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턴 애슬레틱 FC
[clearfix]
1. 개요
찰턴 애슬레틱 FC(Charlton Athletic Football Club)는 잉글랜드 런던 남부의 찰턴에 연고지를 둔 축구 클럽으로 1905년 6월 9일 설립하였다. 런던의 프로축구 클럽들 중 중소 규모의 클럽으로 남부 런던의 밀월 FC와 크리스탈 팰리스 등과 라이벌리를 형성하고 있다.
2. 역사
2.1. 창단과 초창기
1905년 6월 9일, 동런던에 위치한 이스트 무어가(East Moor Street.)에서 평균 15세 안팎의 청소년들이 모여 창설되었다. 1906년부터 유소년 리그에 본격적으로 참가하여 당시 지역리그였던 루이샴(Lewisham) 3부리그에서 18경기 17승1무라는 기록을 세운다. 그리고 약 10년간 20개 이상의 트로피를 차지하고 루이샴 1부리그에서 활동했다.
원래 찰튼이 위치한 지역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팀이 울위치 아스날이었으나 아스날이 북런던으로 1913년 이동하며 주변에 라이벌이 없어졌다. 1919년 현재의 홈구장인 더 밸리에 경기장을 세우고 홈구장으로 삼았다. 1920년에 프로 클럽으로 전환하였고, 1921년 풋볼리그 디비전3에 참가하였다. 1923년에는 FA컵 8강에 올라 자이언트 킬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프로 전환 이후 8년 간 3부리그에 머물고 이후 4년간 2부리그인 디비전 2에 머물며 이렇다할 성적을 거두지 못했고 1933년 결국 4년 만에 디비전 3으로 다시 강등되었다.
2.2. 전성기 1 : 지미 시드 시절
강등된 1933년 클랩튼 오리엔트의 감독이었던 지미 시드(Jimmy Seed) 감독이 부임했고 이때부터 그는 찰튼 역사상 최장기간, 최다경기인 23년간 730경기를 지휘했다. 그는 부임 첫해 디비전 3에서 5위에 올려놓고, 두 번째 시즌인 1934년에 영입한 팀 최고의 수문장인 샘 바트람(Sam Bartram)을 필두로 1934-35 시즌 디비전 3에서 우승하며 디비전 2로 승격했다. 그리고 세 번째 시즌인 1935-36 시즌에는 디비전 2에서 2위에 올라 창단 후 처음으로 디비전 1을 밟게 되었다. 백투백 승격으로 1부리그에 올라온 사례는 영국리그 출범 이래 최초였다. 그리고 첫 1부리그 시즌인 1936-37 시즌 보란듯이 디비전 1에서 준우승을 하는 믿기지 않는 호성적을 기록했다. '''이는 찰튼 역사상 리그 최고 순위'''이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된 1939년 이전까지 4위, 3위를 기록하며 강팀으로 자리잡았다. 종전 이후에도 한동안은 찰튼은 강팀으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1946년 풋볼리그가 재개되었고 그해 FA컵 결승전에 진출하여 더비 카운티를 상대했는데 연장전 끝에 4:1로 패배하며 안타깝게 준우승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47년 FA컵에서 번리 FC를 상대로 연장전 114분 크리스 더피의 결승골로 1:0으로 승리, FA컵에서 구단 처음으로 우승하며 '''클럽 역사상 첫 메이저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이 시기 찰튼은 평균 관중수가 4만명에 이르고 리그에서 가장 큰 축구장인 더 밸리(최대 7만명)을 소유하며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그 흐름은 얼마 가지 못했다. 종전 이후 FA컵에서 우승하기는 했지만 리그 성적은 종전만큼 기록하지 못했다. 1949년부터 1956년까지 1952-53 시즌 5위한 것을 제외하고 하위권에 머물렀으며 FA컵도 우승 이후 8강을 뚫지 못하며 침체기를 겪었다. 시드 감독이 구사하던 2-3-5 시스템은 WM 전술의 도입으로 점점 낡은 구식전술이 되었다. 여기에 경영진의 소극적인 투자가 더해져 좋은 선수들이 유입되지 못했고, 클럽과 경기장 관리도 소홀해져 관중수도 줄어들었다. 걸출한 스트라이커 에디 피르마니(Eddie Firmani)와 올라운드 플레이어 존 휴이(John Hewie)가 있었지만 팀의 부진을 막기엔 역부족이었으며 결국 1956년, 클럽 역사상 최고의 감독이었던 지미 시드와 최고의 선수였던 샘 바트람이 동시에 은퇴했다. 그러나 시드 감독과 바트람 골키퍼가 은퇴하자마자 바로 다음시즌이었던 1956-57 시즌 21년 만에 꼴찌인 22위로 디비전 2로 강등되고 말았다.
2.3. 암흑기 1 : 잃어버린 20년
1부리그에서 첫 강등 이후 찰튼은 수십년간 별볼일 없는 시절을 보냈다. 1957-58시즌부터 디비전 2에서만 쭉 머물다가 1971-72 시즌 21위를 기록하며 37년 만에 3부리그인 디비전 3로 떨어졌다. 디비전 2에 있는 동안 재정악화로 투자가 빈약했고, 감독을 여럿 교체했지만 성적은 영 신통치 않았고, 관중 유입도 줄어드는 악순환이 있었다.
1973년 디비전 2에서 두각을 나타낸 데렉 헤일즈(Derek Hales)를 영입했다. 그는 368경기 168골을 득점하며 찰튼 역사상 최다골을 넣었으나 안타깝게도 찰튼에서 디비전 1을 밟지 못했다. 당시 감독 앤디 넬슨(Andy Nelson)은 헤일즈를 적극 기용하면서 윙어인 콜린 포웰(Colin Powell)과 공격수 마이크 플래너건(Mike Flanaga)과 합을 맞췄다. 이 셋의 강력한 공격력을 활용하여 1975년 찰튼은 3년 만에 디비전 2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승격 이후 재정지원이 빈약해져 주축 선수들의 이탈이 있었고 결국 5년 만인 1980년 다시 디비전 3으로 강등되었다. 1년 만에 다시 디비전 2로 돌아왔지만 런던의 한 소규모 구단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위태로운 행보가 이어졌다.
2.4. 파산과 더 밸리를 떠났던 1980년대
그러다가 1982년 찰튼의 소유주였던 글릭스텐 가(Gliksten Family)에서 젊은 사업가 마크 헐리어(Mark Hulyer)에게 경영권이 넘어갔고, 레니 로렌스 2군 감독을 1군 감독으로 승진시켰다. 그 해 10월 그는 발롱도르 수상자인 세계적인 선수 알란 시몬센을 FC 바르셀로나에서 깜짝 영입하며 세계 축구계를 놀라게 했다. 디비전 2의 소규모 클럽에겐 이 도박은 무리수였다. 그는 16경기 9골로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그의 엄청난 이적료와 급여 지급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고 팀 성적도 그리 좋아지지 않았다. 결국 1년 후인 1983년 시몬센을 자유계약으로 방출하며 찰튼은 심각한 재정난에 놓였고 결국 1984년 3월 8일 찰튼은 파산 선고를 받았다. 17시까지 돈을 구하지 못할 경우 해체 위기에 놓였으나 해체를 25분 앞두고 극적인 긴급 보조를 받으며 역사를 존속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985년 브래드포드 시티 구장 화재의 대참사가 발생하며 영국 정부가 대대적으로 부실 경기장에 대한 감사에 나섰고, 찰튼의 홈구장인 "더 밸리"에도 칼을 들었다. 그러나 재정이 파탄난 상황에서 더 밸리를 보수할 수 없었고 결국 1985년 9월 찰튼 경영진은 크리스탈 팰리스의 홈구장인 셀허스트 파크로 '''홈구장을 이전'''하는 결정을 했다.[3] 이 결정은 1919년 이래 66년간 더 밸리를 홈구장으로 사용했던 찰튼 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때부터 찰튼은 크리스탈 팰리스와 한지붕 두가족의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두 팀은 디비전 2에 함께 속해있었고 라이벌 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경기장을 옮긴지 1년도 안된 1985-86 시즌 '''디비전 2에서 준우승'''하며 '''1957년 이후 29년 만에 1부리그인 디비전 1으로 승격'''했다. 찰튼은 해체 직전까지 몰렸던 암울한 재정 상황 때문에 유소년 출신 선수들을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공격수 칼 리번(Carl Leaburn), 미드필더 롭 리(Rob Lee), 미드필더 마크 스튜어트(Mark Stuart), 라이트백&수비형 미드필더 대런 피처(Darren Pitcher)가 대표적이었다.
1부리그인 디비전 1에서 어렵게 4년을 버텼지만 찰튼 팬들에겐 남의 집에서 셋방살이하는 신세는 결코 즐겁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집주인인 크리스탈 팰리스는 승격에 계속 실패하면서 세입자인 찰튼은 1부리그에 있고 집주인인 팰리스는 2부리그에 머무는 상황이 지속되며 두 팀 간의 라이벌 관계는 더욱 심해졌다. 그래서 찰튼 팬들은 원래 홈구장인 더 밸리로 복귀할 것을 구단에 지속적으로 요청했고, 1989년 마침내 찰튼 구단도 공식적으로 팬들의 요구에 동의했다. 찰튼 팬들은 자발적으로 황폐화된 더 밸리 정리 작업을 적극 도우며 더 밸리로의 복귀를 꿈꾸었다.
2.5. 더 밸리 복귀와 프리미어리그 승격(1990~1998)
더 밸리 복귀 계획은 1990년, 안타깝게도 지방 의회에 의해 무산되었다. 그러자 찰튼 팬들은 "밸리 파티(Valley Party)"라는 단체를 만들어 더 밸리 복귀 운동을 펼쳤다. 비록 그 해 찰튼은 4년 만에 디비전 2로 강등되었지만 팬들은 더 밸리 복귀가 더 우선이었다. 구단과 "밸리 파티"는 더 밸리 복귀에 더욱 박차를 가했고, 1991년, 드디어 "더 밸리"로의 복귀가 실현되었다. 이를 위해 잠시 웨스트햄의 홈구장이었던 업튼 파크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1991년 12월 마침내 찰튼은 기존 홈구장이었던 "더 밸리"로 복귀했다. 팬들은 기쁨의 환성을 외쳤다.
그러나 1982년부터 9년 동안 찰튼을 1부리그로 이끌고 지휘했던 레니 로렌스(Lennie Lawrence) 감독이 미들즈브러 FC로 떠나면서 찰튼은 급하게 플레잉코치였던 스티브 그릿(Steve Gritt)과 앨런 커비쉴리(Alan Curbishley)를 공동 감독으로 세웠다. 둘은 5년간 공동감독으로 찰튼을 이끌었고, 커비쉴리는 15년을 지휘하며 지미 시드에 이은 찰튼의 전설적인 감독이 되었다.
찰튼은 좋은 분위기 속에서 리빌딩을 시작, 하부리그에서 검증된 선수를 영입하던 기존 방향을 버리고 유소년 정책을 강화화여 재능있는 신인들을 배출했다. 윙어 션 뉴튼(Shaun Newton)과 센터백 리차드 루푸스(Richard Rufus)가 대표적이었다. 1995년에는 공동감독이었던 스티브 그릿이 찰튼을 떠나며 커비쉴리가 단독 감독이 되었다. 그러면서 유소년 육성과 함께 베테랑 영입을 병행했다. 1996년엔 디비전 3(4부리그) 콜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25살의 미드필더 마크 킨셀라를 영입했고 1997년엔 유소년 선수이자 향후 잉글랜드 국가대표 미드필더로 성장하는 스콧 파커가 데뷔했다. 또한 폴 콘체스키도 이 시기에 데뷔했다. 또한 30살의 스트라이커 클리브 멘돈카가 영입된다. 이러한 커비쉴리의 육성과 영입 정책으로 점차 강해진 이 팀은 1997/98 시즌에서 4위로 플레이오프에 나가 선덜랜드 AFC와의 플레이오프 결승전에서 멘돈카의 해트트릭으로 4:4 무승부 이후 승부차기 끝에 우승하여 프리미어리그에 승격했다. 1990년 이후 8년 만의 1부리그 승격이었고 더 밸리에서 1부리그를 맞이하게 된건 1957년 이후 41년 만의 일이었다.
2.6. 전성기 2 : 앨런 커비쉴리가 지도했던 황금기(1998~2006)
그러나 승격 후에는 부진한 모습을 보여 한 시즌만에 18위로 아깝게 강등당했고, 1999-2000 시즌에 우승을 하며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로 자동 승격하였다. 프리미어리그에서는 앨런 커비실리 감독의 지도하에 부족한 자원으로도 매번 선전하며 중위권을 유지했으며, 유명세보다 미래에 개화될 실력을 우선하는 혜안으로 요나단 요한슨, 숀 바틀렛, 클라우스 옌센 등 제3세계 선수들을 주로 발굴해 개화시켜줬으며, 폴 콘체스키와 스콧 파커는 2002 한일월드컵 때 잉글랜드 국대에 선발됐다. 특히 2002-03 시즌 때 초반에 7위까지 오르다가 이변을 하는 듯했으나, 뒷심 부족으로 12위로 떨어진 바 있었다. 그래도 2003-04 시즌엔 최고 성적인 7위를 기록했다.
2.7. 암흑기 2 : 2006년~현재
그러다가 커비실리가 떠난 뒤인 2006-07 시즌에 성적이 폭락하며 2006년 11월에 이안 도위 감독을 경질하고 레스 리드가 선임되었으나 50일 만에 역시 경질되었다. 그리고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에서 부진으로 경질된 과거 찰튼 선수 출신 앨런 파듀 감독을 선임했다. 그리고 커비실리 전 감독은 웨스트 햄 감독으로 부임해서 사실상 강등권 팀끼리 감독을 맞바꾼 모양새가 되었는데, 커비실리의 웨스트 햄은 15위로 잔류에 성공한 반면 파듀의 찰튼은 19위를 기록하며 챔피언십으로 강등되었다. 지미 시드가 떠나자마자 강등된 역사를 이번에도 반복했다.
강등 후 첫시즌이었던 2007-08 시즌에는 11위를 차지하며 중위권에 머물렀고, 2008-09 시즌에는 챔피언십에서 최하위 24위를 차지하며 3부리그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파듀는 전반기 때 강등권으로 보낸 뒤 경질되었고 필 파킨슨이 후임이 되었지만 끝없는 나락 끝에 프리미어리그 강등 2년 만에 리그1으로 떨어졌다. 2011-12 시즌 찰턴의 레전드 선수 출신인 크리스 파웰 감독의 지도하에 3부리그에서 우승하며 4년만에 2부리그로 승격하였다.
2012-13 시즌에는 시즌 후반으로 갈수록 순위를 끌어올리며 9위를 차지하며 중위권에 안착하였다. 그러나 2013-14 시즌에는 강등권 다툼을 하며 크리스 파웰 감독을 경질해야 했다. 최종 성적은 13승 12무 21패, 승점 51점으로 18위로 잔류에 성공했다.
14-15시즌은 45라운드까지 10위를 유지하며 리그 잔류에 성공했다. 조 고메스가 리버풀 FC로 이적했다. 아직도 유망주들은 간간히 나오는 듯.
15-16시즌은 22라운드까지 23위로 처져 리그 1 강등권으로 추락했다. 그나마 19위랑 3점차라서 아직 희망이 남아있는 편.
43라운드 볼턴 원더러스와의 경기에서 0:0으로 비기면서 풋볼 리그 원 으로 강등됐다. 여담으로 40득점 승점 40점 골득실 -40로 트리플 40을 기록하는 신기한 성적을 찍었다. 그리고 강등에 빡친 팬들은 구단주가 생일상 받는 꼴이 보기 싫어서 '''벨기에로 건너가서''' 조롱조의 생일 축하합니다를 불러줬다는 후문.
17-18시즌은 6위로 승격플레이오프에 올랐지만 3위 슈르즈버리에게 1차전, 2차전 0:1 합계 0:2로 패하면서 승격에 실패했다.
18-19 시즌 46라운드 최종 승점 88점으로 3위에 오르며 승격 플레이오프를 치루게 되었다.
승격 플레이오프 준결승전에서 돈캐스터 로버스를 승부차기 끝에 격파하고, 웸블리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전반 4분만에 어이없는 자책골로 한 골을 선덜랜드에 내줬으나, 94분 패트릭 바우어의 극적인 골로 2-1로 승리하며 3년만에 다시 챔피언쉽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2019-20 시즌, 3년 만에 돌아온 챔피언십에서 초반 6경기 4승2무로 선전했으나 DTD의 법칙을 피해가지 못하고 10월 이후엔 11경기 무승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하위권으로 내려가게 되었고 한동안 아슬아슬하게 잔류권에서 줄타기 행보를 보였으나 강등권까지 쳐졌던 스토크 시티와 미들즈브러, 위건 등이 반등하기 시작하며 챔피언십 생존이 위태로워졌다. 결국 37라운드 홈에서 강등권 경쟁팀 미들즈브러에 홈에서 0:1로 패하며 22위로 시즌 처음으로 강등권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후 19~21권에서 간당간당하며 생존을 이어나갔지만 마지막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0:4 대패, 또 반즐리가 2경기 승리를 거둠에 따라 22위로 강등을 당했다. 2007년 프리미어리그에서 강등된 이후 벌써 3번째 3부리그 강등이다.
3. 여담
과거 앨런 파듀, 스콧 파커, 알렉스 송, 존조 셸비, 데니스 롬메달, 오구치 오니우 선수가 뛴 팀으로 알려졌다. 중국인 선수 정즈[4] 가 0607 시즌 임대로 EPL에서 활약한 경험이 있다. 이때의 활약으로 팀은 강등되었지만 정즈는 완전 이적하여 09년까지 뛰었다. 또한 레자 구차네자드 선수도 뛰었던 바 있다. 2016년 2월에 윤석영이 임대로 팀에 영입되어 시즌 종료까지 뛰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