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

 

1. 소개
2. 처용은 어디에서 왔는가?
3. 현대
4. 대중문화에서


1. 소개



'''處容'''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처용랑 망해사(處容郞望海寺)에 실려 있는 신라 헌강왕 때의 인물.
나라가 태평을 누리자 이 재위 5년(879년)에 개운포(開雲浦)[1] 바닷가로 놀이를 나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덮이면서 갑자기 천지가 어두워졌다. 갑작스런 변괴에 왕이 놀라 좌중에 물어보니 일관이 말하되 “이것은 동해 의 짓이므로 좋은 일을 행하여 풀어야 합니다”고 하였다. 왕이 용을 위하여 절을 짓도록[2] 명한 즉, 바로 어두운 구름은 걷히고(이로부터 이 곳을 '구름이 걷힌 포구', 즉 '개운포'라 했다), 왕의 절 건축에 기분이 좋아진 동해 용왕이 일곱 아들을 데리고 나와 춤을 추었으며 그중 하나가 왕을 따라오니, 곧 그가 처용이었다.

헌강왕 5년(879년) 3월에 나라 동쪽의 주와 군을 순행(巡幸)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왕의 수레 앞에 와서 노래부르고 춤을 추었다. 생김새가 해괴하고 옷차림과 두건이 괴상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산과 바다의 정령(精靈)이라 일컬었다. <고기에 이르기를 『왕의 즉위 원년(875년)의 일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헌강왕 5년(879년)에 신라의 수도에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어가(御家) 앞에서 가무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서 삼국유사와 미묘하게 다르다.[3] 왕을 따라온 처용은 달밤이면 거리에 나와 가무(歌舞)를 하였다 하며, 왕은 그를 미녀와 짝지어 주고 급간(級干) 벼슬을 주었다. 처용가를 불렀다고 한다.

2. 처용은 어디에서 왔는가?


기록 중 그의 용모에 대한 묘사나, 현존하는 처용탈의 이국적인 디자인을 근거로 그가 중동 사람이거나 혹은 이를 모델로 한 인물이라는 주장이 있다. 참고로 이 학설을 최초로 제기한 사람이 前 남파 간첩 정수일 교수로. 실제로 신라까지 아라비아 상인이 찾아왔다는 기록도 많아서[4] 역사학계에서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가설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일단 현존하는 기록 어디에도 처용이 외국에서 왔다고 콕 집어 기록한 글은 없어서 추정 단계에 그치고 있다. 유시민알쓸신잡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오만 문화부 장관과의 만찬 자리에서 장관이 신라라는 섬이 오만에 있다는 것을 근거로 처용이 오만 출신이라고 주장했다고. #[5]
아랍 상인은 너무 비약된 주장이라며 처용은 단지 울산 인근의 호족의 아들일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허나 울산 인근 호족의 아들이라면 당시 처용 일행의 옷차림과 생김새가 괴이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 및 왕족을 은유하는 단어인 용의 아들이라고 서술한 삼국유사의 기록과 들어맞지가 않는다. 참고로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이 동해 용이 되었다고 하므로 이를 감안하면 문무왕의 제례를 받들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
비형이라고도 불리기도 하여 비형랑과 연관된다는 주장도 있다.[6] 이능화가 쓴 조선무속고에 인용된 성신말법(聖神語法)[7]이라는 책에는 흥미로운 주장이 있는데, 처용의 설화를 바리공주 설화에 접목시켜서 '''처용이 바로 바리공주의 남편 어비대왕'''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설을 생각한다면 처용과 비형은 똑같이 고대 샤먼의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이 된다.[8] 비형 역시 귀신의 우두머리로 취급받으며 벽사그림으로 쓰였다. 한국의 민속에서 지푸라기로 만드는 인형인 제웅이 처용설화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3. 현대


처용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울산에서는 해마다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처용문화제를 여는데, 처용문화제의 이름은 1991년 초대 문화부장관을 지냈던 이어령 선생이 제안한 이름으로, 그전까지는 공업도시 울산을 알리기 위해 1967년부터 울산시에서 해마다 울산공업축제를 열어오다가 공해가 사회문제로 대두되면서 공업이라는 용어가 공해와 연결될 수 있다는 지적이 일자, 당시 문화부장관이던 이어령이 신라 처용설화의 발상지가 울산임을 착안해서 그 이름을 처용문화제로 바꿀 것을 제안한 것이라고 한다.

4. 대중문화에서


  • 네이버 웹툰 에 처용을 모티브로 한 듯한 동명의 캐릭터가 등장한다. 항목 참조.
  • 2014년OCN에서 제작한 판타지 드라마 귀신 보는 형사, 처용의 주인공으로 처용이 등장한다. 당연히 신라 시대의 그 처용은 아니고 처용이 귀신과 통했다는 설화 속 모티브만 따온 것. 배역은 오지호.
  • 울산 출신의 소설가 최항기가 2016년 처용을 당대 최고의 가수로 그린 동명의 소설을 발표했다. 동시대 인물과 처용이 함께 등장하는 팩션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처용은 당나라와 신라를 오가며 여러 인물들과 노래 대결을 펼친다.#
  • 전진석이 스토리를 쓰고 한승원이 작화를 맡은 만화 천일야화에 처용설화를 차용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처용이 중동 사람이었다는 견해를 바탕으로 처용가를 새롭게 해석하였다. 작중 처용은 원래 상선의 노예로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어리숙해 낮에는 혼나기만 하지만 얼굴이 곱상해서 밤에는 선원들의 성욕 해소 대상이 되곤 하였다. 아랍산 정력제(...)를 사려고 몰래 아랍 상인과 접촉했던 신라 헌강왕이 정력제의 원료가 코브라, 즉 뱀이라는 것을 알고 돈만 먹고 튀려는 거 아닌지 의심하자 상인은 처용을 자신의 아들이라고 꾸미고 약효가 없으면 마음대로 하라고 줘버린다. 헌강왕은 차마 사실대로 밝힐 수 없으니 처용을 용왕의 아들이라고 하고 궁으로 데려온다. 정력제의 효과는 끝내줬고(...) 헌강왕은 처용에게 벼슬을 내리고 가야라는 미녀와 혼인도 시켜준다. 총명하고 상냥한 여인인 가야는 말을 못 하는 처용이 물고기 말만 알고 사람 말은 모르는 것으로 생각해 말을 가르쳐주고, 두 사람은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잘생긴 헌강왕의 아들이 가야에게 반해버리고 아버지를 추궁하다가 처용의 정체를 알게 된다.[9] 왕자는 가야에게 진실을 말해주면서 겁탈하려 하는데 그 광경을 처용이 보게 된다. 처용은 아름다운 가야와 잘생긴 왕자 사이에 자신이 끼어드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용왕의 아들로 죽기 위해 울며 쫓아온 가야를 뒤로 하고 바다 속으로 들어간다. 후에 가야는 왕자와 결혼해 행복하게 살았고 사람들은 처용가와 처용무를 퍼뜨렸다고 한다. 신라가 배경이어선지 등장인물 대부분이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전체적으로 헌강왕이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편이다. 정력제를 구하려 몰래 궁을 빠져 나오거나 아들과 선을 봤던 여자를 자기 첩으로 삼기도 하고...... 그런데 분명 가야가 처용에게 말을 가르치는데 가야는 사투리를 쓰고 처용은 표준말을 쓴다. 뭐지... 참고로 헌강왕은 사투리를 쓰는데 왕자는 표준말을 쓴다.
  • 모바일 게임 데스티니 차일드에서는 TSF되어 등장한다. 성우는 김선혜/이치미야 사쿠.
  • 문정희 시인은 처용의 아내의 시각에서 '처용 아내의 노래'라는 시를 썼는데, 본작에서는 실은 처용이 본 역신의 정체가 여성의 그날과 관련된 물건이었고 그걸 역신이라고 착각하고 바깥으로 나가서 처용가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는 재해석을 하고 있다.
아직도 저를 간통녀로 알고 계시나요
하긴 천 년 동안 이 땅은 남자들 세상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서라벌엔 참 눈물겨운 게 많아요
석불 앞에 여인들이 기도 올리면
한겨울에 꽃비가 오기도 하고
쇠로 만든 종소리 속에
어린 딸의 울음이 살아 있기도 하답니다
우리는 워낙 금슬 좋기로 소문난 부부
하지만 저는 원래 약골인 데다 몸엔 이슬이 비쳐
부부 사이를 만 리나 떼어 놓았지요.
아시다시피 제 남편 처용랑은 기운찬 사내,
제가 안고 있는 병을 샛서방처럼이나 미워했다오.
그날 밤도 자리 펴고 막 누우려다
아직도 몸을 하는 저를 보고 사립 밖으로 뛰어나가
한바탕 춤을 추더라구요.
그이가 달빛 속에 춤을 추고 있을 때
마침 저는 설핏 잠이 들었는데
아마도 제가 끌어안은 개짐
털 난 역신처럼 보였던가 봐요.
그래서 한바탕 또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이 바로 처용가랍니다.
사람들은 역신과 자고 있는 아내를 보고도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처용의
여유와 담대와 관용을 기리며
그날부터 부엌이건 우물이건 질병이 도는 곳에
처용가를 써 붙이고 야단이지만
사실 그날 밤 제가 안고 뒹군 것은
한 달에 한 번 여자를 찾아오는
삼신할머니의 빨간 몸손님이었던 건
누구보다 제 남편 처용랑이 잘 알아요.
이 땅, 천 년의 남자들만 모를 뿐
천 년 동안 처용가를 부르며 깔깔대고 웃을 뿐||


[1] 지금의 울산광역시 남구(울산) 황성동과 울주군 온산읍 사이의 외황강 하류. 그래서 온산읍 쪽 지명도 '처용리'이다.[2] 이 절은 망해사(望海寺)라고 해서 지금도 울산에 남아 있다. 현존하는 건물들은 모두 1960년대에 다시 지은 것.* [3] 삼국사기에 기록된 이 이야기의 '해괴한 사람들'이 처용을 떠올리게 한다. 이를 근거로 처용은 저 무리 중 한 명이고 역신은 헌강왕이라고 하는 해석도 있다.[4] 당풍 문화를 수용한 이후의 신라왕릉에는 본격적으로 당의 황릉 배치를 모방한 석인상이 세워지기 시작하는데, 석인상의 복식이나 외모가 아무리 봐도 일반적인 동아시아인 묘사가 아니다.[5] 오만에 있는 '마시라'라는 섬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6] 다만 비형은 진평왕 시대의 인물이고 처용은 헌강왕 시대의 인물이라서 시대가 거의 2백 년이나 차이가 난다.[7] 노량진의 어느 무속인이 소장하고 있던 책이라고 한다.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8] 이능화와 같은 시대의 학자로 조선의 민속을 연구했던 무라야마 지준도 저서 <조선의 귀신>에서 이 설을 소개했는데, 무라야마 지준도 그렇고 이능화도 그렇고 일본의 식민지 조선 지배를 정당화할 건수를 찾으려 조선 민속을 연구한 어용학자라는 비판이 있는지라 현재에는 처용과 어비대왕과의 관련은 참고로만 인용될 뿐 크게 중요하게 다뤄지지는 않는다.[9] 헌강왕은 용왕의 존재를 믿지 않는 현실주의자로, '문무왕도 물에 들어가자마자 고기들에게 뜯어먹혔을 것' 같은 말도 한다. 애초에 문무왕이 속한 무열왕계 왕통은 원성왕이 즉위하면서 단절된 데다 헌강왕 시대의 겉만 번드르르하고 속은 썩어가고 있던 문란상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나름 고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