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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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제31대 군주. 제15대 왕. 초나라에서 출토된 문헌과 묵자(墨子) 귀의(貴義)편에서는 시호가 헌혜왕(獻惠王)으로 되어 있다. 초소왕의 아들. 어머니는 월나라 여자인 월희(越姬).[1] 초 혜왕은 즉위 후 자서(子西)[2] , 자기(子期), 자려(子閭) 등으로 하여금 개혁 정치를 펼쳐 백성들을 쉬게하고 생산력을 늘리며, 초나라를 중흥시킨 군주다. 이 왕이 길게 재위했기 때문에 초나라는 초위왕 때까지 강력한 세력을 자랑할 수 있었다. 그는 백공의 난을 진압하고, 진(陳), 채, 기(杞)나라를 멸해 동중국해, 회해, 사수 일대까지 세력을 떨쳤다.
2. 왕위 계승과 백공의 난
초 혜왕 2년(기원전 487년), 영윤 자서는 초나라 태자 건(太子建)의 아들 웅승(熊勝)을 받아들여 백읍에 봉했다. 그는 백공 승(白公勝)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백공은 적극적으로 민심을 사며, 병사를 길렀는데, 그 목적은 바로 아버지의 한을 풀려는 의도가 있었다.
초 혜왕 6년(기원전 483년), 백공 승은 영윤 자서에게 정나라를 치자고 권했다. 그 이유는 태자 건이 정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켜 초나라를 치려는 기반으로 삼으려다가 죽었기 때문이다.[3] 그러나 자서의 대답은 차가웠다.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오." 당연히 이 처사에 백공 승이 분노하여 자서에게 원한을 품었다.
초 혜왕 8년(기원전 481년), 진(晉)나라가 정나라를 치자 정나라가 급히 구원을 청했다. 그래서 초 혜왕은 자서를 보내 정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정나라를 구원한 자서는 정나라의 대접을 받고 복귀했다. 이때 백공 승은 용사 석걸 등을 모아 영윤 자서, 자기, 초 혜왕을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초 혜왕은 준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어머니인 월희의 궁으로 도피했다. 백공 승은 그 틈을 타서 초왕이 되었다. 1개월 후 채나라에 있던 심제량(沈諸梁)이 백공의 모반 소식을 듣고 백공 승의 난을 진압하려고 했다. 심제량이 도성 북문에 들어가 백공 승을 쳐서 이겼다. 백공 승은 달아나다가 결국 더 달아날 수 없다 여겨 자결하였다. 그리고 초 혜왕이 다시 조정에 복귀했다. 여담이지만 이때 진(陳)나라가 이 혼란을 틈타 백공 승을 지원했지만 실패하였고, 그것은 뼈아픈 대가로 돌아왔다. 그것은 후술하겠다.
3. 영토 확장
백공 승의 난을 평정하여 초나라의 국내 사정이 안정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안정된 국력을 휘두르게 되는데, 초 혜왕은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영토 확장을 하였다.
초 혜왕 9년(기원전 480년), 여름 자서와 자기를 보내 오나라를 쳤다.
초 혜왕 11년(기원전 478년), 진(陳)나라가 백공 승의 난을 틈타 초를 쳤는데, 그것을 초 혜왕은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해 자서와 공손조를 보내 진나라를 치게해 진나라의 저항을 분쇄하고 끝내 진나라를 포위했다. 거기서 끝났으면 진나라 입장에서 다행이겠지만 오나라와 손자 병법의 등장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어 나라를 멸하고 병합하는 시대가 시작되어 진(陳)나라는 거기에 제대로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초군은 진민공을 죽이고 진나라를 멸했다. 그리고 그곳에 현을 설치했다.
초 혜왕 12년(기원전 477년), 파나라가 초나라를 쳤다. 같은 해 3월 초나라의 장수 공손 녕, 위고가 오나라를 등에 업은 파나라를 이겼다.
초 혜왕 13년(기원전 476년), 봄 월나라가 오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초나라를 쳤다. 같은 해 여름 초 혜왕은 공자 경, 공손 관이 월군을 추격했으나 월군이 없어 회군하였다.
같은 해 가을 초 혜왕은 월나라에 보복하기 위해 심제량을 파견해 동이를 치고 삼이와는 오(敖) 땅에서 회맹해 초나라의 세력 범위를 동중국해, 회해 일대로 확장하였다.
초 혜왕 42년(기원전 447년), 초 혜왕은 병사를 보내 채나라를 멸했고 채후 제는 다른 나라로 망명했다.
초 혜왕 44년(기원전 445년), 초 혜왕이 기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월나라는 오나라를 멸망시켜 패자를 당당히 칭하는 등 강성해졌으나 강수와 회수 일대, 회북 일대에 세력을 뻗을 수 없었다.[4] 초나라가 대신해서 세력을 뻗어 사수 일대까지 영역을 확장했고, 송나라를 쳤다.
초 혜왕 50년(기원전 439년), 초 혜왕은 노나라의 유명한 장인 공수반으로 하여금 사다리차를 만들어 송을 치려 했으나 묵자가 그것을 막았다. 이것은 영화 묵공의 기반이 된 사실이다.
초 혜왕 57년(기원전 432년), 초 혜왕이 죽고 아들인 웅중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초간왕이다.
[1] 당연한게 월희가 월왕 구천의 딸이기 때문이다.[2] 그 오자서가 아니다.[3] 그래서 오자서가 오나라로 달아나게 만드는 고생길을 만들었다.[4] 원래 오나라의 세력권이었다. 다만 산동 반도 일부를 포함한 오나라 영토였던 동부 해안 지역을 월나라가 차지한것은 확실한데, 수도를 산동 반도에 위치한 낭야로 옮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