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평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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治平要覽. 조선 세종 23년, 1441년에 편찬되어 중종 11년, 1516년에 간행된 중국, 한국의 역사를 다룬 책. 총 150권 150책이나 현존하는 것은 147책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일본 나이카쿠문고(內閣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1441년 당시 왕이었던 세종은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직접 지중추원사 정인지에게 "무릇 정치를 하려면 반드시 전대(前代)의 치란(治亂)의 자취를 보아야 하고, 그 자취를 보려면 오직 사적(史籍)을 상고해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한 후, 후대 정치인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대 사적 중에서 정치의 귀감이 될 사실들을 간추려 책을 편찬할 것을 명령하였고, 이에 세종 27년에 치평요람 150권이 모두 완성되었다.
대제학 정인지의 서문에는 세종의 교시를 그대로 옮겨 놓았다.
이극감의 얘기를 듣고 세조가 치평요람을 살펴본 후 대신들에게 교정 여부를 물어보게 되는데, 이극감은 책이 거칠게 만들어져 있고 송나라 이전까지만 기록되어 있다면서 내용을 수정, 증보하고 연대를 높여 명나라까지도 포함하자고 주장하면서 세조 대에 다시 교정 작업을 거치게 된다. 이후 세조 6년 2월 계축일(2일)에 명나라 사신이 오자 잠시 교정 작업을 중단하기도 했지만 그 외에는 꾸준히 작업이 이루어져 중종 11년에 이르러 모두 간행되었다.
총 150권 150책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주된 내용은 중국 역대 왕조의 흥망에 관한 것이다.
권1부터 권147까지는 중국 역대 왕조의 사적 중에서 국가의 흥폐(興廢), 군신의 사정(邪正), 정교(政敎)의 장부(臧否), 풍속의 오륭(汚隆), 외환(外患), 윤리 등 각 방면에 걸쳐 권징(勸懲)할만한 사실을 담고 있고, 권 147부터 150까지는 국조(國朝)라 하여 우리나라 고려 때까지의 사적 중 귀감이 될만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치평요람이 참고한 서적은 다음과 같다.
등 중국의 경사자집(經史子集) 백 오륙십 종
이 중에 주목되는 것이 《고려사(高麗史)》이다. 《치평요람》이 처음 완성된 세종 당시에 《고려사》는 계속 초고를 가지고 개수를 반복하였다, 문종을 거쳐 단종 2년(1454년)에, 인출된 것이 오늘의 《고려사》이다. 그리고 별도로 종전의 편년체 초고를 가지고 문종 2년(1452년)에 《고려사절요》라는 이름의 다른 책을 만들어 역시 단종 때에 인출하였다.
그런데 이 《치평요람》에 실린 우리나라 역사 사실은 고려 시대의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러면 이 자료들을 어디서 가져온 것일까? 오늘의 《고려사》, 《고려사절요》가 다 완성되기 전이니까 《고려사》는 물론 《고려사절요》에서도 옮겨온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종전의 편년체 초고에서 가져온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까 《치평요람》의 고려 시대 자료들은 《고려사절요》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가 독자적 사료성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치평요람》의 또 다른 귀중한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조보감과 그 성격이 비슷한 책인데 두 책 모두 세종 대에 편찬 명령이 있었고 세조 대에 완수한 것이며, 역사 중 본받을 만한 사적들을 채록하여 수록한 방식이다. 편찬 과정에서도 서로 영향을 받은 책인데 중국과 고려까지의 훈육사적들은 치평요람에 수록하고, 국조보감은 당대 조선조의 핵심 사적들을 수록하면서 두 역사서가 서로를 보완하는 측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교시에도 나오듯, 책의 효용성을 높이기 위해 고금(古今)의 사책(史策)에서 추려내어, 그것을 임금의 정치 교과서적 기능으로 잘 살렸다.
조선 왕조 전기에 있어서는 책이름 그대로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에 관한 구체적 역사 자료로서 왕과 관료들 사이에 매우 중시되고 자주 언급되어 왔었음에 반하여,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부터는 책 자체가 거의 산실되어 조정과 민간 어느 곳에도 제대로 보존된 것이 없었다고 한다. 현재 남은 책에 산실된 부분이 있는 것도 이리하여 몇 차례 왕들의 관심이 표명된 바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복원이 거창한 사역으로 여겨져서 끝내 방치되고 말았던 것 같다.
효종 5년(1654년)에 "요순을 본받으려면 먼저 우리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한다.…… 《치평요람》의 전질을 보유한 자가 있는가를 내가 한번 보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승지 김익희가 "교서관에선 찾을 수 없었고 민간에도 없는데 경상도 영하 몇몇 고을에는 향교나 서원에서 병화를 피한 곳이 있으니 찾을수 있지 않겠습니까?" 라고 했는데 결국 못 찾은 듯하다.
영조 16년(1740년)에도 교서관에 "《치평요람》을 간행하여 바치라."고 영조가 명한 바 있었으나, 그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임을 알았던지 그 뒤 14년이 지난 영조 30년에 "《치평요람》은 옛날 우리 세종께서 편찬하신 것인데 지금 다 산실 되었으니 홍문관과 춘방(春坊)으로 하여금 널리 중외(中外)에 구하여 바치도록 하라."고 하였다. 물론 효종 때와 마찬가지로 소득은 없었던거 같다.(...)
정조는 규장각을 만들어 옛 집현전의 기구를 재현한 듯 많은 전적을 내었는데, 국초의 금속 활자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용비어천가》와 《치평요람》은 다 궁중에서 교정 인쇄한 것으로 ‘비부본(秘府本)’이라고 하였다. 국초의 판본은 모두 정호(精好)하여 보기에 편하였다."라고 하여 《치평요람》 등의 판본이 정호함을 향수처럼 이야기하면서도 한갓 역사 이야기로 돌리고 말았을 뿐, 그 출판은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 같다. 어쨌거나 규장각에 현존하는 판본이 있는 것으로 봐선 산일된 책을 모으는데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던 듯 하다.
국내에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고활자(古活字)인 갑진자본(甲辰字本)이 총 73책, 일본에는 나이카쿠문고(內閣文庫)에 제33권, 제34권, 제86권의 3권이 빠진 총 147책이 보관되어 있다. 그 외 일본 도요문고(東洋文庫)에 총 84책 분량이 있다.
망실된 부분을 제외하고 현존 치평요람에 수록된 훈육 사적들의 기사 숫자는 총 1만 3천 99개 항목이다.
국역본을 공개하는 사이트
아쉽게도 현재 인터넷 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국역본은 치평요람 89권부터 150권으로 전반부를 볼 수 없다. 현재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국역본에서 중국의 역사는 당헌종 10년(815년)부터 원혜종이 대도에서 홍무제에게 쫒겨난 1368년까지의 일을 다루며 국내의 일은 당연히 신라말부터 조선 건국 직전까지 다루고 있다. 그래도 당나라 말기부터 원나라 말기까지 550여년 간의 역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자치통감을 시작으로 송사, 요사, 금사, 원사 등을 채록하였고 그외 다양한 사료를 채택해서 중국 중세사를 국역으로 살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당나라 말부터 오대십국시대까지를 다룬 자치통감 기사가 그대로 국역되어 있어서 자치통감에서 이 시기를 어떻게 서술했는지를 대략적으로 찾아보고 싶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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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治平要覽. 조선 세종 23년, 1441년에 편찬되어 중종 11년, 1516년에 간행된 중국, 한국의 역사를 다룬 책. 총 150권 150책이나 현존하는 것은 147책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일본 나이카쿠문고(內閣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2. 편찬 과정
1441년 당시 왕이었던 세종은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직접 지중추원사 정인지에게 "무릇 정치를 하려면 반드시 전대(前代)의 치란(治亂)의 자취를 보아야 하고, 그 자취를 보려면 오직 사적(史籍)을 상고해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한 후, 후대 정치인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대 사적 중에서 정치의 귀감이 될 사실들을 간추려 책을 편찬할 것을 명령하였고, 이에 세종 27년에 치평요람 150권이 모두 완성되었다.
대제학 정인지의 서문에는 세종의 교시를 그대로 옮겨 놓았다.
하지만 편찬이 완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이유에선지 이후 간행이 되지 못한채 프로젝트가 묶여버렸고 세종실록 27년 3월 계묘일 이후 기록에서도 책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이렇게 하릴없이 붕 떠 있던 것을 다시 찾은게 세조 때였다. 세조 5년 9월 경진일(1일)에 이극감이 '세종 대에 편찬됐던 이러이러한 책이 있는데 전하의 아버님인 세종께서 가뭄 중에도 편찬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편찬되는 과정에서 3품 이하의 문신들에게 세 차례나 자급(資級)을 더해줄 정도로 각별히 신경썼던 것입니다. 그런데 뒤를 이은 분들이 아직까지 간행조차 하지 않았으니 이게 말이 됩니까?' 라고 주장하며 인쇄하자고 발의하면서 다시 책의 존재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무릇 정치를 하려 하면 반드시 전대의 치란의 자취를 살펴봐야 하고, 그 자취를 보려 하면 오직 사책을 상고할 수밖에 없는데, 주대 이래 대대로 사책이 있어 분량이 호대(浩大)하므로 두루 상고할 수가 없다. 내가 송유(宋儒)가 만든 《자경편(自警編)》을 보니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을 절(節)로 나누고 유(類)대로 엮어 간략하면서도 요긴하다. 옛 사람이 만든 책을 그와 같이 즐겁게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일반 사람도 책을 널리 보기 어려운데 하물며 인주가 만기의 여가에 어찌 박람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사책을 상고하여 선악의 권징할만 한 것을 뽑아 책으로 만들어, 내가 보는 데 편리하도록 하고 후세 자손들에게 영원한 가르침이 되게 하라. 우리 동방에 나라가 선 지 유구하니, 그 흥망성쇠를 몰라서 된단 말인가. 아울러 편입하여 너무 복잡하지도 너무 간략하지도 않게 하라."
이극감의 얘기를 듣고 세조가 치평요람을 살펴본 후 대신들에게 교정 여부를 물어보게 되는데, 이극감은 책이 거칠게 만들어져 있고 송나라 이전까지만 기록되어 있다면서 내용을 수정, 증보하고 연대를 높여 명나라까지도 포함하자고 주장하면서 세조 대에 다시 교정 작업을 거치게 된다. 이후 세조 6년 2월 계축일(2일)에 명나라 사신이 오자 잠시 교정 작업을 중단하기도 했지만 그 외에는 꾸준히 작업이 이루어져 중종 11년에 이르러 모두 간행되었다.
3. 구성
총 150권 150책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주된 내용은 중국 역대 왕조의 흥망에 관한 것이다.
권1부터 권147까지는 중국 역대 왕조의 사적 중에서 국가의 흥폐(興廢), 군신의 사정(邪正), 정교(政敎)의 장부(臧否), 풍속의 오륭(汚隆), 외환(外患), 윤리 등 각 방면에 걸쳐 권징(勸懲)할만한 사실을 담고 있고, 권 147부터 150까지는 국조(國朝)라 하여 우리나라 고려 때까지의 사적 중 귀감이 될만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치평요람이 참고한 서적은 다음과 같다.
등 중국의 경사자집(經史子集) 백 오륙십 종
- 《삼국사기(三國史記)》
- 《효행록(孝行錄)》
- 《삼강행실(三綱行實)》
이 중에 주목되는 것이 《고려사(高麗史)》이다. 《치평요람》이 처음 완성된 세종 당시에 《고려사》는 계속 초고를 가지고 개수를 반복하였다, 문종을 거쳐 단종 2년(1454년)에, 인출된 것이 오늘의 《고려사》이다. 그리고 별도로 종전의 편년체 초고를 가지고 문종 2년(1452년)에 《고려사절요》라는 이름의 다른 책을 만들어 역시 단종 때에 인출하였다.
그런데 이 《치평요람》에 실린 우리나라 역사 사실은 고려 시대의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러면 이 자료들을 어디서 가져온 것일까? 오늘의 《고려사》, 《고려사절요》가 다 완성되기 전이니까 《고려사》는 물론 《고려사절요》에서도 옮겨온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종전의 편년체 초고에서 가져온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까 《치평요람》의 고려 시대 자료들은 《고려사절요》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가 독자적 사료성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치평요람》의 또 다른 귀중한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4. 특징
국조보감과 그 성격이 비슷한 책인데 두 책 모두 세종 대에 편찬 명령이 있었고 세조 대에 완수한 것이며, 역사 중 본받을 만한 사적들을 채록하여 수록한 방식이다. 편찬 과정에서도 서로 영향을 받은 책인데 중국과 고려까지의 훈육사적들은 치평요람에 수록하고, 국조보감은 당대 조선조의 핵심 사적들을 수록하면서 두 역사서가 서로를 보완하는 측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교시에도 나오듯, 책의 효용성을 높이기 위해 고금(古今)의 사책(史策)에서 추려내어, 그것을 임금의 정치 교과서적 기능으로 잘 살렸다.
5. 산실
조선 왕조 전기에 있어서는 책이름 그대로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에 관한 구체적 역사 자료로서 왕과 관료들 사이에 매우 중시되고 자주 언급되어 왔었음에 반하여,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부터는 책 자체가 거의 산실되어 조정과 민간 어느 곳에도 제대로 보존된 것이 없었다고 한다. 현재 남은 책에 산실된 부분이 있는 것도 이리하여 몇 차례 왕들의 관심이 표명된 바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복원이 거창한 사역으로 여겨져서 끝내 방치되고 말았던 것 같다.
효종 5년(1654년)에 "요순을 본받으려면 먼저 우리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한다.…… 《치평요람》의 전질을 보유한 자가 있는가를 내가 한번 보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승지 김익희가 "교서관에선 찾을 수 없었고 민간에도 없는데 경상도 영하 몇몇 고을에는 향교나 서원에서 병화를 피한 곳이 있으니 찾을수 있지 않겠습니까?" 라고 했는데 결국 못 찾은 듯하다.
영조 16년(1740년)에도 교서관에 "《치평요람》을 간행하여 바치라."고 영조가 명한 바 있었으나, 그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임을 알았던지 그 뒤 14년이 지난 영조 30년에 "《치평요람》은 옛날 우리 세종께서 편찬하신 것인데 지금 다 산실 되었으니 홍문관과 춘방(春坊)으로 하여금 널리 중외(中外)에 구하여 바치도록 하라."고 하였다. 물론 효종 때와 마찬가지로 소득은 없었던거 같다.(...)
정조는 규장각을 만들어 옛 집현전의 기구를 재현한 듯 많은 전적을 내었는데, 국초의 금속 활자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용비어천가》와 《치평요람》은 다 궁중에서 교정 인쇄한 것으로 ‘비부본(秘府本)’이라고 하였다. 국초의 판본은 모두 정호(精好)하여 보기에 편하였다."라고 하여 《치평요람》 등의 판본이 정호함을 향수처럼 이야기하면서도 한갓 역사 이야기로 돌리고 말았을 뿐, 그 출판은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 같다. 어쨌거나 규장각에 현존하는 판본이 있는 것으로 봐선 산일된 책을 모으는데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던 듯 하다.
6. 기타
국내에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고활자(古活字)인 갑진자본(甲辰字本)이 총 73책, 일본에는 나이카쿠문고(內閣文庫)에 제33권, 제34권, 제86권의 3권이 빠진 총 147책이 보관되어 있다. 그 외 일본 도요문고(東洋文庫)에 총 84책 분량이 있다.
망실된 부분을 제외하고 현존 치평요람에 수록된 훈육 사적들의 기사 숫자는 총 1만 3천 99개 항목이다.
7. 국역본
국역본을 공개하는 사이트
아쉽게도 현재 인터넷 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국역본은 치평요람 89권부터 150권으로 전반부를 볼 수 없다. 현재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국역본에서 중국의 역사는 당헌종 10년(815년)부터 원혜종이 대도에서 홍무제에게 쫒겨난 1368년까지의 일을 다루며 국내의 일은 당연히 신라말부터 조선 건국 직전까지 다루고 있다. 그래도 당나라 말기부터 원나라 말기까지 550여년 간의 역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자치통감을 시작으로 송사, 요사, 금사, 원사 등을 채록하였고 그외 다양한 사료를 채택해서 중국 중세사를 국역으로 살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당나라 말부터 오대십국시대까지를 다룬 자치통감 기사가 그대로 국역되어 있어서 자치통감에서 이 시기를 어떻게 서술했는지를 대략적으로 찾아보고 싶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