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탕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정치인. 장제스를 도와 광동성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1931년 1차 양광사변을 계기로 반독립적인 정권을 수립하는데 성공했으나 1936년 2차 양광사변을 일으켰다 몰락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90년 광동성 방성현의 객가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1907년 광동육군소학에 입학하여 군문에 들었으며 1908년 중국 동맹회에 가입하였다. 1912년 광동육군속성학당에 입학, 1913년에 졸업했다. 1915년 호국전쟁이 발발하자 광동군으로 참전하였으며 1923년 국민당 산하 객군의 지휘관 유진환 휘하 2여단장으로 승진했고 광동독판 수정공서 참모장에 임명, 리쭝런, 바이충시 등 국민당을 지지하는 계계군벌을 지원하였다. 이후 1925년 객군 반란이 진압되자 1925년 7월 광저우에서 국민정부가 수립, 이어 국민혁명군이 창설되었는데 천지탕은 4군 11사단장에 임명되었다. 1926년 흠렴경비사령에 임명되었고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되자 광서성 남부와 하이난 섬을 비롯한 국민정부의 후방 영토의 방위를 맡았다. 1927년 봄, 소련 시찰을 위해 소련에 파견되면서 11사단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귀국 후 광동성 재정청장 구잉펀의 도움으로 손쉽게 11사단장직에 복직할 수 있었는데 이 때문에 구잉펀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또한 광동파의 수장인 후한민과도 친분을 맺게 되었다. 1927년 장황사변과 광저우 폭동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여 그 공으로 4군 군장으로 승진하였다. 1928년 8월 28일, 유럽으로 외유를 떠났던 후한민이 귀국하자 천밍수와 함께 영국령 홍콩으로 가서 후한민을 영접했고 난징에 대항하기 위한 정치력을 확보하기 위해 후한민에게 광저우 정치분회를 맡아줄 것을 청했지만 중국의 통일을 주장하던 후한민은 거절했다.
북벌 이후에는 장제스와 밀접한 관계가 되어 1929년 2월, 호남 사건이 일어나자 장제스가 광동성 정부주석 리지선을 난징에 감금하는 것을 지지하였고 그 대가로 광동성 수정주임에 임명, 광동성의 군정을 담당하여 광동성 정부주석 천밍수와 광동성의 대권을 양분하게 되었다. 장제스는 광동성의 군권을 장악한 천지탕을 적극 후원하였고 이에 천지탕도 제8로타계군총지휘에 취임하여 휘하의 8로군을 이끌고 반장전쟁 기간 장파쿠이, 리쭝런, 바이충시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하지만 북벌 이후 군비 문제로 장제스와 마찰을 빚게 되면서 서서히 장제스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에 천지탕은 광서군벌 견제를 위해 오주에 주둔시켰던 병력을 철수시키고 타계행영도 폐지하는 등 인접한 광서군벌과의 관계를 진전시키며 장제스와 맞설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2.2. 1차 양광사변
그러다가 1931년 2월, 탕산 사건이 발생하면서 천지탕과 장제스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후한민은 광동의 정신적 지주이자 국민당의 원로로 매우 명망이 높은 인물이었는데 그런 후한민을 장제스가 일방적으로 감금시키자 정부 내부의 광동파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했고 개인적으로도 역시 충격을 받았던 천지탕은 이러한 움직임을 이용하여 난징의 중앙정부에 대항할 역량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를 눈치챈 장제스는 처음에는 천지탕에 대해 신임 광동성 정부주서에 임명하겠다고 열심히 회유하였으나 천지탕이 이를 듣지 않고 호남성 쪽으로 병력을 이동시키자 사태가 절망적이라고 판단, 5월 11일의 보고에서 “광동의 현재 병력이 5개 사단에 불과하나 군비는 매달 5백만 원을 수령하고 있는바 이는 중앙군의 군비에 비해 3배 이상에 이르는 것. (...) 천지탕이 재정특파원과 영업세를 철폐하여 중앙의 재정을 파괴하고 있다”고 천지탕을 제2의 천중밍으로 비난하였다. 또한 장제스는 천지탕의 휘하 군세력을 붕괴시키기 위해 62사단장 향한병(香翰屛)에게 천지탕은 광서파와 개조파에게 광동을 통쨰로 넘기려는 것이니 만약 자신을 지지한다면 8로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겠다고 회유했으나 향한병은 오히려 장제스가 보낸 전보를 폭로하였고 공작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어 장제스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광동성 정부주석 천밍수가 일본으로 망명하자 천밍수의 세력을 제거하고 광동성의 군정대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한편 영국령 홍콩을 통해 영국제 무기 수입을 시도했다.
천지탕은 광동 각계에서 벌어지던 장제스 탄핵 운동에 공개적인 지지를 표명, 5월 7일에 “정의를 지키기 위해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며 장제스에게 하야할 것을 촉구하며 압박했다. 5월 11일, 광서파의 리쭝런, 바이충시가 육군 1방면군 총사령관 명의로 호응하였으며 결국 1931년 5월 27일, 왕징웨이, 쑨커, 쩌우루, 구잉펀이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감찰위원회 비상 회의를 광저우에 소집하였고 이어 5월 28일 광저우 국민정부를 수립함에 따라 본격적인 1차 양광사변이 시작되었다. 광저우 국민정부 국무회의는 6월 2일, 천지탕을 제1집단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이내 천지탕은 후한민의 지시에 따라 왕징웨이의 측근인 천궁보, 구멍위, 간나이광 등이 광저우에 오는 것을 막았다. 6월 28일, 천밍수 휘하의 19로군 주광동 판사처를 수색하는 등 긴장은 고조되었다. 하지만 천지탕의 목적은 장제스의 타도가 아니라 광동을 자신의 기반으로 만드는 것이라서 광서파가 주장하는 북벌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다가 북방에서 스여우싼이 광저우 국민정부에 호응하여 5집단군 총사령관에 취임, 장제스에 반기를 들자 천지탕은 휘하의 위한머우, 이양경 등을 동원하여 장제스를 공격했으나 스여우싼이 장제스와 장쉐량의 협공으로 박살나서 하야하자 겁을 먹고 퇴각하고 장제스와의 화평을 주장했다. 천지탕의 맹우 구잉펀 역시 후한민만 석방되면 괜찮다는 입장이라서 소극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이어 1931년 장강 대범람, 만보산 사건 등으로 난징 정부가 궁지에 몰리자 천지탕은 8월 말, 2차 북벌을 시도했으나 호남성 정부주석 허젠이 장제스를 지지하겠다고 나서는 등 전황이 꼬이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만주사변이 발생하면서 중단했다. 이후 천지탕은 장제스의 하야, 후한민, 리지선 석방을 지속적으로 요구했고 결국 장제스는 후한민, 리지선 등을 석방하고 12월 15일 하아하였다. 1931년 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서남정무위원회 설치가 결정되면서 천지탕은 서남정무위원회, 군사위원회 서남분회 등을 장악하여 광동에서 독립적인 정권을 경영할 수 있게 되었다.
2.3. 남천왕
광동을 장악한 천지탕은 계속된 내전으로 황페화된 광동을 재건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천지탕은 1933년, 난징 국민정부의 폐량개원에 자극을 받아 1933년 광동성삼년시정계획을 발표, 광동성에서 공업 육성, 현대적 금융산업 발전, 통일적인 화폐제도 등을 지향할 것을 확인하고 광동성의 화폐를 대양본위로 통일, 화폐발행권을 성정부에 집중하였다. 또한 광동의 농촌 구제를 위해 수입미에 대한 과세를 부여할 것을 고려하였으나 광동성의 쌀 상인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실행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33년, 국민정부가 수입미에 대한 과세를 선포하자 광동성도 수입미 과세를 결정하였으나 다른 성들이 해관을 통해 관세를 중앙에 송금한 것과 달리 광동성은 관세를 성정부 재원으로 사용하였다. 이에 대해 쌀 상인들이 반발하자 상인들을 체포하여 성정부의 조치를 수용하도록 압박하였다. 또한 중산대학 농업부의 도움을 받아 경작지 확대, 신품종 개량을 시도하는 등 농업발전을 꾀하였고 이로 인하여 광동사람들로부터 남천왕이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다. 이때 천지탕은 매우 기세등등하여 휘하 장령들과 함께 장제스의 모형을 만들어 목검으로 때려부수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1933년 복건사변이 발생하자 천밍수, 리지선 등은 천지탕의 지지를 호소했으나 천지탕은 이들을 비난하는 입장을 취했다. 1934년 제5차 초공작전이 발동되자 천지탕은 광동 방면에서의 초공에 나름 적극적으로 나섰으나 강서 소비에트가 붕괴되고 홍군이 대장정에 오르자 이들과 비밀리에 협상하여 이들을 재빨리 자신의 지배 영역 바깥으로 내보냈다. 허나 세계를 뒤흔든 대공황의 여파가 광동성에도 밀어닥치면서 광동성의 재정은 혼란해지기 시작했다. 성정부의 단속을 피한 지폐 투기는 근절되지 않았고 독자적인 화폐 발행을 하는 은호들도 척결되지 않았다. 결국 1936년 시점에서 삼년시정계획의 달성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되었고 광동성의 금융은 대혼란 시기를 맞이하였다.
반면 난징 국민정부는 1935년 법폐개혁을 단행, 매우 성공적으로 대공황의 타격에서 벗어나는 한편 지폐 발행권을 정부에 귀속시키는데 성공했다. 당황한 천지탕은 광동성의 독자적인 화폐개혁을 선포하고 재정권의 주도권을 중앙에 빼앗기지 않으려 했다. 초기에는 성정부에 엄청난 수익이 있었으나 뒤로 갈수록 상황이 악화되어 광동성 법폐의 가치가 폭락하고 물가가 폭등하는 등 경제위기가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 1936년 5월, 광동의 정치적 후원자인 후한민이 사망하면서 난징 국민정부는 더욱 입장을 강경화하여, 수입미 관세를 정부에 송금할 것을 압박하는 한편 더 나아가 서남정무위원회를 해체하고 양광의 반독립적인 상황을 종식시키라고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정부가 광동성 법폐를 더 이상 화폐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으며 중앙정부 기관이 차차 광동성 법폐의 수수를 거부하자 민심은 크게 동요하여 광동성의 환율은 대폭락, 사실상 경제적인 붕괴가 임박하였다.
2.4. 2차 양광사변과 몰락
이쯤되면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한 천지탕은 리쭝런, 바이충시와 연합하여 항일구국군을 선포, 2차 양광사변을 일으켰다. 2차 양광사변 직전, 천지탕은 장제스에게 양광을 토벌할 의사가 있는지를 타진했는데 이때 장제스는 광서는 토벌해야 하지만 광동에서 천지탕의 지배권을 유지시켜주겠다고 화답했다. 하지만 천지탕은 이를 믿지 못하고 점을 쳐서 반란을 일으키며 거물이 날개가 꺾여 망할 것이라는 점괘를 받아들고는 사변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하지만 장제스는 즉각 서남정무위원회를 취소하는 한편 다이리를 광동에 파견하여 광동군에 대해 회유하는 입장을 취했는데 이에 광동군의 거물 위한머우가 장제스에게 충성을 맹세하여 광동성 수정주임에 취임하고, 광동 공군도 줄줄이 천지탕 측을 이탈하여 난징으로 날아가버리는 등 광동군은 일거에 와해되었다. 여기에 경제도 완전히 붕괴화여 쌀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화폐가 휴지조각으로 변하자 험악해진 광동 민심은 천지탕의 하야를 요구했다. 궁지에 몰린 천지탕은 7월 17일, 리쭝런과 비밀리에 회동하여 하야 의사를 밝힌 후 7월 18일 하야하여 영국령 홍콩으로 도주했다.
한동안 유럽을 떠돌던 천지탕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1200만원을 국고에 기부하는 조건으로 귀국, 국민정부 최고국방회의 위원 겸 전략위원회 위원으로 일하게 되었으며 1940년 농림부장에 임명되었다. 2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에는 1949년 해남도행정장관 겸 해남도 경비사령에 임명되어 하이난 섬 방위를 맡았으나 국공내전에서 패하여 1950년, 타이완으로 철수하였다. 이후 총통부 자정 및 전략고문을 맡다가 1954년 타이베이에서 병환으로 사망했다.
3. 여담
1935년 1월, 광저우 강연회가 잡혀 있던 후스와 만난 적이 있다. 천지탕은 강력한 서구화를 주장하던 후스를 만나 자신의 동도서기론 철학에 대해 주장하며 자신이 비록 서양 엔지니어들을 고용하고 서양 과학과 기계를 들여왔지만 중국인들은 근본을 알아야하며 이 때문에 광동 사람들에게 경전을 보급하고 공자와 관우, 악비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고 무척이나 오만불손한 태도로 자랑했다. 이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후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이에 천지탕은 지금 중국인들의 조상들이 지금껏 사람 구실을 못하고 있었냐면서 벌컥 화를 내자 후스는 전족 하나 못 없앤 조상들이 무슨 훌륭한 본보기냐고 대꾸했고 천지탕은 격분하여 후스의 광저우 강연을 취소해버렸다."제 생각으로는, 백남 선생의 주장은 제 주장과 한 가지만 다를 뿐입니다. 우리 두 사람은 똑같이 그 '근본'이라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다른 것이 있다면, 백남 선생께서 필요로 하는 것은 '두 가지 근본'이고 제가 필요로 하는 것은 '한 가지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생산이나 건설에서는 과학을 필요로 하지만 처신에는 경전 읽기나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기를 필요로 하는 것, 이것은 '두 가지 근본'의 학문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생산에도 과학 지식을 활용해야 하지만 처신에도 과학 지식을 활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것이 '한 가지 근본'의 학문입니다."
4. 참고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1930년대 中國 廣東省의 화폐통일정책의 붕괴과정 : 외환위기와 小洋券, 강진아, 경제사학 30권, 경제사학회.
- 1930년대 중국의 金融統一過程에서 본 중앙과 지방 : 廣東省의 지방화폐 정리과정(1936-1938)을 중심으로, 강진아, 중국학보 46권, 한국중국학회.
5. 매체에서
호이4에서 중화민국 육군 장관으로 등장한다. 사단조직력 8%를 부여한다. Eight Years' War of Resistance 모드에서는 광동군벌의 수장으로 등장하며 역사적 중점을 따라 간다면 2차 양광사변을 일으키는데 특정 확률에 따라 국민정부에 흡수당해서 망할 수도 있고 국민정부의 매수공작이 실패해서 권좌를 지키기도 한다. 역사적 중점만 켯다면 거의 100% 국민정부에게 합병당하며 중일전쟁 발발 후 50의 정치력을 지불해서 육군참모총장으로 기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