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르송(1941)
1. 소개
브라질의 축구인. 역대 축구팀 중 최강의 팀으로 거론되는 1970년의 브라질 대표팀의 당당한 일원으로, 왼발 사용에 능해 황금의 왼발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지지-제르송-소크라치스로 이어지는 브라질 플레이메이커 계보의 중심에 위치한 선수이다. 브라질 축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미드필더 중 한 명이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제르송은 브라질의 명문 클럽 CR 플라멩구에서 뛰었다. 지금이야 정교한 패서로 유명하지만 선수생활 초기에는 왕성한 활동량을 보여주는 하드워커 유형의 선수였다. 플라멩구에서 뛰는 동안 제르송은 리우-상파울루 토너먼트 대회에서 우승하고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주립 리그에서도 1위를 하며,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1963년엔 보타포구 FR로 이적, 세계축구사 최고의 윙어로 손꼽히는 '''가린샤''', 브라질 역대 최고의 레프트백 니우통 산투스등이 포진한 팀의 일원이 된다. 이때 보타포구 FR은 축구 황제 펠레가 있는 산투스 FC와 브라질 리그의 쌍벽을 이루며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대표팀 멤버들이 가득 모여 있던 이 시기에, 보타포구는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제 슬슬 30대가 되려고 하는 1969년, 제르송은 상파울루 FC로 이적한다. 이전보다 활동량은 줄었지만 더 노련한 플레이를 갖추게 되어, 누구보다도 영리한 중앙 미드필더가 된다. 그 해 상파울루의 핵심이 되어 리그 우승을 차지한다. 지지의 재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72년, 30대 초반이 된 그는 커리어를 마무리짓는 차 플루미넨시 FC로 이적해 2년을 더 뛰다가 은퇴를 선언 한다. 선수 생활 동안 그는 우승 청부사라고 해도 될 만큼 가는 팀마다 많은 우승을 가져다주었다.
2.2. 국가대표 경력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전 대회 우승국답지 않게 쓴맛을 제대로 본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은, 대회 후 펠레도 떠나고 가린샤도 없는 그런 팀이 된다.[1] 다행스럽게도 1970년 월드컵을 앞둔 시점에 FIFA에서 월드컵 스타들을 보호하기 위해 퇴장과 교체 등 여러 새로운 제도들을 도입하고 다음 대회부터 적용하겠다고 선언하자 악질적인 플레이에 진저리가 나서 떠난 것이었던 펠레는 다시 조국의 대표팀으로 돌아온다. 제르송은 테크닉이 훌륭한 수비형 미드필더 클로도아우두와 함께 중원을 이루어 월드컵을 준비하게 된다.
그리고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이 개막했다. 펠레를 필두로 호베르투 히벨리누, 자이르지뉴, 토스탕 등 막강한 공격진을 보유한 브라질은, 4-4-2포메이션에 맞춰 움직였다. 4-4-2 포메이션의 중앙 미드필더 두 명은 클로도아우두와 제르송이었고 클로도아우두는 수비에 중점을 둔 롤을 맡았고[2] 공격형 미드필더 또는 왼쪽 날개로 나온 히벨리누는 평범한 윙어의 움직임이 아닌 측면 플레이메이커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엄청난 파워의 슈팅, 그리고 갖가지 패스와 엘 라스티코를 보여줬다. 오른쪽 윙어인 자이르지뉴는 1962년의 가린샤 못지않은 포스를 보여주며 많은 득점을 기록했다. 펠레야 뭐 말할 것도 없었으며 그보다 앞선 위치에서 뛴 토스탕도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이런 엄청난 팀을 보유했던 덕에, 1970년의 셀레상은 6전 6승이라는 말도 안 되는 성적을 내며 '''FIFA 월드컵 전대미문의 전승 우승'''을 할 수 있었다.
제르송은 활약을 인정받아, 1970 월드컵 멕시코의 베스트 11팀에 선정되는 동시에 골든볼을 받은 펠레에 이어 대회 '''실버 볼'''을 수상한다.
3. 플레이 스타일
한창 젊었을 적에는 박스 투 박스 중앙 미드필더로 뛰었기에 활동량이 아주 많아 중원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선수였고 득점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는 활동량이 조금 줄긴 했지만 그래도 팀 내에서는 항상 많이 뛰는 편이었으며 수비력도 나쁘지 않았다.
왼발에서 나오는 정교한 패스는 누구도 부정 못할 그의 주 무기였으며, 가끔씩 때리는 중거리슛도 꽤 쓸만한 득점수단이었다. 굉장히 영리하고 템포가 빠른 플레이를 했으며, 브라질 선수답게 뛰어난 개인 기술도 장착하고 있었다. 때문에 공을 빼앗기지 않았으며 이는 곧 제르송이 플레이를 하며 많은 선택지를 가져올 수 있게 했다.
4. 이야깃거리
애연가이다. 틈만 나면 담배를 피워댔다. 심지어 라커룸에서도 피웠다. 1970년 월드컵 당시, 라커룸 어딘가에서 제르송과 펠릭스(당시 브라질의 주전 골키퍼)의 담배 연기가 불어오면 펠레[3] 나 히벨리누 같은 동료들이 기겁을 했다고 한다."펠릭스와 제르송은 하루에 담배 '''마흔''' 개비를 피웠어."
파울루 세자르(1970년 월드컵 브라질 국가대표팀의 로테이션 미드필더. 애칭인 '카주(Caju)'로도 잘 알려져 있다.)
위 영상은 FIFA에서 제르송과 인터뷰를 진행한 영상이다. 시작부터 나오는 제르송의 항변이 참 재미있는 볼거리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70년 월드컵 당시, 매 경기마다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동료들로부터 '앵무새'라는 별명을 얻은 바 있다.'''"우리가 왜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 하는 거지? 이건 그냥 습관이라고."'''
펠레는 훗날 FIFA 100을 뽑았는데, 같은 브라질리언이자 대표팀 동료였음에도 불구하고 제르송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이를 두고 제르송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브라질의 역대 중앙 미드필더를 거론할 때, 일반적으로 파우캉과 엎치락뒷치락하며 보통 지지 다음 가는 실력자로 평가받는다. 비슷한 시대의 선수 중 그와 비슷한 명성을 가졌던 선수로는 요한 네스켄스, 파울 브라이트너 정도를 들 수 있다."나는 펠레의 의견을 존중해. 하지만 이건 동의할 수 없겠는 걸. 플라티니, 지단, 퐁텐은 그렇다 쳐도 나머지 프랑스 11명[4]
보다 내가 아래라고? 하하, 이건 농담이겠군."
[1] 제르송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도 주전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했었지만 팀의 조기 탈락을 막지는 못했다.[2] 클로도아우두는 1958년의 지투와 비슷하고 지지의 플레이메이킹 롤은 제르송이 맡았다.[3] 펠레는 어린 시절의 일로 인해 혐연가에 가깝다.[4] '''티에리 앙리''', '''에릭 칸토나''', '''레몽 코파''', '''장 피에르 파팽''', 파트리크 비에라, 다비드 트레제게, 디디에 데샹, 릴리앙 튀랑, 마르셀 드사이, 로베르 피레스, 마리우스 트레소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