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강간살인 조작 사건

 


[image]
당시 기사
1. 개요
2. 발단 및 전개
3. 반전
4. 하지만...
5. 책임전가
6. 여담
7. 관련 문헌
8. 둘러보기


1. 개요


'''아들아, 넌 살인범의 아들이 아니다'''

이 사건을 재조명한 그것이 알고 싶다의 부제.

1972년 9월 27일강원도 춘천시 우두동에서 일어난 어린이 강간살인 사건이자 조작 사건. 비슷한 사건으로 아시카가 사건, 카타리나 브로우 살인사건 등이 있다.

2. 발단 및 전개


1972년 9월 27일 오후 8시쯤. 춘천경찰서 역전파출소장의 딸이던 10살 된 J모양은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근처의 만화가게텔레비전을 보러[1] 갔으며, 그것이 생전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아이는 9월 29일 춘천시 우두동의 춘천측후소 뒤편의 논둑길에서 나체 상태의 시신으로 발견되었으며, 아이는 성폭행을 당하고 사망한 것으로 보였다. 혈흔과 음모도 찾아냈지만 당시엔 유전자 검사가 없어서 누가 한 건진 불분명했다.
이에 전국적으로 충격이 일었으며, 게다가 파출소장 딸의 죽음인지라 경찰이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지만 범인의 윤곽조차도 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자 보고를 받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어떤 놈이 경찰 가족을 건드렸다'고 크게 노해서 김현옥 내무장관에게 지시를 내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던 이 사건을 포함한 3대 미해결 사건[2]에 대해 "'''10일 안에 범인을 잡아라. 못 잡으면 인사조치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시한이던 10월 10일, 경찰은 이 사건의 범인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경찰이 범인이라고 발표한 사람은 사건 현장 인근에서 만화가게를 운영하던 정원섭이었다.
경찰의 발표에 의하면 정씨는 평소 소녀들을 성추행하고 심지어 같은 만화가게 직원들을 성폭행하기까지 했던 사람이었는데 사건 당일에 J양이 자신의 만화가게에 오자 자신의 가게에선 TV가 잘 안 나오니 이웃 만홧가게로 가서 TV를 보자고 꾀어내 춘천측후소 뒤편 논둑길로 유인해 그곳에서 성폭행한 후 범행이 들킬까봐 두려워 살해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검찰도 경찰의 수사가 정당하다고 인정한 후 정씨를 기소했다. 그리고 현장에서 정씨 아들의 연필이 있었으며, 증인들의 증언도 일치한 데다 정씨 본인도 사건을 자백해 결국 재판에서 정씨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정씨는 이후 감옥에서 모범수로 복역해 특별 사면으로 15년형으로 감형되어 1987년 12월, 15년을 복역 후 풀려나올 수 있었다. 그 뒤...

3. 반전


정씨는 자신이 결백하다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자신을 고문과 짜맞추기 수사로 '''범인으로 만들었다'''라는 것이다. 결국 정씨는 1999년 서울고법에 재심을 청구했다. 하지만 서울고법은 재심 청구를 기각하였고, 대법원으로 재항고하였으나 2003년 12월, 대법원도 재심 청구를 기각했다.
그 뒤 2005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진실화해위는 당시 경찰관으로 근무한 이들을 면담해 정씨가 당한 고문 수법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임을 밝혀냈고 한 경찰관으로부터 그 당시 다른 사건에서 '''정씨가 당한 것과 유사한 고문을 가하는 것을 봤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당시 그는 경찰들로부터 잠 안 재우기, 통닭구이 등지의 고문을 당했고, 사흘 만에 거짓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경찰은 정씨를 범인으로 몰기 위해 증인들을 위협하였는데 정씨가 운영하던 만화가게의 여종업원들을 감금하거나 가혹행위로 협박해 정씨가 이전에도 성추행, 성폭행을 행하던 인물이라는 허위 증언을 하도록 협박하였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법원은 정씨의 허위자백 호소를 무시했고, 이를 입증해준 참고인들까지 위증 혐의로 구속했다.
한편으로 그것이 알고 싶다 취재팀도 이 사건을 재조명하는 프로그램을 내보냈는데 취재 과정에서 엄청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현장에서 범인의 혈흔이 발견되었다. 당시 국과수는 이 가해자의 혈흔을 조사해 혈액형이 A형이라는 것을 밝혀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정씨는 A형이 아니라 B형이었다'''. 취재팀은 국과수 기록 뿐만 아니라 당시 신문 기사에도 버젓이 '''범인의 혈흔이 발견되었고 혈액형은 A형'''이라고 나와 있던 것을 찾아냈다.
더욱이 경찰의 짜맞추기 조작수사는 경찰이 정씨가 범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로 들이민 정씨 아들의 연필에서도 드러났다. 경찰은 정씨의 아들을 범행 현장으로 데리고 가서 '''정씨 아들의 연필을 현장에 집어던진 뒤에''' '이게 너의 연필이냐'고 물었고 아들이 자신의 것이라고 하자 '그럼 입에 한 번 물어봐라'하고 아들의 이빨 자국을 내게 한 뒤 '''그걸 가지고 증거를 찾아냈다고 했던 것이다'''. 더 어처구니없는 건 살인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연필은 노란색 몽당연필이었던 반면 정씨 아들의 연필은 길다란 파란색 연필이었다.[3]
2007년 11월, 진실화해위의 재심 권고로 재심이 다시 이루어졌고 춘천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에서 재판부는 검찰의 증거는 증거로 사용될 수 없거나 믿을 수 없으므로 정씨의 유죄를 인정할 수 없다고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이 항소해 고법에서 2심이 열렸고 2심에서도 무죄가 선고되었다. 이후 검찰이 다시 상고해 대법원까지 판결이 넘어가게 되었다. 대법원에서는 공판 날짜도 잡지 않고 2년이 넘게 사건 판결을 미루다가 마침내 2011년 10월 27일, 대법원은 2심의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해 정씨는 39년 동안의 치욕을 씻을 수 있게 되었다.
비록 39년 만에 진실이 밝혀졌지만, 그 세월동안 정씨가 당한 고통과 강간살인범이라는 치욕스런 낙인은 누가 보상해줄 것인가? 또 정씨 가족들이 당한 수모도 이루 말할 수 없다. 정씨의 아내는 강간살인범의 아내라는 이유로 동네 사람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 적도 있고, 그 모습을 어린아이였던 아들이 목격하는 등 가족들도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 정의롭지 않은 공권력은 무고한 여러 사람의 인생을 짓밟을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더군다나 경찰과 검찰이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조작하고 공소시효도 지나버리는 바람에 정작 사건의 진범은 결국 영원히 법의 심판을 받지 않게 되어, 죽은 피해자의 한 또한 영영 풀 수 없게 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경찰이라는 공권력의 권위주의 및 실적주의 편중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2013년 7월 15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해당 사건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민주주의 법치국가에서는 결코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라며 국가가 정씨와 그 가족에게 26억 3752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4. 하지만...


2014년 1월 23일[4]에 서울고법 민사8부에서는 소멸시효 기간이 열흘 지났다며 정원섭 씨와 그 가족에게 손해배상금 26억원을 지급하라는 1심 판결을 뒤집었다. 전혀 다른 판결이 내려진 이유는 지난해 대법원 판결에 따른 것이다. 대법원은 지난해 12월 12일 재심 무죄 선고를 받은 과거사 피해자들이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이전까지 민법에 따라 3년으로 통용되던 소멸시효 기간을 뜬금없이 '형사보상 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 로 못박았다. 이 판결로 1심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소멸시효가 적용되면서 결국 정씨는 '''단 한 푼의 배상금도 받지 못하게 된다.''' 링크 1, 링크 2, 링크 3.[5] 한 네티즌은 '그럼 위안부 문제를 시간이 흘렀다고 배상 못 한다고 하면 어쩔래?' 라는 댓글을 썼고 많은 공감을 받았다. # 이 논리는 실제 위안부 부정 세력의 논리와 똑같다.
이 사건에 대한 내용은 국민라디오에서 들을 수 있는 고상만의 수사반장이란 팟캐스트 방송에서 8월 26일 편과 9월 2일 편에서 들을 수 있다.
위에 나온 방식으로 조작된 이후 허위자백을 할 때까지 정씨는 경찰서에서 고문을 받아 왔으며, 검찰에서는 '편하게 말하시면 돼요' 라는 말에 경찰에게 고문을 당했다는 진술을 하기 무섭게 '''경찰서에서 자신을 고문을 한 그 경찰이 다시 들어와서 또 다시 고문했다'''. 이것만으로도 용서를 받을 수가 없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문으로 조작을 한 사건인데 그에 대해서 형사사건 재심과 국가상대 손해배상 소송을 한 민사 1심까지는 멀쩡했던 판결이 위에 나온 저 어처구니 없는 판결로 뒤집히면서 정원섭 씨와 가족들은 또 다시 난도질당한 것이다.
참고로 그 과정의 문제가 바로 위에 나온 소멸시효 기간을 갑자기 줄인 것. 국가를 상대로 하는 손해배상 소송은 소송 절차나 인지세 등이 필요해 준비 기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간단히 말하자면 무조건 소송접수 기간을 초과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놓고서 '니가 더 서둘렀어야지' 라고 훈계질을 하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절대 인정하지 않겠다는 취지로 한 판결이라는 것이 문제점. 그리고 이 판결은 인민혁명당 사건이라든가 부림사건으로 대표되는 권력을 앞세운 폭력 피해자, 그리고 앞으로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이 간첩조작 사건으로 최종 판결이 날 경우 늦게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 과정을 밟는 과정에서 기한을 초과했다는 이유로 국가배상을 한 푼도 하지 않겠다는 선례로 사용하겠다는 것을 표명한 재판이었다.
이 우려는 더 나쁜 방향으로 현실이 되어 2015년 5월 28일에 광주 인화학교 사건(일명 도가니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손해배상 항소심에서 범죄가 발생한 시점으로부터 5년 이내에 소송을 제기하지 않았으므로 청구권한이 소멸했다는 판결이 등장했다.해당기사 이것이 마지막 범죄가 일어난 시점부터 5년이라 쳐도 2010년이고 최초 범죄가 벌어진 시점부터라고 한다면 1985년부터 1990년 사이에 소송을 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정원섭 목사는 다시 자신을 고문한 경찰관, 기소한 검사, 판결을 내린 재판관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고, 2016년에 일부 승소하여 경찰관 3명과 그 유족들이 연대해 23억 8,8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정작 조작된 증거를 가지고 기소한 '''정용식 검사'''와 이를 알고도 무기징역을 내린 '''윤상목 판사''', 그리고 강압적으로 범인을 잡아오라 하여 사실상 조작을 묵인한 '''국가'''에게는 '''손해배상 책임을 전혀 묻지 않았다'''. 그리고 정 목사는 가난한 경찰과 그 유족들이 무슨 죄냐면서 이 판결에 강한 불만을 나타냈고, 손해배상액도 받지 않겠다 공언했다. 그는 권력을 가진 검사와 판사에게 책임을 묻고 싶어했으나 결국 국가는 권력을 가진 자들의 책임은 눈 감아주고 힘 없는 경찰의 유족에게나 23억이라는 금액을 토해내라는 전형적인 '가진 자들의 논리'를 펼친 셈이다.# 정 목사는 '빌딩을 수 채나 가지고 있는 정 검사(당시 기소한 검사)는 왜 배상 책임에서 자유로운지 알 수 없다'며 단돈 만 원이라도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넘어갈 생각이 있다 했다. 하지만 아마 그 검사도 돈도 돈이지만 그걸 인정하는 순간 쌓아올린 사회적 지위를 싹 박탈당하게 되는 셈이기에 그걸 인정할 리가 없다. 그걸 바로 잡아줄 국가가 검사, 판사와 같은 편이니 답도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후 2018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농단이 불거진 뒤에야 그 비밀이 비로소 알려졌다. 2015년 쓰여진 <상고법원 입법추진을 위한 협상추진 전략> 및 <정부 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협력 사례>[6] 문건이 폭로되면서 '합리적 범위 내에서 과거사 정립'이란 명분으로 '''국가배상을 가로막으려는 의도'''였음이 드러났다.

5. 책임전가


위의 판결이 무효가 된 이후 정원섭 목사의 가족이 국가뿐 아니라 '당시 경찰들'에게도 청구 소송을 걸었는데 서울중앙지법에서 이번엔 정씨의 가족에게 손을 들어줬다. 국가의 책임은 모호하지만 경찰이 당시 정씨를 협박한 정황은 명확하기 때문에 26억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것인데 당시 경찰관들이 항소할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실하게 단정하기는 이르다. 또한 당시 판결을 담당했던 판사와 검사 등의 처벌이 없어 불공평하다는 여론의 불만도 크다. 관련기사

6. 여담


사건이 돌아가는 모습은 1981년 경주 당구장 여주인 살인사건이나 윤보살 피살사건, 박상은 피살사건과 비슷한 양상이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동일한 식의 수사와[7] 검사의 환상적인 추리로 인해 억울한 피해자가 양산된 것이다.
또 다른 차이라면 이 경주 사건은 판결 이후 한 민완기자의 활약으로 억울함이 밝혀져서 재심이 이루어지고 무죄판결로 석방되었다는 것이고, 윤보살 및 여대생 피살사건도 혐의 당사자의 고문피해 폭로로 수년 뒤 무죄까지 이어졌다. 이때 민완기자가 바로 조갑제이다.[8] 춘천 사건도 당대에 이런 추적이 있었다면 좀 더 빨리 진상이 밝혀졌겠지만, 이미 전년도 사법파동 후 사법부가 점차 정부에 순종한 뒤였다.
과거에는 실적 잡기용으로 무고한 사람을 엮어서 범인을 만드는 일이 제법 있었는데 21세기가 되어서도 실적주의를 버리지 못한 탓에 아직 수원역 노숙 소녀 살인 사건 같은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공권력에 대한 언론과 시민의 감시가 왜 필요한지를 알 수 있는 사례들이다.
일본에도 이 사건과 매우 유사한 사야마 사건이 있다. 단 이쪽의 경우 범인이라는 증거와 아니라는 증거가 대립하고 있으며 재심 무죄 판결도 받지 못했다.
영화 7번방의 선물이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2018년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그의 근황이 나왔다. 피해자 정씨는 이제 노환으로 인한 뇌출혈치매로 요양원에서 생활하는 중이며, 아들 역시 그 때의 연필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그해 8월 10일 MBC <판결의 온도>에서도 해당 사건이 소개되었다.

7. 관련 문헌



8. 둘러보기




[1] 당시는 TV가 귀한 시절이라 동네의 부유한 집에 한 대 꼴로 있었기에 만화가게 같은 곳에서 요금을 받고 TV를 보여주는 경우도 많았다.[2] 서울 아현동 국민은행지점 납치사건, 부산 어린이 연쇄살인 사건, 그리고 이 춘천 파출소장 딸 살인사건이다.[3] 생방송 투데이 2013년 3월 21일자 방송에 나온 내용.[4] 공교롭게도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추정되는 영화 7번방의 선물이 개봉한지 정확히 1주년이 되는 날이다.[5] 법원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한 독재·권위주의 정권에 의한 폭력, 조작 간첩, 의문사 사건 등 반민주·반인권적인 '과거사' 피해자들은 여전히 많다. 이 판례에 따라 손해배상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는 또 다른 '정씨들' 이 줄줄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6] 문건 제목과 내용부터 민주주의 삼권분립의 기본 원칙과 정면으로 대치된다. [7] 심지어 증인을 조작하기 위해서 당구장 종업원을 협박해서 '''여종업원이 경찰의 괴롭힘을 피하여 나체로 탈출하는''' 일도 벌어졌다.[8] 조갑제는 5.18 민주화운동이 발생할 당시 독자적으로 취재하러 내려간 사람이다. 당시는 진보 성향의 기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