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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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장교이자 부산시장, 서울시장,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서울시장으로서는 김형민 초대 시장에 이어 두 번째로 젊은 나이(40세)에 취임했다.
현대 서울특별시, 부산광역시 개발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흔히 서울특별시의 3대 관선 시장으로 박정희 정권의 김현옥, 양택식, 구자춘을 꼽는다.[1]
좀 나이가 많이 드신 어르신들에게는 '''원조 불도저 시장''', '''돌격시장'''으로 유명하다.
2. 일생
2.1. 군인 시절까지
1926년 10월 27일 경상남도 진주군(현 진주시)에서 태어나 진주에서 학교를 다녔다.
8.15 광복 후인 1947년 육군사관학교 3기로 남조선국방경비대에 입대,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1960년 육군 제3항만사령관을 역임하였고, 1961년 5.16에 가담하였다.
이듬해인 1962년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2.2. 관료, 정치인, 교육자
1961년 박정희 소장이 5.16 군사정변을 일으킬 당시 소령 [2] 으로서 그에 가담하였고, 박정희가 중앙을 차지할 때에 김현옥은 부산시정을 장악하였다. 그러고 나서 부산에 온 박정희에게 도시 개발 계획 등을 브리핑하고 그의 만족을 사 1962년 경상남도 부산시장에 임명되면서 관료 커리어를 시작한다.
부산시장으로서는, 경상남도 부산시의 직할시 승격을 위하여 새벽 열차까지 타고 서울을 왕래하면서 중앙 부처를 설득하는 등 발품 팔아 노력하였다. 그 결과 국회에서 '부산시 정부 직할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키는 데에 성공하였고, 마침내 1963년 1월 1일 초대 직할시장이 되었다.[3] 부산시장으로서 4년간 근무한 김현옥은 이 때부터 한국 현대사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올리기 시작한다.
불도저 시장 별명을 붙여준 서울시 대규모 개발 정책은 사실 부산시에서 먼저 적용되었던 것으로, 서울만큼은 아니지만 부산시에서도 꽤나 공사를 많이 벌였었다.
1966년 윤치영의 뒤를 이어 서울특별시장에 임명되었다. 전임자 윤치영은 서울의 인구 증가에 대해 강력한 개발 억제 노선을 취하면서 심지어 "지방민들을 이사 못 오게 법령으로 막아서 인구를 억제해야 한다"라고 주장할 정도였다. 이런 발언은 박정희나 그의 정부 인사들을 불편하게 했다.[4] 윤치영은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도움을 줬지만 한편으로는 박정희나 군사정권의 정책 의지와는 맞지 않았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정일권 국무총리를 시장실로 보내서 윤 시장을 무마시켰다. 그후 정중히 경질되어 윤 시장은 다른 자리로 가고 부산시장이던 김현옥이 서울시장으로 오게 되었다.
"불도저"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김현옥은 그 명성(?)답게 취임 다음날부터 숫제 서울의 지도를 바꿔놓을 정도의 대사업을 시작한다.
이 당시 김현옥이 벌여놓은 대공사는
- 세종대로, 명동 지하도 건설 : 북한의 포격에 대비한 방공호를 겸했다. 윤치영의 서울 성장억제책을 사실상 포기한 상황에서 북한의 위협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했고, 특히 박정희는 포병 장교 출신이라 이 부분에 대해 관심이 깊었다고 한다.
- 세운상가 사업 : 종묘앞에서부터 중구 필동까지, 일제가 태평양 전쟁 당시 공습 폭격에 의한 화재 확산을 막으려는 목적으로 뚫어 놓은 거대한 공터가 있었다. 이를 소개공지라고 했는데 이 공터는 6.25 이후 몰려든 피난민들로 인해 거대한 무허가 판자 집창촌이 되어 있었다. 김현옥은 세운상가부터 진양상가까지 모더니즘적 입체 공중도시를 만들려고 계획하였다.
- 강변북로 건설 : 1966년 홍수로 인해 서울시내까지 한강물이 역류하여 하수도가 다 넘쳐서 소동이 벌어지자 제방사업 및 교통난 해소를 위한 강변도로 정비사업을 실시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영등포 인근 제방 안쪽에 이전까지 없던 새로운 택지가 생겨나는 것을 보고 여의도 개발을 추진하게 된다.
- 여의도 개발 : 여의도에 제방(윤중제)을 쌓고 밤섬을 폭파했다. 서울대교도 이때 개통되어 영등포/여의도와 도심을 직통으로 잇게 되었다.
- 고가도로 및 터널 건설 : 1960년대 후반의 서울은 이촌향도 현상으로 밀려드는 상경 인구와 전차, 버스 등이 뒤엉켜 극도로 혼잡한 상태였다. 또한 일본 도쿄의 시부야역과 평양의 건설 등에 자극받아 서울에도 고가도로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이 때 국내 최초의 고가도로인 아현고가도로와 서울역고가도로를 건설하였고, 복개된 청계천 위에는 청계고가도로를 건설하였다. 또한 남산1호터널, 남산2호터널, 삼청터널, 사직터널 등 서울 시내 주요 터널도 이 때 건설되었다. 아현, 서울역, 서소문 고가도로는 청계고가도로와 연결되어 서울을 관통할 예정이었으나 예산부족과 기술부족 등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남산터널의 원안은 1, 2호 터널이 중간에 교차하고 그 안에 약 30~5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방공호시설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 시민아파트 건설사업 : 1960년대 당시만 하더라도 서울에는 무허가 건물이 판을 치고 있었고 지번정리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으며 밀려드는 인구로 주거난이 극에 달해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시민아파트 건설을 추진하였으나 건설 과정에서 비리, 부실공사가 끊이지 않았다. 그 결과 김현옥 시대 최대의 사고인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5] 가 일어났고, 김현옥은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6]
당시 김현옥은 '''돌격'''이라고 커다랗게 써붙인 헬멧을 쓰고 하루종일 현장을 다니면서 직접 공사를 진두지휘해서 사람들에게 돌격시장이라고 불렸다.
시장직 사임 후인 1971년에는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마포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당 노승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 해 10.2 항명 파동의 여파로 경질된 오치성의 뒤를 이어 내무부장관으로 복귀, 1973년까지 있었다. 박정희가 피살된 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관료형 부정축재자로 몰리게 되어 중앙 정계에서는 축출된다.
1981년 5월 경남 양산군(현 부산광역시 기장군)에 있는 장안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뒤 그 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또한 1989년에 중학교 바로 옆에 장안여자고등학교(現장안제일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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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대한민국 제1회 지방 선거에 무소속으로 부산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는데, 169,652표로 민주자유당 문정수 후보, 민주당 노무현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이후 1997년 1월 9일에 기도폐색으로 사망했다. 한 마디로 노인이 감기에 걸려 가래가 끓어 수면 중에 사망한 전형적인 케이스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한 원로 관료는 "서울시장 시절엔 그렇게 불도저처럼 온 동네 길을 뻥뻥 뚫어놓더니 어찌 갈 때는 자기 목의 가래 하나도 못 뚫고 가시는가." 하며 씁쓸한 말을 남겼다고...
밤섬에서 퇴거당한 옛 주민들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악감정이 있던 터라, '''밤섬에 있던 부군당을 박살내서 신벌을 받은 거'''라고 악담을 퍼부었다고 한다. 실제로도 밤섬 부군당제는 밤섬 주민들이 퇴거된 후에도 창전동에 부군당을 다시 세워서 여태까지 제사를 지낼 정도라...
2016년 7월 1일부터 8월 21일까지 경희궁 옆에 위치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불도저시장 김현옥' 특별전을 전시했다. #
3. 선거 이력
[1] 윤치영은 강력한 서울시 개발 억제책을 썼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 시절 재임했지만 대개 서울 3대 시장에서는 빠진다.[2] 당시 육사 5기가 대령, 육사 8기가 중령, 육사 11기가 대위였다.[3] 당시에는 정식으로 '부산직할시' 명칭은 얻지 못하고 단지 경상남도를 떼고 서울처럼 그냥 내무부 직할의 부산시였다. 승격식에서도 부산직할시라고 쓰고 당시 부산 지역 언론 등에서도 비공식적으로는 부산직할시 명칭이 통용되었기는 하였으나 공인된 것은 아니었다. 부산직할시로 정식 개칭된 것은 1981년 4월 4일로, 대구시와 인천시의 직할시 승격 3개월 전이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1963년부터 1981년까지의 이 과도기는 '(정부 직할) 부산시'로 표기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4] 엉뚱하게도 박정희를 비롯한 고급 장교 출신들은 이 발언을 계기로 만약 제2차 한국전쟁이 발생할 경우 인구를 대피시킬 방법을 찾고자 했다. 서울 시민이 많아지는 걸 억제하면서도 신속하게 대피시킬 방법인데, 이때문에 남산 터널, 강남 개발, 다리 건설 등이 이뤄졌다.[5] 이 때 산에다 짓는 것을 의아해했던 간부들이 "왜 산에다 짓습니까?"고 하자 하는 말이, "야 이 새X들아 산에다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거 아냐!"였단다(...)[6] 주거난과 도심재개발에 의한 사고는 이후로도 끊이지 않아서 결국 광주대단지사건이라는 대형 쟁의로 폭발하게 된다. 다만 이것은 후임인 양택식 시장 대의 일.[7] 양택식은 철도청장 출신이었기 때문에 철도 관련 사업에는 자신이 있어서 여의도와 함께 가장 의욕적으로 추진한 것이 서울 지하철 1호선 종로구간 사업이었다고 한다. [8] 마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