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
1. 소개
브라질의 前 축구인. 선수 시절의 주 포지션은 라이트백이다.
산투스 FC와 플루미넨시, 뉴욕 코스모스 등을 거치며 휘황찬란한 커리어를 쌓았다. 1967년부터 산투스 FC의 주장직을 역임하였으며, 1968년부터는 브라질 국가대표팀의 주장직까지 역임하였다. 1970 멕시코 월드컵 결승전에서 브라질의 네 번째 골을 직접 득점하며 세 번째 우승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했고, 최후의 쥘리메컵을 멋지게 들어올리며 'Capita', 'O Capitão do Tri(세 번째 우승의 주장)'라는 별명을 얻었다. FIFA 20세기 월드팀의 멤버이며, FIFA 100에도 이름을 올린 전설적인 선수이다.
감독으로서는 보타포구 FR을 비롯한 많은 클럽에서 크고 작은 트로피들을 들어올리며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고, 이후 중앙아시아 2개국에서 감독을 맡기도 했다.
2016년 10월 27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2. 국가대표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1960년대 중반~1970년대 초반 세계 제일의 기량을 자랑했던 라이트백이다. 측면 수비수로서 갖추어야 할 기량을 모두 최고 수준으로 갖추고 있었다. 특히, 뛰어난 공격 가담 능력으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 대표팀 선배 니우통 산투스, 자우마 산투스가 선보였던 공격 가담 수준을 발전시켜 가히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의 공격 가담 능력을 보여주었고, 낮은 위치에 있는 윙어와 같이 기능했다. 이러한 그의 플레이는 현대적인 풀백의 시초가 되었다고 평해진다.
가장 돋보였던 것은 후방 및 측면 플레이메이킹 능력이다. 공을 잡고 천천히 패스를 주고받으며 오버래핑하다가 전방을 한번 바라보고는 바로 공격수를 향한 롱패스를 시도하는 것이 주특기였는데, 그 패스 실력이 매우 훌륭해 팀의 주된 공격 루트로 이용되었다. 높은 패스, 낮은 패스 가리지 않고 스피드를 자유자재로 조절해 보낼 수 있었다. 패스를 할 타이밍을 놓치면 본인이 직접 드리블을 해 공간을 만들었다. 기술적인 능력이 매우 훌륭해 상대 선수를 쉽게 제쳤으며, 엄청난 스피드를 가진 선수였기에 순수하게 주력으로만 상대 선수를 따돌리는 경우도 많았다. 기회만 생기면 경기 내내 시도했던 저돌적인 드리블은 그의 최고 장기 중 하나였다. 이러한 플레이를 뒷받침한 것은 그의 무시무시한 지구력이었다.
자주 중앙으로 침투해 강력한 슈팅을 날리기도 했으며, 이를 통한 득점도 많이 기록했다. 이러한 면모가 잘 드러나는 장면은 대표적으로 1970년 월드컵의 마지막 골 장면이 있다. 침착성과 킥 능력이 매우 훌륭했고, 이러한 장점을 살려 클럽에서 세트 피스를 거의 다 본인이 전담했다. 국가대표팀에서도 페널티킥 전담 키커를 담당했다.
집중력 있는 수비능력 또한 그의 장점이였는데, 상대 선수의 패스를 미리 읽어내고 차단하는 능력이 특히 돋보였다. 커버 가능한 범위로 공이 굴러오면 번개같이 뛰어가서 상대팀의 패스를 뻥 차버리거나 아군 진영에 연결해 주는 능력이 발군이었다. 대인 마킹 능력이 뛰어났고 1:1상황에서 돌파를 좀처럼 허용하지 않았다. 필요할 때에는 슬라이딩 태클을 하되 최대한 부드럽게 시도했다.
30대에 접어들고 잦은 부상으로 신체능력이 떨어진 후에는 대부분의 경기에서 센터백으로 출전하였다. 특히 뉴욕 코스모스에서는 아예 센터백 포지션에 눌러앉았다.
아쉬운 점이라면 역대 최강으로 꼽히는 1970년의 브라질 대표팀의 주장이라는 위치를 점했음에도, 역대 최고 수준으로 언급되기 힘들만큼 부상이 잦았다는 것이다. 특히나 그가 제대로 이름을 떨친 70년 월드컵 이후 3년 넘게 잦은 부상에 시달렸고, 이때문에 절정을 달려야한 시기에 국가대표팀과 클럽 활약상 모두 거리를 두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70년 당시 26세의 창창한 나이였음에도 이후 국가대표 커리어는 영 신통치 못했고, 52경기라는 이름값에 비해 꽤 부족한 경기 수를 기록해야만 했다.
4. 지도자 경력
1983년 플라멩구에서 감독직을 처음 수행한다. 그 후 다른 클럽들을 감독을 한다.
2005년 아제르바이잔 대표팀 감독을 마지막으로 축구계를 떠났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 플루미넨시 FC
-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1964, 1975, 1976
- 산투스 FC
- 레코파 수다메리카나: 1968
- 타사 지 프라타: 1968
- 타사 브라지우: 1965
- 토르네이우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1968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965, 1967, 1968, 1969, 1973
- 뉴욕 코스모스
- 북미 축구 리그: 1977, 1978, 1980, 1982
5.2. 개인 수상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70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71
- FIFA 100: 2004
- FIFA 20세기 월드팀: 1998
- FIFA 20세기 남아메리카팀: 1998
- 뉴욕 코스모스 명예의 전당: 2003
-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
- 발롱도르 드림팀 2군: 2020
5.3. 클럽 기록
5.4. 국가대표 기록
무슨 대회에서 어떤 골을 넣었는지 궁금하다면 이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6.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에 대한 말, 말, 말
[image]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다.'''
'''하이디[1]
와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나의 형제같은 존재이자 최고의 친구였다.'''#
'''프란츠 베켄바워'''
'''그는 위대한 선수, 위대한 주장이었다.'''
'''펠레'''
'''그는 단순한 주장이 아니었다. 그는 어디에서든 존재감을 발휘하는, 유일무이한 주장이었다. 그는 단순한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아니었다. 그는 인간이었다. 그의 죽음 이후 우리 모두는 무언가를 잃었다는 느낌이 든다.'''#
'''제르송'''
'''나는 펠레, 프란츠 베켄바워,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를 동료로 둘 기회가 있었습니다. 보스턴에서 에우제비우와 함께하기도 했었네요. 하지만 뉴욕 코스모스에서는 카를루스가 가장 중요한 선수였습니다. 펠레가 왔고, 키날리아와 베켄바워가 연이어 입단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펠레와 함께했던 3년 동안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펠레가 이렇게 말했던 것 같아요. "우리 팀에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를 영입해야 해. 그는 우리 팀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줄 수 있을 거야."[2]
'''
'''셰프 메싱'''
'''나는 공격에 가담하는 풀백들을 좋아하며, 그는 공격형 풀백의 완벽한 예시이다. 1970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그가 터뜨린 골은 너무나도 우아했다. 나는 그가 노쇠했을 때 NASL에서 그를 상대로 뛰었는데, 그는 마치 지금의 카푸처럼 여전히 좋은 기량을 보여주었다. 그는 나의 사랑스러운 친구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조지 베스트''', 2005년에 자신의 역대 베스트 XI를 선정하며
'''몇몇 경기에서 그와 대결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그는 위대한 선수였고 위대한 사람이었다.'''#
'''디에고 마라도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의심의 여지없이 축구 역사상 최고의 라이트백 중 한 명이며, 산투스, 플라멩구, 플루미넨시 등 거치는 팀마다 주장이었고, 펠레, 제르송과 함께 1970년 월드컵 우승을 이끈 리더였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
'''그는 나보다 위대하며, 브라질 역사상 최고의 라이트백이다.'''
'''브라질은 '주장 중의 주장'을 잃었다. 그는 위대한 사람이었으며, 위대한 선수였고, 가정적인 사람이었으며 훌륭한 친구였다. 지구상의 우리는 슬프지만, 하늘에서는 이 축구 천사를 맞이하기 위한 파티를 열고 있으리라 확신한다. 그와 우리의 관계는 환상적이었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와 함께 우리는 모든 것을 조금씩 배웠다. 그는 강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항상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에는 언제나 좋은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그는 공격과 수비에 같은 정도로 참여했다. 엄밀히 말해서, 그는 현대 축구에서 더 큰 가치를 가질 것이다. 1970년에 그가 득점한 브라질의 네 번째 골이 그것을 증명한다. 아이처럼 컵에 키스하고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몸짓까지... 그러므로 그가 라이트백 포지션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존재 중 하나라는 것은 이견의 여지 없는 사실이다. 나와 그는 모두 브라질 국가대표팀을 세계에서 가장 두려운 팀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카푸'''
'''그는 필드 안에서는 리더십의 본보기였고, 필드 밖에서는 나를 항상 도와주던 좋은 친구였습니다. 런던에서 당신을 만났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편히 잠드소서, 캡틴.''' 출처
'''호나우지뉴'''
7. 어록
'''오늘날의 선수들은 과하게 많은 돈을 받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선수들이 경기에 대한 열정을 잃은 이유이다.'''#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른다'''
1966년 월드컵 브라질 국가대표팀 엔트리에서 갑작스럽게 탈락했던 일에 대해 회고하며 한 말#
'''브라질의 모든 사람은 나를 '주장'으로 기억한다.'''
'''월드컵 우승팀의 최연소 주장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8. 여담
대부분의 팀 사진에서 윗줄 왼쪽 끝에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주장이건 아니건 왼쪽 끝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와 반대로, 펠레는 언제나 사진 기준으로 밑줄 오른쪽에서 2~3번째 자리에 앉아서 팀 사진에 찍히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