 몽골의 영향으로 바투르라는 단어가 고려 말기에는 상당히 흔히 쓰이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는 원간섭기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몽골어 단어를 섞어쓰는 현상은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에서 일본어에서 온 단어들이 쓰이는 것과 비슷한 현상으로 보면 된다.
또한 아기발도가 왜장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몽골식 명칭으로 지칭된 이유가 아기발도가 일본계가 아니라 몽골계가 상주하고 있던 제주에서 출생하여 당시 다국적 해상세력을 구성하고 있던 왜구에 협력한 몽골계 제주인이었기 때문이지 않았는가 하는 추정도 있다(출처: 한국제주역사문화뿌리학).
하지만 아기발도는 일본인이 맞는 것으로 보는 게 정설인데, 조선왕조실록 원문에는 정확하게 이렇게 적혀있다.

我軍稱阿其拔都(아군칭아기발도)

우리 군사가 '아기발도'라 일컬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1권 총서 66번째 기사'''

자기가 아기발도라고 한게 아니라 '''그 당시의 고려인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다.'''
아기발도가 몽골식 명칭인 점은 당시 왜구 토벌전의 주력군인 이성계 군 대부분이 그의 사병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이성계와 그의 사병 대부분은 대몽항쟁 막바지에 몽골에게 넘어간 이후 백여 년 가까이 원의 지배를 받은 동북면 일대 출신이었기 때문에 몽골어로 고유명사를 불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아기 장수'라는 의미의 보통명사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마 본명이 따로 있었을 것이다. 그게 뭐였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다만 '아기'라는 명칭이 일본어로 된 그의 이름이나 호칭을 반영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린 나이임에도 지휘권을 갖춘 장수였던 것으로 보이며, 좋은 갑옷을 입고 있고 기마 무예까지[3] [4] 능숙했다는 기록을 고려하면 평범한 왜구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고려사 변안열 열전을 보면 황산대첩 이후 왜구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온 사람이 왜구들의 동정을 알리는 기사가 있는데, 여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당시 포로가 되었던 자가 적진에서 돌아와, “아지발도가 이장군의 진용이 잘 짜여진 것을 보더니 자기 부하들더러, "이번 군대의 군세를 보니 과거의 장수들과는 비교가 안 된다. 오늘 전투는 너희들이 각각 조심하라.”고 당부하더이다. 애초 아지발도는 섬에 있을 때 출정하지 않으려 했으나 그 무용에 탄복한 왜적들이 굳이 청하여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적의 우두머리들도 그를 보러 올 때에는 반드시 달려와 꿇어 엎드렸으며 부대의 지휘도 모두 그가 맡았습니다.”라고 알렸다.

'''《고려사》 열전 39권, 간신(姦臣) 2, 변안열: 변안열이 양광·전라·경상도 도체찰사로서 왜적을 물리치다'''

이 기사에서 알 수 있는 점은 아기발도는 사실 고려에 침공하는 것을 망설였다는 점, 왜구들도 아기발도를 보면 항상 상전을 대하는 것처럼 대했다는 것인데, 이 기록을 보면 사실 아기발도는 평범한 왜구 우두머리가 아니라 꽤 지체 높은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는 여지도 있다. 특히 이성계의 진용을 정찰하거나 그 진영을 파악하는 모습, 그리고 이성계와 이지란의 협공에 죽기 직전 몸소 필마 단기로 분전하며 사기를 고무하려 한 점은 확실히 평범한 도적떼가 아니라 정규군 무장에 가까운 모습이다.
또한 당시 일본남북조시대의 혼란기였는데 규슈에 근거지를 잡고 있던 남조가 북조에 궤멸당하던 시기와 황산대첩 시기 왜구가 대거 침공해온 시기가 비슷한데, 이 때문에 고려말 왜구를 남조 세력의 '''마지막 발악'''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이러한 견해에서는 아기발도를 남조 측에 선 호족 세력 출신의 장수로 추정하기도 한다. 고려사 변안열전의 기록과 대조해 보면 설득력이 있는 해석이다.관련논문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아지발도와의 발음 유사성을 근거로 그의 정체를 당시 큐슈의 무사 세력이었던 아카보시(赤星) 가문이나 아지히(相知比) 가문의 인물로 추정된다는 설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했듯이 당시의 고려인들이 이름을 몰라 그를 그냥 아기 장수라고 부른 것이기 때문에 이 추정의 설득력은 떨어진다.
다만 아기발도가 뭔가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는가 하는 해석과 달리 이성계를 띄우기 위해 과장되게 기록된 무명 해적 장수일 뿐이라는 견해도 있다. 결국 일본 측 기록에서는 언급되지 않고, 사실상 유일한 기록인[5] 태조실록 총서 자체가 조선왕조실록 다른 부분처럼 사관이 그 당시에 붙어서 일일이 기록한 것도 아니고 이성계의 무용담을 후대에 수집해 전주 이씨 왕가의 창시자로서 미화하기 위한 논조가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4. 대중매체에서


고우영 화백이 그린 만화 '수레바퀴'에도 이성계의 장수 시절을 다룬 파트에서 단역으로 잠시 등장한다. '나이가 어리다'는 실제 기록을 인용했는지 나이가 어린 미소년 장수로 등장하였으나 등장한지 두세 컷도 안 되어서 이성계에게 활을 맞아 죽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왠지 무서운 건 이성계가 쏜 화살이 그대로 입으로 들어가서 꽂혀 죽었다는 것(...). 다만 이는 고우영 화백의 창작은 아닌데, 면갑 때문에 얼굴도 쏠 수 없자 이성계가 투구 끈을 쏘았고, 이에 놀란[6] 아기발도가 입을 벌리자 그대로 제2사를 날려 입을 맞혔다는 전승이 있기 때문.[7] 명궁인 형제가 힘을 합쳐 죽이긴 했는데, 처음 쏜 사람이 이성계인지 이지란인지는 전승에 따라 다르다.
웹툰작가 유승진의 포천에서는 4막 28장(159화)에서 짤막하게 등장하는데, '''아기'''장수 우투리 설화를 엮어서 묘사한다. 작중 왜구들과 싸우던 이성계가 무쌍난무를 펼치던 아기발도를 보고는 이지란과 함께 투구를 벗기고 머리를 꿰뚫어 사살하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이성계가 아기발도를 활로 쏘아죽인 이후 이성계 曰 "그러고 보니 그 어린장수 이름이 우투리였다던가?" 라고 짧게 언급한다. 설화와 연결시키면, 해석하기에 따라서 묘한 느낌이...
드라마 '정도전'에도 아지발도라고 표기되어 등장. 배우 서건우가 연기하였다. 기록상의 묘사처럼 나이가 마냥 어리지는 않지만, 외모가 준수하며 용맹하고 지략이 뛰어난 인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성격은 매우 호전적이며 잔악무도하다. 9화에 첫등장해 고려군을 발라먹는 위엄을 선보이며 10화에서도 이인임에게 등이 떠밀려 억지로 공격을 감행하게 된 이성계와 맞서 잠시 우위를 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죽기를 각오하고 아귀처럼 싸우는 이성계와 이지란의 활솜씨에 당해 쓰러지며 최후를 맞는다. 여기에선 정사의 내용을 각색해서 이성계가 먼저 활을 쏴서 면갑을 벗기고, 그 직후 이지란이 투구를 맞춰서 쓰러뜨린 뒤 이성계가 달려들어서 확인사살을 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8]
고전소설 <옥루몽>의 후반부를 보면 이 아지발도에서 영감을 받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왠지 여기서는 몽고인이다(...). 실제 역사의 아지발도처럼 굉장한 용맹으로 아군을 몰아붙이지만, 역시 역사 속 인물처럼 주인공과 동료 장수의 화살 협공에 의해 죽는다.
루리웹 만화게시판의 패러디 역사만화로 유명한 순욱문약이란 작가의 이성계/이지란 편에선 타이의 대모험흉켈로 패러디되어 등장한다. 이름에 발도가 들어가서 그런지 쓰는 기술은 죄다 비천어검류의 기술들. 여기선 이성계가 투구를 맞히고 이지란이 헤드샷을 날려 처치하는데, 죽으면서 "창천항로의 관우는 헤드샷을 맞아도 안 죽던데..."드립을 치기도 했다.(...)
[1] 아기는 이미 고대부터 원형이 거의 변하지 않은 순우리말이다. 800여년 전 김유신의 여동생 문명왕후를 어릴 때 아지(阿之)라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2]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붙는 그 단어가 맞다. 울란바토르는 몽골어로 '붉은 영웅'이란 뜻.[3] 이 부분이 잘 이해가 안 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원래 사무라이 즉 일본 무사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마 궁수였다. 그리고 고려 말 왜구들이 극성을 부리던 서기 14세기 일본 무사들은 말을 타고 칼과 창을 든 채로 적을 향해 돌격하는 기마 백병전에 능숙했다. 심지어 14세기 일본 무사들 중에서는 말에 쇠사슬로 만든 갑옷인 마갑을 입힌 중무장 기병들도 존재했다. 지금도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는 일본 무사들이 말에 입히던 마갑의 유물이 한 점 보관되어 있다. 출처: 잊혀진 전쟁 왜구/ 이영 저/ 에피스테메(방송대출판문화원)/ 2007년 04월 출간[4] 물론 이후 조총의 도입으로 백병전의 페러다임이 변화해서 기마병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5] 고려사의 기록 역시 거의 같은 시기 같은 집필진이 썼으므로 포함[6] 혹은 투구를 맞혀 기울어져 투구 끈이 목을 조른 탓에 순간적으로 숨을 들이키다가[7] 1969년에 초판이 나온 박흥민의 <이야기국사>에 이 이야기가 나온다. 이성계가 먼 거리에서 쏜 화살이 투구를 맞추자 놀란 아기발도가 입을 딱 벌렸고, 연달아 날린 화살이 입을 꿰뚷어서 죽였다고.[8] 놀라 입을 벌리게 하고 입 안을 쏘아 죽였다는 전승보다 면갑을 벗긴 쪽이 사실성이 있다. 극에서는 아지발도가 입 부분이 뚫린 천 같은 재료로 된 면갑을 쓰고 있는데, 일본 면갑은 나무 같은 것으로 만들지만 입 구멍이 커서 입 안을 노린다면 그냥 쏘면 된다. 입은 있지만 구멍은 막힌 것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