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위왕

 


'''초(楚)나라 37대 국군
21대 왕
위왕
威王
'''
''''''
미(羋)
''''''
웅(熊)
''''''
상(商)
'''아버지'''
초선왕(楚宣王) 웅량부(熊良夫)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329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339년 ~ 기원전 329년
1. 개요
2. 치세
3. 대중매체에서
3.1. 중국 드라마 미월전

[clearfix]

1. 개요


초나라의 제37대 군주. 제21대 . 성은 미(羋), 씨는 웅(熊), 휘는 상(商). 초 선왕의 아들이며 초회왕의 아버지다. 월나라를 멸망시켜 절강성까지 세력을 넓혀 훗날 창평군이 거기서 잠시나마 진나라에게 대항할 저력을 만든 왕이다.

2. 치세


초 위왕 2년(기원전 338년), 진(秦)나라진효공이 죽고, 그 아들인 영사가 진나라의 왕이 되니 그가 혜문왕이다. 진나라에서 변란이 일어나 개혁가인 상앙이 진 혜문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자 초나라는 한나라, 조나라와 함께 진나라와 힘을 합쳐 위나라를 압박하고자 했다.
초 위왕 3년(기원전 337년), 한소후, 조숙후, 촉나라 왕과 함께 진 혜문왕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초 위왕 7년(기원전 333년), 전영(田嬰)이 초나라와 친선을 맺는 척 하면서 월나라를 부추겨 초나라를 공격하게 하자, 초 위왕은 제나라를 공격해 서주(徐州)에서 제나라의 군사를 격파하고 제나라에게 전영을 축출하도록 위협했다. 장축이 전영이 축출되어 전반자가 중용되면 불리할 것이라고 거짓으로 말하자 초 위왕은 전영을 축출하라는 요구를 하지 않게 되었다.[1]
같은 해에 월나라를 공격하면서 월왕 무강(無彊)을 죽이고 오 지역을 손에 넣게 되자, 장강 남안에 석두성을 쌓았다.[2] 그의 치세 동안 초의 영역은 사수 유역에서 장강 중하류까지 확대되었다.
왕은 장자(莊子)가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사자에게 많은 예물을 줘서 장자가 올 수 있도록 맞이해 재상으로 삼으려 했다가 거부당했으며,[3]위나라와의 싸움에서 공을 세운 소양에게 화씨벽을 하사했다.[4]
초 위왕 11년(기원전 329년), 초 위왕이 죽고, 그 아들 웅괴가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초회왕이다.

3. 대중매체에서



3.1. 중국 드라마 미월전


[image]
드라마 미월전의 등장 인물. 조문선 役
미월, 미주의 아버지로 초나라의 군주.
상앙이 처형된 소식을 전해듣던 밤 태사령 당매에게 6국을 발 아래에 둘 패성의 징조가 보이며 곧 패왕이 태어날 것이란 소식과 뒤이어 승은을 내린 상씨의 회임 소식을 듣게 되자 매우 기뻐하며 상씨에게 부인의 지위를 내린다. 그러나 태어난 것이 막상 딸이자 크게 실망하고 분노해 예언을 했던 태사령을 불러 추궁하고[5] 벌을 내려 내쫒는다. 그리고 아기의 생사에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아 위후가 그 아이의 운명을 하늘에 맡겨야 한다고 하자 동의했다. 그러나 연못에 흘러내려갔음에도 무사히 살아남은 아이의 운에 감탄하며 "저 아이는 복을 받을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달이 밝으니 이름을 '''미월(芈月)'''이라 하자."며 이름을 하사한다.
그러나 이후 미월이 4살이 되도록 상씨는커녕 거희도 찾지 않았고, 그렇기에 어느날 편전에 갑자기 들어온 미월을 보고도 누군지 알아보지 못한다.[6] 겨우 미월이 누군지 떠올리고 나니 이젠 미월을 낳은 게 누군지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도 자신에게 겁먹지 않고 태연하게 다가와 노는 미월에게 부친으로서의 애정을 느끼고 슬쩍 몰래 들어올 수 있는 비밀 통로를 알려준다. 또한 그간 상씨가 느꼈을 외로움도 깨닫게 되어 그날 밤 위후와의 저녁 약속도 미루고 찾아간다. 이후 다시 총애를 되찾은 상씨와 미월을 자주 찾으면서 미월의 솔직담백하고 거침 없는 성격을 보며 사내아이였다면 좋을 것이라 아쉬워한다.
출정으로 장기간 궁을 떠나게 될 때 위후와 태자에게 궁의 업무를 맡기고 떠나기 직전 상씨에게서 아들 미융을 보았고, 미월을 한동안 못보는 것에 아쉬워한다. 그렇게 3년이 지나 출정에서 돌아오고 뜻밖에도 상씨가 병사했다고 위후에게 전해듣고 가인박명이라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비밀 통로를 통해 찾아온 미월에 의해 상씨가 살아있으며, 위후에 의해 쫒겨난 것을 알게 되고 바로 상씨를 회궁시킨다. 그러나 상씨는 입궁하자마자 위후의 처소에서 독을 마시고 죽었고, 그 때 자리에 도달한 그에게 '위후의 짓이다.'라는 증언을 듣게 된다. 곧바로 위후를 처벌하려고 고심하나 출정을 장기간 다녀왔기 때문에 상당히 몸이 약해져 있었고 태자가 와서 모후를 용서해달라고 징징거리는 통에 배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결국 급작스레 사망해서 위후를 처벌하지 못하고 말았다.
[1] 사기에서는 제선왕, 죽서기년에서는 제위왕 때의 일이다.[2] 바로 훗날 삼국시대 오나라의 수도 건업의 도성인 바로 그 석두성이다.[3] 장자가 초 위왕의 초빙을 거절한 이유는 귀족들의 입김이 강한 초나라에서 벼슬을 살면 초위왕 대에는 왕의 신임 덕에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지만 왕이 죽으면 그 뒤를 이은 왕이 장자를 신임할지 알 수 없고 신임하지 않게되면 초도왕이 죽은 뒤의 오기(吳起)가 초나라 귀족들의 손에 죽은 것 같은 꼴이 날 수 있으니 왕의 초빙을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초 도왕의 아들인 초숙왕은 그래도 범군 정도는 되는 사람이지만 초 위왕의 아들인 초회왕은 초나라 최악의 암군 중 하나이니 장자 입장에서는 더더욱 가기 싫었을 것이다.[4] 훗날 소양은 화씨지벽이 없어지자 빈객 중 가장 가난한 장의를 의심해 매질한 뒤 진나라에 보내는 원인을 만들었다.[5] 태사령 왈 그 애가 초나라에 흉할지 길할지 모르겠고 저는 성별은 이야기 안했잖아요.(...)라고 해서 더 빡쳤다.[6] 본인 왈 자식이 하도 많아서 모른다고. 나중에 공주들이 모여있는 거 보면 많기는 많다(...). 이에 미월은 흥!하며 삐진 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