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병
1. 개요
淸州兵. 호표기와 함께 조조 세력의 특수 병과로 알려진 부대. 청주(靑州)의 황건적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이렇게 명명된 것으로 보인다.
2. 역사
192년에 황건적의 활동이 다시 극심했을 때, 조조는 연주 구원전에서 청주에서 넘어온 황건적을 토벌하고, 100만 명(가족 포함)의 황건적 중 젊은 자를 뽑아 30만 명의 청주병이라는 특수부대를 만들었다고 한다.[1][2]
초화가 다스리는 청주를 휩쓸어 부유한 산동을 허허벌판으로 만들었고 기주, 연주 등 여러 주를 침공하여 연주자사 유대와 제북상 포신을 죽이기도 했다.
황건적 출신이어서 그런지, 심심찮게 약탈을 일삼았던 모양이다. 이 때문에 우금이 군법을 엄정히 하기 위해 이들을 처벌하기도 했다. 기록을 보면 처벌 수준이 아니라 마치 '''적군을 토벌'''한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우금전에는 우금이 청주병들이 약탈한다고 처벌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우금전 본문에 '조조가 관용을 베풀었었는데 이 때문에 감히 노략질을 일삼은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고 청주병들은 오히려 자기들을 처벌했다고 조조에게 일러바치고 우금 주변 사람들은 오히려 청주병들이 고해 바쳤다고 변명해야 한다고 하는 판국이었다.
조만전에서는 그 유명한 보리밭을 범하면 사형에 처한다고 했다가 조조 본인이 막상 어기게 되자 자살할 수는 없으니 머리칼을 잘라 대신하는 일화가 나오지만 이는 사실 조조군에서도 민간인 약탈은 잘 일어났다는 단적인 예다. 청주병이 조조군에 들어온 초기라 통제가 안되는 집단이라서 그런것도 아닌게 이게 장수를 칠때 있었던 197년의 일이라 조조가 이미 협천자를 하고 조조군은 관군행세를 하고 있었을 때인데 '조조가 관대하게 대해서 노략질을 일삼고' 심지어 일개 병사들 약탈하는거 처벌한다고 일러바쳐서 엄연히 조정의 신하인 평로교위 직이었던 우금이 굳이 조조에게 변명을 해야 할 정도였다면 이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금이 칭찬받은 것도 절도있게 영루를 세워 그것으로 칭찬받은 것이지 청주병을 처벌했다고 칭찬받은게 아닐 정도니, 이들은 군율의 준수 부분에서 조조로부터 자율권을 부여받아 군율을 잘 지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청주병은 아버지가 죽으면 자식에게 그 병역이 이어졌으며, 조조가 죽을 때까지 28년간 존재했다. 청주병을 지휘한 장수는 장패로 알려져 있다. 조조 사후 청주병은 스스로 해산하였다. 이 과정에서 잡음이 있을 뻔 한 것을 가규가 해결하였으며, 한편 장패는 청주병의 자진해산으로 군사들이 대부분 멋대로 이탈하여 졸지에 병권이 약해졌고 따로 병력 충원을 조비에게 요청하기도 했으나, 거절당하고 병권을 더 박탈당했다.
연의에서도 청주병의 병설과정이 나온다. 이 때 청주병을 이끌게 된 장수는 하후돈으로 결정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하후돈과 청주병과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는 기록이 없다.
매체에서는 하나같이 굉장히 과장되어 뭔가 엄청난 특수병과처럼 나오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세병제의 시스템 아래 둔전 단위로 조직된 황건출신 전쟁포로 병사들이다. 포로가 된 적군이나 유랑민 등을 강제징집하여 둔전에 귀속시키는 것은 그다지 특이한 것도 아니고 뭔가 조조만의 대단한 제도적 혁신의 결과라고 볼 근거 또한 없다. 후한말이 워낙 난세였던만큼 군벌들이 유랑민이나 포로를 받아들여 자신의 군세에 합류시키거나 생산인구로 삼은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었으며, 예를 들어 아래 항목들에서 비교의 대상이 된 동주병(東州兵) 또한 청주병의 설립과 맥락이 완전히 일치한다.
다만, 시기가 시기인 만큼 청주병은 매체에서 묘사된 것과는 좀 다른 의미에서 조조에게 매우 커다란 의미가 있는 병사들이었는데, 말하자면 조조의 패업의 시초가 된 병력이자 요즘 경우에 비교하면 소위 "건군 1세대"로 부를 수 있는 조조군의 기틀이 되었기 때문.
190년 이후 몇 년 동안은 조조의 생애에 있어 가장 암울한 시기 중 하나인데, 동탁군과의 형양전투에서 패배로 조조의 군세는 말 그대로 궤멸적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그 직후 조조는 급히 여강 부근까지 남하하여 새로 모병을 해야 했는데, 형양에서 여강은 결코 가까운 거리라고 할 수 없다.
반면, 여강은 상대적으로 조조의 고향인 예주의 패국 초현과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이를 감안하면 워낙 뼛속까지 탈탈 털린 나머지 최초 궐기 때 진류 부근에서 장막의 도움을 받아 모병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고향 근처까지 내려가서야 다시 모병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렇게 어렵게 다시 모은 소수의 병력마저도 반동탁연합에 다시 합류하기 위해 북상하던 도중 예주 내에서 반란을 일으켜 조조가 직접 싸워서 격퇴해야 했을 정도로 재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고생을 해가며 겨우 새로 모은 병사들과 함께 연합군의 주둔지에 도착했더니 그 연합은 지리멸렬 내분으로 와해되고 만다.
결국, 확실한 근거지나 믿을만한 병력규모가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뒤이어 발생한 대규모 황건적의 청주, 연주 공격으로 조조는 적은 병력이나마 연주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가는데, 그 과정에서 힘든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고, 연주의 주요 인물들이었던 제북상 포신, 연주자사 유대가 전사하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이후 연주목이 되어 생애 첫 근거지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딸려온 것이 바로 대규모의 황건적 포로들인데, 청주병이 되는 이들은 조조가 손에넣은 최초의 유의미한 대규모 병력이다. 30만이라는 과장된 서술을 믿을 수 없다고 할지라도 수 만정도는 되었으리고 추정되는데, 이전까지 조조가 거느리고 지휘한 병력이 개인 재산과 지인의 도움을 통해 모은 수 천 단위에 불과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요즘 말로 치면 중급 장교 정도 수준의 병력에서 일순산에 사단장급 대규모 병력을 부릴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조가 이 정도의 대규모 병력을 얻게 되는 두번째 계기는 원가 제압 이후 손에 넣게 된 하북의 병력이며, 세 번째 주요 병력이 형주 제압 이후 얻게 되는 형주의 병력임을 감안한다면 그야말로 "건군 1세대"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행정적으로도 조조가 설치하고 운용하게 되는 최초의 세병들이자 최초의 둔전병들이기도 하니, 이러한 제도를 설치하여 청주병을 운용해본 경험이 훗날 위나라 군사제도의 성립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창작물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도 등장하는데, 그중 삼국지 10에서는 오리지널 부대로 등장하며, 오로지 조조의 세력에만 귀속된다.[3] 공격력 쪽에 추가 능력치가 붙는다. 삼국지 13에서는 창병 중 가장 사기 캐릭터인데, 정예창병을 상위입찰하는 것은 물론이고 같은 창병계열 특수병과인 동주병과 비교하면 동주병은 공격력 버프뿐인데 반해 청주병은 사기 버프도 걸려있어서 괴멸당할 상황에서도 '''잘 버틴다.''' 삼국정립이나 조조가 대충 하북중원 먹은 이후 조글링러시 들어올 때 컴퓨터 AI는 죄다 청주병과 호표기를 뽑아서 오기 때문에 꽤 힘들다. [4] 얻는 방법은 북해와 제북 사이에 위치한 집락 제남을 점령하면 된다.
삼국전투기에서 고순이 이끄는 함진영과 함께 최강의 특수부대로 언급되며 얼굴에 특수분장을 하는 병졸로 그려진다. 정확히는 브레이브 하트에서 묘사되는 대청 특공대로 보인다. 조조가 연주 구원전이 끝난 뒤 하후돈에게 지휘를 맡겼으며, 작중에서 우금, 장패의 지휘를 받기도 하는 모습이 나온다. 조조가 사망한 뒤 스스로 군을 떠나는 모습이 나온다.
창천항로에서는 7권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연의의 설정 그대로 백성 100만에 정병 30만으로 나온다. 조조의 성을 공격할 때는 황건적 장로 여러 명이 지도했으나, 조조와 대화[5] 한 후 조조의 제안을 받아들인 장로들이 집단으로 자결한 후에는 조조의 수하가 된다. 지형을 십분 활용했다지만 여포의 1만 병력을 단 5백 명만으로 분쇄하고 관도 대전에서는 기십 만 단위의 원소군을 학살하는 등, 조조의 비밀 병기라는 식으로 막강하게 묘사된다. 관도 대전의 최후를 장식하기 위해 청주병이 출전하는 광경을 본 허도의 어느 고관은 아끼고 아껴둔 청주병까지 꺼내는 것을 보니 조조는 곧 패배한다고 추측할 정도.
조조와는 은근히 잘 맞는 구석이 있다. 조조는 황건적 장로들과의 약속을 끝까지 존중하고 청주병의 사상을 탄압하기는커녕 훈련할 때는 "중황태을" 이라는 황건적의 구호를 마음껏 외치게 내버려 두며, 원소를 보고 두통을 달래다가 청주병이 보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내심 아낀다. 난세가 바뀌기를 소망했던 청주병은 변혁을 원하는 조조에게 공감하는지, 오소에서 원소군을 변혁을 원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매도하자 분노하여 눈물을 흘리며 원소군을 도륙한다. 조조도 청주병의 기질을 아는지, 오소를 습격하러 가기 전에는 원소와 그의 무리를 무자비하게 학살해야겠다며 청주병을 통솔하는 나엄에게 자신의 잔혹함을 견딜만큼 신앙심이 두터운 자들만 추리라고 명을 내렸다. 이들의 관계를 본 관우는 조조를 "'''수십만 나찰'''에 군림하는 간웅" 이라고 묘사한다. 조조 사후에는 자진해서 해산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6]
용랑전에서도 등장. 조조군의 직속부대로 등장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이며 사마의 중달에게 충성하고 있다.[7] 사마의가 모습을 드러내자 조조군을 배신하고 중달의 수하로 들어간다.
화봉요원에서 십상시를 깊이 증오한다는 설정이 붙었다.
[1] 조조의 몇배로 세력이 커진 이 사건을 하작은 위무지강의 시작이라 평한다.[2] 청주병 30만 기록은 진수, 배송지, 호삼성, 하작, 노필, 현대 서양학자인 Richard Rafe Champion de Crespigny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후한인구의 9/10가 유민이 되는 상황이었고 황건적의 난과 기근이 가장 극심한 청주였기에 100만 단위의 유민, 도적이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청주자사 초화의 기록에는 청주가 황건적으로 인해 텅 비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공융전, 장홍전, 원소전 등으로 주 전체가 초토화 되고 대부분의 백성이 유민, 도적으로 전락한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청주병 30만 모두가 전투병력이라기보다 예비군 개념의 징병가능 성인남자 인구일 수는 있다. 역사 기록을 부정할 근거가 없는 한 개인의 의견을 사실인 양 기술하지 않도록 한다.[3] 하지만 다른 세력도 어떤 방법으로 하면 쓸 수가 있는데. 황건적 시나리오 쯤의 재야로 등장하는 조조군 소속에 가까운 장수들이 사병으로 가지고도 있는 경우가 있다. 이후 시나리오 쯤에는 청주병이 있는 조조 세력으로 쳐들어가서(...) 청주병을 무시하고 최종 성문(시가전은 관청)를 공격해서 무너트려 이기면 점령 후 살아남은 일부 병종들이 그대로 있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적 부대들을 전멸시켜서 이기면 모든 병종들이 부상병이 남아도 해산되기 때문에 얻을 수도 없고 그냥 증발한다.[4] 사실 고수들은 청주병을 상대해도 빨리 안 죽어서 좀 귀찮네 할 뿐이지만. 화계로 불지르고 낙석에 사망민함정에 맹독 깔고 등등... 사기 버프에는 청주병 할애비가 와도 답이 없다. 그냥 녹아내리는 숫자일 뿐.[5] 도술로 구름을 타고 몰려오는 광경을 연출했지만, 사실은 연기를 피운 후 병사들이 겹겹이 쌓아 만든 인간 탑 위에 서 있었다.[6] 누군가가 어디로 가냐고 묻자 "주군과의 약속" 을 이행할 뿐이라고 했다.[7] 정확히는 중달과 손잡은 한 인물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