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림사건

 



釜林事件
1. 개요
2. 어떤 사건인가?
3. 피해자들
3.1. 1981년 9월 7일 발표 1차 구속자 8명
3.2. 1981년 10월 15일 발표 2차 구속자 8명
3.3. 1982년 4월 이후 3차 구속자 3명
3.4. 대학시위 중 구속자 4명
3.5. 피해자 진술
4. 영화화
5. 변호사 노무현의 역할
6. 관련 서적 목록
7. 왜 일어난 사건인가?
8. 같이 보기


1. 개요


5공 정권 하인 1981년에 부산직할시에서 일어난 군사 정권의 대표적인 용공조작으로 꼽히는 사건이다. 부산의 학림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부림사건(釜林事件)으로 명명되었다.

2. 어떤 사건인가?


용공조작이라는 면에서는 대한민국 제5공화국 집권 초기 당시 통치 기반을 다질 목적으로 일으켰던 사건으로 본다.
신군부 정권 초기인 1981년 9월에 공안 당국이 당시 부산 지역 양서협동조합에서 사회과학 독서 모임을 하던 학생과 교사, 회사원 등 22명을 영장 없이 체포해 불법 감금하고 고문해 기소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시 부산지검의 공안 책임자로 있던 최병국 검사(새누리당 전 국회의원)가 지휘했다. 매카시즘적 발언으로 논란이 된 고영주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도 이 때의 담당검사였다.
한편 당시 김광일 변호사와 함께 피고 변론을 맡았던 노무현 변호사는 이전까지는 부산에서 돈 잘버는 변호사 정도로 유명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담당 검사였던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은 이후 역사 바로세우기에 나섰던 김영삼 대통령의 뜻을 거부하지 않고,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사형을 구형하였다.
이 사건 관계자들은 "영장없이 체포·구속되어 대공분실에서 짧게는 20일부터 길게는 장장 63일 동안 몽둥이 등에 의한 구타와 '물고문', '통닭구이 고문'[1] 등 살인적 고문을 통해 공산주의자로 조작됐다. 독서모임이 반국가단체의 찬양활동으로 조작됐고 술집에서 두 사람이 만난 것이나 친구 개업식에 선물을 들고 찾아간 것도, 망년회를 한 것도 모두 현저히 사회 불안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는 집회로 규정되어 처벌됐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 사건은 국가보안법이 정권의 안보를 위한 도구로 쓰이는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로 지목되어 노무현#s-2.2, 김광일[2] 등이 무료 변론에 나서기도 했다. 이 사건은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후 '전두환 정권 초기 저항세력에 대한 탄압으로 조작된 사건'이란 정치적 면죄부를 받았으나, 법률적으로는 여전히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부산지법은 2009년 8월에 피해자들에 대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는 면소 판결을, 계엄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고 2014년 2월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과 계엄법 위반에 대해서는 상고 포기를 하였지만,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건에 대해서는 상고를 검토 중이라고 한다.# 이는 검찰이 당시 학생들이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부림사건 당시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한 주체가 당시 대법원이었기 때문이다. 부산지법이 아니라 대법원 차원에서 정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2014년 9월 대법원은 부림사건 피해자 5명에게 무죄를 확정했다.''' #

3. 피해자들



3.1. 1981년 9월 7일 발표 1차 구속자 8명


7월 4일~8월 14일에 걸쳐 불법연행 후 고문.
  • 설동일 (26세, 서울대 농대, 언양농협 근무: 이후 부산민주항쟁기념관장, 현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근무.)
  • 송병곤 (24세, 부산대 법대졸, 공장근무: 이후 법무법인 '부산' 사무장 재직,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던 권양숙 여사의 고종사촌 동생과 결혼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주례를 서줌.)
  • 노재열 (24세, 부산대 공대 4년휴학: 1979년 부마항쟁 주도, 이후 민주노총 간부 역임.)
  • 고호석 (26세, 부산대 문리대졸, 당시 부산 대동고 영어교사: 부산 거성중학교[3] 영어교사 재직.),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초대 상임이사, 2019년 11월 25일 고인이 되심.
  • 이상록 (27세, 부산대 법대졸, 선반공: 이후 8년간의 정신병 투병 후 2006년 사고로 사망.)
  • 송세경 (30세, 서울대 농대졸, 회사원: '아우성'이라는 약칭으로 알려진 성교육 강사 구성애 씨의 남편. 이후 김광일 변호사의 사무장으로 활동하다가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총무이사 역임.)
  • 김희욱 (32세, 부산 대연여중 교사: 부산환경연합 대표 재직 후 귀농.)
  • 이상경 (부산대 문리대 1년퇴학: 현재 출판업 종사.)

3.2. 1981년 10월 15일 발표 2차 구속자 8명


9월 11일~30일에 걸쳐 불법 연행 후 고문.
  • 장상훈 (24세, 부산대 약대졸: 이후 노무현이 39세의 나이로 장상훈의 결혼식에 첫 주례를 선다.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공안검사 출신 한나라당 김기춘(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거제에서 맞붙었으나 패한다.) 당시 출마 기사
  • 김재규 (33세, 부산대 상대졸, 당시 탁구장 운영: 이후 노무현 후보 국민참여운동본부 부산본부장 및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 역임.)
  • 이진걸 (23세, 부산대: 1979년 부산대 내에 '민주선언문'을 뿌려 부마항쟁 주도. 노무현재단 부산지역위원회 공동대표 역임)
  • 박욱영 (25세, 부산공전졸: 전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의원.)
  • 윤연희 (24세, 부산대 사범대졸, 교사: 현 부산 장림여중 음악교사.)
  • 최준영 (29세, 서울대 공대졸, 설비사무사: 현재 무역업 종사.)
  • 주정민 (24세, 부산대 법대졸.)
  • 전중근 (25세, 공장근무.)

3.3. 1982년 4월 이후 3차 구속자 3명


도피중 체포.
  • 이호철 (24세, 부산대졸: 부마항쟁 주도, 이후 배재여행사 경영, 전 참여정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 설경혜 (23세, 교사: 1차 구속된 설동일의 동생, 이후 계속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 정귀순 (22세, 부산대졸: 현 '이주민과 함께' 대표로 이주노동자 인권운동가로 활동.)

3.4. 대학시위 중 구속자 4명


(부산지방검찰청 공소장 1981.10.21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구속자 석방요구 청원서, 각종 신문기사 참조)

3.5. 피해자 진술


《부산민주운동사》 에서 밝힌 당시 사건 피해자들의 현재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 김모씨(33·상업) - 부림사건은 20여명이 관련된 부산지역 최대의 국가보안법 조직사건으로 영장없이 불법구금과 고문 등으로 완벽하게 조작된 사건이다. 사건의 수사책임자가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서 일하는 것은 부적절 하다고 판단해 총선 연대에 낙천명단에 포함시켜달라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 송모씨(26·농협근무) - 대공분실에 끌려가 통닭구이, 몽둥이로 맞는 고문을 당했다. 당시 최병국 검사가 대공분실로 찾아와 수사를 지휘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당시 검사가 관련자들에게 3년에서 10년의 중형을 구형한 것으로 보면 사건 조작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당시 시대 상황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면 최소한 반성과 용서를 구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 최모씨(당시 피의자 최모씨 부인) - 당시 남편이 사건을 끝까지 부인하자 최병국 검사는 “사건을 인정한다는 반성문을 쓰면 당신 남편만 빼주겠다”고 회유했지만 뿌리쳤던 경험이 있다. 최 검사가 사건 조작의 책임자이다.
  • 고모씨(26·교사) - 관련자들 중에는 재판을 받기 위해 법원에 가서야 처음 상견례를 한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로 서로 거의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우리 모두 그들의 각본 속에 끼워 넣어 하나의 사건으로 만들어 냈다. 당시 몇 명이 다방에 앉아 얘기 나눈 것까지 ‘반국가단체 고무·찬양’으로 몰아붙여 징역 10년에서 3년까지 중형을 구형했다.

4. 영화화


부림사건을 다룬 영화로 2013년 12월 개봉한 변호인이 있다.[4] 송강호가 고 노무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에서 모티브를 따온 주인공 역을 맡아 열연했으며, 피해자인 박진우 역할을 맡은 임시완 역시 부림사건의 피해자와 똑같은 부산대학교 공대 출신이란 점에서 화제가 되었다. 2014년 1월 18일 천만 관객을 달성했다.
영화 내에서도 에드워드 카가 저술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불온서적이라는 주장이 억지라는 것[5]과 실제 노무현 대통령이 발언했던 비유[6]까지 영화에서 각색되어 재현되었다.
2014년 1월 22일에 TV조선에서 방송된 강적들에서 영화 '변호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실제 '부림사건'과 어떤 차이점이 있느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실제의 사건과 비교했을 때 영화가 여러가지 이야기와 깊이가 더해진 것은 사실이고 그뿐만 아니라 추가적인 허위 사실이 더해진 것 등등. TV조선 같은 해당 프로그램에서는 영화적 연출을 위해 사실과 다르게 각색하거나 드라마틱하게 바꾼 몇 가지 소재를 제시하였다.[7] 자세한 내용은 변호인 문서 참고.[8]

5. 변호사 노무현의 역할


부림사건 피해자들은 훗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헌신적인 노력에 깊은 감사의 뜻을 밝혔다.# 고호석 씨는 노무현 변호사가 법정에서 격앙되어 판사와 싸울 정도로 열정적으로 변호했다고 증언[9]하면서 그의 당시 헌신적인 변호 덕분에 33년이 지나 무죄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2,#3 박욱영 씨는 노무현 변호사가 차분하고 논리적이면서도 때로는 거칠게 판검사들을 밀어붙였다고 증언하였으며#, 최준영 씨는 노무현 변호사가 편한 길을 갈 수 있었음에도 부림사건 피해자들을 변론하느라 험난한 길을 걷게 되었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내었다.# 윤연희 씨는 노무현 변호사가 자신들의 무료변론요청에 흔쾌히 응해준 것에 감사해하며 재판에서 피해자들의 편에 서서 당당하게 변호해 주었다고 회고했다. 부림사건의 판사였던 서석구 씨 역시 노무현 변호사가 재판에서 부림사건의 피해자들이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을 폭로하여 사회적 주목도를 높였다고 증언하는 등# 부림사건의 관련자들은 하나같이 노무현 변호사의 역할이 컸다고 증언하고 있다.[10]
이런 당시 관련자들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일각에서 말하는 노무현 변호사가 부림사건 당시 아무 것도 안 했다느니 하는 극소수의 주장들은 아무 근거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도 변호를 맡았다고 잘못 알려진 경우가 있지만 문재인변호사는 1982년에 12기로 사법연수원을 수료하였기 때문에 부림사건과 연관이 없다. 다만, 33년만에 무죄 판결을 받은 2014년 부림사건 재심에서 변호를 맡은 적이 있다.

6. 관련 서적 목록


군사정권이 당시 피해자를 만들어낸 불온서적 목록이다. 1987년 '10.19 출판활성화조치' 이전까지 해당 서적들은 문화공보부의 '판금도서 종용제도'와 출판사 신규등록 규제, 납본필증 거부 등으로 인해 시중에선 아예 출판이 불가능하여 대학가 앞 '사회과학서점'에서 비합법적으로 몰래 출판해왔다.
심지어 이 책들 중 일부는 해당 분야에서 고전으로 취급되는 책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사회과학서적 탄압은 문민정부가 끝날 때까지 기승을 부렸다. 반면 교도소/구치소 등 교정기관에서는 2001년 말까지 법무부 훈령인 <재소자 열독도서 관리준칙>에 따라 '열독불허 도서목록'을 작성/배포해 사회과학서적의 열람을 원천 통제한 바 있었다.
  • 에드워드 카 "역사란 무엇인가"[11]
  •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김정한 "모래톱 이야기"
  • 이영협 "일반경제사론"
  • E.R.셀리그만 "경제사관의 제문제"
  • 박현채 "전후 30년의 세계경제사조와 민족경지론"
  • 유인호 "한국경제의 실상과 허상"
  • 리영희 "전환시대의 논리"
  • 리영희 "우상과 이성"
  • 리영희 "중국 8억인과의 대화"
  • 아세아문제연구소 발간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4, 5권"
  • 조용범 "후진국경제론"
  • 최종식 "서양경제사론"
  • 리영희 "경제학"
  • 폴 스위지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 중 제3장 '공황과 불황' 제4장 '제국주의'
  • 조지프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 사무엘 팔머 "제3세계의 이해"
등등 아주 많다.
국내 학자들의 책은 빼고라도 역사학계의 불멸의 고전인 <역사란 무엇인가>나 경제학계의 거두인 조지프 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처럼 국제적으로 학계에서 인정받고 있는 책들까지 불온서적이라고 한 것은 그야말로 무식의 증거일 뿐이다. 당시 5공 정권과 사법부가 얼마나 협소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당연히 저 책들을 정말 불온서적이라고 생각했기에 피해자들을 잡아들인 것이 절대 아니고, 단지 피해자들을 '빨갱이'로 만들기 위해 저 책들을 불온서적으로 만들었어야 했던 것이다. 즉, 당시의 재판 과정에서는 저 책들에 공산주의를 모욕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더라도 불온서적으로 되고도 충분히 남을 상황이었다. 불온서적으로 지정된 책들이 서점에 멀쩡히 돌아다니며, 일반인들이 아무 제한 없이 구매할 수 있다는 것부터 이미 무식의 차원이 아닌, 조작을 위해 지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민주화가 진행된 뒤에도 2007년 미르북 사건이나 2016~2017년 '노동자의 책' 사이트 압수수색 및 운영자 구속 사건과 같이 사회과학서적 탄압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7. 왜 일어난 사건인가?


박정희 사후 12.12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부는, 집권과정에서 명분이나 정통성이 전혀 없었다. 박정희 역시 쿠데타로 집권했으나, 당시는 6.25 전쟁이 끝난 지 몇 년 지나지 않았던 시점이고, 남한은 경제력마저 북한에 뒤졌던 때라, 전쟁의 재발 가능성에 전 국민이 불안에 떨었던 때였고, 4.19 혁명 이후 집권한 윤보선, 장면 등의 지리멸렬한 내분은 국민들에게 실망과 불안감을 더 주었다.
박정희는 5.16 이후 사실상 정권을 장악했음에도 자기 마음대로 대통령이 되어 국가를 통치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은 분명히 인식하고, 제대로 된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직선제 대통령 선거를 진행하였다. 이것이 제5대 대통령 선거로 이 선거에선 정권을 장악한 공화당의 금권, 관권 선거공세가 있긴 했지만, 선거운동을 어쨌든 제대로 했고 자신이 빨갱이라는 윤보선의 공격에 위기에 몰리기도 했지만, 박정희가 호남에서도 높은 지지를 받으며 14만표차 간발의 차이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후 역시 여당에 유리하게 구도를 유도하긴 했지만 제6대 국회의원 선거도 정상적으로 운영했고, 여기서도 겨우 34% 정도의 지지만 받았지만 야권의 분열로 결국 대승했다. 박정희는 분명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이후 국민들이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표출할 기회를 주었고, 거기서 교묘하게 승리하며 자신의 기반을 다졌다. 쿠데타를 비난하던 야권의 거물들도 당시 기준으로는 부정을 지적할 수 없을 정도로[12] 선거와 발언의 기회를 보장하는 박정희가 민의로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이러한 정치의 과정을 보자면 박정희는 독재자였지만 정치적 감각과 통치술은 대단했다. 거기에 당시 그의 기반인 국군조직은 당시에는 매우 젊고 유능한 인재가 가장 많이 모인 집단이며 아직은 부패와 거리가 있었기에 기존 정치인들보다는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13]
하지만 전두환은? 집권 배경과 과정이 박정희와 판이하게 달랐다. 전두환의 전임인 최규하는 박정희 사후, 대통령 유고 관련 규정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시작하여 업무를 시작한 지 겨우 40여일에 불과했다. 애초에 최규하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초반에 쿠데타에 대해서 사과하지만 정국의 안정을 위한 것이었다며, 만약 국민이 반대한다면 기꺼이 물러나겠다고 연이어 대통령선거, 국회의원 선거를 제안한 박정희와 다르게, 전두환은 최규하를 허수아비로 세워놓고, 국민들의 민주화와 유신헌법 폐기 및 대통령 직접선거 요규를 5.17 계엄 전국확대를 통해 무력으로 진압하고, 다음날 광주에서 학살을 저지르고 그해 아무런 법적 정당성도 없는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기구를 이용해 체육관에서 말만 간접선거지 셀프로 대통령이 되었다. 유신헌법으로 종신독재자가 된 박정희가 사망한 만큼, 박정희 대통령이 했던대로 최소한 대통령선거는 직선제로 해야한다는 국민의 열망을 짓밟은 것.[14]
거기에 박정희 시절 육군이 아직 부패하지 않은 젊고 유능한 장교들의 조직이었다면[15] 1980년 전두환이 이끌던 군부는 이미 20년이나 집권하면서 썩을대로 썩은 기득권 집단에 불과했다.[16] 결국 같이 쿠데타로 집권했어도 박정희는 이후 국민들의 피부로 체감할 수 있을 정도의 고속 경제성장을 통해서 정통성을 일부 획득했지만 전두환은 정통성이 없었고 직접선거로는 아무리 공포분위기를 조장해도 참패할 게 뻔했다. 결국 전두환과 그 일당들은 정치적 불안상황을 조장하고, 국민들에게 공포감을 심고, 자신의 집권의 정당성을 억지로 긁어내기 위해 강하게 나가야 할 필요성을 느껴서 정부 차원에서 조작한 사건이다.
전두환이 그나마 국민들에게 미움을 덜 받게 된 것은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에서 북한의 테러로 수많은 인원이 사망하여 북한에 대한 국가적 분노가 일어나서 부터이다. 운좋게 살아남은 전두환은 극단으로 치닫는 군부를 통제하는 데는 또 그런대로 잘했고[17] 이후 당시 세계 경제호황 속에 한국 경제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면서 비난이 아주 약간 가시게 된다.

8. 같이 보기


[1] 전기구이 통닭처럼 사람을 긴 막대에 묶은 뒤 돌려가며 때리는 고문 수법. 전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수법이다.[2] 부림사건의 재심 변호인이다.[3] 거성중학교는 1990년 8월 까지는 대동고등학교와 같은 재단의 사립학교였다. 부림사건 이후~1990년 8월 사이에 재단에서 거성중학교로 발령한 이후에 거성중학교가 계열분리된것으로 추측.[4] 작중에서는 '부독련 사건' 으로 나온다.[5] 에드워드 카영국인이며, 영국 외교관으로서 학계와 외교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가졌던 사람이다. 또한 영국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에 파병한 대한민국의 우방국이다.[6] "조지 포먼하고 무하마드 알리가 권투시합 해가 내가 알리 응원하는데 김일성이도 알리 응원하모 내 국보법 어긴깁니까?"라는 발언,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과 북한이 축구하는데 북한 응원하면 그게 국보법 위반이냐"라는 발언을 했었다고 한다.[7] 영화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대부분의 변호를 독자적으로 하지만 실제 사건 당시에는 5명의 공동 변호인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소설, 드라마, 영화 등의 미디어물에서 특정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각색과 연출로 작품의 완성도와 극적 몰입도를 높이는 것은 널리 허용되는 기법이다. 또 당시의 폭압적 정치사회에서 인권을 위해 인권변호사로 뛰어든 점은 높이 살만하다. 다만 부림사건 피해자들은 "'''노무현 변호사가 가장 열성적으로 변론에 임했다'''"고 증언하고 있는 걸로 보아 영화를 마냥 허구로만 볼 수 없다.[8] 더 충격적인 사실은, 심지어 최근에도 일베저장소를 비롯한 일부 극우파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전두환 정권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이유는 단순한데, 단지 사건을 소재로 쓴 영화 변호인노무현 대통령을 다룬 영화였기 때문.[9] '''매우 격렬하게''' 변호했으며 피해자 가족들이 변호사가 저렇게 싸우듯이 변호해도 되나하고 우려할 정도였다고 한다.[10] 서석구는 뒷날 박근혜 탄핵 반대 집회에 참가하거나, 박근혜에 대한 재판의 변호를 맡을 만큼 굉장히 극우적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발언하는 것을 보면, 당시 변호사 노무현의 역할은 매우 지대했음을 알 수 있다.[11]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억지 주장이다. 이 책은 현대 역사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고전 중 하나로 꼽히는 명저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책이다. 심지어 국정교과서 시절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첫 장에 에드워드 카의 역사관을 주요 역사관 중 하나로 소개하며(Geschichte와 History를 비교하는 그 페이지) 그의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표현이 인용되어 있기도 했다. 이런 게 목록에 들어가 있다는 것부터 실소를 금치 못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는 듯.[12] 당시의 부정부패, 금권, 막걸리 선거는 여야 모두의 문제였고, 실제로 자유당 시절의 선거에서 이런 건 더욱 극심했다. 애초에 이승만은 아예 선거를 하지 않으려고 상대를 죽이던 인물이다.[13] 당시는 전쟁이 끝난 지 채 10년도 지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국군조직은 5공 시절보다 훨씬 능력있는 엘리트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또한, 박정희가 본격적으로 독재의 길을 걷기 시작한 시기는 1970년대 유신헌법 제정 이후이며, 이전까지는 교묘한 술책을 사용했을지언정 선거를 제대로 진행하여 국민들로부터 확실하게 정통성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14] 이미 경제성장의 성과가 어느 정도 가시화되고 있었기에, 국민들은 1960년대보다 여유로워진 경제로 인해 정치적 민주화에 슬슬 눈을 뜨던 시기기도 했지만, 전두환 신군부가 민주화 세력의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등 상당히 원시적이면서도 허술하게 대응했다. 또한, 쿠데타에 대한 사과와 쿠데타를 일으킨 근거를 제시함과 동시에 선거를 제안하며 국민들로부터 정통성과 지지를 확보하는 과정을 우선적으로 거친 박정희와 달리, 전두환은 애당초 정통성이 전혀 없었고, 정통성을 확보하려 시도하지도 않았다. 고작해야, 한미 미사일 사거리 협정을 통해 미국의 지지를 받아냈을 뿐이었다. 똑같이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얻었지만, 전두환의 정치적 감각과 통치력은 박정희보다 훨씬 못 미쳤디. 그 결과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 자리를 유지했고, 전두환은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했다.[15] 이때 대한민국은 가혹한 식민통치와 참혹한 전쟁으로 인해서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최악의 후진국이었다. 근대적인 산업기반 따위는 전무한 농촌국가였기 때문에 유능한 인재들은 관료 아니면 군으로 몰려들고 있었고, 특히 미군이 직접 훈련시킨 육군 장교단은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선진문물을 많이 접한 엘리트 집단이었다. 소위 1960~70년대의 공업화를 군부와 (미국유학파) 관료들이 주도하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16] 애당초 하나회와 같이 군부 내에 특정 파벌이 자리잡고 권력 나눠먹기를 하고 있던 시점에서 이미 군부가 타락할 대로 타락한 것이다. 일제 군부가 왜 미쳐돌아가기 시작했고, 어째서 미국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미국에게 선빵을 때리는 미친 짓을 했는지 생각해보면 이는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었다.[17] 사실 이마저도 군부 핵심인사를 하나회가 모두 장악한 상황이었고, 하나회의 수장이었던 전두환을 미국이 살살 달래주었기 때문이다. 즉, 이마저도 하나회의 수장이라는 자리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