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자성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가족관계

崔滋盛
(1065 ~ 1143)

1. 개요


고려의 인물. 본관은 수주로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2. 생애


수주 최씨(수원 최씨) 문벌귀족 출신이다. 과거에 급제한 뒤 전중내급사에 임명된다. 예종 13년(1118) 급사중으로 각도(道)에 파견돼 군사를 선발한 기록이 있다.
최자성은 예종과 그 아들 인종대의 외척 이자겸과 가깝게 지낸다. 이자겸과 같은 항렬의 인천 이씨 문벌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며, 인종 4년(1126) 4월에는 이자겸의 별장 중흥택에서 김의원과 집사로 있었을 정도였다. 바로 다음 달 이자겸이 몰락하면서 이자겸과 연을 맺은 여러 문벌귀족도 처벌을 받는다. 같이 집사로 있던 김의원도 좌천되는데 최자성은 별다른 처벌 없이 넘어간다. 이자겸이 객사한 뒤 반년만인 인종 5년(1127) 6월 동지추밀원사에 임명되고 또 반년 뒤인 12월에는 참지정사에 오르면서 재추직을 두루 역임한다. 인종 9년(1131)까지 역임한 관직은 검교사공 판병부사, 이부상서,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판상서예부사, 검교사공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 등이다.
인종 10년(1132) 평장사 최자성이 지공거, 이부시랑 임존이 동지공거가 되어 과거 시험을 주관한다. 임존이 출제한 부(賦, 한문 문체의 일종)의 제재가 다음과 같았다.

聖人以天下爲一家 성인내이천하위일가, 성인은 능히 천하를 일가로 삼는다.

예기』 「예운」편.

중서문하성의 한 간관이 인종에게, "살피건대 의 옛 글자로 (노)와 (등)의 반절이니 奴를 운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다시 시험을 보도록 명하기를 청합니다."[1]라고 아뢨다. 왕은 간관의 청을 절충해 시험은 다시 보되 최자성과 임존에게 기회를 한번 더 준다. 이번에는 최자성이 다음 제재를 출제한다.

天道不而能久 천도불이능구, 한가롭지 않고 오래갈 수 있는 것이 천도이다.

『예기』의 구절인 "天道不閉而能久"의 (폐)를 (한)이라고 오기한 『공자가어』를 참고했기 때문에 두 시험관이 또 실수를 범한 것이다. 법사(法司, 전법사?)는 "정경을 참고하지 않고 착본(錯本, 오류가 있는 서적)에 의거해 제목을 출제했으니 양 지공거를 파면하고 올해의 과거를 중지하기를 청합니다."[2]라고 하니 과거는 중지되고 최자성은 처벌을 받을 위기에 놓인다.
과거가 취소돼 합격자가 아니게 될 사람들 중에는 정항의 사위로 인종비 선평왕후의 동생인 김이영, 한유충의 사위로 왕후의 친척인 윤인첨이 있었다. 선평왕후가 인종을 설득하고 정항과 한유충이 환관에게 간청하니 과거는 취소되지 않았다. 모두 25명이 급제했으며 최자성은 인종의 다른 왕비 공예태후의 동생인 어사대부 임원준이 나서서 청한 끝에 6월에 파면된다. 7월에 중서시랑동평장사로 복직하고 개부의동삼사가 더해진다.
노년에 이르러 표문을 여러 번 올려 은퇴를 청한 끝에 중서시랑평장사로 은퇴하며, 인종 21년(1143) 12월 임진일(10일) 79세의 나이로 죽는다.

3. 평가


사서에서는 성격이 강직하고 영민해 유능한 관료였다고 평하면서도 이자겸의 파벌에 들었으므로 사람들에게 비난을 들었음을 밝히고 있다.

4. 가족관계


최사위의 장남 최충공의 후손이다.
  • 본인: 최자성
  • 처: 인천 이씨
    • 아들: 최유항
    • 며느리: 흥양 이씨
      • 손자: 최성뢰
이자연의 손녀로 좌사낭중 이자례의 딸인 이씨와 결혼한다. 아들 최유항은 흥양 이씨의 시조 공부상서 이언림의 딸과의 사이에서 3남 4녀를 둔다.

[1] 按耐古能字, 奴登切. 今以奴代爲韻, 非是, 請改命他人再試.[2] 今貢院不考正經, 而據錯本命題, 請罷兩貢擧職, 停今年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