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후돈

 




'''맹하후(盲夏侯)
夏侯惇
하후돈
'''
'''시호'''
충후(忠侯)
'''작위'''
고안향후(高安鄕侯)
'''최종직위'''
대장군(大將軍)
'''성씨'''
하후(夏侯)
''''''
(惇)
''''''
원양(元讓)
'''족제'''
하후연(夏侯淵)
'''생몰 기간'''
음력: ?년 ~ 220년 4월 경오(25)일[1]
양력: ?년 ~ 220년 6월 13일
'''고향'''
패국 초현 
역임한 관직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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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조조)
분무장군 사마(奮武將軍 司馬)
절충교위(折衝校尉) 겸 동군태수(東郡太守)
진류태수(陳留太守) 겸 제음태수(濟陰太守) 겸 건무장군(建武將軍)
진류태수(陳留太守) 겸 제음태수(濟陰太守) 겸 건무장군(建武將軍) 겸 하남윤(河南尹)
하남윤(河南尹) 겸 복파장군(伏波將軍)
전장군(前將軍)

<bgcolor=#00008b> {{{#FEDC21 조위(조비)

대장군(大將軍)
}}}}}}
1. 개요
2. 정사
2.1. 초기 생애
2.3. 복양 전투
2.4. 서주에서
2.5. 조조 휘하
2.7. 박망파 전투
2.8. 하북 평정
2.9. 장로 정벌
2.10. 216년 ~ 217년 유수구 전투
2.12. 죽음
2.13. 사후
3. 연의
4. 평가
4.1. 부정적 평가
4.2. 긍정적 평가
4.3. 종합적 평가
5. 기타
6. 미디어 믹스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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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하후영의 후손, 조만전과 세어에 따르면 조조의 사촌. 는 원양(元讓). 패국 초현 사람.
'''정사와 연의에서의 차이가 가장 극심한 인물 중 하나로''' 연의에선 최전방에 나서는 맹장으로 각색되었으나, 실제 정사에선 전선보단 주로 후방을 관리하고 체제 안정에 힘썼으며 전장에서의 군공은 사서에는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다.

2. 정사



2.1. 초기 생애


14세에 스승을 모시고 학문을 배웠는데 어떤 이가 그의 스승을 모욕하자 그를 죽였고 이로 인해 그의 강직한 기풍이 알려지게 되었다.[2]
조조가 처음 거병한 이래 하후돈은 늘 비장(裨將)으로 정벌을 수행했다.

2.2. 동탁 토벌전


조조가 분무장군의 직을 행할 때, 하후돈을 사마로 삼아 백마에 따로 주둔시켰고, 절충교위로 승진시켜 동군태수를 겸하게 했다.
무제기에 따르면 조조의 군사가 적었으므로 하후돈 등과 함께 양주로 가서 모병하니 양주자사 진온, 단양태수 주흔이 군사 4천 여 명을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예주 패국 용항현에 당도하자 사졸들이 다수 모반했다.
한호전에 따르면 하후돈이 한호의 명성을 듣고 청하여 서로 만났는데 그를 높게 평가하여 병력을 지휘해 정벌에 수행케 했다.[3]

2.3. 복양 전투


조조가 도겸을 공격할 때 하후돈을 남겨 복양을 수비하게 했다.
순욱전에 따르면 순욱장막이 반란을 일으켰음을 알고, 곧 병사를 이끌고 대비를 했으며, 동군태수 하후돈을 빨리 불러 들였지만, 연주의 여러 성이 모두 여포에게 호응했다. 이때 조조의 모든 군대는 도겸을 공격하고, 남겨서 수비하던 병사는 적었고, 감독하던 장수와 큰 관리들이 장막, 진궁과 많이 남몰래 서로 통하여 공모하였다. 하후돈이 도착하자, 그날 밤에 모반하였던 자 수십명을 주살하니, 군대가 이내 평정되었다.
예주자사 곽공이 군사 수만을 이끌고 성 아래에 이르르니, 혹자들은 곽공이 여포와 같이 모반을 일으켰다고 말하니, 군사들이 심히 두려워 했다. 곽공순욱을 보려 하니 순욱이 가려고 했다. 하후돈 등이 말했다.

그대는 한 주의 중요한 인물로, 가면 반드시 위험하게 될 것이니 가면 안됩니다.

순욱이 말했다.

곽공이 장막 등과 본래부터 결탁한 것은 아니며, 지금 빨리 온 것은 그 계책이 반드시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요. 아직 정해지지 않았을 때 그를 설득하면, 중립을 하게 할 수 있으니, 만약 먼저 의심한다면, 저들은 장차 노하여 계책을 완성할 것이오.

곽공이 순욱을 만나보내는데 두려운 뜻이 없고, 견성은 쉽게 공격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에, 마침내 병사를 이끌고 가버렸다.
장막이 모반하여 여포를 맞이했는데 조조의 가솔들이 견성에 있어 하후돈이 적은 수의 군대로 견성으로 나아가다가 여포와 조우해 교전했다. 여포는 군을 물려 마침내 복양에 입성하여 하후돈 군의 치중(輜重)을 습격하여 탈취했다.
여포가 장수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고는 하후돈을 사로잡아 보물을 요구하니 하후돈의 군중이 두려움에 떨었다. 이에 하후돈의 장수 한호가 군사들을 지휘해 병영의 문에 둔치고 군리(軍吏)와 제장들을 불러 모두 각자 담당하고 있는 부(部)를 단속하여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자 여러 군영이 안정되었다.
그리고 하후돈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 그를 인질로 잡고 있는 자들을 질책하여 말했다.

너희들이 흉역하게도 감히 대장군을 사로잡아 겁박하고도 살기를 바라는 것인가! 내가 도적을 토벌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어찌 장군 한 명 때문에 너희들을 용서하리.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며 하후돈에게 말했다.

응당 국법이 이러하니 어찌하겠습니까!

그리고 병사들을 재촉해 하후돈을 인질로 잡고 있는 자들을 공격하게 하자 두려움에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저희들은 다만 필요한 돈과 물품을 얻어 떠나려 했을 뿐입니다.

한호가 여러 차례 책망하며 모두 참수했다.
하후돈이 풀려나고 난 뒤 조조가 이를 듣고 한호에게 말했다.

경이 이처럼 한 건 가히 아주 오랜 세대의 법이오.

이에 영을 내려 지금 이후로 인질을 붙잡는 자가 있으면 모두 함께 공격하고 인질을 돌보지 말도록 했다. 이로 인해 인질을 붙잡고 협박하는 자가 없어지게 되었다.
조조가 서주에서 돌아오고 하후돈이 이를 수행하여 여포를 공격하다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왼쪽 눈을 다쳤다. 이 일로 하후돈은 애꾸눈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하후돈 최대의 콤플렉스가 되었다. 여기서 왼쪽 눈을 다쳤을 때 하후돈이 아버지의 정기가 담긴 피를 어찌 흘리겠느냐며 다친 눈알을 뽑아 씹어먹는데 이건 연의의 창작이다. 실제로 눈알이 뽑힐 정도로 눈이 다치면 눈은 물론 뇌신경까지 무리가 가기 때문에 죽는다.
위략에 따르면 이때 하후연과 하후돈이 둘 다 장군이었는데, 둘 다 '하후 장군'이라 군중에서는 한쪽 눈을 잃은 하후돈을 맹하후(盲夏侯)라 불렀다. 하후돈은 이를 싫어했는데, 거울을 보면 화를 내며 번번이 땅바닥에 집어던지곤 했다.
그래도 부하들을 죽이거나 처벌했다는 기록은 없고 거울에만 화풀이하고 만 걸 보면 역시 사람은 좋았다. 사실 맹하후라는 별명은 군중에서 은어처럼 쓰였다는 것이지 그 별명을 대놓고 상관 앞에서 쓰는 건 미치지 않고서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놀리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두 명의 하후 장군을 구분하기 위한 별칭 격이었던 걸 듣고 잡아 죽였다면 그거야말로 인성에 문제가 있을 노릇이다. 오히려 전투에서 입은 상처인 만큼, 본인 생각은 어떨지 몰라도 군중 가운데서는 그리 치욕스런 별명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체로 하후돈의 성격은 여러 정황상 과격하고 용맹하면서도 위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다른 일화에서 보면 감정이 격해질 상황에서도 도를 넘지 않고 오히려 너그럽게 대처하려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4. 서주에서


여포전에 따르면 198년, 여포가 다시 모반하여 원술 편에 서고, 고순을 보내 패(沛)에서 유비를 공격해 격파했다. 조조는 하후돈을 보내 유비를 구원했으나 고순에게 패했다.

2.5. 조조 휘하


다시 진류, 제음태수를 겸하고 건무장군의 직이 더해지고 고안향후에 봉해졌다.
위진전에 따르면 하후돈이 진류태수가 되었을 때, 위진을 계리(計吏)로 추천하고, 부인에게 연회에 출석하도록 명령했다. 위진이 말했다.

말세의 풍속이야. 바른 예절이 아니오.

하후돈은 매우 화가 나서 위진을 체포했지만, 오래지 않아 그를 사면시켜 주었다.
큰 가뭄이 들고 황충이 일자 하후돈은 태수(太壽)의 물을 끊어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손수 흙을 져 나르고 장병들을 이끌고 벼 심기에 힘써 백성들이 이로움을 입었다. 전임하여 하남윤을 겸했다.

2.6. 관도대전


조조가 하북을 평정할 때 대장군을 위하여 후방을 지키게 했다.[4]

2.7. 박망파 전투


이전전에 따르면 유표는 유비를 보내 북방을 침략하도록 하고 엽에 이르렀다. 조조는 이전을 보내 하후돈을 따라가서 유비와 대항하도록 했다. 유비는 하루아침에 군영을 불태우고 떠났으며, 하후돈은 군사들을 이끌고 그를 추격하려고 하는데 이전이 말했다.

적군이 이유도 없이 물러났으므로 틀림없이 매복하고 있을 것으로 의심됩니다. 남쪽으로 가는 길은 좁고 초목이 우거져 있으므로 추격할 수 없습니다.

하후돈은 듣지 않고 우금과 함께 그를 추격하였고, 이전은 남아 군영을 지켰다. 하후돈 등은 과연 적군이 매복해 있는 가운데로 들어가 전세가 불리해졌다. 이전이 구하러 가자, 유비는 구원병이 도착한 것을 보고 흩어져 물러났다.

2.8. 하북 평정


업이 함락된 후 복파장군으로 승진시키는 한편 예전처럼 하남윤을 겸하게 하고 편의대로 일을 처리하여 법령에 구애 받지 않도록 했다.
두기전에 따르면 조조가 하북을 평정한 뒤, 고간이 병주를 이끌고 반역했다. 당시 하동태수 왕읍은 중앙에 불려와있었으므로, 하동의 위고, 범선은 겉으로는 왕읍의 귀환을 청원하였으나, 속으로는 고간과 모의를 함께하였다.
두기전에 따르면 조조는 하후돈을 파견하여 그들을 토벌케 하였으나, 그 군은 아직 도착치 않았다.
두기전에 따르면 위고 등과 고간, 장욱은 힘을 모아 두기를 공격하였으나 이를 격파하지 못했고, 이에 여러 현을 약탈하였으나 손에 넣은 것도 없었다. 이때, 대군(하후돈)이 도착하여 고간, 장욱은 패퇴, 위고 등은 주살되었다.
207년, 하후돈의 앞뒤 공을 기록해 봉읍을 1800호를 늘려 이전과 아울러 모두 2500호가 되었다.
전주전에 따르면 조조는 조정 신하들의 생각을 듣고 전주를 제후로 봉하려고 했다. 전주는 평소 하후돈과 친했으므로, 조조는 하후돈에게 말했다.

그대가 먼저 가서 우정으로 그를 설득하오. 이것은 모두 그대의 뜻이라고 말하고, 나의 뜻이라고 말하지는 마시오.

하후돈은 전주의 숙소로 가서 조조보다 먼저 권하는 것처럼 했다. 전주는 하후돈이 찾아온 뜻을 알고 그와 얘기하지 않았다. 하후돈은 떠날 때, 전주의 등을 치며 말했다.

전군(田君), 주군의 뜻이 이토록 간절하니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는 없겠소?

전주는 대답했다.

장군은 나 전주의 사람됨을 잘 알면서 오히려 이렇게 재차 말하고 있소. 만일 반드시 부득이 받아들여야 한다면, 나는 당신 앞에서 머리를 잘려 죽기를 원하오.

전주는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하후돈은 이런 사정을 모두 조조에게 보고했다. 조조는 전주의 뜻을 끝내 굽힐 수 없음을 알고 깊게 탄식하며 그를 의랑으로 임명했다.

2.9. 장로 정벌


장로전 주석 위명신주에 따르면 양평산 위의 둔영들을 공격하는데 있어 제대로 이기지도 못하고 상처 입은 병사들이 많았다. 조조는 뜻을 이루지 못하자 군대를 데리고 후방을 막으면서 돌아가고자 하후돈과 허저를 보내 산 위의 병사들에게 소리쳐 돌아오도록 하였다. 전군이 다 돌아오지도 못했는데 밤중이라 길을 잃어 적의 군영으로 잘못 들어갔고 적들은 기습이 있는 줄 알고 모두 퇴산하였다.
시중 신비유엽 등이 군대의 후방에 있으면서 하후돈과 허저에게 말했다.

관병이 이미 적군의 둔영을 점거했고 적들은 퇴주했습니다.

그 둘은 믿지 않았다. 하후돈이 나아가 친히 이를 보고 마침내 돌아와 조조에게 아뢰니 병사를 진군시켜 평정했으므로 운이 좋게 이긴 것이다.

2.10. 216년 ~ 217년 유수구 전투


사마랑전에 따르면 사마랑은 하후돈, 장패 등과 오나라를 정벌하러 갔다.
무제기에 따르면 3월, 왕(조조)이 군을 이끌고 돌아오며 하후돈, 조인, 장료 등을 남겨 거소에 주둔하게 했다.
216년, 손권을 정벌하는데 수행했다가 돌아올 때 하후돈을 26군의 도독으로 임명해 거소에 머물게 했다. 기악(伎樂)과 명창(名倡)을 하사하며 영을 내려 말했다.

위강은 융족과 화평한 공으로 금석(金石)으로 만든 악기를 받았는데 하물며 장군이랴!

이때 하후돈은 조조군의 2인자로서 잡호장군인 북파장군 신분으로 26군을 독한 셈인데 한나라 승상 영기주목 조조가 복파장군 하후돈에게 26군을 도독하라는 권한을 내렸다고 보면 된다. 잡호장군이든 뭐든 한나라의 실권자인 조조가 조직의 2인자로 인정한 하후돈에게 26개로 이루어진 대규모 군단의 관리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이는 즉, 후한 말 조조가 이끌던 한 조정에서 관직의 위계가 생각보다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대의 적인 원가를 멸한 후 조조는 자신의 관직을 사공 거기장군에서 승상으로 올리는데 208년 6월의 일로, 이 시점에서 조조는 헌제 유협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한나라의 실질적인 1인자가 된다. 이런 조조가 잡호장군이긴 하나 하후돈에게 26개의 군을 도독하라는 영을 내렸다. 헌제 유협을 능가하는 실질적인 권력자인 승상 조조의 명령이니 절대적이다. 하후돈이 일개 잡호장군이라고 해도 조조 군벌 내부에서는 누구도 이를 무시할 수가 없다. 하후복파는 조승상이 내린 도독 권한을 바탕으로 26군의 군사 업무를 관장한 대리자니까.

2.11. 번성 공방전


219년, 서황관우의 번성포위를 푼 다음, 조조가 마피에 주둔했을 때 하후돈을 불러 항상 함께 수레를 타고 특히 친밀하고 중하게 대하여 침소에 출입케 하니 다른 여러 장수들 중 이와 같은 경우는 없었다. 양주의 총사령관 역할이었던 하후돈이 뜬금없이 형주에서 조조와 만났다는 것은 하후돈이 관우를 막기 위해 동원된 장수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5] 당시 장료도 형주 방면으로 파견되어 마피에 주둔했다는 기록이 있음을 보면 하후돈과 함께 온 것으로 보인다.
위서에 따르면 이때 여러 장수들이 모두 위의 관직을 받았는데 하후돈이 홀로 한의 관직을 받았다.[6] 이에 상소하여 신하된 자의 도리가 아니어 부당하다고 진술하자 조조가 말했다.

내가 듣기로 가장 좋은 것은 스승 같은 신하요, 그 다음이 벗 같은 신하라 했소. 구차하게 위의 관직일 필요가 있겠소. 신하는 몸을 굽혀 주군을 섬기면 충분하오.

그럼에도 하후돈이 굳게 청하자 전장군에 임명했다.
무제기 주석 위씨춘추에 따르면 하후돈이 왕(조조)에게 말했다.

천하가 한조가 이미 끝나고 다른 대(代)가 바야흐로 일어서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30여 년간 군사들을 이끌어 그 공덕이 백성에 드리웠고 천하가 귀의했으니 하늘과 백성에 순응할 뿐 어찌 다시 의심하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만약 천명이 내게 있다면 나는 주문왕이 될 것이다.

과거 주문왕주왕의 신하로 주왕을 지극정성으로 섬겼으나 그 아들 주무왕이 결국 주왕을 죽이고 천하를 통일한다. 조조가 주문왕이 되겠다는 것은 찬탈의 악역을 자신의 후계자에게 넘기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제기 주석 조만전과 세어에 따르면 환계가 왕(조조)에게 정위(황제)를 권하자, 하후돈은 의당 먼저 촉을 멸해야 하며 촉이 망하면 곧 오가 복종할 것이니 두 지역을 평정한 연후에 , 의 궤범(선양)을 따라야 한다고 하니, 왕이 이에 좇았다.
전장군에 임명되고 제군을 지휘하여 수춘으로 돌아갔는데, 소릉으로 옮겨 주둔했다.

2.12. 죽음


하후돈은 군중에 있을 때도 스승을 모시고 학문을 배웠다. 그 성정이 청렴, 검소하여 남은 재물이 있으면 즉시 나누어서 베풀고 부족하면 관청에서 도움을 받고 별도로 산업을 경영하여 치부하지 않았다.
무제기 주석 조만전과 세어에 따르면 왕(조조)이 죽자 하후돈은 예전에 했던 말을 상기하고 한스러워 하다 발병하여 죽었다.
조비가 왕위에 즉위하자 하후돈을 대장군에 임명했는데 그 몇 달 뒤에 죽었다.
문제기 주석 위서에 따르면 이때 조비는 흰 상복을 입고 업성의 동쪽 성문까지 행차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러나 예법에 의하면 같은 성씨를 가진 경우에는 종묘의 문 밖에서 곡을 해야 하는데, 성문까지 나가서 곡을 한 것은 예법에 어긋난 것이다.
시호를 내려 충후(忠侯)라 했다. 아들인 하후충이 후사를 이었다.

2.13. 사후


황제가 하후돈의 공을 기려 그 자손들을 모두 후에 봉하려고 하후돈의 식읍 천 호를 나눠 하후돈의 일곱 아들과 두 손자에게 하사하고 모두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다. 하후돈의 동생 하후렴과 아들 하후무는 원래 이와 별도로 열후에 봉해졌었다.
명제기에 따르면 233년 여름 5월 12일, 조칙을 내려 지금은 고인이 된 대장군 하후돈, 대사마 조인, 거기장군 정욱을 조조의 종묘 정원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진양추에 따르면 266년, 고안향후 하후좌가 죽어 하후돈의 후사가 끊기자 조서를 내려 말했다.

하후돈은 위의 으뜸 공신으로 위로부터 선위를 받은 짐(사마염)이 어찌 공신을 잊겠는가! 마땅히 하후돈의 가까운 친척을 택해 책봉하도록 하라.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맹장으로 각색되어 조조군에서도 손꼽히는 용장의 이미지로 나타나서, 늘 조조가 싸울 때는 최선봉에 나선다. 또한 하후연의 친형으로 나오는데, 정사에서는 그냥 하후연과 종형제, 즉 사촌 지간이었다. 한 마디로 '''"마왕 조조의 외눈박이 행동대장 부하 캐릭터"'''가 주어진 것이다.
조조가 거병하기 전에는 조조의 친척들 중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로서 조조가 시국에 대해 한탄하면 맞장구를 치는 식으로 첫 등장했다. 그러다 조조가 거병하자 하후연과 함께 제일 먼저 달려와서 합류한다. 참고로 그 바로 다음에 도착한 이들도 같은 일족인 조인조홍이었다.
초반엔 조조가 동탁 토벌전 당시의 형양 전투에서 서영을 베어 죽이며, 원술의 부장 교유를 찔러 죽인다. 이후 서주에서 여포군의 맹장 고순과도 겨루다가 40합 만에 우세를 점했는데, 안 되겠다 싶었던 고순은 부장 조성에게 유인했고, 조성이 기습적으로 쏜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을 잃는데, 이때 "이 눈은 아버지의 정(精)과 어머니의 피로 이루어진 것인데 어찌 함부로 다룰 수 있겠느냐."라는 말과 함께 화살 꽂힌 을 화살째 뽑아서 씹어 삼키고는[7] 바로 조성을 베어 죽인다. 그리고 조조군과 여포군이 겨룰 때 비록 다른 장수들과 힘을 합쳤다고는 하지만 여포와 일기토 를 벌여서도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전설의 아가리 파이터 예형이 조조의 부하들을 놀릴 때 하후돈을 완체 장군이라고 칭했다. 그 완체란 말 자체가 사지가 멀쩡하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라 오히려 애꾸인 하후돈을 놀리기 위해서 비꼰 것이다.[8] 그런가 하면 다른 판본에선 (눈 하나가 없어서 움직이기 힘들테니) "의사 조수나 하면 제격"이라고 까는 장면도 있다.
자신이 아끼던 진기가 관우에게 베이자 복수하러 관우를 공격하러 와서 천하의 관우와 수십합을 겨루며 대등하게 맞짱을 뜨는 모습도 보여준다. 결국 달려온 장료가 말려서 승부는 나지 않았다.
박망파 전투에서 하후돈은 이전의 충고를 듣지 않고 조운을 추격하다가 제갈량의 화계에 당한다. 병사들을 죽게 한 책임을 지기 위해 스스로를 포박하고 조조에게 죄를 청했으나, 조조에게는 일족이자 능력에서도 경험으로도 첫째가는 장수였기에 그를 용서했다. 그리고 제갈량에 대해 처음으로 경계하게 된다.
한중 공방전에서는 양수계륵 뜻풀이를 듣고 그걸 옳다고 여겨 철수 준비를 했다. 이 일로 양수는 군령위반 죄목으로 처형당했고 하후돈도 같은 죄로 사형 명령이 내려졌지만 주변 사람들의 만류로 살았다. 물론 조조는 진짜 하후돈을 죽일 생각은 없었고 단지 경고 차원에서 그랬던 것.
조조의 명으로 복황후를 죽이는데 앞장섰고, 이후 조비의 부름을 받아 입궐하려다 하늘에 떠 있는 복황후와 복완 일행의 유령을 보고 기절해 그 뒤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연의의 창작이고, 실제로는 그냥 노환으로 죽었다.

4. 평가



4.1. 부정적 평가


연의와는 달리, 정사에서의 하후돈은 이렇다할 군공이 없다. 오죽하면 개인의 인격이나 정치력은 나쁘지 않지만 군사적 능력은 무능하기 짝이 없는 낙하산 똥별로 평가하는 견해가 나오는 상황.
하후돈은 분명히 동료들보다 떨어지는 군사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중요한 직책을 맡았고, 야전에서 맹위를 떨친 쟁쟁한 장군들보다도 훨씬 고위층인 대장군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지만 군공에 대한 별다른 설명이 없다. 하후돈이 아예 능력이 없지는 않았지만 대장군 같은 거창한 지위를 얻기에는 군사적 능력이 심히 함량 미달인 인물인데 단지 조조와 혈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조조의 군부 장악 정책의 일환으로 대장군 자리에 박아넣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 부정적 평가의 뿌리이다.
연의가 죄다 지휘관 = 선봉장처럼 묘사해놓아서 모든 장수들이 인간병기화 된 측면이 있지만, 이를 고려하고 보아도 하후돈은 정말 군공이 적다. 고작해야 압도적인 전력으로 반란군 진압을 했던 적이 몇차례 있고, 우연히 장로 진영을 함락시킨 정도야 유의미한 군공의 전부. 여기에 후방에서 보급을 맡거나, 목민관으로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준 정도인데 이런 업무를 군공으로 볼 수는 없다. 서황, 장료, 장합, 우금, 하후연, 조인 같은 뛰어난 사령관들이 즐비한 조조 진영에서 이 정도 군공으로 대장군이라는 것은 민망할 정도이다.

4.2. 긍정적 평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하후돈이 군재가 뛰어났다는 주장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조가 유독 하후돈을 특별히 더 귀하게 대접한데는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당시 조조의 입장에서는 친족 우대는 반드시 나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믿을 만한 친족들이 곳곳에서 활약해 줄 경우, 조조를 중심으로 하는 군벌 세력의 조직력이 튼튼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세력 내에 조조의 막부와 헌제의 조정이 공존하면서도 서로를 견제하는 모순적인 정치 상황에서 조조가 권세를 유지하려면, 무엇보다 신뢰할 수 있는 친인척 인사들이 군부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어차피 조조 자신이 당대 최고의 군략가로서 중요한 원정에는 거의 항상 친정했고, 조씨 일족의 조인을 비롯해 일선에서 활약할 뛰어난 장군들도 많이 있었기에 하후돈의 군사적 능력 부족은 당장 큰 결격 사항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친족을 통한 군부 장악 원칙은 아들 조비에게 이어져서 조비 즉위 이후 대사마 조인을 중심으로 하였고 조인 사후에는 조휴, 조진이 대사마와 대장군이 되어 군부 중추에 자리잡는다.[9]
조조가, 더 나아가 조씨가 원했던 대장군감의 첫째 조건은 군사적인 재능이 아니라,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면서 아랫사람들을 적당히 아우를 수 있는 용인술과 인망을 겸비한 인물이었으며, 하후돈은 이 부분에서 매우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조조 입장에서는 그래야만 헌제에 충성하는 자들이 군부에 파고들거나 군부의 장성이 헌제에게 직접 포섭되는 것을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후돈의 몇 안 되는 군공의 대부분은 반란 진압이며, 특히 허창에 가까운 지역에서의 반란 진압을 주로 맡았다. 이를 보건데 하후돈의 역할은 군정을 총괄하는 대장군으로서 부하들의 인망과 충성을 얻으면서, 충성의 방향이 오직 조조에게만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지 않았나 생각되고, 반란진압에도 최적화된 장군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하후돈의 공은 조조의 패업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임협집단의 의리를 기초로 구성된 초중반의 유비 진영과, 강남의 유력가문으로 손견-손책-손권의 대를 이어 내려온 오나라 진영과 달리 조조 진영은 인척집단+초기공신+항장+신진세력이 뒤섞여 있으며, 이들이 제각기 내로라하는 뛰어난 재능과 실력을 뽐내던 집단이었다. 이런 특색있는 집단을 내적으로 단속하여 서로 공을 다투거나 알력 싸움으로 전력을 낭비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다는 점에서 공신이라 부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할만한 부분이다.
게다가 하후돈이 큰 전쟁에서 자주 맡았던 직책 중 하나였던 후방 군량보급은 매우 중요한 요직 중 하나이다. 행보관이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은 고대 군대 운용의 핵심을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군의 보급은 현대에도 중요한 일인데, 이렇다 할 교통수단이 없는 고대에서 군량보급은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다. 특히 조조군 같이 원정이 잦았던 군대에서 군량보급을 전담한다는 것은 총사령관 다음으로 군 조직 내부에서 비중이 크다. 단적인 예로 원소군의 2인자였던 순우경관도대전에서 맡았던 임무는 군량고를 지키는 일이었다. 순우경은 연의에서의 찌질한 이미지와는 달리, 젊을 적에는 팔교위 중 하나로 원소와 조조와 어깨를 견주었던 명사급 인물이자 원소군에서 계속해서 주요 직책을 맡았던 상당한 인물이었다.[10] 다른 사례를 보자면 한중공방전 당시 유비군의 군량보급을 담당했던것이 바로 제갈량이었으며, 그 제갈량은 승상이 되어 북벌할 때 자신과 같은 탁고대신이었던 이엄에게 보급을 맡겼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조조가 친정할 때 본진에서 군수물자를 지원한 사람은 바로 조조의 오른팔 순욱이었다.
하후돈이 거대한 조조진영에서 사실상의 군사적 2인자에 가까웠단 걸 생각하면, 군사적 능력보다도 정치적,행정적 능력으로 세력을 어떻게 운용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현대 군에서도 국방장관은 군사적 능력보다 군의 방향을 제시하는 정책을 수립하는 등 행정적 능력이 강조된다.[11] 심지어 조조군은 맹장들과 책사들이 넘쳐났다. 이런 환경에서 조조가 후방의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썩지 않게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인재들을 규합하고 행정적인 측면을 책임지며, 조조와 형제와 같이 친밀해서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인재라면 중용되는 게 이상한 게 아니다. 조조 초기 거병 당시 장막의 반기로 인해 멸망 직전까지 갔던 점을 기억해보면 하후돈 같이 믿고 중용할 수 있는 2인자의 존재감은 매우 크다. 거기다 하후돈이 군사적 능력이 떨어진다곤 한들, 출정할 때마다 연전연패하거나 치명적인 대패를 당한 것도 아니다. 다른 경쟁자들이 탈인간급이 많았을 뿐이지 1인분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게다가 초중기의 조조군에서 하후돈의 훌륭한 인품은 야전사령관으로서도 매우 긍정적인 요인이다. 식자층에서는 헌제를 옹립하며 정통성을 확보했던 조조이지만, 일반 평민과 병졸에게는 무관한 이야기였다. 초기부터 상당히 가혹한 통치체제를 구축한 데다가 원정까지 잦았던 조조군의 사기가 높았을 리가 만무하다. 실제로 조조 자신이 단양병의 반란으로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특히 청주병 같이 투항한 이후 영구적으로 병역에 묶여버린 병사들을 더 가혹하게 다루다가는 프래깅 위험이 컸다. 하후돈같이 인품 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사졸들이 휘하에 들고 싶다고 자청하는[12] 지휘관의 존재는 조조군의 성격상 반드시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하후돈은 지금으로 말하면 참모총장 또는 군수사령관 같은 역할이다. 이들은 직접 나가서 싸우지는 않으나, 후방에서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일들을 총감독하며 보급에 신경쓰고 전방에 나간 장군들이 잘 싸울 수 있게 해 준다. 비록 한쪽 눈의 실명으로 전방에 나갈 수 없게 되어 이런 역할이 주어지기는 했지만, 그 때문에 조조군은 후방에서 전방지원을 잘해줄 수 있게 되었다. 후방을 비우고 전방에 늘 제갈량이 있어야 했던 촉한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라. 더욱이 조조의 최측근 중의 최측근이라는 엄청난 권위까지 있어, 온갖 출신배경을 가졌던 장수들도 그 앞에서는 꼼짝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성격도 온화하여 조조가 점령한 영토 백성들을 진무하고 지지를 얻게 하는 데에도 능했다. 비록 전투의 공적은 적다 하여도, 그가 조조군 내부적으로 미친 영향력은 폄하받을 수 없다.
당장 하후돈 뿐만 아니라 수많은 하후,조씨 일가의 장군 중신들이 있는데 굳이 하후돈을 최고 직위에 임명했다는 점에서 단순 친족우대가 아님은 당연한 일이다.

4.3. 종합적 평가


대장군하면 떠올릴 법한 군사적 업적은 없지만 모범적인 군 행정관이자 위로는 상관인 조조에게 의심할 여지없는 충신이자 최측근, 아래로는 부하들을 잘 대해주는 상사였다. 즉 조조 입장에서는 군부를 잘 통솔하는 믿을만한 오른팔이었다. 순욱이 사대부들을 관리하면서 조조를 절대 배신하지 않을 오른팔이었던 것처럼 군부에서는 하후돈이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실제로 장막의 반란 당시 순욱이 총책임자로서 반란에 넘어가지 않은 세력들을 규합하고 통솔할 때, 하후돈은 그의 지휘에 따라 군대를 관리하였다.
이렇듯 조조가 그에게 대장군이라는 2인자 지위를 준 건 단순 친족에 대한 편의 제공이 아니라, 그 동안의 군 내부의 정치적 통솔 능력과 충성을 볼 때 합당한 대우였다고 볼 수 있다.

5. 기타


조조의 신임도 특히나 남달랐다. 조조의 수레에 동승했으며 다른 장수들보다도 특히 중하게 대우받아 그 침실[13]까지도 출입하였다. 
진수가 처음 정사 삼국지를 편찬할 때 조조의 친부 조숭의 출신을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조조가 하후돈과 같은 집안이라는 이야기도 없었다. 후세에 배송지가 하후돈이 조조의 사촌이라는 조만전과 세어의 기록을 주석으로 넣었다. 그런데 유명 인사 조조와 거의 동시대의 인물이었던 진수가 조조의 출신을 몰랐는데 오나라 사람이 저자인 조만전과 후세 사람이 저자인 세어에서 조조의 출신을 어찌 알았는지 의심스럽고 출처조차 불분명하다. 청나라 시대의 학자 홍량길은 조씨와 하후씨가 서로 대대로 결혼한 것은 둘이 같은 일족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주장했으며, 유함흔 역시 조씨 일가가 조숭환관의 양자라는 사실도 숨기려 하지 않았는데 무엇하러 하후씨임을 숨겼겠느냐고 깠다.
다만 이 때문에 진수가 동성동본의 혼인을 대놓고 쓸 수 없어서 조숭이 하후씨라고 쓰지 않고 그렇다고 이를 안 쓸 수는 없어서 종실전 대신 제하후조전을 마련해 하후씨가 위나라 종실임을 암시했다는 의견도 있다. 학자중에선 반미처럼 진수가 대놓고 조숭의 출생본말을 알 수 없다고 뭉뚱그려 놓은 다음 여러 하후씨와 조씨를 한 권으로 만든 것 자체가, 하후씨가 종실임을 드러냈다고 보는 측도 있다. 하후씨가 조씨와 인척관계에 있을 뿐이라면 굳이 위나라 황실의 종실들만이 들어갈 자리인 '종실전'을 따로 두지(촉은 종실이랄 사람이 없어서 '종실전'대신 '이주비자전'으로 유비의 가족들을 분류했고 오에는 '종실전'이 있어서 손권의 작은아버지와 사촌 형제와 그 자손의 전을 묶어두고 있다), '제하후조전'이란 이름으로 하후씨와 조씨를 묶지 않았을테니까...
현대에 이르러 유전자 감식을 통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조조와 하후씨가 친척이라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는 다른 삼국지 인물의 후손들도 유전자 감식으로는 서로 다 다르게 나오는건 마찬가지며, 조조의 무덤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아서 고대인의 정확한 DNA를 얻지 못하는 현대의 상황상 이거 가지고 단순히 판단할 일은 아니다. 조조와 하후돈은 무려 1800년전 사람인데 그 후손들도 수십대를 내려오면서 각 후손들마다 서로 다른 씨족들과의 혈통적 교류가 있었을 것임은 자명하고, 현대에 이들의 후손을 자처하는 이들 전부가 정말 전부 조조와 하후돈의 자손인지도 알 수 없는 엄청나게 오래전 일이다.
하후돈 하면 가장 유명한 것이 애꾸눈이 된 일화다. 그러나 실제로 화살에 맞아서 애꾸눈이 되었을 가능성은 낮다. 의 시신경은 뇌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물컹한 안구를 화살이 못 뚫을 리 없으니 이 부분에 화살을 정면으로 맞으면 즉사하므로 화살을 뽑고 딸려나온 눈을 먹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전혀 말이 안 된다. 다만, 무조건 어떻게 된다는 것은 예외가 많아서 현실에서도 전장에서 머리에 총 맞고도 살아남아 치명적 장애 하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고,[14] 눈 정면으로 맞지 않았다고 설정하면 그만이라 불가능할 것도 없다. 하후돈이 정말 화살에 맞아서 애꾸가 된 케이스라면 정황상 날아온 화살이 방패 등의 장애물에 맞고 튕겨져서 속도가 떨어진 화살에 맞았거나 힘이 없는 화살이라 눈 근처에 가볍게 상처를 입었는데 감염 등의 이유로 시력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후돈이 연의에서 용장, 맹장으로 각색되는 것도 외눈 탓이 커 보인다. 악의 화신인 조조의 오른팔로서 강하지만 결국 당하는 역할과 용장 역할을 맡기려는데, 독안룡이라는 별명처럼 중세 중국에서도 애꾸눈은 악당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극의 재미를 위하여 하후돈에게 맹장의 이미지를 입힌 것이다.[15]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무장으로서 애꾸눈은 큰 약점이다. 원근감을 잃어버리는 데다가 무장은 말을 타고 다녀야 하는데 애꾸일 경우 눈을 잃은 쪽 방향으로 방향 전환이 심각하게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화살을 피하는 것도 굉장히 힘들어진다. 때문에 실제로 애꾸눈이 된 하후돈은 무력을 크게 상실했을 것이다. 장군이 꼭 전열의 선두에 직접 나서지는 않았겠지만, 이 시대의 전쟁은 장군에게 직접적으로 위해가 가해져서 직접 창칼을 휘둘러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또한 없었다. 이러한 리스크 때문에 결국 조조군 전선의 후방 총책을 맡는 것으로 보직을 변경하게 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6. 미디어 믹스




7. 관련 문서


[1] 연강 원년.[2] 이건 현대 관점으로 보면 얄짤없이 살인자이지만, 옛날 중국에서는 이러한 협객 문화를 의롭게 여겼다. 또한 14세에 자신의 스승도 어쩌지 못한 모욕한 사람을 죽인거니(모두 강직하다 여겼으니 스승이 단지 선해서 복수를 안한건 아니다.) 후술할 군사적 재능은 떨어져도 용맹이나 개인의 힘은 뛰어났던 듯하다. 동탁도 황건적 토벌 당시 군 지휘에 있어 무능함을 보였지만, 개인의 용력과 무예는 뛰어났다.[3] 실제로 한호는 군사적 재능과 정치쪽으로도 뛰어났다. 사람보는 눈도 상당한듯.[4] 사실 이때 조조는 대장군이 아닌 사공이었기에 정확한뜻을 알수없다. 보통 장을 진수의 오류라고보고 빼서 대군의 후방을 지키게 했다고 해석[5] 하후돈전에서 '건안 24년 태조의 군이 여포의 군을 마피에서 격파했다'고 쓰고 있는데 이때는 이미 여포가 죽은지 20년 후다. 삼국지집해에 따르면 이를 관우의 오기라고 보는 쪽이 많은데 조조는 마피에 주둔했지 관우와 직접 마피에서 전투가 있었던 적은 없어서 잘못 삽입된 문구라고도 본다. 다만 학자들이 관우의 오기라고 보는 것도 이유가 있는데 이 기록을 관우 본인이 아니라 '관우의 군대'의 오기로 본다면 조조와 관우가 직접 싸운게 아니라 '관우가 파견한 군대'와 '조조의 군대'가 마피에서 싸웠다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사종영은 증거는 없지만 이것은 '관우가 파견한 별장(別將)이 겹(郏)현 아래에 있던 것'으로 관우가 파견한 별장 가운데 동명이인 여포가 있던게 아닌가 보기도 했다.[6] 한과 위는 형식상 황제국과 제후국 관계였기에 동급이라도 당연히 한의 관직이 더 높다. 거기다가 명목상 위나라의 신하이기 이전에, 같은 한나라의 제후가 되는 셈이다.[7] 맨 위에 있는 그림이 바로 이 모습을 그린 것이다. 단, 장수라서 말을 타고 있었을 텐데 지면상 말은 생략한 듯.[8] 여기에 대해선, 오히려 다른 인물들과 달리 '''"예형은 하후돈을 깐 것이 아니다."''' 라는 일부의 해석도 있으나, 당시 예형 등장 시의 플롯과 전개 상황으로 보았을 때는, 비꼬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트집잡을 게 도저히 없어서 장애를 걸고 넘어졌다는 다른 해석도 있다.[9] 조비 사후 조예는 사마의가 유능하다고 적극 푸시하고 그 일족까지 중용했는데, 사마의는 물론 알다시피 굉장히 유능했고 뛰어난 성과를 보였지만 조예 사후에 뒤늦게 받은 그 대가는 쿠데타였다.[10] 참고로 순우경이 패했던 이유는 원소의 원군이 늦었기 때문이지 순우경 본인은 최선을 다해 싸웠다. 연의에서처럼 방심한 적은 없다.[11] 심지어 문민통제 전통이 강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아예 일부러 군인이 아닌 민간인을 국방장관에 앉힐 정도다.[12] 실제로 하후돈을 다룬 정사에 저런 내용이 들어있다. 이렇게 병사들을 잘 보살펴주기로 유명한 또다른 장수가 바로 관우.[13] 침실은 개인적인 공간임과 동시에 완전 무방비 상태가 되는 공간이다. 이는 즉 친형제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다는 뜻이다.[14] 나무위키에 문서가 있는 한용운의 경우 후유증으로 장애가 생겼지만, 어쨌든 즉사하거나 활동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15] 이와 비슷하게 별로 군사적으로는 재능이 없었던 일본 전국시대의 다이묘 다테 마사무네도 독안룡이라는 별명과 애꾸눈 때문인지 창작물에선 싸움을 좋아하는 맹장 캐릭터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