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카이거
1952~
陈凯歌 (진개가)
1. 개요
중국의 배우, 영화감독이다. 중국 영화 세대 구분에서 장예모와 함께 제5세대 감독이라고 부르는 감독의 대표주자이다.
2. 생애
2.1. 초기이력
영화감독인 천화이아이의 아들로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문화대혁명 시절 그는 중학생이었고 홍위병에 가담하여 아버지를 비난했다. 이 당시의 경험은 패왕별희에 잘 묘사된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그는 대학입시를 봐서 베이징 전영학원에 입학한다. 1982년 졸업한다. 이때 동문이 장예모와 톈좡좡.[1]
2.2. 패왕별희까지
졸업후 동문 장예모와 함께 광시영화제작소에 입사하여 영화감독 커리어를 시작한다. 1984년 내어 놓은 황토지는 제5세대 영화의 효시격으로, 중일전쟁 시기의 농민들의 삶을 다룬 영화였다. 이 영화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그는 대열병과 해자왕을 내어 놓는다.
대열병은 국경절 열병식을 위한 훈련과정을 다루는 영화로서,얼핏보면 배달의 기수식의 선전영화 같지만, 실제로는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의 관계를 영화적으로 풀어내어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해자왕은 과거의 홍위병이 상산하향 운동으로 산간 벽지 교사로 발령나서 겪는 이야기이다. 두 작품 모두 호평을 받았고 천카이거의 영화적 위상은 확고해진다.
그는 영화를 더 공부하러 뉴욕대학교의 영화학과에 방문학자로 유학했고, 그 때 듀란 듀란의 뮤직비디오를 감독하기도 했다.
이어 현위의 인생(중국제목 변주변창, 1991)으로 서양 비평계의 상당한 호평을 받는다.
1993년 장국영과 공리(배우)를 기용해 내어 놓은 패왕별희는 대호평을 받았고,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2.3. 패왕별희 이후
하지만 패왕별희 이후의 필모그라피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명성을 얻어 거대한 제작비와 명배우를 쓸 수 있게 되었지만, 도리어 작품성은 더 떨어지는 기묘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1996년 다시 공리와 장국영을 캐스팅 하여 1930년대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풍월을 내놓았으나, 중국 당국이 영화에서 남편이 아내를 제3자와 관계를 맺게 하는 장면이 "풍속에 어긋난다"고 판단하여 본토상영을 금지하였다.
1999년작 시황제암살도 공리와 함께 만들었으나 범작이었다. 같은 주제를 다룬 장예모의 영웅(2002)이 정치적으로 욕을 먹었지만, 흥행과 작품성에서는 성공을 거둔 것과는 대조적이다.
2002년에는 헤더 그레이엄을 기용해 영어 영화인 킬링 미 소프틀리를 내어 놓지만 이 작품은 천카이거의 흑역사로 꼽힐정도로 망작이 되었다.
2005년에는 장동건과 장백지를 캐스팅하여 무극을 감독했으나, 이것도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다. 2008년에는 다시 여명을 캐스팅하여 유명 경극배우를 주제로 한 매란방을 감독했으나, 이 영화는 한국에서 개봉도 하지 않을 정도로 망했다.
2010년에는 갈우, 판빙빙, 황효명 등의 초호화 캐스팅으로 조씨고아(한국개봉명:천하영웅)을 내어 놓지만, 이것도 평이 미지근 했다.
2019년에는 중국 정부가 기획한 옴니버스의 선전영화 나와 나의 조국의 한 에피소드를 감독했다.
보도에 의하면 2022년 개봉예정으로 장진호 전투를 다룬 영화를 감독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