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예모
1. 개요
중국의 영화 감독. 1950년 4월 2일생(현재 만 74세). 천카이거와 함께 5세대 감독으로 불린다. 수상경력을 보면 해외에서 가장 인정받은 중국 본토 출신 영화감독이라 할 수 있다.
세계 3대 영화제(베를린 영화제, 베니스 영화제, 칸 영화제) 에서 모두 최고상을 수상하는 등, 아시아 감독[1] 으로는 최고의 커리어를 가지고 있으며, 세계적인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2. 경력
2.1. 초기이력
당나라의 수도 장안이 있었던 고도인 시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국민당군 군의관이었고, 삼촌들도 다 국민당군 장교들이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들은 장제스가 중국 공산당에 패퇴하자 모두 대만으로 도피했다. 이 때문에 장이머우는 반동 집안 출신이었지만, 본인은 딱히 큰 박해를 받지는 않았다.
문화대혁명 당시인 1968년 시골로 하방되어 삽질을 하는 등, 3년간 개고생을 하다가[2] 1971년 다시 도시로 와 시안 옆의 셴양(咸陽)[3] 의 방직공장에서 7년간 노동자로 일하였다. 이때도 그림을 습작하고, 문혁 전에 출판된 영화관련 서적을 읽고, 피를 팔아 얻은 돈으로 산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서 혼자 현상을 하는 등, 사진미학에 대해서 독학했다고 한다.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문혁이 끝난 후인 1978년이 되자 대학은 다시 문을 열었고, 이때 대학입시를 치러 베이징전영학원의 촬영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2.2. 1980년대
1982년 베이징 전영학원졸업생인 천카이거, 톈좡좡과 함께 중국 5세대 감독의 선두주자로 나서게 되었다.
1982년에 광시영화제작공사(广西电影制片厂)에 촬영기사로 입사하였는데, 스탭 경력의 시작은 동기생 천카이거의 <황토지>에 촬영감독으로 데뷔하게 된다. 1985년에 고향에 있는 시안영화제작공사로 옮겨 연출을 하게 되었다. 이름이 알려진 계기는 1987년의 <오래된 우물(老井)>이었다. 이 영화에 장이머우는 촬영감독을 맡았고, 남자주연으로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4]
2번째로 맡은 1988년작 <붉은 수수밭>이 영화로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하게 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해 베니스 영화제, 칸 영화제 등 여러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며 서구 관객들에게 중국 영화의 인상을 각인시켰다.
2.3. 1990년대
8~90년대에는 중국의 근현대사와 개인의 삶을 엮는 작품을 주로 만들었다. 이 시기에 찍은 영화가 '붉은 수수밭', '국두', '홍등', '인생', '귀주 이야기' 등이다. 사실 이즈음 찍은 영화들이 장예모에게 있어서 인생작이다. 작품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문제없는 하나같이 그의 대표작이자 걸작으로 손꼽힐만한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1991년의 <홍등>은 1920년대 중화민국 시기에, 부잣집 첩으로 팔려간 여대생(공리)을 통해 중국의 가부장제와 여성억압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화려한 색감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서사가 약하다는 비판을 비평가들로부터 듣기도 했다.
1992년 베니스 영화제 진출작 "귀주 이야기"는 <홍등>에서의 비판을 수용해 서사를 강화했다. 영화 촬영중인 것을 숨긴 채, 몰래 카메라 형식으로 촬영된 작품[5] 이다. 공리와 몇 인물 빼고는, 실제 마을 주민들이다.
1994년작 "인생"은 거장으로서의 위치를 확고이 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중국 국민배우인 갈우가 맡았고, 공리는 그의 부인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는 칸 영화제에 진출했으나 중국 정부의 출국금지로 인해, 본인은 영화제에 가지 못하고 여주인공 역이었던 공리만 참석했다. 유난히 경쟁이 치열했던 그해 영화제 측은 남우주연상으로 화답했다.(펄프픽션, 올리브 나무 사이로, 세가지색 레드 등이 그해 경쟁작) 이 영화는 주인공 푸구이의 청년기부터 시작해서 노년기까지 보여주는 영화로 주인공이 살았던 시간에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이 많았던 만큼, 사실적인 묘사로 이를 그려내면서 그 가운데서도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주인공을 통해 중국 근현대사에서 민중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 현대사를 그린 수많은 영화중에서도 최고의 역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사실 <인생>은 1994년 당시 중국에서 개봉하지 못했다. 당시 이 영화의 감독인 장예모와 주연인 공리, 갈우는 5년간 영화출연금지에 처해졌으나 이 영화가 국제적으로 격찬을 받자 곧 풀렸다.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은 사실 중국 공산당조차도 덩샤오핑이 집권한 이후 "마오쩌둥의 과오"라고 분명히 지적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덩샤오핑은 마오쩌둥 시기에 2번이나 실각-숙청되어 오지의 공장에서 일한 바 있다.),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을 비판한 인생이 딱히 현집권체제에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6] 하지만 당시는 정치성이 있는 영화는 주제에 상관없이 엄금되던 시기였고, 1년먼저 나온 패왕별희도 여러 부분이 삭제개봉 되었다. 이렇게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기의 암울한 면을 다루었기 때문에 인생은 제작 당시에는 개봉이 금지되었으나 1990년대 후반부터 풀리기 시작했고, 현재는 중국 동영상 사이트에서 대부분 볼 수 있다.
이즈음 그의 페르소나였던 배우 공리와 11년간 동거하다가 1996년경 헤어졌다. 장예모는 이미 유부남이었고 이혼도 하지 않은 동거는 불륜이었다. 결국 장예모는 이혼했지만 공리와 재혼하지 않았고, 나중에 공리는 싱가포르 사업가와 결혼한다. 공리는 장예모의 '붉은 수수밭'으로 데뷔했고, 이후로도 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사이를 다진 듯 하다. 이 둘은 관계를 정리한 후에도 간간히 영화 작업을 함께 하는 중이다.
직접 연기한 작품도 여럿 있는데, 꽤 섬세하게 잘 한다. 공리와 함께 주연으로 출연했던 '진용'은 국내 공중파에서도 방영된 적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알고있는 그의 연기작이다.
장예모를 출세작으로 이끈 1990년대 작품들은 대부분 1930~1960년대의 중국의 저개발 암흑기를 그린 작품들이었다. 이런 작품들에는 중국의 암흑기 동안 고생했던 본인의 체험이 상당히 녹아들어가 있으며, 특히 전체주의 정권(장제스 및 마오쩌둥) 하에서 체제가 인간성을 얼마나 억누르는지를 미학적으로 묘사하면서 간접적으로 전체주의 체제를 비판하고 있다.
2.4. 2000년대
이렇게 90년대까지는 1920-70년대 중국의 암흑기를 독특한 영상미학으로 다루어 세계적인 거장으로 떠올랐지만, 2000년대 들어서 나온 작품은 중국의 국력신장을 반영하듯 화려한 중화주의적 영향이 작품 곳곳에 나타난다.
2000년대 들어서는 거대 제작비가 들어간 큰 스케일의 무협이나 시대극을 주로 찍었다. '영웅[7] ', 황후화 등이 그 예. 영웅은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아 제53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알프레드 바우어상, 제22회 홍콩 영화제 작품상, 감독상, 제39회 전미 비평가 협회상 감독상을 연이어 수상하였다.
이 시기에 그의 향토적인 매력과 서민적인 분위기를 많이 잃어버려 기존 영화팬들의 아쉬움을 사기도 했다. 블록버스터의 경우는 거의 망작인 경우가 많다. 한국에 <연인>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유덕화, 금성무, 장쯔이 출연의 무협작품 십면매복(2004)은 중국에서조차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2000년대 장예모의 대표적인 <영웅(영화)> (2002)는 1990년대 장예모를 출세로 이끈 여러 작품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전체주의 정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했던 초기작과는 달리, <영웅>은 "천하의 안정과 인민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독재도 상관없다"는 주제를 내비치고 있다.
<영웅>은 사실 엄청난 물량 및 액션, 그리고 화려한 미장센으로 2002년 개봉당시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권에서 대성공을 했고, 2004년 미국에서도 외국어 영화 흥행 1위를 하기는 했지만, 주제면에서는 거의 중국 공산당의 고도의 프로파간다용 영화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어떤 한국 영화 평론가는 영웅을 시각효과와 미장센은 개쩌는데, 막상 내용물은 볼게 없다며 공갈빵에 비유를 하기도 하였다. 그 주제에 실망한 일부 영화팬들이 "장예모가 전향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웅은 흥행성 (미학적) 작품성 모두 성공한 작품이다. 마치 나치 독일의 레니 리펜슈탈이나 소련의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의 여러 선전영화를 연상하면 된다.
사실 <영웅>은 장예모 본인이 문화대혁명에는 비판적일지언정 현 중국공산당체제에는 반항할 뜻이 전혀 없음을 고백하는 영화라고 보는게 더 맞는 듯 하다. 1994년 <인생> 때문에 장예모는 정권의 요주의인물이 되었지만, <영웅>의 감독 이후 이런 규제는 거의 풀렸고 곧이어 중국정부가 심혈을 기울인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폐막 총감독을 맡게 된다.
2.5. 2010년대
2000년대 여러 범작을 만들어서 욕을 먹었던 그는, 2010년에 들어서는 다시 초심으로 회귀한 듯 문화대혁명 시기를 다룬 수수한 색채의 산사나무 아래, '5일의 마중' 등의 작품을 만들었다.
2014년작 5일의 마중은 마오쩌둥 정권이 어떻게 한 가족을 파괴했는지 묘사하면서 미국에서도 호평받았다. 여기서 문화대혁명 시절 복역하다가 문혁이 끝난 이후 석방된 지식인 루옌스(진도명)와 그를 기다리다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아내(공리)를 통해 문화대혁명 시기를 비판하고 있다.
2017년 할리우드 배우를 동원해 만든 그레이트 월은 역시 블록버스터에는 약하다는 공식만 확인해주고 그다지 좋은 평은 받지 못했다. 다만 흥행은 성공했다.
2019년 문화대혁명 시기를 다룬 신작 일초종(一秒鐘, One second)이 베를린 영화제에 나섰다가 갑자기 출품이 취소되었다. 장이머우 측은 "기술적으로 불완전해서 경쟁부문 출품을 취소한다"고 밝혔는데, 서방언론측에서는 정부의 검열에 걸린게 아니냐는 추측을 하고 있다. 결국 이 작품은 2020년 개봉했다. 이 영화는 문화대혁명 시기, 공산당 간부와 싸웠다가 노동캠프로 끌려간 한 죄수가 자기 딸이 나오는 뉴스영화를 보기 위해 탈옥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심각한 영화같지만 의외로 유머 코드가 많다. 이 작품에서도 문화대혁명 시절의 자신의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아무리 현재의 중국 체제에는 긍정적이라도 문화대혁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여전한듯.[9] 폭정에 파괴되는 가족 및 개인의 이야기는 본인이 직접 겪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명작을 내놓는 듯 하다.
한국전쟁 시기를 다룬 영화를 연출한다고 한다.
3. 국제적 명성과 작품 세계
그는 색감과 미장센 연출에 특출나다. 특히 화려한 중국적인 색채(붉은색, 황금빛)를 가장 잘 살리는 감독으로 손꼽힌다. 그런 탓에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개막식, 폐막식의 총감독을 맡았다. 당시 개폐막식 영상을 보면 그야말로 아낌없는 물량과 사람 공세로 압도적인 스케일을 자랑한다. 개막식에서 가장 공을 들인 '공자의 3천 제자들' 파트는 하이라이트이자 압권인 부분. 또 평창 동계올림픽 폐막식에서 차기 개최국인 중국의 공연 총감독을 맡았다.
또 그는 영화 외에도 오페라 작품을 연출하였다. 1997년엔 이탈리아 피렌체 극장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를 연출한 이후, 1998년 중국 자금성 특설무대에 주빈 메타가 지휘하는 <투란도트>를 다시 무대에 올려 화제를 모았다.
아시아는 물론이고 서양권에서 워낙 유명한 감독이다 보니 할리우드 배우들과 작업도 잦다. 크리스찬 베일, 맷 데이먼 등 최고 연기파 배우들과 함께 작품을 찍었다. 특히 맷 데이먼과 함께 작업하고 2016년 개봉하는 그레이트 월은 장예모의 첫 할리우드 진출작이 된다. 다만 그레이트 월은 뻔한 작품성으로 혹평을 받았다. 아무래도 장이머우는 블록버스터 영화에는 별 소질이 없는듯.
한국에서는 친정부 예술인이라는 인식이 퍼져있고, 이 때문에 혐중적인 영화팬들[10] 뿐만 아니라 리버럴들이 주로 기고하는 씨네21같은 잡지에서도 그의 명성에 비해서는 평가가 매우 낮다.[11] 하지만 장예모는 5세대 감독 중에서도 중국 정부나 공산당과는 거리를 두는 편이다.[12] 장예모 초기작들은 당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가 활동금지를 받을 뻔 했고, 이는 2010년대 작품( <산사나무 아래>, <5일의 마중>, <일초종>) 에서도 유유히 이어지고 있다.[13]
장예모가 친정부적인 영화를 주로 만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14] , 장예모는 이들의 인식과는 달리 중국정부가 직접 기획한 선전영화나 프로파간다 영화는 손 댄적이 없다. 장예모와 동기생들인 중국 5세대 감독중에 천카이거나 톈좡좡 같은 경우는 중국 정부가 직접 제작하는 여러 선전영화 (대표적으로 나와 나의 조국)제작에도 참여한 것과는 대조적이며 정부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15] 결론적으로 장예모가 친정부적이라기보다는 중국에서 나름 비판의식을 가진 감독이지만, 현정부와는 직접 각을 세우기는 회피한다고 볼 수 있겠다.
4. 사생활
- 두 번의 결혼과 여러 혼외 관계에서 자녀 7명[16] 을 낳았는데 신고조차 하지도 않았다. 2011년 계획생육정책을 시행하는 중국에서 이 사실이 폭로되어 지탄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748만 위안(약 12억 원)이라는 상당한 벌금을 물었다고.
- 두번째 부인인 천팅은 장예모와 31살 차이가 나는 81년생으로서 원래 무용수 혹은 장예모의 모교인 북경전영학원 학생이었으나, 아버지뻘인 장예모와 눈이 맞아 결혼했고, 2011년 벌금보도가 난 이후에야 장예모 스튜디오가 결혼사실을 공개해서 수면에 드러났다. 첫 아이 장타이난은 천팅이 만으로 20세때인 2001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둘째와 세째는 2004,2006년에 태어났다.) 이후 천팅은 웨이보를 개설하고 장예모의 부인으로 공개활동을 하고 있다.
- 첫번째 부인인 샤오화와 낳은 맏딸인 장모(張末)는 83년생으로 컬럼비아 대학교 건축과, 뉴욕대학교 영화과 대학원을 나온 재원으로, 현재는 영화계에서 일하며 편집인을 하고 있다. 아버지의 영화에도 스탭으로 참여하고 있다.
- 중국에서는 캐스팅된 여배우나 캐스팅을 미끼로 여배우를 건드린다는 루머가 많으며,[17] 예술적 재능과는 별개로 이미지는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다. 홍상수 감독과 이런 면에서 조금 비슷하다. 이런 사생활이 붉은 수수밭이나 홍등 등 초기 영화에서 여성들의 삶을 파국으로 몰고 갔던 당시 중국의 가부장제와 축첩을 비판하는 모습과 대비되어 일부에서 비판하기도 했다.
5. 기타
- 완전 신인이었던 공리와 장쯔이를 주연으로 발탁해 세계적인 여배우로 발돋움하게 한 인재 발굴가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진링의 13소녀의 주연인 니니와 5일의 마중에서 주연 루옌스(진도명)의 딸로 나온 장혜문도 꽤 유명해졌다. 중국에서는 장예모가 발굴한 여배우들을 "장예모의 딸들(艺谋娘)"이라고 부른다.
- 2000년대 들어 발굴한 신인 저우둥위(周冬雨)도 현재 중화권에서 연기력을 갖춘 탑배우로 등극했다. 가장 최근에는 일초종에 캐스팅된 2000년생 유호존(류하오춘)도 기대를 받고 있는 중. 여배우 캐스팅에 탁월한 감이 있는 편이다.
6. 필모그래피
7. 수상
[1] 세계적으로도 최고커리어를 가지고 있다. 수상경력을 보면 구로사와 아키라, 마틴 스코세지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에 비교할만하다. 일부에서는 도쿄 국제 영화제와 모스크바 영화제를 합쳐서 세계 5대 영화제라고 하는데, 도쿄 영화제는 80년대 반짝했지만 그 이후 일본영화계의 몰락과 함께 위상이 축소되었고, 모스크바 영화제는 소련 붕괴후 마찬가지 신세가 되었다. 어쨌든 장예모가 주연하고 촬영감독을 맡은 오래된 우물은 1987년 도쿄 영화제에서도 감독상(다만 이 영화의 감독은 우톈밍이고, 그가 수상했다)을 수상했기 때문에 5대 영화제 중에서도 4개에서 직간접적으로 수상한 독보적인 경력을 가지고 있다.[2] 이때의 경험이 후에 감독하는 여러 영화에 나온다.[3] 진나라의 수도였던 함양이다![4] 여담이지만 1988년에 이장호 감독이 성우 이선영이 진행하던 KBS 라디오의 "이선영의 영화음악실"에 출연했을 때, 도쿄 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보고 와서 <오래된 우물>을 "1970년대 한국의 새마을 운동을 다룬 선전 영화" 같다고 혹평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사회주의 사실주의 미학을 추구한 영화였고, 국제적으로 호평받았다.[5] 과거였기에 가능한 촬영 방법일 뿐 불법이다.[6] 물론 중국은 아직까지 전체주의체제이기 때문에, 현 공산당 체제를 지나치게 비판하거나, 사회적 모순을 심하게 고발한 영화들은 상영금지를 맞기도 한다. 하지만 장예모의 비판은 문화대혁명시기-대약진운동시기에 한정되어 있고, 이시기는 중국의 현집권세력들도 모두 피해자이기 때문에 다루는데 비판적으로 다루는데 별 문제는 없다.[7] 이 작품은 할리우드 제작사인 미라맥스도 3500만 달러를 투자를 했다.[8] 다만 장예모는 시대적 압박에 놓인 중국인들을 묘사하면서 이를 예술적이나 영상미학적으로 승화시켜 거장이 된 것이지, 본격적인 현실참여용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다.[9] 이는 당연한 것이다. 유튜브 댓글 같은 것을 보면 자꾸 문화대혁명을 현재의 중국 지도부가 일으킨 것이라고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오히려 현재의 중국 집권층도 대부분 문화대혁명 당시 시골에서 삽질을 하는 등의 피해자였다.[10] 그레이트 월같은 단순 상업영화가 아예 공산당 선전영화나 국뽕영화로 매도되고 (오히려 그레이트 월은 중국내에서 화이트워싱으로 비판을 받았던 영화였다.) , 홍등과 같이 여성억압을 비판적으로 그린 영화나 5일의 마중과 같은 공산당에 비판적인 영화의 리뷰에 달린 댓글을 봐도 장예모를 공산당의 나팔수 노릇을 하는 어용예술인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다수다.[11] 씨네21의 전문가들의 별점을 보면 장예모의 작품에 6/10점이상 주는 일은 드물다.[12] 중국은 전체주의국가이기 때문에 대놓고 비판의식을 드러내는 예술인은 아예 활동을 하지 못한다. 장예모 이후 6세대 감독중에 중국정부에 비판적인 감독들은 작품활동이 막혀있기 때문에 "지하전영"이라고 불리는 영화를 만든다. 이것은 공식 배급라인을 타지 않고 당과 정부에 비판적인 인민들끼리만 동영상으로 돌려보는 영화를 만든다. 이것도 걸리면 코렁탕감이다.[13] 위에서 지적되지만 일초종은 정부 입김 때문에 해외영화제 출품도 취소될 정도로 정부의 눈총을 받은 작품이다.[14] 그의 작품중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영웅> 같은 경우는 그 주제가 매우 현체제를 옹호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는 하지만 정부가 제작에 직접 개입한 선전영화는 아니다. <영웅> 은 기본적으로 홍콩자본으로 만들어졌고, 할리우드의 미라맥스도 제작에 참여했으며, 나름 흥행성이 있어서 중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성공했다. 즉, 주제는 친정부적일지언정, 정부와는 무관하게 제작된 상업영화라고 보는게 합리적이다.[15] 굳이 들자면 정부주도의 행사에 참여한 것은 베이징 올림픽의 개폐막식에 감독을 들 수 있지만, 베이징 올림픽은 중국의 국민적 행사였고, 이런 국민적 행사에 참여한 것이 딱히 친정부적 행보라고 볼 수 없다.[16] 첫째 부인과 한명, 둘째 부인과 세명을 낳았으나 나머지 세명은 혼외자라고 한다.[17] 이는 여배우에게도 상당히 악의적인 루머이다. 장쯔이만 해도 이런 성상납 악성 루머 때문에 수년을 시달렸으며 소송전까지 벌여야 했다.[18] 감독으로서의 데뷔작.[19] 2012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모옌의 소설 '홍까오량 가족'을 원작으로 하였다.[20] 중국어 제목은 '추쥐가 소송을 걸다'라는 뜻이다. 중국어 병음 Qiu Ju(추쥐)를 '귀주'로 오역하는 바람에 엉뚱한 제목이 돼 버렸다. 굳이 한국어로 했으면 "추국"이라고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