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가

 

處容歌
[image]

삼국유사에 수록된 처용가.
언어학 유튜버 향문천의 고려가요식 처용가 낭독.
1. 개요
2. 내용
3. 처용가에 얽힌 설화


1. 개요


신라 시대, 처용이 역신에게 아내를 빼앗긴 이후 지은 '''8구체 향가'''. 4구체 향가에서 10구체 향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작품이다. [1]

2. 내용


원문
양주동 해독
현대 한국어 해석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烏伊四是良羅
二兮隱吾下於叱古
二兮隱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良乙何如爲理古
ᄉᆡᄫᆞᆯ ᄇᆞᆯ긔 ᄃᆞ래
밤드리 노니다가
드러ᅀᅡ 자리 보곤
가ᄅᆞ리 네히어라.
둘흔 내 해엇고
둘흔 뉘 해언고?
본ᄃᆡ 내 해다마ᄅᆞᆫ
아ᅀᅡᄂᆞᆯ 엇디 ᄒᆞ릿고!
서라벌 밝은 달 아래
밤 늦게까지 놀다
집에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어라.
둘은 내 아내 것인데
둘은 누구 것인고?
본래 내 것이었는데
빼앗아 간 것을 어찌 하리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제2, 처용랑 망해사(處容郞 望海寺), '역신을 감복시킨 처용' #'''

3. 처용가에 얽힌 설화


의 아들인 처용은 헌강왕을 따라 수도 서라벌에 와서 벼슬을 하는데, 어느 날 밤 역신(疫神)이 자기 아내와 함께 동침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처용이 그걸 보고도 태연하게 노래를 지어 부르며 춤을 추었더니, 역신이 모습을 나타내 처용의 관대함에 감복하여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는 앞으로 대문에 처용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붙여둔다면 그 집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다 하였다.
그 후부터 백성들은 처용의 형상[2]을 그려 문간에 붙여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가 나게 하였다. 그리고 헌강왕이 세운 절 이름을 망해사(望海寺), 혹은 신방사(新房寺)라고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이때 처용이 춘 춤이 악부(樂府)에 처용무(處容舞)라 전해지고 이 춤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정재(呈才) 때와 구나의(驅儺儀) 뒤에 추는 향악(鄕樂)의 춤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를 처용희(處容戱)라고도 한다.[3]
그런데 처용가는 단순히 처용설화하고만 연관해서 생각해서는 안되고, 헌강왕설화, 어법집의 기록 등과 함께 살펴봐야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신들이 각기 출현하여 국가의 존망에 대한 예조를 보인다는 것.
반면 처용을 무당으로 추정하는 쪽에서는, 처용의 아내가 역신이 들어 그 귀신을 쫓기 위한 노래를 지어주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용의 아들' 이란 것은 그가 용신을 모시는 무당이었다는 것이며, 무속에서는 꿈속에 자신과 검열삭제하는 사람이 하반신만 보이고 상반신이 보이지 않으면 '역병 귀신이 역병을 옮기려는 재수없는 꿈'으로 본다고 한다. 노래에서 '다리'만 나온 것이 그런 의미라는 것. 그래서 그런 꿈을 꾼 아내가 역병에 걸리지 않도록 무당으로서 역병귀신을 쫓는 노래와 춤을 만들어주었다는 설을 무속 연구가 서정범 교수가 제기했다.
한편으로는 처용가에 나오는 역신이 여성 천연두 귀신인 호구별성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 가설을 주장한 김현우씨(처용탈 제작자)에 의하면 처용과 역신, 아내를 삼각관계 또는 성적인 관계로 해석한 것이 잘못이라고 한다. 실제로는 역신이 아내에게 NTR이 아니라 전염병을 옮기려는 행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출처
물론 이와 반대로 역신의 성별이 남성이라는 내용도 많다. 역신이 생전에 처용의 아내를 사모한 남자였다거나, 혹은 역신이 남자(처용)의 모습으로 변해 아내를 품었다는 내용도 전해지기 때문에 꼭 성적인 관계가 없었다고도 확정지을 순 없다.
처용가의 마지막 부분을 "원래 내 것이었으니 (내가) 빼앗은들 (네가) 어쩌겠느냐."라고 해석하는 설도 있는데, 이 설도 처용이 무당이라는 설을 바탕으로 한다. 귀신을 쫓는 무가에서 "빼앗음을 어찌 할까"와 같은 표현이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표현은 대체로 귀신을 위협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적 간격이 너무 크기 때문에 현재의 무가를 직접 적용하기 어렵다는 점과 설화의 내용 등을 이유로 용서하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정설이다.
실화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실화설을 주장하는 사람에 따르면 역신은 헌강왕이라고 한다. 대놓고 왕을 비판할 수가 없어서 역신으로 표현했다고 주장한다.

3.1. 처용무


자세한 내용은 처용무 항목 참고

4. 고려가요


[image]
한글 부분이 고려가요 처용가이며
표시 부분은 향가와 중복되는 부분이다.
처용가는 고려가요로도 남았는데, 잡신을 쫓는 내용 중에 향가 처용가가 삽입되어 있는 형태이다. 이것을 '''악학궤범한글로 옮겨 적은 것이 남아있어''' 현재 한글로 남아있는 유일한 향가(물론 변화는 있었겠지만)로 보고 있으며, 다른 향가 해석에도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고려가요인 처용가에서는 향가의 처용가 부분 앞에 처용의 모습을 묘사하는 부분이 들어가는데 이 부분이 원래의 처용가보다 훨씬 길다. 또한 마지막 구절인 "본래 내 것이었는데/ 빼앗아 간 것을 어찌하리오!" 부분이 없어지고 대신 역신은 처용 앞에서는 상대가 안 되니 처용의 옷만 보여줘도 역신은 문제가 안 된다고 말하며, 처용은 역신을 잡으려고 하고 역신은 멀리 달아나는 내용으로 끝난다.#
'''향가'''
'''고려가요'''
東京明期月良
東京 ᄇᆞᆯᄀᆞᆫ ᄃᆞ래
夜入伊遊行如可
새도록 노니다가
入良沙寢矣見昆
드러 내 자리ᄅᆞᆯ 보니
脚烏伊四是良羅
가ᄅᆞ리 네히로섀라
二肹隱吾下於叱古
아으 둘흔 내 해어니와
二肹隱誰支下焉古
둘흔 뉘 해어니오

[1] 대놓고 '''빼앗겼다'''라는 말이 나온다.[2]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탈 등에 남아있는 처용의 외모가 중동 지역 사람과도 비슷하다고 해서 이것이 신라와 중동의 교역 증거라는 말도 있다. 처용이 왕과 만난 곳도 당시 국제 교역항이던 울산. 이 학설을 최초로 발표한 사람은 1996년에 '''북한 간첩'''으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2003년에 공식적으로 복권되어 학계로 돌아온 정수일이다. 이 사람에 대해 자세한 것은 문서 참고.[3] 연산군이 그렇게 처용무를 잘 췄다고 한다. 오죽하면 곁에서 구경하던 궁녀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다고. 참고로 조선연산군중종은 형제가 쌍으로 이 처용무를 상당히 좋아했는데, 연산군이 벌인 짓이 벌인 짓이라 나중에 그를 몰아내고 왕이 된 중종조차 "님 연산군처럼 되고 싶음?"이란 신하들의 반대로 처용무를 즐길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안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