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

 


'''조갑제
趙甲濟'''
[image]
'''출생'''
1945년 10월 24일 (78세)
연합군 점령하 일본 사이타마현[1]
'''직업'''
언론인, 출판인, 편집인, 작가
'''병역'''
공군 병장 만기전역(병 161기#)
'''경력'''
국제신문 기자
월간 마당 편집장
조선일보 월간조선부(部) 기자
월간조선 편집장 1기(1991 ~ 1996)
편집장 2기(1998 ~ 2004)
월간조선 초대 대표이사(2001년 ~ 2005년)
조갑제닷컴 대표
'''링크'''
(유튜브) (웹사이트)
'''종교'''
개신교
1. 개요
2. 생애
3. 언론인으로서의 조갑제
4. 조갑제닷컴
5. 새누리당 공천 내홍에 대한 평가
6.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논조
6.1. 문제점
7. 조갑제의 시각
7.1. 반공주의
7.2. 자위적 핵무장론
7.3. 한미 동맹 해체론
7.4. 6.25전쟁에 대한 시각
7.5. 박근혜 대통령 탄핵 관련
7.6. 3김에 대한 평가
7.7. 박원순의 자녀 병역비리 의혹
8. 여담
9. 기자로서의 조언
10.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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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기 나라를 지킬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힘을 써보지 못하고 남한테 구하려고 손을 내미는 것은 노예근성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자들은 대한민국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다.'''

시국강연회 강연 中

대한민국언론인. 극우 논객이라는 인식이 넓게 퍼져 있지만 정확히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노선과 살짝 다른 민주주의애국주의 사상을 가진, 고전적인 애국주의 논객에 가깝다.[2] 정확하게는 '''완고한 반공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3] 좌우 대립보다는 남북 대립에 더 신경이 예민한 경향을 보인다.[4]
청년 때부터 박정희, 전두환 정권이 저지른 비리와 조작을 파헤쳤고, 다른 민주화 투사처럼 안기부에서 끔찍한 고문을 당한 뒤에도, 취재를 포기하지 않을 만큼 집념이 강했다. 나중에는 안기부에서 고문을 받은 사람들 및 당시의 고문 기술자를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전두환 정부를 비난하는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이라는 책까지 작성했다. 그가 진보진영에 심한 말을 할 때마다, 언론인 후배들이 반박은 하더라도 조갑제가 기자로서 남긴 업적이 대단하기에 아주 심하게 공격을 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그를 보고 장래희망을 기자로 정한 사람도 많다. 지금도 비록 조갑제와는 입장과 노선을 달리 하지만, 언론인으로서 보여준 조갑제의 업적과 취재력, 글쓰기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2. 생애


1945년 10월 24일, 일본 사이타마현에서 태어났으나 얼마후 부모들이 나고 자란 경상북도 청송군으로 귀국하여 성장하게 된다. 이런 연유로 자신의 고향을 경북 청송 출신으로 소개한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가난을 이유로 부산으로 이주하였다.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수산대학교(현 부경대학교)를 중퇴하였다.[5] 고교 시절, 단파라디오를 통해 미국과 일본의 야구 중계방송을 들으며 영어 및 일어를 공부했고, 군대에서 미 공군과 합동근무를 하고 비행기 식별 업무 때문에 일본 자위대와 연락관계를 유지하면서 영어, 일어 회화를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1967년 3월 1일 공군에 입대하여 요격관제[6] 특기병으로 3년 4개월을 복무하였다. 원래는 3년 만기 전역이었는데 훈련병 때 결핵성 늑막염에 걸려 40일간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서 자대배치가 늦어졌고, 1.21사태 등으로 군 복무를 몇개월 더 했다고 한다. 전역이 늦어져 제때 복학을 못했고 빨리 사회에 나가야 했기 때문에 학업을 계속 이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부산·경남지역의 신문인 국제신문에 응시하여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1971년부터 부산·경남지역의 신문인 국제신문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으며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때 아프지 않았는데도 회사에 병가원을 제출하고 광주광역시로 내려가 그 곳을 현장취재하였던 경험이 있으며 그로 인해 신군부의 압력으로 신문사에서 해고당하고 신군부 해직기자 명단에도 등재당하는 확인사살을 당했으며 이후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와 다시 언론기자로 활약 개시해[7] 월간 마당의 편집장을 지내다가 1983년 조선일보 월간조선부(部)에 입사하여 기자[8]로 활동하게 되었고 1991년 편집장 1기를 지냈고 1996년 ~ 1998년까지 해외연수를 갔던 경험이 있다. 이후 연수를 마친 1998년에 월간조선으로 복귀하여 편집장 2기를 맡았고 조선일보에 박정희에 관한 일담을 담은 저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연재하였다. 2001년 1월 2일자로 월간조선이 조선일보사에서 분리독립하여 독립법인 회사로 출범하면서 그 해부터 독립법인 월간조선사 초대 대표이사를 맡았으며 편집장도 겸직하였다. 이후로는 20년 동안 몸 담았던 월간조선을 떠나게 되었으며 독자적으로 세운 독립법인 회사 조갑제닷컴의 대표가 되었다.

3. 언론인으로서의 조갑제


'''1970~80년대 기자로서 조갑제는 가히 전설적인 족적들을 많이 남겼다.''' 환경문제와 관련한 심층취재(이를테면 중금속 오염에 관한 실태), 포항 유전설이 나돌 때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다'고 폭로한 특종 보도[9]를 비롯해 박정희의 여성편력, 사생활 문제를 비롯해 권력형 비리에 아주 날카롭게 다뤘으며, 1979년 부마민주항쟁(이때 남긴 책이 '유고' 2권 세트-1987년-이다.) 때와 1980년 5.18 민주화운동 시기 각각 잠입 취재했었다. 군사정권 시절에 빈번히 행해진 수사기관의 고문에 대해서도 여러차례의 심층 탐사 보도를 써낸바 있다. 1980년대까지 국제 기자 및 작가들의 단체인 국제 펜클럽에서 상도 여러 번 탔고 일본에도 정론과 민주주의를 지키는 언론인으로 알려졌다.
80년대 중후반까지 분명히 '''조선일보와 월간조선의 인기를 만들어준 실력파 기자'''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주진우, 손석희 등 2010년대에 이름을 얻은 기자나 논객들이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군사정권 시기 박정희를 직접 저격하려고 부단히 애썼던 사람이다. 그 당시는 민주주의가 정착된 시대가 절대 아님을 감안해야 한다. 기자정신 하나는 정말 대쪽같은 양반이었고 요즘 문제가 되는 기레기들이 보고 배워야 할 진짜 참기자의 모습을 갖춘 기자였다.
이 밖에도 4공, 5공의 각종 비화에 관해서도 취재해 족적들 남기기도 했다. 1983년에는 월간조선 편집기자로 이직했다. 이 시기 조갑제는 탐사, 심층 취재 도중에 안기부에 붙들려 고문까지 당했다고. 당시 월간조선에 한국에서 활동하는 CIA에 관한 기사를 실었는데, 과감하게도 국내에 존재하는 CIA 사무실 전화번호를 공개하는 용자짓을 해버렸다(...). 이때문에 조갑제는 고문 후유증 영향으로 실제 혼자 걸어가는데 있어 많이 힘겨워한다. 지인이 부축해 줄 정도. 이 시기까지만 해도 조갑제는 어떠한 외압,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진실만을 추구하는 기자로서 모범을 보였던 인물이었다.
조갑제의 전문 영역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는 항공 전문 기자이기도 했다. 군 복무를 공군 관제병으로 마쳤기에 비행기와 항공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등 대형 항공 사고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 기사를 싣기도 했다. 앞의 대한항공 사고 나무위키 문서에 기재된 내용의 상당수는 사실 조갑제 기사의 월간조선 기사에서 가져온 것이다. 대한항공 보잉 747 조종석에 동승해 지구를 한바퀴 일주하고 난뒤 월간조선에 게재한 "점보 조종실 기행 2000개의 계기 속에 갇힌 고독"이라는 르포 기사도 항덕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명문이다.
이후에 논조에 변화가 생겨서 스탠스가 보수, 반공주의 노선으로 전향된다. 이에 대해서 1987년 6월 민주항쟁,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지난 시점으로 우익 반공주의 성향으로 확 변했다는 설도 있으며, 1987년 양김 분열과 김영삼 정부를 거치면서 기대를 가졌던 민주화 세력의 엇나간 행보에 실망해서 생각이 바뀌었다는 추정도 있다. 여기에 관해 성공회대 역사학자 한홍구는 '조갑제가 안기부로부터 각종 많은 정보를 주고 받으면서 정보의 유혹에 넘어갔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람 속 마음을 들어가보지 않는한 이 역시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스탠스의 변화는 홍준표와 비슷하다는 지적이 있다. 활동기 때 권력에 맞서고, 업계에서 전설로 불리었으나 전향했다는 점에서 그런 듯하다.
조갑제에게 과거에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는데 왜 생각이 바뀌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그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자료들을 샅샅이 뒤지다가 보니까, 어느 순간 박정희라고 하는 인물에 대해서 매료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조갑제는 1991년부터 계속 월간조선의 편집장 자리에 있었고, 월간조선이 독립법인화 된 2001년부터는 편집장 겸 대표이사를 맡는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조갑제의 주장과 행동이 강경화, 극단화 됨에 따라, 조선일보는 부담을 느끼고, 송희영 논설위원을 필두로 조갑제를 비판하는 칼럼을 지면에 게재하는 등 그와 점점 거리를 두게 된다. 실제로 2004년 12월말에 실시된 인사이동에서 '''조갑제는 편집장 업무에서 물러나 사장직만 수행하게 되었고''', 2005년 3월에 일어날 후술할 사건으로 사장자리도 불명예 퇴임했다.
결정적으로 2005년 조갑제의 '''친일보다 나쁜 건 친북''' 주장[10][11][12][13] 이후 사회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아 논란이 커지자 조선일보는 그를 월간조선 대표에서 경질했고, 월간조선의 대표이사 자리에 조갑제의 극단성을 비판하던 이상철 기자를 앉혔다. 최소한 대중을 상대하는 언론으로 수익을 내야하는 하는 기업의 입장에서 대통령을 인격적으로 모독하거나 원색적인 비난을 하는 초극단주의적 성향의 관계자를 책임자로서 마냥 품고 갈 수는 없었던 셈.
또한 몽골징기스칸에 대한 관심이 높으며, 몽골 현지 취재도 여러 번 다녀온 경력이 있다. 월간조선 시절에 몽골 취재 기사를 올린 사례가 많으며, 이후 조갑제닷컴 등에도 징기스칸을 소재로 한 글을 자주 쓰고 있다.[14]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기 집권에 성공한 이후, 처음으로 인터뷰한 한국언론은 메이저 언론매체도 아니고 정식 언론매체도 아닌 조갑제 개인이었다.# 일본의 총리가 언론사 재직중인 기자도 아닌[15] 일개 민간인과 관저 집무실에서 공식적으로 시간을 내어 인터뷰를 갖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 당시 조갑제와 아베 신조 사이의 통역을 맡은 것은 극우인사 니시오카 츠토무(西岡力) 국제기독교대학 교수였다.
최근에는 유튜브에 '조갑제 TV'라는 채널을 만들어 활동하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Vlog 영상들을 올리는 중이다. 주로 예전부터 조선일보/월간조선을 구독해온 노인층 내지 이른바 '콘크리트 보수'들이 많이 본다.

4. 조갑제닷컴




5. 새누리당 공천 내홍에 대한 평가


2016년 20대 총선 과정에서 친박계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존영'이란 표현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조갑제는 친박계가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을 떨어트렸고 친박계가 개인 박근혜에 대한 충성이 아부로 비춰진다고 지적하면서, 진정으로 대통령을 위해서 충성하는 사람은 없다고 비판했다.
대통령직이라는 것은 프레지던트(president)가 아니고 프레지던시(presidency)이며,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대통령 사진을 거는 일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대통령 개인을 중심에 두고 친박(親朴), 비박(非朴), 진박(眞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스스로 보수의 윤리가 없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특히 한국인들은 특유의 '저항적 정의감'을 갖고 있다면서 권력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권력에 아부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갖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또한 당 정체성 위반을 이유로 유승민, 이재오 등 컷오프시킨 논란에 대해서도 공천관리위원회가 찍어내리기하는 것보다는 공천을 탈락시키고자 한다면 국민들을 설득하는 방법을 택해야 하며, 경선을 붙이든지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다 보니까 국민들한테는 정치 보복처럼 비춰진 것이라고 비판했다.
유승민 의원에 대해서는 새누리당의 정체성과 부합하지 않고 좌파영합주의라고 비판하면서도, 안보관과 국방문제, 중부담 - 중복지로의 복지강화, 단기적인 경기부양 정책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동조하였다. 조갑제는 유승민의 공천문제에 대해서 공관위가 당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유권자들에게 판단을 맡기는 것이 옳다고 밝혔다.

6.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논조



'''북한군 개입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위험하다. 광주사태 당시 시위대는 반정부적이었지만 친북적이진 않았다.''' 시위대가 간첩 같은 사람이 끼어 있다고 군 당국에 신고하기도 했었다.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구호가 늘 나왔다. 대한민국 세력은 진실 위에 정의를 세워야지 정의 위에 진실을 세우려 해선 안 된다. 신념보다 사실이 더 중요하다.

조갑제 《조갑제의 광주사태》, 조갑제닷컴 2013., 45쪽

"전두환 타도!"란 구호 뒤에는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구호가 따랐다. 시민들이 간첩으로 의심 가는 시위자를 붙들어 계엄당국에 넘겨주기도 했다. '''광주사태의 기본이념은 반공·민주화였다.'''"

조갑제 《조갑제의 광주사태》, 조갑제닷컴 2013., 195쪽

의외일지 모르겠지만 지만원을 비롯한 극우 반공주의 진영이 어떻게든지 폄하하려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주장을 하면서 '''반공적 민주화 운동으로 높이 평가한다.''' 무엇보다 '''조갑제 본인이 당시 기자 신분으로 광주, 즉 생생한 현장에 있었고, 당시의 상황을 두 눈으로 생생하게 봤기 때문이다.'''[16]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를 경험했기에 부실공사를 철저하게 취재하여 당산철교의 조기 재시공을 이끌어낸 최일구와 더불어 현장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 사람이 확실히 알려준다.
이미 조갑제는 80년대부터 5.18 연고대생 북한간첩설을 강하게 부정했으며 월간조선에서도 이것만은 아니라고 계엄군의 무차별한 시민 학살이라며 계엄군의 총에 피투성이가 된 시신 사진들을 실으면서 강력하게 비난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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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가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잠입해 본인이 직접 찍은 사진으로 광주 시민들이 플래카드로 '''북괴는 오판말라'''[18]라고 외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조갑제가 '''5.18은 반공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
2013년 조갑제는 '조갑제의 광주사태: 왜 총을 들고 왜 총을 쐈나? 광주사태 루머와 싸운 30년 이야기'라는 책을 냈다. 그 책에는 5.18의 북한개입설을 체계적으로 반박했는데, 일베저장소의 회원들으로 추정되는 자들이 1점테러를 하는 중. 광주사태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는 제목 때문에 오해를 사는 경우도 있지만 책 본문에서는 처음부터 민주화 운동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다만 그렇다고 조갑제가 5.18을 무작정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5.18 당시 계엄군이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일에 대해서 조갑제는 자기가 보지 못했다며, 좌파 성향의 영화나 드라마들이 지나치게 과장했다며 부정적으로 보는데 계엄군의 광주 시민 학살은 분명히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판명이 난 일이다.

6.1. 문제점


조갑제는 5월 23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 머물렀는데, 그 때는 '''공수부대가 광주 외곽으로 철수한 상황'''이었다. 즉, 5월 18일부터 21일까지 벌어졌던 공수부대의 만행을 잘 모른 채 당시 시민들과 계엄군들의 이야기만 주로 듣고 '시위대가 괜히 과격'한 것처럼 보이거나 양비론이 나올 수 있다.
김문수, 조갑제 할 말은 한다-나는 일류국가에 목마르다 에선 화려한 휴가에 화를 내면서 (시민들 무장 후에) "학살이라 할 수 없다"고 하며 "서로 살기 위해 싸웠다"고 한다. 또 그는 "광주사태는 발포명령자가 누구인지 여지껏 밝혀지지 않았다. 차량을 탈취한 시위대가 전남도청 앞을 지키고 있던 군인 두 명을 깔아뭉갰고 한 명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장교가 한 클립 정도의 M-16 실탄을 가지고있었는데, 격분한 나머지 차량을 향해서 사격한 것이 최초의 발포. 이후 경찰서 무기고를 털어서 무장한 시위대가 반격에 나서면서 상호 간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다만 훈련된 군인이 유리하기에 시위대가 더 많이 희생된 것이다." 라고 말했다. 화려한 휴가에서처럼 전남도청 앞에서 시민을 향해 일제사격하는 장면은 거짓이라고 했다. 또한 영화 시작 부분에 '이 영화는 사실을 기반으로 만들어 졌습니다.'는 문구가 있는 만큼 관람자들이 전남도청 앞 일제사격이 실제 있었던 일로 생각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시민들에 대한 일제사격, 조준사격이 실제로 있었더라면 당연히 발포를 명령한 지휘관이 있어야 되는데 지금까지 아무리 조사를 해도 발포 명령자가 없다고 이야기하며 발포 명령자가 있었으면 진작에 사형에 처해졌을 거라고 말했다. 구술은 실증이 될 수 없고 오히려 과장되거나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논거. [19]
또한 조갑제는 화려한 휴가가 과장됐다고 말한다. 그런데 조갑제는 '''5월 23일'''부터 현장에 있던 사람이다.[20] 5월 18일~19일에 있었던 공수부대의 잔인한 만행과 21일 도청 앞 집단발포 양상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5월 18일부터 광주 상황을 예의주시한 김영택 기자는 오히려 화려한 휴가가 실제보다 못하다고 한다. 이건 조갑제 본인이 본 게 아닌, 시민 측과 계엄군 측의 증언들을 토대로 파악한 광경을 전체로 잘못된 일반화한 것. 무엇보대도 광주는 조갑제만 간 게 아니다. 중앙일보 장재열 기자, 동아일보 김충근 기자, 동아일보 김영택 기자는 오히려 '''조갑제보다 먼저 광주상황을 목격했던 사람들이다. '''
또한 일부에선 "실제 5.18 관련 사료의 다수가 바로 조갑제 기자의 자료"라는 말도 하는데 근거없는 소리다.
한편 자신의 경험을 맹신한다. 그는 이런 5.18 관련 책,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광주 시내에 간첩처럼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하다. 아무리 당시 조갑제 뛰어난 신문기자였어도 일개 언론인 눈에도 간첩이 보인다면 그건 간첩으로서의 자질이 안 되는 녀석이다. 간첩은 기도비닉으로 먹고사는 직업이다. 남들 눈에 띄면 밥줄이 끊기는 정도가 아니라 목숨이 날아간다. 괜히 각 나라마다 정보 기관을 육성해서 간첩을 보내고 잡아내는 것이 아니다. 물론 간첩이 있었을 확률은 없다 봐도 무방하지만, 그것은 정보 기관이 잡아내고 판단할 일이다. 조갑제는 신문 기자이지 정보 기관 직원이 아니다.

7. 조갑제의 시각


오늘날 조갑제는 대체적인 논조로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이승만박정희에 대해서는 강하게 옹호하는 논조를 가졌고, 김대중노무현, 문재인은 극렬히 비판한다. 놀라운 것은 그가 언론인으로써 초창기 활동했을당시 썻던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이랑 <박정희> 전기 시리즈(1992년 까치 출판사에서 발간한 책)는 같은 사람이 썼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다른 내용이라는 것이다. 김지하와 마찬가지로 6월 혁명 이후 논조가 바뀐 케이스 중 한 명이다. 그의 확 틀어져버린 논조에 대해 '진짜 조갑제는 남산에 끌려가서 죽고, 대역이 조갑제라는 이름을 쓴다'는 우스개소리가 있다.
사실 이래저래 엇나갈 때도 많고 여러 면에서 문제가 있긴 하지만, 2010년 이후부터 규모가 확 커져버린 넷우익에 비하면 확실한 논조가 있으며, 자료수집이나 역사, 정치, 경제, 사회 분야 등 여러 방면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승만이나 박정희를 강하게 옹호하는 점이 그와 정치성향에서 반대에 있는 사람들을 거북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비판하는데 있어 조금 신중해야 하는 것이, 위에도 언급했듯 박정희 정권 시절에 누구보다도 날선 비판을 했던 인물이 조갑제다. 유신정권에 아부하며 이권을 챙기던 지식인이나 언론도 많았던 점을 고려하면 분명 큰 점수를 줄 수 있는 부분이고 또한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고 나서 오히려 스탠스를 옹호 쪽으로 바꾸었다는 것은 적어도 그것이 시류 편승적이거나 기회주의적 발로에서 기인하지는 않았다는 의미이다. [21]
실제로 다른 강성 보수 지식인들과 달리 조갑제에 대한 반대 진영의 평가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이러한 점 때문에 강성보수 인사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여타 극우인사들과는 달리 반대 진영에서도 인정하고 존중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반대 진영에서 군사정권시절을 비판하는 근거로 드는 역사적 비화들도 알고 보면 조갑제가 치밀한 취재로 발굴해낸 것이 많다.
또 진보측의 의견을 옹호하거나 사실관계를 인정해주는 경우가 많아서[22][23], 일베 등 극우 사이트에서는 '결정적일 때 좌파 편 들려고 보수 코스프레하는 프락치'라는 평가를 받으며 인격적인 모독을 당하기도 한다.
우파 언론인의 표상이긴 하지만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글만큼은 자기가 직접 '''목숨 걸고''' 취재를 다녀와서 쓴 글이기에 이 사건에 대해서만큼은 인정받는 수준이다. 또한 5.18과 관련된 많은 역사자료를 내놓기도 하였다. 이 때문인지 진보측에서도 비슷한 논조의 지만원에 비해 조갑제는 크게 까이지 않는 편이다.

7.1. 반공주의


'''친일보다 더 나쁜 건 친북'''

그가 저술한 <종북백과사전>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북한 주민들을 해방시키는 건 우리의 임무다. 그게 싫으면 이민가라' Ergo Decedo 참고

7.2. 자위적 핵무장론


적이 핵무장 했다면 살기 위해서라도 핵 필요해 핵무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핵무기라는 비대칭전력이기에 이를 해결하려면 북한이 핵무장을 포기하거나한국이 핵무장을 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북한의 행보를 생각해 보면 북한이 핵무장을 포기할 가능성은 낮다. 다만 북한이 핵무장해서 제제를 받고 있음을 생각해 보면 한국이 핵무장을 선언할 경우 국제사회의 제제를 받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음을 유념해야 한다.

7.3. 한미 동맹 해체론


여느 보수들과 뚜렷하게 차이를 보이는 점인데 이스라엘과의 비교를 들면서 북한과의 비교를 들면서 남북이 일대일로 싸워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다. https://youtu.be/DW_JPXsQa-s
물론 좌파 진영에서 줄곧 이야기하는 급진적인 반미주의적 시각은 아니고, 점진적으로 우리 국방을 키워서 장기적으로는 한미 동맹이 해체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가깝다.

7.4. 6.25전쟁에 대한 시각


* 정규재: (중략) 6.25전쟁은 어떻게 보십니까? 6.25전쟁 자체는 고통의 과정이었지만, 그 이후 근대화로 새 출발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최근 들었습니다.

* 조갑제: '''6.25는 재앙으로 위장한 축복'''이었어요. 6.25 없었으면 1960년대 초에 한국은 월남 식으로 공산화됐을 겁니다. 6.25가 났을 때 한국은 출구가 없었어요. 한미 동맹도 없었고, 주한 미군도 나갔고, 국회에는 좌익들이 들어와서 여러가지 분탕질을 하고 있었고, 이미 산악 지역에는 북한 게릴라들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중략) 저는 6.25 없었으면 한국은 망했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24]

역사학계에선 16세기 조선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선조 시기 사림파가 기존 인식과 달리 전혀 개혁적이지 않었다는 점이 확인되고 있다. 기묘사림 이후 제대로 개혁을 부르짖은 건 이이 정도밖에 없던 상황에서 임진왜란이란 초유의 전란 덕분에 대동법 등 기존에 받아들여지지 않던 개혁과 재분배 정책들이 시행되었다는 시각이 있는데 이것과 비슷한 시각이다. 국토가 폐허가 되고 수많은 사람이 죽은 비극이지만 가만 있었으면 내부 혼란과 체제 모순이 걷잡을 수 없어졌을 대한민국이 전쟁으로 기사회생에 성공했다는 것. 조갑제는 다른 글에서 6.25로 인해서 남한이 사라질 뻔했다고 하는 주장한 바도 있으며, 6.25전쟁을 한국과 자유진영의 승리로 공산군의 남침을 저지시킨 것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이 발언이 김일성의 남침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7.5. 박근혜 대통령 탄핵 관련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반대 집회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비록 최순실 게이트 사태가 국민들의 분노를 유발하는 사건이기는 하나 국가의 기본과 정체성을 뒤흔들 정도까진 아니니 임기 5년까지는 보장하는 게 맞고, 부친인 박정희의 딸이니 봐 주는 게 낫지 않냐는 입장이며 탄핵 반대 집회에도 연설을 위해 참여했다. 그러면서도 박근혜 현직 대통령을 보좌하던 보수 정치인들을 비판하는 논조도 공존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박근혜 대통령의 파면과 관련하여 12가지의 이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주간조선에 기고한 글에서 조갑제는 박정희 탄신 100주년에 일어난 박근혜의 추락 앞에서 그리스 비극을 떠올렸다며 "그리스 비극은 못 되더라도 국민적 연민의 부족, 이 점이 한국식 비극의 핵심일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버지-어머니-딸이 대를 이어서 동족의 손으로 요절이 나는데 외국 언론이 동정론을 펴는 게 그래서 더 인상적이다. 한국인은 원래 이토록 잔인한 민족인가? 과연 영웅을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들인가?"[25][26]라고 했는데,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문학동네》 2017년 여름호에서 이런 조갑제의 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받아쳤다.

저 질문에 답을 해 주기로 하자. 한국인은 헌법을 유린한 범죄자에게 이 정도로 '잔인'할 만큼의 정치적 이성은 가지고 있다고. 또 현대사를 수십 년 퇴행시키려는 것이 아니라면 오늘날의 민주공화정에 파시스트 '영웅' 따위는 필요없다고.[27]

그리고 '국민적 연민'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은 국가가 방치해서 바닷속에 가라앉은 304명을 위한 것이지, 그들이 죽어가는 동안 행방불명 상태였고 이후에도 유가족을 철저하게 외면한 냉혈한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28]

신형철 「굿바이 박정희 -2017년 여름호를 펴내며-」, 《문학동네》제24권 제2호(2017년 여름호), 문학동네, 2017, 3~4쪽

그뿐만 아니라 조갑제는 월간조선 2017년 4월호에서도 탄핵을 두고 내전이나 다를 것 없다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29]
눈 감고 귀 막고 탄핵을 반대하기만 하는 다른 보수 성향 인물들과는 다르게, 이번 사건이 국민들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한다는 점과 비판 없는 보수들이 박 대통령을 파멸로 몰고 갔다고 비판하는 점이 눈여겨볼 만하다. (기타: #, #)
그리고 탄핵 이후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과정에서 탄핵 찬반을 떠나서 북한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은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안철수를 지지했고, 탄핵 사태로 보수가 형해화된 상태에서 '중도' 성향의 안철수가 대통령에 당선하게 된다면 절반의 성공 내지는 선방을 한 셈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2017년 대선 뒤에도 보수통합, 우파통합을 주창했는데 결국에는 박근혜 탄핵 사태가 이를 꼬이게 만들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리고 "보수가 살아나려면 음모론 퍼트리지 말자."라고 했는데, 정작 아이러니하게도 조갑제 본인은 김대중과 노무현이 김정일의 첩자라는 식의 음모론을 아주 진지하게 주장한 책들을 썼다.#, #

7.6. 3김에 대한 평가


유튜브 조갑제 TV - 내가 겪은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 김대중과는 10회 이상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짧게하면 2시간, 길게 하면 8시간 이상 했다고 한다. 1993년 경에 김대중과 7시간 이상 인터뷰 할 당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을 김대중 측에게 검토 요청하여 김대중이 직접 글을 고쳐서 보내왔는데, 그의 문장력이 정확하고 달필이었다고 회고했다. # 이념적으로 자신과는 다르지만, 가장 부지런하고 가장 성실하고 가장 전략적인 정치인이었다고 평가했다. 그의 흠으로는 독선과 사물을 바라볼 때, 단편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점을 비판했다.[30]
  • 김영삼에 대해서는 타이밍을 잘 잡는 정치인이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강단과 기개가 있었고, 기자들의 질문을 잘 받아주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 속에 한 번 각인이 된 것은 쉽게 바꾸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대통령 집권 후에 원초적 민족주의에 빠진 것은 그의 큰 불행이었다고 했다.[31] 가장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정치인이며, 약속을 잡아 시간에 맞춰가면 먼저 기다리고 있더라고 언급했다.
  • 김종필에 대해서는 인간적인 매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와 만나게 되면 정치뿐만 아니라, 예술, 영화, 문화, 자신이 만난 인물들의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는데, 박학다식하고 만남이 기다려지는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종합적인 능력과 소양이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했다.

7.7. 박원순의 자녀 병역비리 의혹


의외라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박원순의 자녀 병역비리 의혹에 대해서 명백히 허위사실이라고 반박했다. #1 #2

8. 여담


자신에 대한 비판적인 글에 대해서 자신이 판단하기에 사실에 부합하지 않은 것들은 대개 무시한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해서 비판문을 쓴 사람들 중에서 고마웠던 사람이 있느냐 질문에 강준만 교수를 꼽았다.
영국의 작가인 조지 오웰을 매우 존경하며, 오웰의 저서를 자신의 글에 인용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조지 오웰이 골수 사회주의자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의외라면 의외.
《조선일보》 사회부장 출신으로 판문점에서 북한 기자들과의 접촉이 잦았던 함영준 기자의 회고에 의하면, 1990년 무렵까지만 해도 조갑제는 '''북한에서 가장 좋아했던 대한민국 기자'''였다고 한다.[32] 그도 그럴 것이 위에서 나온대로 정권의 치부를 드러내는 수많은 탐사보도 특종을 냈으며, 5·18 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용기 있게 폭로하며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을 여러 차례 난처하게 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북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런 반정부 기사를 써대는 용감함에 북한 언론인들도 감탄해마지 않았다고 한다.

9. 기자로서의 조언


기자 출신으로 신동아 2006년 8월호 기사에서 특종사냥에 대한 조언을 했다. 한때 탐사취재와 보도로 명성을 날렸던 대기자의 연륜이 엿보인다. 기자로서의 투철한 직업정신 면에서는 보수와 진보를 가릴 것 없이 그를 존중[33]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신문기자 조갑제의 특종 사냥법'''

'''"정기적으로 논문 색인집과 관보 읽어라"'''

*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춰라. 가급적 대중성이 강한 분야가 좋다. 야구가 인기면 야구, 권투에 대한 관심이 높을 때면 권투, 석유면 석유, 고분 발굴이면 고분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갖춰라.

* 논문 색인집을 정기적으로 살펴보라. 국회도서관과 주요 대학, 연구기관에서는 다양한 논문 색인집을 내고 있다. 여기에 실린 논문 제목을 정기적으로 살펴보면 생각하지도 못했던 아이디어를 찾아낼 수 있다.

* 관보를 비롯한 정부 간행물을 정기적으로 읽어라. 관보를 비롯한 정부 간행물에 실린 사안은 정부의 공식 정책이거나 정책으로 확정될 것이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보도해도 오보가 될 가능성이 작다. 각 부처에서 나오는 보도자료에만 의존하면 특종을 쓸 수 없다.

* 루틴(routine)한 취재를 반복하라. 출입처 이외의 기관도 정기적으로 챙겨라. 경찰서를 출입할 때는 구청도 드나들어라. 그러면 2중으로 취재지역을 훑을 수 있다.

* 취재 현장에는 반드시 가라. 현장에 가면 사무실이나 기자실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 같이 술을 마심으로써 취재원에게 접근하는 방법은 지양하라. 맑은 정신으로 취재해야 취재원이 안심한다. 취재한 것은 반드시 기사화하고 취재원에 대해서는 끝까지 함구해 확실한 신뢰관계를 구축한다. 그가 새로운 제보자를 소개해 준다.

* 다작(多作) 속에 특종이 있다. 기사 욕심을 내서 기사를 많이 쓰는 기자가 특종에 접근한다. ‘기사는 힘으로 쓰는 것’이고 ‘발로 만드는 것’이다.

* 문제의식을 갖고 한 주제를 물고 늘어져라. 한번 잡은 주제를 여러 번 반복해서 취재하다 보면 시작할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큼직한 특종이 걸려든다. 잡지기자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 ‘사실은 이념에 우선한다’는 소신이 필요하다. 이념과 신념에 빠져버리면 왜곡된 기사를 내놓게 된다. 기자는 사명감 때문에 취재하는 게 아니라 사실을 추적하는데 재미를 느끼며 취재해야 한다.

* 명문(名文)과 미문(美文)을 쓰려고 하지 말고 정확한 문장을 쓰려고 노력하라. 형용사 부사 접속사는 되도록 쓰지 말고 건조한 문장을 만들어라.

* 특종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취재를 피하는 취재원은 몇 번이고 찾아가는 성의를 보여라. 알아도 취재원에게 자꾸 물어봄으로써 상대방이 편하게 말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취재원을 감동시키거나 신뢰를 주지 못하면 제대로 된 취재를 하지 못한다.

* 기사가 실리지 않았다고 해서 데스크와 충돌하지 말라. 그들도 이유가 있어 기사를 내보내지 못하는 것이다. 취재원뿐 아니라 데스크에게도 신뢰를 주어야 한다. 데스크가 의심하지 않도록 정밀한 취재를 할 수 있는 능력부터 갖춰라.


10. 저서


  •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 1986년, 기자 조갑제가 인천 일가족 살인사건의 사형수 오휘웅의 억울함과 무고함을 입증한 전설적인 책. 사법부의 문제점과 사형제에 관련해서 조목조목 파헤친 책이다. 법대 전공수업이나 대학원 수업에서도 읽혔던 책이다.
  • 『대폭발』 - 1985년 2.12 총선에 대한 분석 및 1980년대 중반 민주화운동 관련 다룬 르포
  •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s-2』 - 박정희의 일생을 다룬 전기로,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내용을 엮어서 펴낸 책이다. 박정희에 대한 조갑제의 평가가 잘 드러난 책이다. 취재를 바탕으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많아서 좌우파 연구자를 막론하고 박정희 시대사 연구자들의 저술 등에서 종종 이 책의 내용을 인용한다. 나무위키의 수많은 관련 문서들도 이 저서의 내용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
  • 『국가안전기획부』
  • 『유고』 (2권 세트) - 1979년 부마항쟁, 10.26 사건을 다룬 책. 그밖에 이 책에서 박정희의 비리 및 사생활 문제에 대해서도 적나라하게 다뤘다.
  • 『조갑제의 광주사태』 : 왜 총을 들고, 왜 총을 쐈나? 광주 사태 루머와 싸운 30년 이야기 - 5.18을 왜곡하는 지만원의 주장을 반박하는 책.
  • 『군부』 - 안기부의 행태들을 날카롭게 본격 해부한 책.
  • 『한강의 새벽』 -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 『종북 백과사전』 - 일종의 종북인명사전이다. 한때 조갑제닷컴에 신청하면 무료로 배송해 주기도 했다.
  • 『송의 눈물』 - 군대에서 정신 교육 시간에 읽어보라고 권유한다. 2014년 기준. 평화 조약과 강화 협상의 부질없음을 강조한다.
  • 『트루먼과 스탈린의 한반도 게임 비사』 - 소련이 왜 유엔 안보리에 불참했는지 편지를 갖고 와서 설명한다.
  • 『우리 생애의 가장 길었던 날』



[1] 1946년에 경북 청송으로 귀국하게 된다.[2] 그런데 결국에는 이른바 아스팔트 보수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극우적 색체가 아예 없다고는 볼 수 없다.[3] 당연히 이북의 '공산주의'와 일반적인 좌파는 근본이 다르다.[4] 실제로 그는 북한 3대 세습 정권에 반대하는 좌파라면 환영한다고 한 적이 있다. 물론 이는 좌파를 별개로 3대 세습 정권이라는 독재주체사상에 대한 반대를 의미한다.[5] 처음에는 해양 쪽 일을 하고싶어 해군사관학교나 한국해양대학교에 지원했으나 시력 문제로 지원 자격이 되지 않았고, 육군사관학교 역시 지원 자격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부산수산대학교에 진학했으나 수산물 가공 쪽 학과라서 영 재미가 없었다고 한다.[6] 요격관제병은 관제사가 전투기를 관제할 때 그 옆에서 수동식 컴퓨터로 비행기의 속도, 고도, 방향 등을 계산하여 보좌해주는 조수(助手) 역할을 수행한다.[7] "조갑제의 현대사추적 공수부대의 광주사태" 책 머릿말에 나온다.[8] 이때 주로 많이 쓴 기사가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였다.[9] 이때 거의 매국노 취급을 받았다(...). 국가적으로 이제 한국도 산유국이 되어서 기름 한 방울 안나는 나라의 설움을 벗어나겠다고 신나했는데 조갑제 기자는 당시 국회 도서관을 드나들면서 논문들을 열람하고 지질학자 및 화학자 등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아예 논문을 한 편 만들었다.''' 자비로 논문을 출간해서 관계 당국과 언론사, 석유시추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한 학자들에게 보냈고 결국 조갑제는 "한국의 산유국화" 주장을 개박살냈다.[10] 조갑제는 1987년 이전까지만 해도 이런주장과는 '''전혀 배치되는 주장'''을 했던 사람이다.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 한길사' 책에서 그는 '''친일파들은 오늘날 한국사회의 부정적 영향들을 끼친 주범들로 반드시 단죄해야 한다''''는 논조를 보였던 게 조갑제였다.[11] 그러나 이런 논조의 변화도 이해하지 못할 것만은 아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소수의 주사파 등 일부 운동권을 제외하고는 사회 전반적으로 반공 분위기가 강했으나 2000 남북정상회담 이후 2005년에 이르면 사회 전반적으로 공공연하게 친북·종북성향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물론 친일도 옹호되선 안되지만, 어쨌든 일제강점기 시대는 끝났고, 일본에서도 극우정당, 극우 세력들 이외에는 일제를 옹호하고 한국을 위협하려는 성향을 드러내지 않는다...만은 사실 극우들이 정권잡고 극우 유권자들이 넘쳐나는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아베노믹스한일 무역 분쟁으로 우리가 엿을 먹은바도 있고해서 결코 우호적이라고만은 볼수 없다, 그냥 조갑제가 친일 성향을 보여서 저러는것(실제로 한일 무역 분쟁에서 일본편을 드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어쨋든 친일세력이 망신을 주고 만행을 저질르긴 했어도 당장은 국가안보에 해가 되는 존재는 아니지만, 북한정권이 여전히 대남적화전략을 가동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친북세력은 '현존하는 안보 위협'이라는 위기의식은 충분히 가질 수 있는 것이다.[12] 현재는 북한에 대한 인식이 조금 바뀌었을 수는 있어도, 위협이 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아직 경계단계인건 사실이다. 더불어 일부 극우세력들은 주사파들에 의해 종북주의자들이 늘어난다고 하지만, 사실 북한과는 동북아 평화를 위해 협력하는 상황이지, 아직 북한을 동맹이라고 공식적으로 인증하지 않고, 현재도 주의~경계단계인 적국인 상태. 더불어 친일이나 친북이나 이를 넘어선 종북, 종일의 경우 타국(특히 적국)에 충성을 하는 건 좋다고 절대 할 수 없다.[13] 그런데 일본 극우 인사들이나 신문의 자료들을 자신의 사이트에 올려놓칠 않나, 구로다 가쓰히로와 친하게 지내면서 이 인간의 망언에 대해선 별로 터치를 안하는등, 명백히 친일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14] 2004년 9월 징기스칸이라는 월간지를 만들었는데, 창간사가 "1등과 천재 덕분에 먹고 사는 범인이 그 고마음을 모르고 질투심과 열등감을 천재들에게 쏟아붓는 판국. 우리는 1등과 천재들이 존경받고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건전한 사회를 향하여 나아갈 것. 저희 잡지는 바보처럼 우직하게 일하면서 천재를 알아보는 순수함을 견지하겠다. 징기스칸을 읽으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힘이 불끈 솟아나며 세상이 밝게 보이도록 해 드리겠다"이다. #[15] 월간조선에서 은퇴한지 한참 지났고, 조갑제닷컴은 조갑제 개인의 홈페이지로 본다면 풍부한 정보량을 자랑하지만, 정식 언론매체로 보기는 힘들 정도로 영세한 수준이다.[16] 이 밖에도 조갑제는 1979년 부마민주항쟁에서도 잠입취재했던 경력이 있던 기자다.[17] 지만원과 완전히 갈라선 것도 이 문제 때문이란 추측이 많다. 참고로 지만원은 인터넷에서 5.18 북한군 개입설을 체계적으로 유포한 최초의 인물이다.[18]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항쟁이 진행되고 있으니, 북한은 혼란을 틈타 남침할 생각 말라"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실제로, 1980년 서울의 봄 당시에도 대학생 시위대는 훌라송에 맞추어 '''김일성은 오판말라'''를 외친 바 있다. 1970년대까지 "김일성은 오판말라 반공전선 이상없다"는 용공 혐의를 의식한 시위대가 자주 외치는 구호였다.[19] 조갑제는 5.18 검찰 보고서와 계엄군 지휘관들의 증언들을 토대로 '화려한 휴가'의 도청 앞 집단발포 장면이 과장됐다고 한다. 그러나 '애국가가 흘러나오면서 기립자세를 취하던 시민들'을 향해 '군인들이 앞줄은 무릎쏴 자세로, 뒷줄은 서서쏴 자세로 일제히 사격'하는 장면은 동아일보 김충근 기자와 김영택 기자가 현장에서 직접 확인한 사실들이다.[20] 이 문서는 r445 버전까지만 해도 조갑제가 "5월 20일부터 광주에 머물렀다"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본인 저서 《조갑제의 광주사태》194쪽을 보면, '''"기자는 1980년 5월 23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에서 그 유혈사태를 취재"'''했다고 밝혀두었다.[21] 앞에도 기술되어 있듯이 조갑제는 당시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해서 혼자서 제대로 걷기도 힘든 정도다.[22] 특히 광주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사안에서는 진보측의 의견을 뒷받침한다.[23] 보수논객 조갑제조차 ~는 인정했다, 라는 식으로 자주 인용된다.[24] 출처 책 정규재TV 닥치고 진실 321쪽[25] 2017년 1월 2일자 《주간조선》2439호.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 탄핵이 인용되기 전에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을 두고 쓴 것이다.[26] 그런데 정작 조갑제가 그토록 찬양했던 칭기즈칸은 '''역사상 가장 잔인한 정복자였다'''(...)[27] 다만 조갑제는 박정희 찬양자로 돌아선 이후에는 "민주주의는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며, 징기스칸이라는 월간지를 만들면서 "바보처럼 우직하게 일하다가 천재를 알아보는 눈을 독자들한테 갖게 하겠다."라고 창간사를 밝힐 만큼, 초인 엘리트 독재를 찬양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기본 대전제로 인식해야 한다.[28] 조갑제는 기본적으로 초인-엘리트 사관 숭배자이며, 그런 의미에서 조갑제 같은 강성 극우 인사에게 세월호 침몰 사고로 죽은 300명의 아이들은 국가적 위신 같은 대의보다 덜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29] 조갑제는 2020년 4월 20일에도 여전히 박근혜를 찬양하는 글을 홈피에 올릴만큼, 강성 친박이니 당연히 박근혜 탄핵을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30] 다만 조갑제는 김대중이 북한과 내통한 좌익 첩자라는 식으로 극렬히 비난한 책을 써냈을 만큼, 엄연히 반 김대중 성향을 띈 인물이니 결코 김대중에 우호적인 인물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31] 그런데 정작 조갑제 본인이나 월간조선에는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 王家의 후손이다", "1300년 동안 숨겨진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 "칭기즈칸 선조(先祖) '황금항아리'는 발해(渤海) 대야발의 후손" "대한제국의 한은 칭기스칸의 칸"이라는 식으로 작성된 '원초적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내용의 기사들이 넘쳐났다(...) 애초에 조갑제 본인부터가 "한국인은 몽골족 등 북방 유목민족의 후손이다."라는 식의 원초적 민족주의가 담긴 주장을 가장 적극적으로 오랫동안 공개적으로 설파한 사람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그런 조갑제 본인이 민족주의를 부정적으로 보는 일 자체가 일종의 셀프 디스인 셈이다. 사실 한국인이 몽골 계통의 민족이라는 설부터가 오늘날에 와서는 그다지 신빙성이 없다는 쪽으로 학계에서 결론이 나오고 있다. 만약 조갑제 본인이 정말로 원초적 민족주의를 부정적으로 본다면, 본인이 옛날부터 열심히 주장했던 "한국인은 몽골족 등 북방 유목민족의 후손이다."라는 설 자체를 스스로 비판해야 옳다.[32] 덤으로 그 무렵에는 북한에서 《조선일보》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이름부터 '조선'이 들어가고 논조도 당시에는 결코 親정부적이지만은 않았으며, 방응모가 북한 출신(평안북도 정주군)이라는 점도 작용했다고 한다.[33] 진보 성향의 경향신문조차 장문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시각을 경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