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발

 


1. 개요
2. 자연현상의 하나
3. 창발주의 : 전체론
3.1. 생기론 Mk.2 인가?
3.2. 지적설계 Mk.2 인가?
3.3. 한계점
3.4. 현황과 미래
4. 관련 문서


1. 개요


'''창발'''()이란 "떠오름" 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으며, 21세기 들어 중요한 키워드로 각광받고 있다. 당초 자연과학에서 제안된 이 단어는 사회과학에서도 적용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심지어 현대에는 소위 "창발 경영", "창발적 광고", "창발적 플레이" 같이 여기저기에 인기리에 쓰이고 있는 단어이다.

2. 자연현상의 하나



쿠르츠게작트의 영상.
상위 수준의 특성 중에서 그것을 이루는 하위 수준의 특성들 속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환원 불가능한 특성이 나타나는 현상. 이 현상은 그 하위 수준에서는 관찰되지 않는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게 뭔 소린가 싶을 수 있으니 흔한 예를 들어 보자. 먼저 자연현상의 예를 들면, 개미 군체의 대규모 분업사회를 들 수 있다. 한 마리의 개미는 그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분업을 이루어내기는커녕 이해하지도 못한다.[1] 그런데 이런 개미들이 수만, 수십만 마리가 모이면서부터 점차 뭔가 체계가 잡히고 조직화가 시작된다. 개미마다 역할이 정해지고 업무가 세분화되는 것이다. 한 마리의 개미 수준에서는 관찰되지 않던 특성이, 개미 집단의 수준에서는 비로소 관찰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사회현상의 예를 들어 보자. 2002년 월드컵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빨간 옷을 입고 길거리로 몰려나와 응원을 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평소에는 빨간 옷을 입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거대한 집단의 복잡한 상호작용으로 인해, 마침내 그들은 "Be the Reds!" 라 적힌 빨간 옷을 입었다.
창발에 대해 논의하는 다른 해외 원서들을 살펴보면 종종 다른 자리 입체성 조절(Allosteric regulation)이라는 개념이 창발의 예로 등장한다. 생화학에 관련된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할 수는 없지만, 이와 관련된 단순한 화학적 결합의 원리들이 모이고 모여서 마침내 거대분자 (macro-molecule) 수준에서 (화학 수준에서는 예상치 못했던) 생리학적인 새로운 부가 효과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창발은 언뜻 기존 서구사회의 주류적 학문연구 흐름과 배치되는 측면이 있다. 전통적으로 서구의 지성은 어떤 대상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그것을 잘게 쪼개어서 각각의 성질을 규명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알게 된 지식들을 싹싹 긁어모은 후, 그 지식들의 합이 곧 당초에 우리가 알고자 했던 대상에 대한 지식과 정확히 동일하다고 간주해 왔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는 창발의 존재 자체를 장담할 수가 없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보아서 창발 자체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니 골칫거리가 된다. 우리는 각종 물리 · 화학적 결합으로 형성된 단백질들의 덩어리이면서, 복잡하게 기능하는 기관들과 체계들을 그 속에 갖추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우주에서 제일로 복잡하다는 "의식"(conscious)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의식들이 모이고 모여서, 싸움이 일어나고 갈등이 생기다가 다시 화해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랑의 열병을 앓다가 실연의 아픔에 눈물짓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이 모이고 모여서, 국제정세는 요동치고 전쟁이 일어나며 달러화 가치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수많은 난민들이 줄지어 고향을 떠난다. 이 세상과 그 생활권(biosphere)이 단지 물리적, 화학적 요소들의 합과 동일하다면, 물리와 화학의 언어로 이를 어찌 설명해야 하겠는가?
종래에는 어떤 대상 (ABC) 가 있을 경우, 그 요소 (A) 와 (B) 와 (C) 를 찾아서 분해하고, 각각의 특성을 규명하고자 노력했다. 찾아본 결과 (A) 는 예컨대 a1, a2, a3, ... 의 특성이 발견되었고, (B) 와 (C) 역시 마찬가지로 b1, b2, ..., c1, c2, ... 같은 식으로 발견되었다고 가정하자. 이를 통해 학자들은 (ABC) 의 특성들은 a1 + a2 + a3 + ... + c59 + c60 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환원의 논리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ABC) 의 새로운 특성 d1, d2 등이 발견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예컨대 a23 과 c49 같이 불특정한 특성들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일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관찰할 수 없었던 c61, c62, ... 와 같은 또 다른 "잠재력" 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학자들은 창발에 대해서 두 가지 정도의 설명을 시도한다. 하나는 다분히 환원주의적인 접근인 상관성(correlation)이다. 즉, 사랑을 느끼는 것과 체내 옥시토신 분비량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사랑을 느끼는 것은 옥시토신의 높은 분비 수준과 본질적으로 같다고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창발이라는 것은 어쩌면 함께 움직이는 관찰 대상들을 억지로 따로 구분지으려는 것일 수도 있다. 한편 창발에 대한 다른 시각은,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로 설명하려는 것이다. 이는 복잡계 이론의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인데, 특정 방향과 환경적인 상태 속에서 그 숨겨진 잠재성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상관성을 지지하는 많은 환원주의적 학자들은 창발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들을 갖고 있다. 크게 분류하자면 대략 세 가지 정도 반응이 있을 수 있다. '''1)''' 극단적으로 강경하게 환원주의를 설파하는 어떤 학자들은 "환원적 설명만으로 완전하며, 창발은 단지 환원적으로 해명되길 기다리는 평이한 현상일 뿐" 이라고 여길 수 있다. '''2)''' 어떤 학자들은 환원주의적 접근이 창발을 다루는 데에서 분명히 일정 부분 실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만족할 만한 설명으로 간주" 할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3)''' 가장 조심스러운 어떤 학자들은 환원주의의 한계를 통감하면서도, "이보다 더 나은 설명이 달리 없는 이상, 가장 경제적인 설명을 선택할 뿐" 이라면서 아쉬워할 것이다.

3. 창발주의 : 전체론


'''emergentism / holism'''
이 창발의 관점에서 연구의 틀을 설정하려는 경향을 창발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2] 환원주의의 분해하는 특성에 대비하여 "전체를 바라본다" 는 의미에서 '''전체론'''이라고 부를 수도 있으며, 대중적으로는 이 표현이 좀 더 직관적일 것이다. 서구 지성의 주류를 이루는 환원주의의 맹점에 대해 우려하는 비서구권 연구자들과, 환원주의가 무조건 옳을 것이라는 생각을 자성하는 소수의 연구자들에 의해 창발주의의 가치가 재평가되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서는 개념적으로 상당한 혼동이 발생할 여지가 다분하다. 창발주의는 종종 환원주의의 대척점에 놓여 있다고 여겨지거나, 논리적으로 반(反)의 관계에 해당한다고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환원주의의 안티테제는 엄밀히는 반환원주의(anti-reductionism)이다. 위키에서 길게 풀어 설명하려면 지나치게 어려워지지만, 반환원주의 진영에서도 굳이 분류하자면 다양한 분파와 입장들이 갈라질 수 있다. 물론 창발주의라는 개념이 여기서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일단은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3.1. 생기론 Mk.2 인가?


일부 학자들은 창발주의가 점차 인기를 끄는 것을 보면서 "오래 전에 죽었던 생기론(vitalism)이 간판만 바꿔서 다시 돌아왔다" 고 우려하기도 한다. 물론, 전체론 자체가 그 뿌리를 되짚어 올라가다 보면 생기론과도 맞닿아 있는 것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창발주의 자체가 생기론의 영향을 받은 것은 전혀 많지 않다. 이미 생기론은 그 결함과 방법론적 문제가 진작에 밝혀져서 폐기되었을 뿐이며, 창발주의 역시 그들의 한계점에 대해서는 이미 인식하고 극복한 상태이다. 생기론이 "인간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다!" 라면서 초자연적 실재[3]의 특성적 개입을 주장했다면, 창발주의는 "인간은 단순히 원자들의 합, 화학적 결합의 결과물이 아니다!" 라면서 고수준에서의 특성들의 발현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 생기론자들은 (ABC) 에서 갑자기 나타난 d1, d2, d3 ... 에 대해서 그것이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초자연적인 어딘가로부터 추가된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는 과학적 방법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방법론이다. 냉정히 말하면 이는 개인적인 신학이고, 과학의 영역에 발붙일 수 없는 종류의 주장이 되는 것이다. 반면 창발주의자들은 자연주의적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들은 d라는 특성의 출현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a, b, c의 특성들을 주목하여 바라본다. 기존에 밝혀질 만큼 밝혀졌다고 여겨지고 있긴 하지만, 그들의 상호작용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그들의 잠재성이 어떻게 창발을 일으켰는지가 열쇠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3.2. 지적설계 Mk.2 인가?


물론 창발주의의 여러 논거들은 지적설계 진영에서 써먹기에는 꽤 편할 것이다. 실제로 유명한 환원주의자들은 한편으로는 유명한 무신론자들이기도 하다. 특히나 환원주의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대상이 존재하고, 바로 이를 지적하는 것이 창발주의이므로, 창발주의는 그들의 전매특허인 간극의 신 논제를 위해 봉사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4] 이런 점에 있어서는 창발주의 진영에서 자체적으로 선긋기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논의를 약간 바꾸어서, 반환원주의적 흐름 전체를 지적설계로 싸잡아 묶는 것은 문제가 있다. 여기에는 반환원주의적 자연주의(anti-reductionistic naturalism)[5]를 비롯하여 시스템 이론가들이나 동양종교 및 철학 사상가들도 포함될 수 있다. 이들 중 절대 다수는 지적설계 진영과 무관하며, 도리어 반환원주의 진영을 지적설계의 후신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심각한 흑백논리에 해당한다.
물론 소수의 종교를 가진 과학자들이 창발 개념에 좀 더 호의적이기는 하다. 유명한 유신론적 진화론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T.Dobzhansky) 같은 사람들도 그렇고, 상술했듯이 나무보다는 숲을 볼 것을 강조하는 동양종교의 전체론적 가르침도 있고 해서, 이런 사람들은 종교적 동기에 의해 창발 개념에 더 친근함을 느꼈을 수는 있다.

3.3. 한계점


이들조차도 창발을 "신비"(mystery)라고 부른다는 게 문제다. 아직까지도 '''창발이라는 현상의 메커니즘에 대한 명쾌한 설명은 완성되지 않았다.''' 즉, 창발주의자들은 환원주의자들에게 "환원의 틀에 갇혀서 창발의 가능성을 간과하지 말라, 창발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의 문제는 잘 제기했지만, 정작 그들을 테이블에 끌어내 놓고 그럼 그 창발의 메커니즘이 뭐냐고 물어보면 본인들도 "음, 그게..." 하는 답답한 모습만을 보이는 데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은 창발을 강조하고, 매우 중시하고, 자연과 사회를 이해하는 주된 원리로 인식하고 있지만, 정작 창발의 정체와 특성, 메커니즘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바가 없다. 환원주의자들이 보기에, 이런 상황에서는 결국 "아하, 여전히 환원주의의 편에 서는 것이 더 안전하겠군!" 이라는 결론을 얻게 될 뿐이다.
일부 창발주의자들은 환원 대 창발의 논쟁이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철학(과학철학)의 영역에 속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창발주의가 과학의 영역에 포섭됨으로써 환원주의적인 접근을 "대체" 할 수는 없으며, 그보다는 상호경합적인 철학적 논쟁으로 남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창발주의는 본질적으로 과학이 아닐 수 있기에 과학의 영역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며, 그렇다면 결국 철학의 링에 대신 올라서서 환원주의와 대등한 대안적 관점의 지위를 얻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연구자들은 그들의 선호나 세계관, 가치관에 따라서 환원주의 혹은 창발주의 중 하나를 골라서 그들의 조망(perspective)으로 삼게 될 것이다.

3.4. 현황과 미래


'''상당히 안습하다.''' 창발이라는 개념이 대중적으로 엄청난 돌풍을 일으키는 것과 달리, 창발주의는 학계에서 별로 좋은 취급을 받고 있지는 않다. 당장 가장 유명한 창발주의자로 꼽히는 폴 데이비스(P.Davis) 같은 경우, 가장 온건한 평가가 "몽상가" 이고 가장 과격한 평가가 "타락한 과학자" 정도다. 환원주의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학자들이 나름 존재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자연과학 분야에서 환원주의가 엄연한 방법론적 주류임은 부정하기 힘들다. 그래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탐구해 보려는 학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부분. 그리 오래 전 일도 아니지만, 사회생물학이나 통섭(consilience) 운동에 대해서도 상당한 반대 의견이 나왔던 것 역시 상위 학문으로서의 방법론적 창발을 신뢰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창발주의는 어느 정도는 환원주의에 대한 인기에 그 운명이 결부되어 있다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환원주의가 정치이념과 엮여 극단적으로 폭주하기 시작하면, 그 반동으로 사람들이 창발주의에 주목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들을 차치하자면, 역시 창발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개념을 먼저 정확히 정립하고 해결하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결정적일 것이다. 가장 사소한 창발일지라도 어쩌면 그 상호작용의 복잡성은 어지간한 대규모의 난류(turbulence)에서 발생하는 복잡성에 버금갈지도 모른다. 이런 부분들에 대해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만약 알면 어떻게 설명되는지, 모르면 왜 모를 수밖에 없는지 향후 연구에서 밝혀지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해당 본문을 읽고서 "창발"에 대한 정의를 내리자면, "하위 단계(예: 물리학, 화학 등)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상위 단계(생물, 의식, 사회현상)의 특성의 출현"으로 그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창발"의 정의를 이렇게 내리면, 모든 "창발"을 꿰뚫는 어떤 추가적인 과학적 법칙이 나타나리라 기대하기 보다는 각각의 하위 단계와 그 하위 단계보다 상위인 단계 사이의 법칙들이 각각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면, 물 분자만을 보다가 물 분자간의 상호작용을 볼 때는 수소결합을 봐야하고, 개별 인간만을 보다가 여러 인간 간의 상호작용을 보려면 문화, 언어 등을 봐야하는 등. 단순히 이러한 "하위 단계(예: 물리학, 화학 등)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상위 단계(생물, 의식, 사회현상)의 특성의 출현" 그 자체를 "창발"이라고 할 뿐, 여러 창발의 경우마다 그 창발에 대한 설명은 각각의 경우마다 다를 것이라는 것.
그리고, 이 정의를 가지고 다시금 생각해보면, 결국 이 "창발"은 "각 객체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는 '''미시적 관점에서는 보기 힘든 각 객체(예:원자, 분자 등)간의 상호작용에 의한 특성(예: 물 분자간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나는 물의 특성 등)이 분명히 존재'''하며, '''따라서 우리는 보다 거시적 관점에서 다시금 현상을 바라봐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듯 하다.
쉽게 말하자면, 이 "창발"은 우리가 이 우주를 더 잘 이해하고 싶으면 수학, 물리학만 공부해선 안되고, 점점 거시적인 단계, 화학, 생물학, 의학, 심리학, 사회학, 복잡계 등의 각 단계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4. 관련 문서


  • 보이지 않는 손[6]
[1] 일군의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어떤 종의 개미는 개미굴 밖의 특정 장소에 거대한 쓰레기장을 만들어서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이 개미들을 연구한 결과, 개별 개미들은 매우 단순한 두 가지 행동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 밝혀졌다. 1) 운반하지 않고 다니다가 운반할 대상을 만나면, 운반한다. 2) 운반하며 다니다가 운반할 다른 대상을 만나면, 그곳에 자신이 운반하던 대상을 내려놓는다.[2] 어찌 보면 창발과 창발주의의 관계는 진화와 진화론의 관계일 수도 있다. 창발 자체는 분명 존재하는 현상이면서, 창발에 입각하여 자연현상과 사회현상을 설명하려는 것이 바로 창발주의이기 때문이다.[3] 그것이 에너지(氣)이든, 영혼이든, 정령이든, 신(神)이든...[4] "환원주의를 맹신하는 무신론자들이여! 창발이라고 들어 보셨는가? 환원주의적 과학으로는 창발을 설명할 수 없다네. 그렇다면 창발이야말로 신의 섭리가 아니겠는가!" 뭐 이런 식이겠다.[5] 반환원주의적 물리주의 같은 유사한 용어도 존재한다.[6] 경제주체 개인이 오로지 사적인 이익을 위해 행동함에도 불구하고 의도치 않게 시장을 형성하여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점에서 사회과학 분야에서의 창발이라고 볼 수 있다. 미시경제학에서는 환원주의의 입장에서 이러한 현상을 분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