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범술

 


崔凡述
1904년 5월 26일 ~ 1979년 7월 10일
1. 개요
2. 생애


1. 개요


대한민국승려, 정치인. 그리고 '''독립운동가이자 친일파'''. 법명은 효당(曉堂), 본명은 최영환(崔英煥).

2. 생애


1904년 경상남도 곤양군 서부면(現 사천시 서포면) 금진리 율포마을#에서 최종호(崔鍾浩)의 아들로 태어났다. 곤양보통학교(현 곤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사천 다솔사에서 출가하여 합천 해인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3.1 운동 때에는 등사판을 구매한 후 해인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각지에 배포하는 것을 시작으로 삼가면 장날을 이용하여 기관을 습격하고 방화하는 등 폭력 시위를 지휘하였다. 그러다가 체포당하고 옥중에 혹사당한 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방면되었고, 요양 후 도일하여 일본 다이쇼 대학 예과 및 불교학과를 졸업했다.
일제강점기가 되어 1920년대 임시정부가 수립했다는 소식을 듣고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박열과 함께 '불령선인회'를 조직하여 천황 암살을 모의하고 계획했다. 하지만 누설되어서 미수에 그치고 8개월 동안 구류형에 처해진다 [1] 1930년대에 들어서 김법린 등과 만당을 조직하였다. 만당은 정교분리, 불교대중화, 불타정신의 구현 등을 행동강령으로 활동하였지만, 워냑 성향이 과격한 탓도 있고 '''애초부터 친일로 돌아선''' 조선 불교의 한계에 부딪쳐 별 활동을 하지 못했다. 대표적으로 조선 불교를 관리하고 있던 관립 친일단체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 예산 문제로 찍혀 있었다.
결국 일제강점기말기 친일반민족 단체인 '복지황군위문단'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만당에 들기 이전에 '''삼십본산연합사무소[2]의 기초위원'''이었으며 관동군에 위문행렬을 열고 일본 승려들과 다솔사에서 학술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8.15 광복해인사 주지, 국민대학교 이사장 등을 지냈다. 국민대학교 이사장을 지낼 당시 신익희 총장 해임을 주도하여 반발을 샀다. 이후 해인대학(현 경남대학교) 이사장을 지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사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물론 이때 친일행적은 처벌받지 않았고, 20년대까지 실체가 분명했던 독립운동 업적을 인정받은 덕분이다.
그 이후로 일선에서 물러나 원효대사의 사상을 연구하고, 사천에 차밭을 가꾸어서 '반야로(般若露)'라는 정제증차(精製蒸茶)를 만들기도 했고, 한국 다도의 입문서인 <한국의 차도>를 집필하여 그동안 다수 소실되었던 한국의 다도를 복원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1979년 7월 10일에 사망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독립운동도 친일행각도 분명하여 친일파냐 독립운동가냐 하는 문제로 평이 엇갈리고, 불교계에선 대처승이라는 이유로 까이기도 한다.

[1] 천황 암살모의 건은 일본의 조작이라는 말이 있다. 박열 문서 참조. 다만 박열이 폭탄을 샀음은 사실이고, 최범술은 '최영환'이란 가명으로 활동하여 그 폭탄을 운반했다.[2]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전신. 역시나 관립 친일 불교단체였으며, 이것의 전신인 불교옹호회의 회장이었던 '''이완용'''이 평의원장을 맡은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