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에고 마라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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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 선수 출신 감독, 축구 경영인.
이탈리아 SSC 나폴리의 세리에 A 2회 우승과 UEFA컵 우승을 이끌며 구단의 전설이 되어 영구결번을 부여받았고, 축구사에 영원히 회자될 국가대항전 단일 대회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1986년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다.
이러한 활약을 인정받아 펠레와 함께 FIFA 세기의 선수에 선정되었고, 아르헨티나에는 그를 숭배하는 '마라도나교'라는 종교가 실제로 존재하며 국가적 영웅으로 인정받는 인물이다.[3]
2. 생애
2.1. 유년기
마라도나는 1960년 10월 30일,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 라누스에서 크로아티아계+원주민 혈통의 아버지와 스페인계+이탈리아계 혈통의 어머니 사이에서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4] 그는 3살때 사촌으로부터 축구공을 선물받았는데 어찌나 축구공을 좋아했는지 누가 자신의 축구공을 훔쳐갈까봐 선물 받은 후 6개월간 꼭 끌어안고 다녔을 정도였다.
그의 부친 돈 디에고는 아르헨티나의 극북동 지역의 코리엔테스 파라냐 델타의 선원이었으며, 가사일을 도우며 돈을 벌던 부인 달마 프랑코와 합치기 위해 코리엔테스 주에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남부 외곽의 판자촌인 비야 피오리토(Villa fiorito)로 이주하였다. 돈 디에고는 빌라 피오리토 지역에 헐거운 벽돌과 금속 벽지로 자신의 집을 지었다. 그 슬럼가는 너무나 폭력적이고 위험해서 경찰들 조차도 상주하지 못하고 매일 버스를 타고 드나드는 지역이었다. 하루는 걸음마를 막 뗀 마라도나가 열려있던 오물통으로 떨어졌다. 그의 삼촌 시릴로는 그를 돕기 위해 "디에기토! 그 똥통에서 머리를 들어라"라고 소리쳤다. 그 표현은 마라도나가 그의 인생에서 힘든 순간일 때 주문과 같이 반복해서 쓰는 표현이 되었다. 이렇게 가난한 가정이었고 위험한 지역에서 돈 디에고는 가족을 위해 새벽 4시에 막노동을 하러 나간 뒤 밤늦게 돌아와 곯아 떨어지기 일쑤였다.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 어머니, 누나들을 제외하면 집안의 장남인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이 무엇이라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택시 문을 열고, 폐기물을 팔고, 궐련 포장을 벗길 때 나오는 호일을 모으면서 돈을 벌었다. 동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하는 전쟁놀이엔 도통 관심이 없었던 그는 다행히 한 분야에서 재능을 발견한다. 바로 축구였다. 그는 친구들과 축구를 하면 언제나 최고의 기량을 보여줬는데 특히 드리블을 통해 골 넣는 것을 좋아했다. 태생부터 공격수로 태어난 것이다.
축구공을 튕기며 재주를 부리는 트래핑을 좋아했던 마라도나는 8살 때 지역 클럽 에스트레야 로하에 입단하였고 온종일 공만 갖고 논다는 빈민가 소년의 소문은 금세 주변으로 퍼져나가며 부에노스 아이레스 전역으로 퍼졌다. 아르헨티나 대표 일간지 중 하나인 <클라인>은 축구 천재의 탄생이라는 기사를 통해 마라도나를 보도했는데, 당시 기자가 실수로 이름을 카라도나로 보도하기도 했다. 이러던 중 그의 재능을 알아본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의 스카우트 프란시스코 코르네효에게 목격되었고,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는 11살에 불과했던 마라도나에게 과감한 투자를 하기로 결심하며 계약하게 된다.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의 유소년팀인 로스 세볼리타스에서 뛰게 된 마라도나는 그곳에서 에이스가 되어 팀의 140경기 무패라는 난공불락의 기록을 세우며 주축이 되었고 1부 리그 경기에서 볼보이로 나와 하프타임 중간 휴식시간에 공으로 묘기를 부리는 마법의 모습을 보여주며 관중들을 즐겁게 했는데, 이런 워밍업은 마라도나의 전매특허가 된다. 훗날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는 호세 페케르만은 이 시절 1군 선수들 모두가 일찌감치 훈련을 종료하고 유소년 팀에 놀러가 마라도나를 구경하던 일을 회상했다. 그야말로 사상 초유의 선수가 나타난 것이다.입단 테스트에는 유독 뛰어난 선수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 중 '''마라도나'''는 유독 튀는 선수였다.
프란시스코 코르네효 (마라도나를 발굴한 아르헨티노스 유스 코치)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는 이런 마라도나에게 경기장 근처인 비야 델 파르크의 작은 아파트를 선물하였고 판잣집에서 연명하던 소년과 소년의 가족들은 꿈처럼 믿기지 않는 현실에 눈물을 흘렸다. 그 광경을 본 마라도나는 축구로 꼭 성공해 가족들과 평생 부유하게 살겠노라고 다짐하게 된다. 그리고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는 마라도나라는 이름을 아르헨티나 전역에 알리는 발판이 된다.
2.2. 선수 경력
2.2.1. 클럽 경력
2.2.2. 국가대표 경력
2.3. 감독 경력
2.3.1. 감독 경력
2.4. 사망
2020년 10월 말 마라도나의 경호원이 코로나19 증세를 보여서 본인 또한 자가격리 중이었는데, 현지 시간으로 11월 3일 두부 외상을 입은 후에 출혈이 생겨 뇌 경막 아래 피가 고이는 경막하혈종으로 수술을 받았다. 이후 11월 11일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교 올리보스의 병원에서 퇴원하였지만, 2020년 11월 25일 심장마비로 인해 자택에서 사망한 것이 확인되었다. 심장마비로 쓰러져 응급 처치를 받았지만 회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5] 향년 60세의 나이였다. 아르헨티나 언론 보도에 따르면, 마라도나의 사망하기 직전까지 살아 있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마라도나의 조카인 조니 에스포시토라고 밝혔다. 마라도나는 아침식사를 먹으면서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으며 식사 직후에 잠이 들었고 다시 깨어나지 못하였다고 한다.[6][7]
2004년, 마라도나는 이와 동일한 심장마비가 한 번 발생한 적이 있었고 이 때 쿠바와 우루과이를 오가면서 대대적인 치료를 받은 끝에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다른 지병이 없었기에 대대적인 치료를 받고 살아날 수 있었지만, 두서없는 사생활과 나태한 건강관리 등으로 이후 그의 몸은 점점 망가지고 있었고 재발한 심장마비에 뇌출혈도 같이 발생하는 바람에 의사들도 손을 쓰지 못한채 세상을 떠난 것이다.
마라도나의 장례는 국장#s-1으로 치러질 것이며 아르헨티나 정부는 26일부터 28일까지 3일간을 국가 애도 기간으로 지정하였고, 아르헨티나의 대통령도 금요일까지 모든 공식일정을 취소하였고 공공기관은 조기를 게양하고 건물에는 아르헨티나의 국기 색깔인 하늘색 조명을 비출 예정이다. 선수 시절 전성기를 누렸던 나폴리에서도 관내 모든 학교들은 레전드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휴교에 들어간다. 시신은 대통령궁인 카사 로사다에 안치하고 국민들의 조문을 받겠다고 했다. 마라도나의 유해를 실은 영구차가 움직이자 국민들이 쏟아져나와 그의 마지막을 배웅해주었고, 일부는 대성통곡하며 영구차를 가로막기도 할 정도였다.[8][9]
세계 각국의 언론들은 마라도나의 죽음을 일제히 대서특필하였고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는 56면으로 구성된 잡지에 무려 23면까지 마라도나 관련 내용을 실었으며 CA 보카 주니어스는 홈구장 에스타디오 알베르토 J. 아르만도의 마라도나가 생전 사용했던 VIP룸의 불을 켜놓으면서 그를 추모했다.[10] 마라도나를 품었던 SSC 나폴리는 팀의 전설적인 대스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나폴리 시장과 홈구장 이름 변경에 대한 논의를 펼쳤고 기존 산 파올로에서 마라도나의 풀네임인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로 바꾸는 것으로 최종 결정하였으며 그의 죽음을 기리며 산 파올로의 불이 켜졌다.[11] . 또한 SSC 나폴리는 AS 로마와의 다음 세리에 A 경기에서 마라도나를 위한 특별한 킷을 입고 경기에 나선다. 축구계가 역대 가장 위대한 축구 아이콘 중 하나인 디에고 마라도나의 사망을 애도하는 가운데 FIFA는 211개 회원 협회에 모든 대회 주최측이 이번 주말 또는 다음 가능한 경우에 모든 축구 경기에서 1분의 묵념을 유지하도록 요청하였다.
마라도나의 죽음이 보도된 이후 수많은 유명인사들과 축구 클럽들이 마라도나를 추모하고 있다.[12] 라이벌 관계인 보카 주니어스와 리버 플레이트의 팬들도 국민 영웅의 죽음에 함께 슬퍼하였고 마라도나의 시신이 안치된 대통령궁에는 현지 시각으로 오전 6시에 조문이 시작 되기도 전에 수많은 축구팬들이 대통령궁 인근에서 장사진을 이루며 3㎞가 넘는 줄이 만들어졌으며, 조문객들은 아르헨티나 국기와 유니폼으로 덮힌 고인의 관을 향해 작별 인사를 건네며 추모했다.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현직 대통령도 관저에서 헬기를 타고 카사 로사다에 도착해 그의 관 곁에서 직접 성호를 그으며 마라도나를 애도했다. 국민 영웅의 마지막길을 함께 하려는 팬들의 열기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공포도 넘어섰고 아르헨티나 정부는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강도 높은 전 국민 격리를 장기간 시행해 왔지만, 마라도나 추모 인파를 막지 않았다.
유족들의 뜻에 따라 정확한 사망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부검이 진행되었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 검찰은 "법의학 경찰이 이날 오후 4시부터 부검을 시작했다"며 범죄나 폭력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어 "부검은 의심할 여지 없이 사망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수행되고 있다"면서도 "현 단계에선 자연적인 원인(심장마비)에 의해 사망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전했다.[14]
마라도나의 시신은 당초 사흘간 대통령궁에 안치될 예정이었지만, 유족의 뜻에 따라 하루 만에 장례 절차가 마무리됐다. 조문 마감 시간이 공지되자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지 못한 축구팬들이 무질서하게 한꺼번에 몰리며 경찰이 조문 인파의 진입을 통제하려하자 성난 팬들이 돌 등을 던졌고, 경찰은 최루탄과 고무탄 등을 동원해 해산을 시도하며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다. 대통령궁은 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조문시간을 저녁 7시까지로 연장하겠다고 밝혔지만 혼란은 계속됐고, 마라도나의 관이 안전상의 이유로 카사 로사다 내부의 다른 장소로 옮겨지기도 했다. 결국 고인의 시신은 7시가 되기 전 운구됐고, 장지는 마라도나의 부모님이 안장된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교의 베야 비스타 공원묘지다.
3. 플레이 스타일
마라도나는 리오넬 메시와 함께 '''역대 최고의 드리블러이자 역대 최고의 플레이메이커이다.'''
마라도나는 축구 선수로서의 모든 것에 능통하였으며, 현역 시절 그의 사진을 보면 작은 키지만 상당한 근육질이며, 몸도 상당히 단단하다. 그러다 보니 상대 선수가 마라도나를 막기 위해 무작정 몸으로 부딪히다가는 오히려 역으로 튕겨나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최전성기를 보낸 80년대는 클래식 No.10 포지션이 가장 큰 힘을 발휘했던 시기였고, 흐름에 따라 기라성같은 공격형 미드필더형 선수들이 필드를 수놓았다. 공격형 미드필더가 경기의 모든 것을 책임지던 시절, 마라도나는 요구하던 모든 것을 홀로 감당하였고 공격형 미드필더가 가지고 있어야 할 모든 능력이 가장 빛나는 별이었다.
3.1. 드리블
축구사에 역대로 손꼽히는 드리블러로 단단하고 근육질의 몸을 가지고 있어 다소 투박한 드리블을 했을거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마라도나의 드리블은 절대 투박하지 않았다. 상대하는 수비수 입장에서 그의 드리블이 버거운 점은 근육질의 단단한 몸을 바탕으로 기술적 측면에서의 드리블링 자체도 뛰어나다보니 몸싸움으로도 잡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볼터치의 가속과 감속이 워낙 변화무쌍하면서도 속도까지 빠르다 보니 도저히 그 수비할 타이밍을 잡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현대보다 컨트롤 하기 어렵던 경기장과 축구공을 가지고 저돌성과 파괴력, 전진력을 이용한 볼운반을 갖춘 드리블은 당시의 전세계 축구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고 당대 정상급 수비수들이 철저히 유린당할 만큼 드리블은 그의 핵심적인 능력이었다.
그를 막기 위해 수많은 수비수들이 집요하게 마라도나의 유니폼이나 팔을 잡아채고 심지어 백태클과 발목을 노리는 태클을 숱하게 시도했지만 마라도나는 그 태클 타이밍을 점프 혹은 개인기로 농락하면서 볼을 지켜내며 전진, 상대 수비진에 균열을 일으키는 압도적인 능력을 과시했다.
실제로 선수시절 마라도나를 상대했던 파올로 말디니는 그는 항상 자신의 움직임을 예측했고 자신은 한발 늦으며 당할 수 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공을 소유하고 있을때 그는 혼자서 경기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선수였고, 1986년 멕시코 월드컵 8강전에서 나온 68미터 드리블 골과 4강전에서 나온 두 번째 골이 대표적이다.
3.2. 플레이메이킹
마라도나는 축구 사상 최고의 드리블러로 평가받지만, 정작 마라도나의 진정한 가치인 플레이메이커로서의 자질도 잊어서는 안 된다. 마라도나는 경기장 전체를 조망하고 경기장 곳곳의 공간에 계속 관여하면서 경기 페이스까지 조절하고 변속하는 플레이메이커로서의 자질 또한 그야말로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마라도나는 시야와 공간 판단력이 엄청난데다 패스의 구질과 타이밍 또한 창의적이고 변칙적이면서도 그 정확도까지 뛰어났다.
그렇기에 드리블을 막으려고 집중마크가 들어오는 순간 곧바로 빈 공간으로 위협적인 패스를 찔러주는 능력까지 겸비했으며, 반대로 수비가 마라도나의 공간을 미리 차단해버리면 압도적인 볼키핑으로 집중마크를 자신에게 유도하며 상대 수비를 분산시키면서 자유자재로 템포와 공간을 주도하는 특출난 플레이메이커였다.
마라도나는 드리블과 슛 능력 외에도 경기 페이스의 변화에 맞춰서 템포 전환과 주도를 하면서 거기에 자신의 플레이를 조절하는 능력이 탁월했기에, 굳이 본인이 드리블로 상대 선수들의 시선을 자신한테 집중시켜 동료 선수들의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 이외에도 정지 상태에서도 왼발만으로도 위협적인 플레이가 수시로 터져나왔다. 그리고 운동량과 운동반경에서도 하프라인 아래부터 2선, 1.5선, 1선까지 너른 움직임을 왕성하게 가져가면서도 플레이의 패턴까지 정형적이지도 않아서 대인방어는 물론이고 지역방어도 거의 불가능했다.[15]
즉 마라도나의 진가는 압도적인 드리블 전진에만 있는 게 아니라 이렇듯 경기 흐름 전체를 읽고 거기에 최선의 플레이로 대응하며 경기를 지배하는 데에 있다. 드리블이든 패스든 정지상태에서의 수비 끌어당기는 공간창출이든, 마라도나는 수시로 변화하는 상황을 읽고 거기에 최적의 판단으로 최고의 플레이를 보여주면서 경기 판세 자체를 바꿔버리는 모습을 위기의 순간이나 승부처에서 매우 빈번하게 보여줬으며, 이것이야말로 상대팀에게 마라도나가 왜 그렇게 무서운 존재인지 입증한다.
이로 인해 나타난 마라도나 상대법 중 하나는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마라도나의 발목을 일부러 노리는 악질적인 견제전술까지 나왔을 정도다. 이렇듯 마라도나는 폭넓은 시야와 창의성, 테크닉을 기반으로 패싱과 연계를 하면서 두 세명 이상의 밀집된 수비도 손쉽게 붕괴시켜 버린다. 또한 그를 막기위해 아리고 사키가 사키이즘(압박축구)을 고안, 탄생시키며 축구라는 종목을 한차례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3.3. 프리킥
마라도나는 또한 위협적인 왼발 프리킥 스페셜리스트로 역대에 손꼽히는 프리키커다. 보통 프리킥은 수차례 반복되는 연습으로 그 진가가 발휘되는게 큰데 그는 재능을 바탕으로 10대부터 프리킥에 능통했다.[16] 대표적으로 보카 주니어스와의 경기에서 나온 프리킥 결승골이 있다.
80년대 당시 지쿠와 함께 양대 프리키커로 축구공 컨트롤이 현대보다 어렵던 시절에 정교하지만 낙차가 아주 크고 빠른 프리킥을 구사했다.
이러한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여 드리블하면서 연계나 공간과 페이스 조절로 팀의 공격 활로를 찾고 템포를 주도하다가도 페널티 박스 근처에서는 일부러 파울을 유도하기도 하면서 얻어낸 프리킥은 직접이든 간접이든 매우 위협적으로 꽂아넣기도 했던 것이다.[17]
3.4. 득점력
게르트 뮐러나 요제프 비찬 등 축구사에 득점으로 이름을 남긴 선수들에 비해서 마라도나의 골기록은 다소 초라해 보일수 있으나 그의 주된 포지션이 공격형 미드필더였음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대이던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시절 무려 5번이나 아르헨티나 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단신임에도 불구하고 헤더 능력이 준수하여 헤더로도 골을 만들어냈고 득점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인 문전 침투와 슛도 최고 수준이었다. 이 때문에 첫 유럽 진출 무대이던 바르셀로나에서는 아예 1선 포워드로도 플레이를 한 기간이 있을 정도였고 간염과 부상으로 고생했지만 경기당 평균 골수가 0.65골에 달했다.
세계적인 스타들이 모이던 당대 세계 최고의 리그였던 세리에 A에서는 득점왕에 올랐고 이탈리아에서 보낸 7시즌 중 5시즌 동안 득점 4위 안에 들어갈 만큼 득점력 또한 당시 최고 수준이었다. 또한 마약으로 인해 쫓겨나듯이 떠났던 마지막 시즌을 제외하고 매번 리그에서 10~20골 언저리를 기록했고 이 기록만을 보고 다른 시대와 비교하여 평가하면 안되는 이유는 당시 세리에 A는 득점이 많이 나지 않던 리그였기 때문이다.[18]
3.5. 단점
단점을 꼽자면, 오른발의 사용 빈도와 정확도 모두 왼발에 턱없이 못 미쳤다는 점이다. 때문에 양발잡이만큼 변칙적인 슈팅 타이밍과 슛팅각도를 잡아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마라도나는 전문 골잡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고 오히려 왼발 편향이라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역대 최고의 드리블 실력과 준수한 득점력을 자랑했다는 사실이 마라도나의 왼발 테크닉이 얼마나 사기적이었는지를 반증한다.
또한 마라도나는 오른발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용하여 상대팀들이 왼쪽 방향의 움직임을 차단하는 것을 센스있게 오른발로 패스하며 득점 기회를 만들어 주는 천재성을 보이기도 했다.
할리우드 액션으로 비판받기도 하였는데, 마라도나는 승리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성격이었고 매번 시합에서 기본으로 2명, 3명, 많게는 5명 이상이 따라붙으면서 온갖 거친 플레이를 당하면서 발로 걷어차이고, 유니폼이 잡아 당겨지고, 공이 아닌 발목을 향한 살인태클의 위협에 시달렸으니 인격자가 아닌 이상 누구든지 화가 날 만도 했다.[19] 이런 상황이니 필연적으로 '매춘부'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할리우드 액션의 달인이 되었을 수 밖에 없었다.
4. 평가
'''펠레와 함께 축구사의 양대산맥'''으로 각종 축구 언론매체들이 선정하는 '''역대 선수 랭킹에서 TOP 3에 거의 고정적으로 포함되는 것으로 증명된다.'''[20] 10대이던 1978년, 바르셀로나의 스카우트가 18살의 마라도나를 보기 위해 직접 아르헨티나로 찾아와 관찰을 하고 작성한 보고서가 있었는데 마치 '''축구의 신'''을 본 느낌이라는 그야말로 극찬의 일색으로 가득했을 뿐만 아니라 1979년 남미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고 그해 발롱도르 수상자였던 케빈 키건을 누르고 구에린 스포르티보 당해 최고의 선수에 뽑혔을만큼 아직 유럽으로 넘어오지 않았던 10대 후반부터[21] '''신성불가침한 영역이었던 펠레,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소환할만큼 압도적인 퍼포먼스와 실력을 내뿜었다.'''
마라도나가 뛰었던 1980년대는 10번 공격형 미드필더, 플레이메이커들이 많았던 공격형 미드필더들의 전성기였다. 당시에 미카엘 라우드루프, 카를로스 발데라마, 게오르게 하지, 한지 뮐러, 얀 쾰레만스, 훌리오 세사르 로메로,[22] 엔조 시포, 알랭 지레스, 리엄 브래디, 카를하인츠 루메니게,[23] 소크라치스, 베른트 슈스터 뿐만 아니라 지쿠, 미셸 플라티니 , 엔조 프란체스콜리, 루드 굴리트[24] 등 내로라 하는 선수들이 80년대를 풍미했다. 마라도나가 대단한 이유는 그 수많은 기라성 같은 플레이메이커들, 10번 유형의 선수들과 비교해서 의심의 여지 없는 '''1인자'''였던 것에 있다. 특히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의 활약으로 "축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 11명이 하는 팀 스포츠지만 우리는 지금 '''축구의 개념을 벗어난 최초의 선수'''를 보고 있다"라는 평가를 들으며 그 정점을 찍었다. 아르헨티나를 FIFA 월드컵 우승으로 이끈 1986년의 마라도나는 '축구 국가대항전 단일 대회 퍼포먼스 면'에서 역대 최고로 거론된다.
또한 지금은 당연시 여기는 지역방어와 압박은 마라도나가 뛰었던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너무나도 생소한 개념이었다. 하지만 그가 당대의 수비 시스템을 붕괴시킴으로 당시 그를 막아야 했던 AC 밀란의 감독 아리고 사키가 개인이 아닌 구조의 정형화를 통한 강력한 압박 수비 전술인 사키이즘을 고안하며 현대 축구의 근간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사키는 '''"압박축구는 마라도나를 견제하기 위해서 만든 전술이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마라도나가 압박 축구에 고전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1988/89 시즌 압박 축구가 탑재된 사키의 AC 밀란[25] 을 상대로 1골1도움을 기록하며 팀에 대승을 선물하고 다음시즌에도 우승 경쟁 상대인 밀란을 상대로 골을 넣으면서 나폴리의 2번째 우승을 선사하는 등 자신을 막기 위해 고안한 사키이즘을 보란듯이 무너뜨리며 그가 왜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는지 증명해보였다.
마라도나는 물론 일개 플레이어로서도 역대 최고의 반열에 놓이는 선수였지만, 동료들을 잘 이용하면서도 이들의 역량을 끌어올리는데 있어 뛰어난 리더라는 점도 언급할 수 있다. 일례로 마라도나는 고작 18살 소년일 때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에서부터 이미 주장을 맡을 정도로 강인한 리더십을 가진 선수였고 단지 강등을 면할 생각만을 가지고 있던 나폴리 동료들을 바꿔내며 우승을 이뤄냈다. 국가대표로서도 당시 영원한 캡틴 파사레야가 있었던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주장이 아니었지만, 선수 1인의 영향력이 가장 강했던 것으로 평가받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주장으로서 팀 곳곳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우승을 이끌었고,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과 1994년 미국 월드컵[26] 에도 계속해서 주장으로서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주장으로서 플레이가 좋든 나쁘든 마라도나는 항상 경기에 관여하였고 팀에 에너지를 공급하였으며 볼을 컨트롤하고 게임을 컨트롤했다. 그리고 플레이가 잘 되지 않을 때에도 그는 항상 열심히 움직였다.
그의 전성기 시절, 우승컵을 들었던 팀인 SSC 나폴리나 아르헨티나의 동료들을 감안해 볼 때, '''축구에서 한 선수가 팀을 어디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가?'''의 한계치를 평가하는 사례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직전 시즌 승점 1점 차이로 강등을 면한 나폴리를 단지 강팀으로만 끝나지 않고 세리에 A와 UEFA컵 우승까지 이끌고 나간 것은 다름아닌 마라도나 단 한 명의 능력이었다. 유독 마라도나의 월드컵 우승이 고평가되는 이유도, 당시 결코 강팀이라 불릴 수 없던 스쿼드를 이끌고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을 한 명의 축구 선수가 하나의 대회를 가장 완벽하게 지배하고 통제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축구라는 종목에 커리어만이 남는다라고 생각한다면 마라도나는 자신과 비교되는 다른 전설적인 선수들에 비해 초라해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그가 사람들의 기억에 남고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고 평가받는 이유는 축구 본연의 위대함을 실현했기 때문이다. 포클랜드 전쟁의 패배와 경제위기에 낙심해 있던 아르헨티나인들에게 압도적인 기량으로 자신들을 굴복시킨 잉글랜드를 드라마틱하게 무너트리며 선사한 월드컵과 가난한 도시라고 지역차별과 멸시를 받던 나폴리인들에게 영광을 안겨다 주며 그는 단순한 축구 선수를 넘어 역사적 영웅이자 투쟁의 화신, 축구의 신으로 보통 사람을 훨씬 뛰어넘는 능력이 있다고 믿어졌고 그는 일반적인 기준에서 다뤄지는 축구 선수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천재였던 게 아니라 '''상징적인 중요성이라는 휘장을 감싼 선수'''였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 CA 보카 주니어스 (1981, 1995~1998)
- FC 바르셀로나 (1982~1984)
- 코파 델 레이: 1982-83
- 코파 데 라리가[28] : 1982-83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983
- SSC 나폴리 (1984~1991)
- 세리에 A: 1986-87, 1989-90
- 코파 이탈리아: 1986-87
-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990
- UEFA컵: 1988-89
5.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명예상: 1996
- 발롱도르 드림팀: 2020
- FIFA 월드컵 골든볼: 1986
- FIFA 월드컵 브론즈볼: 1990
- FIFA 월드컵 실버슈: 1986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86, 1990
- FIFA 월드컵 도움왕: 1986
- FIFA 월드컵 역대 베스트 XI: 1994
- FIFA 월드컵 올타임 드림팀: 2002
- FIFA U-20 월드컵 골든볼: 1979
- FIFA U-20 월드컵 실버슈: 1979
- 세리에 A 득점왕: 1987-88
-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 1978 M, 1979 M, 1979 N, 1980 M, 1980 N[30]
-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 1987-88
-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 1979, 1980
- 남아메리카 올해의 팀: 1985
- 옹즈도르: 1986, 1987
- 옹즈 드 옹즈: 1985, 1986, 1987, 1988, 1989
- 구에린도르: 1984-85
- 구에린 스포르티보 올해의 선수: 1979, 1986
- 레키프 챔피언 중의 챔피언: 1986
- 올림피아 데 오로: 1979, 1986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1986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84, 1987
- 월드 사커 역대 베스트 XI: 2013
- 아르헨티나 올해의 축구 선수: 1979, 1980, 1981, 1986
- FIFA 100: 2004
- FIFA 세기의 선수[31] : 2000
- FIFA 20세기 최고의 골: 2002[32]
- FIFA 20세기 월드팀: 1998
- FIFA 20세기 남아메리카팀: 1998
- 골든풋: 2003
- 올해의 유나이티드 프레스 국제선수상: 1986
- 마르카 레전드: 1999
- IFFHS 레전드: 2016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4
- 아르헨티나 역대 베스트 XI: 2015
- 문도 데포르티보 바르셀로나 역대 베스트 XI: 2007[33]
5.3. 클럽 기록
5.4. 국가대표 기록
6. 라이벌
호사가들이나 대다수 해축팬들이 꼽는 마라도나의 라이벌은 펠레지만 현역시절 마라도나의 라이벌로 꼽힌 선수는 잉글랜드의 케빈 키건,[34] 서독의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프랑스의 미셸 플라티니, 브라질의 지쿠[35] 와 파우캉, 네덜란드의 루드 굴리트와 마르코 판바스턴[36] , 그리고 월드컵과 세리에 A[37] 에서 심심하면 만나서 경쟁했던 로타어 마테우스가 있다.[38] 이 중 본인이 최대 라이벌로 꼽았던 선수는 로타어 마테우스였다.
사실 엄밀히 보면 루메니게, 플라티니, 지쿠는 마라도나보다 약간 전세대로서 전성기가 겹치지 않아서 완전히 라이벌이라고 보긴 좀 어려운 면이 있다. 루메니게, 플라티니, 지쿠가 이미 세계 최고로 꼽히던 1980년대 초반에 마라도나는 아직 20대 초반이었다.[39] 판바스턴, 굴리트, 마테우스는 동시대이지만 전형적인 센터포워드인 판바스턴은 포지션이 달라서 직접적인 라이벌로는 비교되는 빈도가 낮았다.[40]
이래저래 동시대에서는 굴리트와 마테우스가 라이벌로 많이 논해졌으나, 굴리트는 라이벌 포지션은 전성기 2년 정도에 그쳤고, 마테우스는 마라도나보다 몇년 늦은 1980년대 후반에 전성기가 찾아왔지만 엇비슷한 나이인 마라도나와 전성기가 어느 정도 겹치고 2번의 월드컵 결승과 세리에의 우승길목에서 계속 마주쳤기에 라이벌 포지션으로 가장 적합하다는 강한 인상을 줬다. 물론 마라도나의 전성기인 1979년부터 1988년까지는 마테우스는 마라도나의 퍼포먼스에는 감히 비교되지는 못했지만. 그 뒤로 마테우스는 마라도나와 붙으면서 종종 맞대결에서 승리하고 1990 이탈리아 월드컵 결승전에서는 판정승하기도 하면서 발롱도르를 수상하면서 30살에 최고 선수에 등극한다. 반면 마라도나는 그때부터 마약 스캔들로 급속한 몰락이 시작된다.
현재는 자국 후배인 리오넬 메시가 세대를 넘어서는 라이벌이 되려는 조짐이 보이고 있다.[41]
6.1. 메시와의 비교
비교에 앞서 재밌는 점이 있는데, 마라도나와 메시, 마라도나와 펠레의 비교우위 논점이 비슷하다는 점이다. 마라도나의 강점은 클럽이건 국가대표팀이건 비교적 약팀의 소속으로 UEFA 컵과 월드컵을 우승시켰다는 점이다. 대조적으로 펠레가 역대 최고의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며 월드컵을 3회 우승한 점, 그리고 리오넬 메시가 역대 최고 클럽팀 중 하나[42] 로 꼽히는 FC 바르셀로나 소속으로 2회 트레블을 달성한 점과 달리, 마라도나의 강점은 우승후보로 꼽히지도 못하던 팀을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최고의 위치까지 혼자만의 힘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 있다.
아리엘 오르테가, 후안 로만 리켈메, 하비에르 사비올라, 파블로 아이마르, 카를로스 테베스, 세르히오 아궤로 등등 아르헨티나의 수많은 축구신동들은 이후 '포스트 마라도나'라는 기대를 받았으나, 대부분은 마라도나와 축구 포지션 및 스타일도 달랐으며[43] ,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이후 현재까지 이르러서는 리오넬 메시가 '마라도나의 재림'이라는 칭호를 받는 등, 지금까지의 아르헨티나 축구신동 중에서 포스트 마라도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선수로 기대받고 있다.[44] 마라도나 역시도 "그동안 새로운 마라도나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수십 번 반복되었다. 그러나 메시만이 내 수준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믿을 수 없는 재능을 갖고 있는 선수다."라고 하며 메시를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었고 '''나의 마라도나는 메시'''라고 할 정도로, 실제로도 메시를 무척 아낀다. 2010 남아공 월드컵때 감독을 맡은 당시에도 팀의 에이스인 메시를 무척 싸고 돌았고 그후로도 계속 조언과 격려를 해주고 있다. 아르헨티나 현지에서 메시를 여러 이유로 혹독하게 까는 경향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곤 하고, 월드컵 우승이 없는 메시에게 우승으로 증명할 필요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메시는 이런 비교에 대해 "펠레, 마라도나와 비교되는 것은 정말 영광이지만 그들을 뛰어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다. 그저 팀과 나의 발전을 위해 축구를 하고 있다"라고 말했으며 아르헨티나 출신답게 가장 존경하는 선수 역시 마라도나. 물론 역대 최고 역시도 당연히 마라도나라며 존경심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마라도나는 "누군가 나를 능가하게 된다면, 그것은 아르헨티나인이기를 바란다. 그 인물이 메시라면 기꺼이 환영할 것이다"라고 말한바 있으며 "나의 커리어는 이미 끝났지만 메시는 현재 진행형이다, 결국에는 펠레와 나의 반열에 오르게될 것이고 우리는 훗날 역대 최고의 자리를 놓고 서로 비교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도 말한 적 있다.
장지현 위원은 두 선수를 사실상 비교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이는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준 것이 아니라 1980년대의 축구와 현대 축구가 사실상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파고들자면, 1980년대 축구는 그 어느 시기보다 공격형 미드필더의 역할이 두드러지던 시대였다.
마라도나는 개인적인 플레이메이킹 뿐 아니라 드리블링과 연계 능력, 경기 내의 템포 조절, 직접적인 득점력, 수비 가담까지 모든 부분에서 단 한 명의 클래식 공격형 미드필더가 책임을 지는 시대에 나타난 선수였다. 압박이 등장하고 1인 공격형 미드필더가 더 이상 모든 부분을 책임질 수 있는 시대가 지나면서, 플레이메이킹은 후방 플레이메이커와 전방 플레이메이커로 이원화된다. 이러한 후방 플레이메이커의 대표적인 선수는 펩 과르디올라,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 페르난도 레돈도 등이었다. 한편, 후위에 전문적인 수비형 미드필더를 보좌한 플레이메이커도 태동되었는데 이러한 선수의 유형의 대표선수는 지네딘 지단이라 할 수 있다.
마라도나가 메시에 비해 확연하게 우위를 가져가는 분야는 동시대를 비교할 때 원터치 플레이와 패스 스펙트럼의 다양성, 팀원의 움직임을 최대한 살리고 맞춰주는 플레이메이킹, 다채롭고 변칙적인 무브먼트, 수비력, 우월한 근력과 지구력을 바탕으로 한 엄청난 활동량과 활동범위, 몸으로 부딪쳤을때 밀리지 않는 피지컬적 성능이다. 마라도나는 메시처럼 섬세한 플레이를 하진 않았지만 이는 우수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좀 더 역동적으로 전진하는 플레이 스타일상의 차이이다. 또한, 마라도나는 양발잡이는 아니였으나 왼발만으로도 역대 손꼽히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고, 중요한 순간에 오른발로 실수를 범하는 일도 없었다. 당시 중하위권 수준의 팀을 이끌고 빌드업에서 골게터까지 모든 역할에 관여하고 수행해야 하는 진정한 원맨팀에서 마라도나가 세얼간이라는 당대 최고의 미드필더진과 함께한 메시만큼의 득점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메시 역시 FC 바르셀로나라는 현세대 최고의 팀 중 하나에서 축구사의 역사를 써내려가고있지만, 마라도나처럼 중하위권 팀을 이끌고 스쿠데토를 차지하고, UEFA컵을 홀로 우승시키거나 월드컵[45] 을 우승까지 떠먹이는 하드캐리를 하지는 못했다[46] .
반면 메시는 비교적 균등한 양발능력을 활용한 마무리 부문의 전반적인 능력치, 연속 터치로 라스트 패스나 슛팅까지 이어지는 파괴력, 연계나 침투 이후의 문전 파괴력에서 더 우위를 점한다. 왼발 편향으로 킥의 반경이 비교적 좁은 마라도나는 메시만큼 말도 안 되는 타이밍에 슛을 하지 못하며,[47] 라스트 킥의 각도 활용 등에서 메시보다 많이 부족하다. 오프사이드 라인을 깨거나 기계처럼 원투패스를 주고 받는 능력 등에서는 메시보다 떨어진다. 반면 메시는 플레이메이킹에서 마라도나보다 떨어지는데, 이는 포지션 자체가 더 공격적인 메시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또 메시는 마라도나처럼 온 몸을 이용한 패스를 쏘아대지는 않는다. 마라도나의 플레이를 보면, 마라도나는 한 번 공을 잡는 순간에 드리블보다 패스를 먼저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메시는 대개 본인의 압도적인 드리블 및 퍼스트 터치를 바탕으로 탈압박을 끌어낸 후 패스 공간을 만든다. 반면 마라도나는 볼이 오자마자 아웃사이드, 힐, 발바닥, 어깨나 가슴 등등을 가리지 않고 그야말로 온 몸을 이용해 원 터치로 다른 선수에게 넘겨버린 후 다른 곳으로 파고 들어가는 형식의 '곡예', 혹은 프리스타일 트래핑 같은 느낌의 플레이메이킹을 했다. 물론, 그 볼 순환에 있어 중심 플레이어는 마라도나였고 마라도나 개인 기량에 팀 전체가 큰 의존을 했다. 이는 마라도나 시대의 볼만 잡으면 백태클이 들어오는 너무나 폭력적이었던 축구 배경과, 일인 플레이메이커 비중이 절대적이었던 시대에서 자연스레 나타났던 플레이 성향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물론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마라도나가 드리블을 통한 탈압박에 약하다거나 메시가 원터치 플레이를 못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기본적으로 기술에 있어서는 둘 다 정점을 찍었다고 봐야 할 것이며, 축구사에서 메시나 마라도나보다 더 섬세하게 볼을 다룬다고 할만한 사람은 아예 없다고 보아도 좋다.
드리블 비교에서 서술했듯 마라도나의 신체 구조는 보면 메시가 아니라 되려 카를로스 테베스와 유사하다. 그래서 피지컬에 의존한 플레이도 가능하고 거기에 왕성한 활동량까지 지녔으니, 메시가 마라도나급의 하드웨어를 지녔다면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은 아르헨티나가 우승했을 확률이 높다. 이 월드컵 당시 메시는 4강 네덜란드전부터 체력부족을 노골적으로 호소하는 모습이 역력해서 그 이전의 경기들과는 달리 활약이 신통치 않았다.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8강 독일전에서 역시 메시는 체력부족을 호소했다.[48] 심지어 코파 아메리카 센테나리오에서 역시 메시는 칠레전에서 노골적으로 체력 부족을 호소했으며 승부차기에서 체력 부족이 원인이 된 집중력 저하로 인해 약점이었던 페널티 킥에서 또다시 실축을 하고 만다.
결국 시대에 따른 축구의 흐름 변화를 전혀 살피지 않고 메시와 마라도나를 1대1로 득점력이나 패싱력 등으로 비교하며 누가 더 낫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 답이 나올 수 없다. 마라도나와 메시를 비교할 수 있는 부분은 그 위상에 있어서만 가능한데, 그렇다 하더라도 누구 한 쪽의 손을 들어주기는 어렵다. 앞서 언급한 장지현위원은 사실상 두 선수의 위상은 비슷하다고 이야기하였다. 요한 크루이프 역시 두 선수를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우위를 말하는 관계자, 전문가들이 있기는 하나, 두 사람이 갖고 있는 스타일, 장점, 커리어 등에서 어느 쪽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서 갈리는 정도고, 어느 쪽이 선수 가치면에서 총체적으로 우월하다는 식의 얘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마라도나 vs 메시에 대한 비교분석을 한 칼럼.
이 칼럼에서 한 번 더 풀어 설명해 줄 만한 점은 젊은 층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정작 1990년대를 전후해서 공수간격이 가장 좁았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알겠지만 공수간격이 좁을수록 모든 선수들이 더 밀착하고 더 가까운 상태이므로 압박의 강도가 강하다. 더군다나 룰이 거친 플레이를 2010년대보다 훨씬 더 많이 용인했으므로 반칙이 엄청나게 더 거칠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이 시대 미래 축구에 대한 예측은 기술보다는 피지컬에 집중했으며, 아프리카 출신 선수가 대두될 것이며 아프리카 대륙이 축구적으로 더 강해질 것이라는 의견이 대세였다. 즉, 훨씬 더 가까운 곳에서 몸으로 비비고 부딪치고 충돌하는 행위는 1990년대가 훨씬 강도가 높았으며, 조직적인 압박은 2010년대가 더 강하다. 1990년대에는 저런 식의 거친 몸싸움과 더불어 마라도나는 현대 첨단 의학과 관리기법의 수혜를 입지 못한 것도 감안해야 할 시대적 환경이였다.
또한, 득점력 등 공격포인트 부분에서도 1990년을 전후해서 축구가 가장 득점이 덜 나던 시절이라는 것을 무조건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앞서 얘기했듯이 가장 공수간격의 폭이 좁은 상태이기에 선수들이 훨씬 더 달라붙어서 경기할 수밖에 없었고, 거칠기까지 한 데다가 오프사이드 룰 완화, 백태클에 대한 레드카드 규정, 또한 골키퍼는 백패스를 손으로 잡는 것이 가능했던 등[49] 전체적인 축구경기의 평균 득점 차이가 난다.
하지만 앞서 서술한 장지현 위원의 말처럼 시대가 다른 두 선수의 비교에 큰 의미는 두지 않는 것이 좋다.
단순히 플레이스타일을 넘어서는 경우 둘의 차이는 확연하다. 소위 말하는 '깡'이나 '악바리 근성'의 영역에서 메시와 마라도나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마라도나는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서는 손을 포함해서 그야말로 무슨 짓이든 하는 선수였고, 그만큼 지고 있는 경기에서 체념하거나 포기하는 일도 드물었다. 자의식과 자존심이 워낙 강한 캐릭터이니만큼 어떤 수를 써서라도 상대를 이기는 것에 목표를 두는 선수였고, 그렇기에 리더로서의 자질은 마라도나가 메시보다 더 낫다.
6.2. 펠레와의 비교
7. 사건 사고
7.1. 신의 손
7.2. 도핑
앞서 설명했다시피 1994년 미국 월드컵 출전 당시 '''에페드린 양성 반응'''으로 월드컵 도중 귀국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1994년 7월 1일) 경향신문 - 마라도나 약물 양성반응 충격 (1994년 7월 2일) 동아일보 - 월드컵 축구 약물복용 마라도나「축구인생」끝장. 이에 마라도나는 "감기약을 먹은 것일 뿐"[50] 이라며 '''"나는 결코 신께 어긋날 행동을 한 적이 없다."'''라고 주장했지만 당시 마라도나는 도핑 결과 에페드린, 페닐프로판올아민, 슈도에페드린, non-pseudo-ephedrine 그리고 메틸에페드린 이상 5가지의 약물이 검출되었고, 당시 도핑을 담당했던 Michel D'Hooghe[51] 가 "현존하는 치료 목적의 약물중에 5가지의 금지약물이 동시에 사용되는 약물은 없다.[52] "라고 판단해서 월드컵에서 출전 정지를 먹은 것.Diego Maradona, the Argentine superstar with a history of fabled play on the soccer field and drug use off it, was abruptly removed from World Cup play today because he had tested positive for five variants of ephedrine, a stimulant banned by soccer's international governing body.
축구계의 전설적인 인물이자 마약 복용으로 유명한 아르헨티나의 슈퍼스타 디에고 마라도나가, 오늘 월드컵 경기를 앞두고 흥분제 성분이 들어있는 FIFA의 5가지 금지약물에 대한 양성 반응을 보여 퇴출되었다.
뉴욕 타임즈, 1994년 7월 1일 기사.
이후 2011년에 마라도나는 "그론도나 당시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 회장의 지시로 경기 전에 팀 닥터들이 커피에 약물을 타주었다."라고 고백하면서 아르헨티나의 모든 선수가 도핑을 했다고 주장했다.
7.3. 마약
나폴리에서 뛸 때부터 마약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공식적으로 마약 복용이 확인된 것은 1991년으로 코카인 양성 판정을 받아 15개월간 출장 정지 징계를 받았다. 이후에도 마약을 끊지 못했고 1997년 CA 보카 주니어스에서 마지막 선수 생활을 할 때 조차 마약에 빠져 살았다.
이후 우루과이에서 마약 소지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고 2000년, 2004년에 코카인 복용으로 인한 심장 발작 증세로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 2004년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의 도움으로 마약을 끊는데 성공했다.
7.4. 탈세
마라도나는 SSC 나폴리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할 당시 탈세를 심하게 하는 바람에[53] 이후 그가 이탈리아로 방문할 때마다 각종 귀중품을 빼앗겼다. 마라도나가 탈세한 액수가 모두 채워질 때까지 계속 반복될 것이라고 했다. 2009년에는 귀걸이를 빼앗겼다. 경매로 넘어간 귀걸이는 최종적으로 이탈리아/팔레르모 소속의 파브리치오 미콜리에게 한화 4500만원 가량에 낙찰되었다. 미콜리 본인은 귀걸이를 돌려주고 싶다며 마라도나를 만나고 싶어하지만 마라도나는 별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 지금은 가끔 미콜리가 하고 다니는 듯. 경기 중에도 마라도나의 귀걸이를 하고 나오는 모습이 간간히 보인다.
다만 이부분에서는 마라도나가 "이태리 국세청 놈들이 나에게 세금 고지도 안해놓고 탈세했다고 하네?"라고 항의할 만큼, 마라도나 만의 잘못은 아니라는게 세간의 평이다. 왜냐하면 이태리 국세청에서도 이에 대한 반박은 못하고 슬그머니 체납액을 3,800만 유로에서 1,200만 유로로 깎아주었기 때문. 2016년 현재는 약 한화로 600억원 가량 체납액이 남아있다고 한다.
어쨌든 이게 원인이 되어, 나중에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감독이 되어서도 이탈리아에 가질 못하기 때문에 이탈리아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을 제대로 평가할 수가 없었다. 막말로 '''배'''(마라도나가 받는 감독으로서의 급여)보다 '''배꼽'''(이탈리아에 가기만 하면 빼앗기는 세금)이 '''더 크니''' 이게 마라도나가 선수관리를 하는 데에 큰 애로사항으로 돌아오게 된다.
7.5. 기타
- 2013년 10월 14일 FIFA U-17 월드컵이 개최되자 마라도나는 여기서 굉장한 사건을 터뜨리고 만다. 이 마라도나의 발언 한 마디 때문에 온 아르헨티나가 뒤집어졌다.
- 2016년 10월 12일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최한 평화기원 경기에서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과 싸우다 결국 하프타임 도중 안전요원들에게 끌려가는 굴욕을 맛봤다.
- 러시아 모스크바 스파르타크 스타디움에서 2018년 FIFA 러시아 월드컵 D조 조별리그 아르헨티나와 아이슬란드의 경기를 앞두고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한국 관중들을 향해 눈을 찢는 인종차별 제스처를 취해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마라도나는 "나는 월드컵에서 사람들이 어디에서나 뉴스거리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지만, 이 점만은 분명히 하고 싶다"면서 "경기장을 수많은 팬 중에서 나는 멀리서 아르헨티나 유니폼을 입고 우리를 촬영하는 아시아 소년에게 놀랐다. 나는 심지어 아시아인들이 우리를 응원해주는 것이 얼마나 내게 근사하게 보였는지를 말하고 싶었다. 그게 전부다."라고 해명했다. 참고로 남미권은 인종차별에 대한 의식수준이 매우 낮은 걸로 유명하고[54] 그중 특히 마라도나의 조국 아르헨티나는 전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인종차별 국가로 비판을 받는 국가이다. 즉 마라도나도 인종차별의 중대성을 모르고 저런 행동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 인종차별 논란을 빚은 아르헨티나의 러시아 월드컵 조별리그 D조 1차전 아이슬란드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하고 크로아티아전에서 역사에 남을 졸전 끝에 3-0으로 떡실신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는데, 이후 나이지리아와의 3차전에서 그간 침묵하던 메시가 득점에 성공하자 실신할 듯한 표정으로 기쁨을 만끽했다. 이후 페널티 킥을 허용하며 1-1 동점이 되었다가 후반 막판 16강행을 결정짓는 극적인 결승골을 성공시키자 환호하면서 아르헨티나 월드컵 도전사에 길이 남을 희대의 쌍법규#s-2.1를 시전하여 세계인들에게 충격을 선사했다. 월드컵 중계방송 제작진이 마라도나를 비춰주는 순간 마라도나의 기똥찬 두 손가락을 보고는 황급히 선수들에게로 화면을 돌렸을 정도. 참고로, 나이지리아와 아르헨티나는 5대회 연속으로 조별리그에서 만났는데, 2014년 브라질 월드컵때는 서로 정들었는지 매우 훈훈한 분위기속에서 경기를 풀어낸 바 있다.
- 그 외에도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에서 FIFA에게 주의까지 받을 정도로 부적절한 발언이나 언행을 많이 하면서 축구팬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장 자리에 지원한 하비에르 사네티에게 너무 나댄다고 저격했다. 물론 사네티가 마라도나에 비해 실력은 몰라도 인격적으로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위인이기 때문에 역으로 까였다.
- 최근에는 그동안 자신이 총애했던 메시도 “메시는 훌륭한 선수지만 신격화해서는 안된다. 그는 소속팀에선 맹활약을 펼치지만,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선 다른 모습을 보인다. 경기 전에 20번이나 화장실을 가는 선수를 리더로 만들면 안된다. 메시는 동료들과 이야기 하는 것보다 비디오게임을 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가 좋은 모습을 보일 때까지 리더 역할을 맡겨선 안된다.”라고 비난했다.
- 마라도나가 이끌고 있는 멕시코 프로축구 2부 리그팀 도라도스 데 시날로아는 2018년 12월 3일(현지시간) 원정에서 치른 아틀레티코 산 루이스와의 승격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2:4로 패했는데 도라도스는 1, 2차전 합계 스코어 3:4로 1부리그 진출이 좌절됐다.[55] 문제는 경기 이후였다. 멕시코 현지 매체들은 3일 문제의 영상을 공개했다. 영상 속 마라도나는 경기장을 나오는 상황에서 산 루이스 팬들을 향해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이어 주먹질을 시도했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에는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며 분노를 표했다.
8. 개인사 및 사생활
8.1. 가족
마라도나의 혈통은 이주민의 나라 아르헨티나답게 복잡하다. 그는 아르헨티나인이지만 조상은 크로아티아계 갈리시아인으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 달마 살바도라 프랑코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존재로 마라도나는 악동이라는 수식어 답게 수많은 기행을 일으켰지만 어머니 달마 프랑코의 말을 어기는 법은 없었고 코카인에 중독되었던 그가 끊을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의 훈계가 컸다. 형제자매로 4명의 누나와 2명의 남동생, 1명의 여동생이 있다. 남동생들은 둘 다 축구 선수였지만 성공적이지 못했고, 그중에 휴고 마라도나는 선수 시절 이탈리아 세리에 A 아스콜리 칼초에 입단하여 마라도나와 경기에서 맞붙은 적이 있다.
16살에 전처인 클라우디아 비야파녜와 처음 사귀기 시작하였고 당시 비야파녜는 15살이었다. 어머니 달마 살바도라 프랑코가 약간의 질투가 있어서 마라도나는 비야파녜를 살짝 숨겨야 했지만 그녀와 미래를 약속했고 1989년 11월 7일 애인 관계이던 비야파녜와 부에노스 아이레스 루나 파크 스타디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생활은 2003년까지 지속되었고 그 후 이혼하면서 부부 관계는 끝이 났다.
비야파녜와의 사이에서 2녀를 얻었고, 이들 중 차녀 지안니나가 2008년에 아르헨티나의 신성 세르히오 아궤로와 결혼하여 아기를 출산하면서 할아버지가 되었다. 외손주 이름은 벵하민 아궤로이며 2009년생. 그러나 딸과 아궤로는 2012년 별거 상태로 이혼 절차에 들어갔고 결국 이혼했다. 언론에 의해 알려진 바로는 결혼 후에도 이어진 아궤로의 파티 스타일을 지안니나가 견디지 못해서 였다. 마라도나는 아궤로를 비난하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지만 2014 브라질 월드컵에까지 딸과 함께 가서 재결합을 위해 아궤로를 설득하는 부정을 보이기도 했다.
나폴리에서 뛰던 1986년, 누이 마리아의 친구이던 이탈리아 가수 크리스티아나 시나그라와 깊은 관계를 맺고 아들 디에고 시나그라를 얻었다. 혼외자였고 이에 마라도나는 30년간이나 친자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2016년 8월자로 친자임을 인정했다. 훗날 마라도나는 당시 애인 클라우디아를 사랑했지만 자기는 성자가 아니었고 미녀들이 많았다고 밝혔다.
그리고 2013년 2월 13일 36살의 애인 베로니카 오헤다가 득남하여 늦둥이 아들이 하나 더 늘었다. 한마디로 아궤로의 아들이자 마라도나 외손주인 벵하민은 자기보다 4살이나 어린 외삼촌을 갖게 되었다. 이름은 디에고 페르난도 마라도나로 늦둥이 아들이 외손주 벵하민과 메시의 아들 티아고와 함께 대표팀에서 뛰기를 바라고 있다고 전했다. 메시의 아들인 티아고가 축구를 가장 잘 할 것 같고 벵하민이 스트라이커, 그 뒤를 티아고와 페르난도가 받쳐주면 좋을거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거기다가 1996년생 사생아 딸이 하나 더 있는데 이름은 자나 마라도나 사발레인. 그녀의 생모는 자나를 마라도나의 친딸로 인정받게 하기 위해 오래 법정 싸움을 했다고 한다.
더 선에 따르면 직계자녀 5명 외에도 쿠바에 있는 혼외자녀 3명(요아나, 루, 하비엘리토)과 최근까지 소송 중인 2명(라라, 길) 외에도 2명의 혼외자식이 더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마라도나의 자식'을 자청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자 마라도나의 딸 지안니나는 "아버지가 축구팀 하나를 만들 만큼 충분한 자손을 낳았다"며 "앞으로 3명만 더 있으면 11명이 된다"는 농담을 한 적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8.2. 대인 관계
마라도나는 정치적으로도 상당부분 엮인 인물이다. 1990년대 초중반에는 카를로스 메넴[56] 과 상당한 연줄이 있었기 때문에 메넴의 지지자였다. 그러다가 2002년 이후로는 성향이 변했는데, 아르헨티나 정계가 경제위기로 인해 격변기를 맞았고 급진시민연합이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페론당이 여러개의 정당으로 분당되었는데 마라도나는 이중에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창당한 승리를 위한 전선[57] 을 지지하였고 그 이후로 부부 대통령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와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를 지지하였다. 다만 2007년 수출세 인상문제로 시끄러울때 마라도나가 수출세 인상에 대해 네스토르와 크리스티나를 비판한 걸 보면 무조건적인 지지자라기 보다는 깔때는 까는 타입에 가깝기는 하다.
쿠바의 자국 혁명지도자인 피델 카스트로와 각별한 사이였는데 1987년에 쿠바를 방문했을 때 카스트로를 처음 만난 후 친분을 쌓았다. 이들의 우정은 마라도나가 2000년대 초 약물 중독을 치료하려고 쿠바 수도 아바나에 4년간 머무르면서 깊어졌고 마라도나는 카스트로의 사무실에서 축구도 하고 카스트로를 '제2의 아버지'라고 부르며 왼쪽 다리에 카스트로의 얼굴 문신도 새겼으며 카스트로도 녹갈색의 군모로 큼직한 빨간 별이 그려져 있는 '체게바라 모자'를 선물하고 생전 마라도나에 관해 "디에고는 좋은 친구이며 매우 고결한 사람"이라면서 "쿠바와 우정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물질적 이익은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카스트로 사망 후 소식을 전해들은 마라도나는 쿠바로 날아와 장례식에 참석하며 애도를 표했다. 또한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이었던 우고 차베스와도 생전에 매우 친하게 지냈다. 그러나 조지 부시 부자에 대해서는 '''BU卐H'''라고 대놓고 부르며 아돌프 히틀러와 동급으로 취급해 버렸고 2005년 FTA 협상 당시에 반미 시위에 참여했었다.
우고 차베스와의 인연은 마두로 대에도 이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간 마두로 대통령이 유가폭락으로 인한 경제위기속에서 삽질을 많이 벌였고 마라도나도 이를 모르고 있을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기 때문에 대놓고식으로 지지하는 스탠스를 보이지는 않았는데[58] 마두로가 정치적인 승부수로 내놓은 제헌의회 선거가 야권의 보이콧과 함께 여러 남미국가들과 유럽, 미국 등으로부터 사실상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제헌의회 구성후에 군사기지가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내전 얘기까지 나오자 마두로를 강력하게 지지한다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59] 이를 두고 마라도나가 CIA가 남미 정권교체를 유도하고 있다는 음모론에 과도하게 빠져서 맛이 간 것이 아닌가하는 뒷말이 나오고 있는 중이다.[60]
그러던 와중에 버락 오바마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자 대놓고 쌍수를 들며 환영하면서 "나는 부시집안이 망쳐놓은 미국에 대해 오바마가 원상복구 시켜줄 것을 강력하게 확신한다."라고 말하며 오바마를 지지했다. 그렇지만 이후로 가족과 함께 디즈니랜드로 갈려다가 반미 시위 참여 및 우고 차베스와 피델 카스트로와의 관계로 인해 미국 이민관리국으로부터 출입금지를 먹은 경력이 있어서인지 지금은 어떻게 볼지 다소 미지수. 그리고 우파성향의 마크리와도 상당한 인연이 있는데 이건 마크리가 CA 보카 주니어스의 소유주인데다가 마라도나가 CA 보카 주니어스에서 좋은 성적을 내다보니 사이가 나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마크리가 대통령이 되고나서 정리해고와 공공요금 인상 등의 정책을 펴자 이에 적극적으로 반발하며 까기도 했다.
리오넬 메시와는 요즘에는 그다지 좋은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사이가 점점 멀어지는 모양새. 메시의 말로는 2010년 월드컵 이후로 서로간의 연락이나 대화가 완전히 끊겼다는 모양이고, 2017년 메시의 결혼식에도 마라도나는 초대받지 못했다. 그리고 나댄다는 이유로 하비에르 사네티를 저격한 이후 얼마 안 돼 메시를 '경기 전에 화장실 20번이나 가는 놈'이라고 저격해 메시의 사촌이 분노하기도 했다.
후안 로만 리켈메와도 사이가 좋지 않다. 처음에는 리켈메를 중용하지 않았던 바르사를 세계 최악의 클럽이라 불러 리켈메를 두둔할정도로 사이가 좋았었는데 마라도나가 국가대표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에는 트러블이 생겨 리켈메는 2008년에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었다. 이후 빡친 마라도나가 너따위 없이도 잘할 수 있다며 메시에게 등번호 10번을 주고 남아공 월드컵에 나섰으나 8강에서 독일에게 0:4 대패를 당하고 쓸쓸하게 탈락했다. 결국 마라도나가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끝내 화해하지 못했으나 리켈메는 악감정은 잊고 고인이 된 전설에게 가슴 뭉클한 추모 편지를 남기는 것으로 늦게나마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다.
9. 여담
-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61] 에는 마라도나를 신으로 섬기는 종교도 있다고 한다. 마라도나교(Iglesia Maradoniana)라고 하는데, 간단히 이야기 하면 기독교[62] 의 여호와를 영(靈)의 아버지로, 마라도나를 육체(肉體)의 아버지로 여기고 섬기는 종교이다.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영화 '축구의 신: 마라도나(Maradona By Kusturica)'에서 그 전모를 감상할 수 있다. 진짜로. 이들은 자신들의 종교는 가톨릭이지만 마라도나를 성인으로 숭배한다고 한다. 종교보단 가톨릭의 한 교단 비슷한 개념으로 마라도나를 성자로 숭배한다. 종교의 우두머리격인 인물들부터 전통적으로 믿는 신(神)은 천주교지만, 마음의 신(神)은 마라도나라는 신앙고백을 할 정도이다. 참고로 이 종교는 마라도나의 생일을 크리스마스로 기념하고 오순절(성령강림대축일)이라 여기는 날은 위에 나온 멕시코 월드컵 당시의 '신의 손' 사건이 있었던 날이다. 십계명도 있으며 현재 전세계에 약 20만명의 신도가 있다고 한다. 앞면에 DT(diego ten), 뒷면에 등번호 10이 새겨진 예복도 있다고 한다.
- 1979년 청소년 월드컵에서의 마라도나를 본 대한축구협회 송기룡 과장은 당시 마라도나의 모든 플레이에 눈을 뗄수 없었다고 한다.
- 2002년 한일 월드컵 유치 과정에서 주앙 아벨란제와 펠레가 브라질의 우방인 일본의 단독 개최를 지지하자 펠레가 싫은 나머지 어그로를 끌기 위해 대한민국을 지지했다. 마라도나는 2002년 월드컵 유치 활동의 일환으로 축구협회에서 추진한, 보카 주니어스와 한국 대표팀간의 경기(1995년 , 잠실주경기장 개최)에 출전했다. 이 경기는 마라도나가 약물 복용으로 출전 정지 처분을 받은 것이 해제된 후 첫 공식 경기였기 때문에 '마라도나 공식 재기전'으로 셀링(selling) 포인트를 잡아서 홍보했었다.
- 2017 FIFA U-20 월드컵 조추첨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적이 있다. (2017년 3월)
- 명성이 워낙 대단하다보니 '레몬이나 오렌지로 트래핑 연습'을 한다든가 '일부러 공을 차서 골대만 맞추면서 논다'는 등의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는데 실제로 그렇게 연습을 했다. 농담이 아니라, 선수 시절의 마라도나는 식사시간을 빼면 늘상 미친 듯이 공만 차면서 노력하는 연습벌레로도 유명했다. 심지어는 지네딘 지단도 마라도나의 축구실력에 경의를 표했는데, 일설에는 지단이 "내가 배구공으로 간신히 할 수 있는 볼키핑을 마라도나는 탁구공으로 하고 있다."라고 극찬을 했다는 말이 있다.[63]
-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의 주포지션은 공격수가 아니라 미드필더다. 공격력이 매우 뛰어나서 스트라이커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그는 공격형 미드필더에 가까운 선수였다. 그의 골기록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 1995년까지 지속된 국적 제한 때문에 축구계 최고 권위의 개인상인 발롱도르를 받지 못한 선수들을 위해, 발롱도르 수여 주체인 프랑스 풋볼과 FIFA에서 자체적으로 발롱도르 명예상을 수여했는데 역대 수상자는 디에고 마라도나, 펠레가 전부이다. 디에고 마라도나는 1996년에 프랑스 풋볼로부터 발롱도르 명예상을 지급받았다.[64] 또한 2016년 발롱도르를 선정하는 프랑스 풋볼에서 발롱도르 60주년 기념으로 유럽인 이외 선수들이 발롱도르를 받을 수 없었던 1995년 이전 선수들의 수상에 대해 재평가를 했는데 1986, 1990년의 수상자로 이름을 올렸다.[65] 명성에 비해 다소 저조한데 당대에 플라티니, 굴리트, 판바스턴 등 쟁쟁한 라이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 호마리우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세계제일의 "악동" 선수로 명성이 자자했던지라 호마리우처럼 실력만 좋고 멘탈은 썩었다고 생각하는 젊은 세대들이 많은데 절대 그렇지 않았다. 기자들에게 새총을 쏘는 등의 기행이 있었긴 했어도[66] 선은 지켰고 나름대로 선행도 많이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그리고 축구협회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마라도나는 언제나 선수들의 편이었고 절대 축구협회 회장에게 빌붙지 않았다. 나폴리에서 나폴리의 마피아인 카모라들과 사이가 나빴으며, 그들에게 대놓고 비난했던 유일한 인물이다. 당시 카모라들에게 대든다는 것은 정말 죽을 각오를 했어야 했다.
- 또한 서방언론 특히 미국계 언론과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다. 일단 그 인생사, 물고 뜯을 게 많기 때문에 좋은 먹잇감이기도 하지만 남미인으로서 아르헨티나인으로서 주관이 뚜렷한 인물이다. 즉 미국을 몹시 싫어하고 신나게 깐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은 참지 않고 바로바로 내뱉는 성격이다.[67] 체 게바라랑 피델 카스트로를 좋아하는 것이 그 반증이다. 언론 역시 "네 그러세요?"하며 신나게 물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있다.
- 선수 시절에 마약과 관련 있다보니 카모라들이랑 한통속이라는 음모론도 있지만 완전 헛소리다. 당시 카모라의 아이들이랑 찍었다는 사진이 있는데 사실은 카모라들에게 부모를 잃은 아이들과 찍은 것을 카모라들이 그렇게 퍼뜨린 것이다. 그런 아이들을 위하여 재단을 만들어 기부한 것도 유명한 일이다. 괜히 나폴리에서 저렇게 떠받드는 게 아니다라고 기존에 알려져 있었으나, 2019년 국내에도 개봉한 영화 '디에고'가 마라도나의 사생활을 꼼꼼하게 취재해 영화에 반영하면서 카모라와 친분이 있었다는 건 확실한 사실임이 널리 알려졌다. 카모라와 함께한 사진, 영상이 수없이 많다. 이 영화는 마라도나를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면서도 옹호하지는 않는 태도를 잘 유지하고 있는데, 영화에 따르면 마라도나는 처음 카모라의 호의를 대충 받아넘겼고 깊은 친분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코카인에 빠져든 뒤 마약을 구하기 위해 카모라의 영향권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흔한 중독자처럼 카모라의 말에 따르는 신세가 됐다. 오히려 마라도나의 마약 관련 수사에 카모라가 연루되면서 언론 노출을 철저히 막던 그들의 방침에 차질을 빚었을 정도다.
- 1986년 대표팀 동료인 오스발도 아르딜레스의 초정을 받아 토트넘 유니폼을 입고 인테르와의 이벤트성 경기에 출전했다. 당시 마라도나를 볼려고 사람들이 몰려들어 경기가 15분 이상 지연되는 해프닝이 있었다.
- 1984년, 바르셀로나에서 나폴리로 이적한 후, 새 클럽과 FIFA에게 아픈 어린이를 위해 기금을 모으기 위한 친선 경기를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양쪽 모두 그 요청을 거절당하자 마라도나는 그 문제를 자신의 손에 맡기고 모든 것을 스스로 마련하였는데 거대한 경기장에서 경기를 하는 대신, 디에고는 아이의 집으로 왔고 바로 뒷마당에서 축구를 했다. 4,000명의 사람들이 나폴리의 가장 가난한 교외 중 한곳에서 열린 경기를 보기 위해 왔다. 당시 세계 최고의 스타였지만 진흙탕에서 뒹굴며 축구를 하는 것을 보면 순수하게 축구를 사랑했던 사람은 맞는 듯 하다.
- 한번은 친구의 딸이 병에 걸려서 비싼 수술비를 내기가 난감했는데, 그 막대한 수술비를 내준 적도 있다. 그리고 그 친구의 아들이 바로 디에고 포를란으로, 병에 걸렸던 여성은 포를란의 친누나인 알레한드라 포를란이다. 원래 테니스 선수였던 디에고 포를란은 마라도나의 극진한 애정에 감명받아 자신의 진로를 축구선수로 전향했다. 그리고 2011년에 마라도나의 조국을 무너뜨리며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차지한다.
- 10대 부터 펠레, 디 스테파노를 소환할 만큼 엄청난 재능을 지녔지만, 재능만 믿고 혼자서 다 하려드는 우를 범하지 않았고 항상 동료들과의 연계를 잘 활용하며 팀을 위한 플레이를 펼쳤다. 그의 주장 완장은 결코 실력만으로 얻어진 게 아니다.[68][69]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도 주장으로 뛰면서 그리스전과 나이지리아전에 맹활약했다.
- 마라도나는 역으로 감독으로서는 동정심 때문에 문제가 있었다는 말도 있다. 빈민촌 출신인 카를로스 테베스를 자르지 못했는데 후임인 알레한드로 사베야는 테베스를 잘라내고 승승장구했다는 것이 그 근거. 그러나 사베야 재임기의 테베스는 맨체스터 시티 FC에서 트러블을 일으켜 경기도 못 뛰고 있었으니 잘라내는게 당연한 얘기이고, 마라도나 재임기의 테베스는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이며 공격전개, 돌파, 연계까지 완벽하게 수행해 당시 미드필더진[70] 의 창의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맨시티를 이끌고 있었다.
- 파파라치에게는 아주 쿨하게 대응했다. 아무 소리 안 하고 그냥 공기총으로 위협사격을 했다. 이로서 가장 터프하게 파파라치를 상대한 유명인사가 되었다.[71] 이 때문에 파파라치들은 마라도나가 지병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얼씬거리지 않았다.
- 자신과 같은 테크니션에게 들어오는 거친 견제와 파울을 매우 싫어했다. 친선전에서 상대 선수가 계속해서 거친 파울로 자신의 플레이를 끊어대자 경기 후 인터뷰에서 '이럴 거면 왜 나를 부른 것이냐'라고 불만을 토하기도 했었고, 허정무에게 걷어차인 것을 두고두고 기억하고 있는 것도 아마도 이 때문이다. 반면 전설의 드리블 5명 돌파 같은 경우는 "그건 상대 선수들의 페어플레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라며 잉글랜드 선수들을 추켜세우기도 했다.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이 비판받는 이유의 절반 이상을 이 인간 혼자서 차지하고 있다. 당장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지휘봉을 잡았으나 너무 엉망이었고 결국 지역예선에서 볼리비아에게 1-6으로 잡히고 그나마도 칠레가 에콰도르를 쳐잡아서야 겨우 턱걸이로 본선에 오르고 본선에 올라가서는 8강에서 독일한테 아예 0-4로 처발렸다. 더군다나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에서는 아르헨티나를 기껏 응원 나와서 한다는 짓거리라는 게.... 사람들이 아르헨티나 팀을 싫어하는 이유의 대부분이 바로 이 인간의 처신 때문이다. 당장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에도 마라도나에 대한 논란을 서술한 항목이 따로 있을 정도다.
- 전 아내가 돈을 훔쳤다고 고소했는데 액수가 137억원...
- 은퇴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 연간 유니폼 판매량에서 꼬박꼬박 10 위권 안에 개근 중이다.
- 2010년 12월, 고작 22개월 된 외손주 벵하민 아궤로가 범상치 않은 포스를 발휘하며 킥을 하는 영상이 올라오면서 20년 후를 책임질 유망주(...)로 떠오르고 있다. 외할아버지는 마라도나에 아버지는 아궤로여서 과연 마라도나와 아궤로를 있는 축구 천재가 탄생할지 설레발이 오가는 중이다. 풀 네임은 벵하민 레오넬 아궤로 마라도나. [72]
- 만 50살이 되던 2010년에 득남했다. 결국 벵하민 아궤로는 자기보다 어린 외삼촌을 두게 된 셈이다. 그리고 리오넬 메시의 아들 티아고 메시까지 해서 나중에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같은 괴물 3명이 동시에 뛰는 어마무지한 팀이 될 거라는 예측이 있으며 일각에서는 이 세 명의 아이들이 축구선수가 되는 2030 FIFA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이 우승할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있다.
- 앞의 일화들을 보면 마라도나는 나름의 의리는 있는 사람이다. 월드컵이 끝나고 아르헨티나 축구협회에서 마라도나는 그냥 연임시키고 코칭스텝만 경질한다고 하자 그 코칭스텝들의 편에 서서 그래도 안되니까 그들과 운명을 함께 했다. 마라도나는 체 게바라를 존경하며 그의 의지를 본받으려고 애쓰는 모습도 보인다. 정치적으로 반미 성향이 강하고 사생활이 좀 허술해서 그렇지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의리가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다. 당장 앞에 서술되어 있는 디에고 포를란의 누나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 2010 남아공 월드컵 때 아르헨티나 경기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경기 시작 전에 선수들 한 명 한 명한테 볼에다 찐하게 뽀뽀를 해준다. 특히 국대의 에이스이자 본인 후계자인 메시에게 경기 후 격한 애정표현을 퍼붓는 사진들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문화권이 다른 우리가 보기엔 뜨악스럽지만 선수들은 굉장히 영광스럽게 여긴다나. 2010 년에도 현역 시절 발재간은 아직 살아있어서 공이 날아오자 발재간으로 가볍게 툭 받아서 경기장에 돌려주는 센스를 보여줘서 관중들의 박수를 받았다. 이외에 훈련 동영상이 공개된 적이 있는데, 스핀이 잘 안 들어가고 반발력이 심해서 유럽 일류선수들도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던 남아공 월드컵 공인구 자블라니를 너무나 쉽게 가지고 놀면서 골대에 집어넣었다. 역시 명필은 붓을 탓하지 않는 법이다.
연습장에서 훈련중인 아르헨티나 선수들.
마라도나: 자, 다음 경기를 준비해보자. 이렇게 공을 잡고 3명을 제치면 되는거야. 어때 참 쉽지? (묘기를 부리며 3명을 제친다.)
메시: 아, 정말이네. 쉽다-! (다른 선수들도 묘기를 부리며 3명을 제친다.)
마라도나: 그래, 그럼 준비 끝. 남은 시간은 수영장에서 놀자구-!
- 2011년 코파 아메리카 기간 동안 교통사고를 당했으나 다행히 무사했다.
- 2014년 2월 21일, 데일리 미러를 비롯한 영국 매체들은 마라도나가 54세에 아르헨티나 5부리그 소속인 데포르티보 리에스트에서 현역 선수로 복귀한다고 전했다. 마라도나 또한 데포르티보 리에스트의 영입 제의에 동의했고,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에 선수 등록 신청서를 제출할 계획이고 신청서가 통과될 경우, 마라도나는 오는 3월 23일 산 로렌조와의 경기에 데뷔한다고 알려졌지만 측근에 의해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고 마라도나는 이 팀에 명예코치로 임명되면서 1주일간 선수들에게 투쟁심을 불어넣는 역할을 맡게 되면서 프리킥 차는 법 등을 선수들에게 알려주었다.
- 2015년에는 제프 블라터가 이런저런 비리로 FIFA 회장에서 물러날 조짐을 보이자 자기가 FIFA 회장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나섰다. 또 실제로 FIFA 부회장 출마 선언을 했다.
- 실황 월드 사커 퍼펙트 일레븐에서는 선수로서의 황혼기였던 94년 국대 소속으로 나온다(이름은 가명). 만능에 가까운 무시무시한 능력치를 보유했지만 스태미너가 살짝 떨어진다. 시나리오 모드에서는 마라도나가 퇴장당한 상태에서 루마니아를 상대해야 하는데 이는 월드컵 기간 도중 도핑 적발로 퇴출된 것을 고증한 것.
- 프랑스 풋볼 일간지인 So Foot 에서 선정한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선수 TOP30 에서 펠레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또한 영국 매체 '기브미스포츠'는 '역대 최고 대표 선수 톱 10'을 선정하면서 이 부분 최고 선수 1위로 꼽았다.
- 마라도나가 나온 사진을 잘 보면 시계를 양손에 차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자국의 시간을 항상 알기 위해서 한쪽에는 아르헨티나의 시간을, 다른 한쪽에는 그가 현재 있는 곳의 시간을 맞춰 놓는 것이다.
- UEFA 유로 2016 개막 이벤트 경기 행사장에서 펠레와 함께 리오넬 메시에 대한 뒷담화를 하다 딱 걸리는 해프닝이 있었다.
> 마라도나: 정말 사람 좋죠. 하지만 리더가 될 만한 성격은 아니에요.
> 펠레: 아, 알겠어요. 예전의 우리 같지는 않군요.
> 마라도나: 딱 그래요.
- 밴드 오아시스와 한 번 마주친 적이 있다. 리암 갤러거의 말로는 오아시스가 콘서트 일정으로 아르헨티나에 방문해서는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갑자기 가게에 30 명 정도가 왁자지껄 밀려 들어오길래 “뭐 하는 새X야?” 하면서 봤더니 마라도나였다고. 마라도나가 가게 2층으로 일행과 여자를 데리고 올라가길래 통역사를 통해 마라도나에게 한 번 만나볼 수 있는지 부탁했더니 돌아온 대답이 ‘갤러거 형제만 올라와라’. 남은 멤버들의 부러움을 뒤로 한 채 2층으로 올라갔더니 마라도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페트병 뚜껑으로 리프팅을 하고 있었고(...), 기이하면서도 어색한 분위기에 얼른 사진만 찍고 튀려고 했는데 마라도나가 통역에게 무언가를 말했다고 한다. 갤러거 형제가 통역에게 무슨 말을 한 건지 물어봤더니 “여기 있는 여자들 꼬시면 죽여버리겠어”였다.
- 2015년 성형 수술로 인해 얼굴이 바뀌었다. 주름 제거와 입술 보톡스, 턱 성형 등. 남자다운 강인한 이전의 얼굴에서 갑자기 중년 아줌마같은 얼굴이 된 탓에 이후 ‘마마도나’라는 별명이 붙었다. 갑작스러운 성형의 계기는 30살 어린 새 여자친구의 권유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 2018년 여름 29세 연하로 자신의 딸 지안니나와 동갑인 아르헨티나의 여자 축구선수 로시오 올리바와 약혼했다. 마라도나가 로시오에게 결혼 반지를 내밀자 로시오의 어머니는 특이하게도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하지만 같은 해 12월에 결별 소식이 떴다. 동거하던 집에서 쫓겨나는 모양새로 헤어지게 됐는데, 심지어 그 집은 마라도나가 올리바에게 선물로 사준 집이었다.
- 대두다. 당장 위에 사진만 봐도 키에 비해 엄청난 머리통을 자랑하며 심지어 메시와 같이 선 사진에선 메시가 장신으로 느껴질 정도다.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선수를 선정했는데 1980년대 아르헨티나 최고의 선수에 선정되었을 뿐 만 아니라 최고의 선수와 미드필더에 선정되었다.
- 1986년 플라티니와 함께 마약, 부패를 하지 말자는 유니폼을 입고 사진을 찍은 적이 있었다. 지금 둘의 상황과 가운데 펠레를 보면 아이러니한 사진.
- 워낙 전설적인 선수였던 만큼 그가 선수시절 입었던 유니폼은 경매에서 비싼 값에 팔린다. 나폴리 마지막 시즌인 1990/91시즌 AC 피사전에 입었던 원정 유니폼은 토리노 경매에서 1만 2000유로(약 1537만원)에 팔렸다. 이게 고가로 낙찰된 이유는 마라도나의 상징적인 번호인 10번이 아니라 9번이 새겨져 있는데 이유는 이 당시 마라도나는 등번호 10번을 팀 동료였던 지안프랑코 졸라를 클럽의 미래라 생각하고 물려줬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10번 새겨진 파란색 유니폼은 6500만유로(약 832만원)에 낙찰되었다. 또한 1987년 6월 이탈리아전에 입은 유니폼은 코로나19 피해지역 지원을 위해 열린 경매에서 7천300만원이 넘는 비싼 가격에 팔렸다. 마라도나가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잉글랜드와의 8강전에서‘신의 손'골을 넣었을 때 입었던 유니폼은 당시 시합 직후 마라도나와 옷을 교환한 잉글랜드 대표팀 출신 스티브 호지가 보관해왔고 현재는 영국 맨체스터 국립 축구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데 미국 경매회사 골딘옥션은 이 유니폼의 가치를 금전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소장 가치를 200만 달러로 추정하였고 호지는 "내가 100만∼200만 달러(약 11억∼22억 원)를 받고 이 유니폼을 판매한다는 얘기까지 나도는데 터무니없고 무례한 말" 이라고 강조했다.
- 워낙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왔다 보니 그에 대한 영상화도 많이 이루어졌다. 2008년에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축구의 신: 마라도나가 개봉하였고 2019년에는 넷플릭스에서 마라도나가 도라도스 데 시날로아[76] 의 감독직을 맡으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은 다큐멘터리 시날로아의 마라도나: 끝나지 않은 전설이 공개되었다. 또한 다큐멘터리 거장 아시프 카파디아의 <세나: F1의 신화>, <에이미>를 이은 천재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디에고>가 개봉했다. 인물의 성공이나 비극에 초점을 맞춰 마라도나를 우상화하거나 연민을 자아내려 하지 않고 대상을 최대한 다면적으로 조명하면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마라도나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영화다.
- 2020년 5월 19일(한국 시각) 영국 언론 더선에서 '마라도나가 코로나19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줄 것을 호소했다. 그의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말했다'고 보도했다.[77] 또한 마라도나는 자신이 감독을 맡고 있는 힘나시아에 급여 삭감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힘나시아의 가브리엘 페예그리노 회장은 라디오 현지 라디오 방송에서 "마라도나 감독이 급여를 삭감해야 한다면 기꺼이 하겠다는 뜻을 전했다"고 밝혔다.
- 김병지가 유튜브에서 밝히길 마라도나를 실제로 보고 가장 놀란 것은 가슴(흉부) 두께였다고 한다. 과장 없이 한국 선수들의 두 배였다고 한다.
- 2020년 11월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는데 그 조짐은 이미 2004년에 있었다. 이 때 마라도나는 심장마비로 한 번 쓰러졌다. 그 이후 응급치료를 받은 후 쿠바로 가서 심장수술을 받았다. 게다가 관절염이 너무 심해서 인공관절로 이식수술을 고려할 정도로 그의 몸은 2004년에 이미 엉망이었다. 2004년에 마라도나는 쿠바에서 재활 치료를 계속 받았고 2006 FIFA 월드컵에 독일로 가서 열렬히 응원을 할 정도로 건강이 회복되었다. 하지만 마라도나는 방심했고 그렇게 악화된 상태에도 불구하고 몸관리를 거의 하지 않고 방탕하게 살아온 결과 2020년에 뇌출혈 증세를 보였는데 하필이면 이럴때 심장마비가 재발하는 바람에 두 개가 겹쳐서 사망했다.
- 영국 매체 메일 온라인판은 28일(한국시각) 마라도나의 측근이 주장한 바에 따르면 마라도나는 자신의 은행 계좌에 거의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떠났다고 보도했다. 이탈리아에서 세금 체납 소송을 대리했던 변호사도 이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며 "마라도나는 물질을 초월해 살았고 매우 관대했다. 그의 돈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싶으면 그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물어봐라. 그의 주머니에는 100유로가 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라도나가 현금이 부족한 상태로 사망했지만 다른 부동산 등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또다른 분쟁이 임박하고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아르헨티나 언론들에 따르면 마라도나의 부동산과 보석, 고급자동차, 초상권 등을 모두 합치면 최대 1억5000만 파운드(약 2200억원)의 가치가 있다며 유산 상속을 두고 분쟁을 벌일 게 확실시된다고 외신들은 전하고 있다. 영국 대중지 더 선은 자녀들뿐만 아니라 마라도나의 누이 5명 중에 4명도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상속 분쟁에 뛰어들 것으로 내다봤으며 마라도나의 유산을 얻기 위한 경쟁은 전쟁 수준이며 월드컵이 될 것이라 덧붙였다
- 마라도나가 사망한 후 장례를 담당한 상조업체의 외주 직원들이 아르헨티나 소셜 미디어에 관에 누워있는 마라도나의 시신과 찍은 사진을 공개하며 고인에 대한 직업의식과 예우를 지키지 않아 파문이 일고 있다. 이에 아르헨티나의 시민들이 사건의 당사자 페르난데스를 죽이겠다며 살해협박까지 하고 나섰고[78] 특히 유족과 변호사의 분노가 극심하다고 한다. 이 사실이 알려진 후 해당 업체는 해당 직원을 즉시 해고하였고 그는 공개사과를 하며 제발 용서해달라고 호소했다.
- 아르헨티나 수사당국이 마라도나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데에 의료적 과실이 있었는지를 보기 위해 마라도나 주치의 레오폴도 루케의 집과 진료실을 압수 수색했다.
- 한 아르헨티나 팬이 마라도나가 연상된다며 SNS에 올린 달밤 사진이 화제가 되고 있다.
- 코로나로 취소된 2020 발롱도르 대신 '프랑스 풋볼'에서 선정한 발롱도르 드림팀에 예상대로 공격형 미드필더로 선정되었다. 선정 전에 발표한 후보군의 포지션 배분을 보면 레프 야신, 프란츠 베켄바워, 펠레, 마라도나, 로타어 마테우스의 선정은 사실상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으므로 당연한 일이라는 평가다.
10. 마라도나에 대한 말, 말, 말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펠레다. 왜냐하면 디에고 마라도나는 축구의 신이니까.'''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누구냐고 물으면 내놓는 답.
'''모든 아르헨티나인들에게 디에고는 신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진짜로 나폴리에서 성 야누아리오(나폴리 수호 성인)와 마라도나 중 누가 더 유명하냐 물으면 마라도나가 이깁니다.'''
'''나와 비교가 되려면 왼발, 오른발, 머리로 다 골을 넣을 줄 아는 선수여야 한다. 나는 마라도나가 역대 최고 선수 중 한 명이라고 본다. 마라도나가 메시보다 낫냐고? 그렇다. 훨씬 낫다. 이뿐만 아니라 프란츠 베켄바워, 요한 크루이프 또한 훌륭한 선수들이었다.'''
펠레 (브라질 일간지 '폴랴 데 상파울루'와의 인터뷰에서)
'''디에고 마라도나는 아마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였을 것이다.'''
'''디에고 마라도나만큼은 나보다 위. 그는 격이 다르다.'''
'''녀석(디에고 마라도나)에겐 선수로서 전혀 대적할 수 없다.'''
'''현재 전세계의 모든 현역 선수들은 전성기의 디에고 마라도나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그를 제외한 세계 최고의 선수는 로베르토 바조라고 생각한다.'''
'''내가 펠레보다 못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러나, 디에고 마라도나는 다르다. 내가 축구공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그는 오렌지로도 할 수 있다.'''
'''만약 발롱도르가 처음부터 전 세계 모든 선수들을 대상으로 했다면 나의 발롱도르 3연속 수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역사상 최고의 선수다. 마라도나라면 최소한 5번은 수상했을 것이다'''
'''내가 배구공으로 간신히 할 수 있는 볼키핑을 디에고 마라도나는 탁구공으로 하고 있다.'''
'''그와 비교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는 외계인이기 때문에.'''
'''마라도나가 페널티 지점에서 볼을 차서 크로스바에 맞히고, 튕겨나온 볼을 다시 크로스바에 맞히면서 놀고 있던 그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나로선 해낼 도리가 없다.'''
'''나는 펠레의 플레이를 보지 못했지만 그럴 필요도 없다.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디에고 마라도나이다. 내가 백만년을 플레이 해도 마라도나에게 근접하지는 못할 것이다. 어떻게 해도 내가 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는 역대 최고의 선수다.'''
'''마라도나가 우리를 상대로 두번째 골을 넣었을 때는 나조차도 박수를 치고 싶었다. 그런 기분이 든 건 처음이었다. 마라도나는 단연코 역대 최고의 선수다. 완벽한 천재다.'''
'''마라도나는 차원이 다른 주장이자 미드필더였고 엄청난 오라를 내뿜었죠. 저희 세대 선수들은 기억해요. 학생이 된 것처럼 우러러봤죠. 당신(졸라)처럼 실력이 좋은 선수도요. 말도 안 될 정도로 오라를 내뿜었잖아요? 다들 수군거렸죠. '마라도나야, 마라도나가 왔어!' 신을 본 것처럼요.'''
'''나는 1987년에 웸블리에서 열린 영국 1부 리그 올스타 VS 세계 올스타 경기에 참여했었어. 엄청 스타들이 많았지. 지쿠, 플라티니, 푸트레, 마라도나까지. 우리 모두 몸 풀고 있었는데 갑자기 마라도나가 끈이 풀린 축구화를 신더니 볼을 몇 번 툭툭 차다가 있는 힘껏 차올리는거야. 그리고는 공이 떨어지면 또 있는 힘껏 차올리고, 있는 힘껏 차올리고...이걸 12번 반복하더라...진짜 엄청났어. 옆을 보니까 플라티니가 입을 쩍 벌리고 바라보고 있더라. 정말 믿기지가 않더라니까.'''
게리 리네커 (2007년 12월호 포포투 인터뷰)
'''그는 지금까지 존재한 선수 중에 최고의 선수다. 펠레조차도 능가한다. 나는 이탈리아에서 그를 가까이서 지켜봐왔다. 그는 다른 선수들과는 다른 레벨에 있었다. 그가 하는 것의 일부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보지 않고도 볼을 컨트롤 할 수 있었다.'''
'''저에게는 과거에나 현재에도 모두 최고입니다. 당신이 메시와 호날두에 대해 이야기하면 난 이렇게 대답합니다. 메시와 호날두는 드리블을 할 수 있지만 마라도나는 드리블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마라도나는 상대 수비수들을 이겨내기 위해 점프를 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마라도나의 다리를 부러뜨렸죠. 실제로 빌바오의 도살자, 안도니 고이코체아는 마라도나의 발목을 부러뜨렸습니다. 그때 공격수들은 규칙으로 보호받지 못했고, 심판은 저같은 선수들이 완전히 박살나야만 파울을 불었습니다. 운좋게도 오늘날은 다릅니다. 메시와 호날두는 이들을 위해 뛰어줄 팀이 있고, 메시와 호날두는 이 조립 라인에 놀라운 마지막 퍼즐입니다. 반면 마라도나는 혼자였고, 그는 상대 수비수들의 먹잇감이었죠. 만약 당신이 마라도나를 쓰러뜨렸다면 그 자체로 영광스러운 뱃지를 단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펠레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다. 마라도나가 언제나 가장 위대한 선수로 남을 것이다. 그는 1986년 월드컵에서 우승을 했고, 1990년 결승전에서 아깝게 우승을 놓쳤다. 1994년에 출장 금지당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우승했을 것이다. 마라도나와 펠레의 결정적인 차이를 말하자면, 마라도나는 최고의 선수들을 동료로 가지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 팀을 캐리해야만 했다. 만약 마라도나가 없었다면 아르헨티나는 우승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브라질은 펠레가 없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여러번 우승을 차지했을 것이다.'''
'''나는 천재가 아니다. 천재라는 것은 디에고 마라도나 같은 선수를 말하는 거지.'''
'''Q: 리오넬 메시가 당신이 본 가장 위대한 선수인가?'''
'''A: 그는 놀라운 선수다. 하지만 최고는 아니다. 그에게는 월드컵 우승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Q: 상대했던 선수 중 누가 가장 위대한 선수였나?'''
'''A: 쉬운 질문이다. 디에고 마라도나다.'''
'''내가 마라도나에 근접했다고? 그의 수준에 다가갔다거나 어깨를 나란히 했다 같은 비교를 넘어선 지평에 디에고 마라도나가 있다. 그는 축구 그 자체이다.'''
'''메시는 마라도나를 잡지 못한다. 내게 있어 마라도나는 최고였다. 마라도나는 축구를 넘어 아르헨티나 그 자체를 상징한다. 그는 우리들에게 나타난 제대로 된 최초의 선수다. 마라도나는 월드컵에서 우승한 카리스마가 있으며 드문 재능과 상상력을 가졌다.'''
'''메시는 기술적으로 마라도나와 같거나 더 뛰어나지만, 필적할 수 없다. 메시에게는 마라도나의 카리스마가 없다. 마라도나는 경기장을 지휘할 수 있었고, 모두가 그를 지켜볼 수 있게 했다. 나는 마라도나와 경기를 해봤기 때문에, 그가 팀에 어떠한 존재였는지 이야기할 수 있다. 비록 내가 마라도나의 생활 방식을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나에게 마라도나는 가장 위대한 선수이다.'''
'''나와 디에고 마라도나를 비교하는 것은 실례다.'''
'''난 마라도나가 메시보다 더 경쟁력 있는 시간을 보냈다고 믿는다. 그는 언제나 맨마킹을 당한 채 플레이했다. 마라도나는 팀에 많은 것을 가져다줬다. 메시도 마찬가지다. 단, 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에도 크게 공헌했다.'''
'''메시는 정말 위대하다. 하지만 펠레와 디에고 마라도나는 더 대단했다.'''
'''메시와 마라도나? 나의 선택은 디에고 마라도나다..'''
다보르 슈케르 (1998 월드컵 득점왕이자 현재 크로아티아 축구협회 회장)
'''Q: 당신이 생각하는 역대 최고의 선수는?'''
'''A: 디에고 마라도나'''
'''마라도나처럼 축구를 할 수 있는 선수를 저는,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내 프리킥 실력이 그의 발 밑 정도에 근접했을지 모른다. 아니, 그렇게 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를 마크하는 것이 가장 괴로웠다. 그와 같은 선수는 이제 다시 나타나지 않을거야.'''
'''나의 커리어에서 디에고 마라도나만큼 대단한 선수를 만나본 적이 없다. 그는 두 눈을 볼에 고정시키지 않고도 룰렛이나 라보나 킥 같은 고난도 기술을 사용했고, 두 눈으로는 그를 향해 날아오는 백태클을 피하는데에 사용했다. 그 다음은 인테르 시절의 호나우두. 그는 마라도나와 근접해 있었다. 대단한 기백을 보여주었다. 지금의 호나우지뉴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나는 항상 나 스스로를 준수한 수비수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탈리아 세리에A 명예의 전당 시상식에서 마라도나와 내가 나오는 영상을 보고 부끄러웠다. 내가 마라도나에게 끔찍한 파울을 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마라도나를 막을 수 없었다. 그는 내 움직임을 다 읽고 있었고, 나는 매번 한발 늦을 수밖에 없었다. 마라도나는 정말 빨리 공을 컨트롤하고 방향을 바꿨고, 내 경력을 산산조각 냈다. 반칙을 쓰지 않고는 마라도나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영상을 보니 그런 장면이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그에게 사과해야만 한다고 느꼈다. 그는 정말 대단했다.'''
'''챔피언스리그 우승 혹은 발롱도르를 차지했을 때도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월드컵을 우승했을 때 진정한 레전드가 된다. 메시는 마라도나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이번 브라질 월드컵이 필요하다. '''
'''나는 메시를 아주 존중한다. 새로운 세대에서 중 그는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다. 그러나 마라도나는 다른 차원의 선수이다. 당시의 축구는 달랐다. 많은 선수들이 마라도나를 걷어차도 그는 항상 상황을 컨트롤을 했고 또 강력했다. 메시는 최고의 선수지만 마라도나는 다른 세상의 선수다. 나는 마라도나를 그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는다. 나는 펠레의 플레이를 보지 않았지만, 마라도나는 7년 간 매 경기를 지켜봤다. 마라도나는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 아니라 "역사상 가장 최고의 선수"다. '''
'''마라도나는 나폴리 사람들에게 신이다. 마라도나는 역사를 바꾸었다. 80년 동안 우리(SSC 나폴리)는 강등되지 않으려고 싸우며 항상 고통받아왔다. 하지만 그가 우리와 함께한 7 시즌 동안 우리는 두 번의 리그 우승, 한 번의 UEFA컵 우승, 두 번의 이탈리아 컵 우승을 이루었다. 나 또한 마라도나의 팬이었다. 마라도나가 함께 했던 7년 동안의 삶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웠다.'''
'''축구에서 한 사람의 힘으로 경기를 승리로 만들어 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직 그것이 가능한 선수는 디에고 마라도나뿐이다.'''
'''난 축구 역사상 3번째로 뛰어난 선수다. 1위와 2위는 당연히 펠레와 디에고 마라도나다.'''
'''나와 로베르토 바조가 스타#s-2이긴 하지만, 슈퍼스타의 존재는 아니다. 현대 축구에서 슈퍼스타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디에고 마라도나뿐이다.'''
'''사람들이 마라도나, 메시 중 누가 낫냐고 논쟁하는데, 여전히 마라도나가 최고다. 아르헨티나를 위해 그가 한 것(우승) 때문이다.'''
'''메시는 아직 펠레나 마라도나의 체급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Q: 네가 생각하는 역대 최고의 선수 세 명을 말해봐.'''
'''A: 마라도나. 그는 나에게 축구에 대한 열정을 심어 주었어. 그 다음은 Ronaldo, 페노메논'''
'''Q: 브라질리언 Ronaldo 말하는 거지?'''
'''A: 응. 그는 스트라이커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았어.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지단. 음... 지단으로 정할게.(후략)'''[80]
'''마라도나는 유일무이합니다. 그는 역사상 최고입니다. 그의 워밍업을 보는 것만으로도 저는 행복합니다. 그는 자기 앞에서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했습니다.'''
'''디에고 마라도나는 마르코 판바스턴보다 위다. 그가 지금의 시대에서 활약할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디에고 마라도나에게는 언제나 당하고 있었다. 당시의 그는 최고로 빛나고 있었다. 최근의 은퇴시합의 그를 보면서 왠지 울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필드 위에서 그는 마법(Magic)이었다.'''
'''80년대에 그는 최고의 선수였다. 개성, 퀄리티, 스피드, 테크닉 등 모든 면에서. 그는 완벽한 선수였다. 팀 플레이어로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이 대전했던 선수 중 누가 가장 대단했나? 라는 질문에) 가장 대단했던 것은 디에고 마라도나이다. 그는 특별하다. 그 다음은 마르코 판바스턴. 그리고 조금 더 내려와서 미셸 플라티니다.'''
'''마라도나는 훌륭한 기술들과 놀라운 드리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매우 빨랐다. 많은 빠른 선수들은 볼컨트롤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놀라웠다.'''
'''내가 브라질 사람이기 때문에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의 우상은 디에고다. 물론 펠레도 늘 영웅이었지만, 나는 디에고의 플레이에 언제나 경악했다.'''
'''내게는 메시보다는 마라도나가 더 뛰어난 선수였다.'''
'''물론 우리는 메시에게 그 이상을 바라기는 하지만, 그는 마라도나가 아니고 혼자서 월드컵 우승을 이뤄낼 수 없다. 만약 메시가 월드컵 우승을 한다고 해도 마라도나와 같은 경지에 올라설 수 있을까? 사실 그것도 의문스럽다.'''
'''우리는 메시가 마라도나와 비견할 만하다고 평가해왔으나, 아마 그것은 실수였던 것 같다. 마라도나는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선수라고 생각한다.'''
'''마라도나와 메시는 천재성, 플레이면에서 비슷합니다. 차이점은 마라도나 때는 옐로카드를 받기 전까지 60번의 파울도 가능했지만, 메시가 뛰는 지금은 그렇게 했다간 가차 없이 바로 옐로카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천재, 진정한 아티스트,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이다. 그는 혼자만의 능력으로 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혼자만의 능력으로.'''
'''옛날, 바르셀로나 시절의 호나우두가 5, 6인을 제치고 득점하는 것을 보았다. 방금전에도 말한 것처럼 그는 경이적이었다. 호마리우도 발군이었지만, 전성기의 디에고 마라도나가 내가 본 중 최고였지. 초일류의 선수다. 그리고 호나우두가 조금의 차이로 2위다 (웃음).'''
'''메시는 그의 시대에서는 최고이나 역사상 최고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호나우두가 있기 때문 입니다.'''
'''역대 최고의 선수는 디에고 마라도나다. 1986년과 1990년 월드컵을 보며 그를 칭송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에도 리오넬 메시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같이 뛰어난 선수가 있지만, 내가 본 마라도나의 플레이는 축구 역사 전체에서도 없는 것이었다.'''
'''유벤투스가 호날두 때문에 강해질까? 한 선수만으로는 그 어떤 것도 우승할 수는 없지. 심지어 세계 최고의 선수라 할지라도 말이야. 만약에 디에고 마라도나가 아니라면, 혼자서는 그 어떤 것도 우승할 수는 없어.'''
'''바이에른에 살고 있는 나의 오랜 친구들은 모두 펠레의 플레이를 보았고 그가 코스모스와 산투스, 그리고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 언제나 팀을 승리로 이끄는 모습을 보았으며 그의 플레이를 좋아했다. 그러나 마라도나는 좀 더 어려운 환경에서 플레이했다. 이탈리아에서 지내는 동안 마라도나는 나폴리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우리는 이미 팀에 뛰어난 선수가 있다는 것은 알았으나, 그가 혼자 우리를 우승까지 끌고 갈 줄은 몰랐습니다. 마라도나는 너무나도 강력해서, 존재만으로도 경기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걸로 상대팀은 흔들리죠. 상대팀을 위압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1986년이 그에게 가장 위대했던 해입니다.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증명했던 해였죠. 기술적으로 보면, 그는 축구 역사상 가장 완벽한 선수였습니다.'''
'''펠레는 천재였다. 엄청난 킥 능력을 양 발에 가지고 있었으며 가슴에 용수철이 있는 것으로 느껴질 정도로 공을 잘 받았다. 망치로 치는 듯한 헤더 슈팅 능력도 가지고 있었고, 먼 거리에서도 득점했다. 필드 위의 코치였으며 전략가이자 해결사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선수였다. 그러나 공을 가지고 하는 일에서만큼은 마라도나가 더 뛰어났고, 그러므로 기술적인 면에서는 마라도나가 역대 최고라고 본다.'''
호르헤 발다노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 대표팀 동료)
'''물론 메시는 센세이셔널합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는 더 천재적이고 극적인 마라도나가 더 뛰어납니다.'''
카레카 (나폴리 시절 마라도나 동료)
'''볼을 취급하는 컨트롤 기술에선, 내가 처음 본 완벽한 선수였다. 마라도나가 볼을 컨트롤 하면서 달릴 때, 혹은 디펜스를 드리블로 제껴나갈 때, 그것은 마치 볼을 다리에 붙이고 있는 느낌이었지. 그건 첫 합동훈련 때였을 거야. 그가 처음으로 볼을 만진 순간 주위의 선수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모든 선수의 눈이 마라도나의 발밑에 고정되어 있었지. 왜냐고? 그가 펼치는 다양한 테크닉을 실제로 처음 직접 목격했으니까. 그런 선수는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을 거야'''
로보 카라스코 (FC 바르셀로나 시절의 동료)
'''나는 지쿠, 플라티니, 마라도나와 팀메이트였지만, 최고의 선수는?이라고 질문 받으면 예외 없이 마라도나라고 대답한다. 그는 미팅시 10분 20분 내키는 대로 오렌지나 레몬으로 리프팅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우리는 그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씨모 마우로 (나폴리 시절의 동료)
'''지네딘 지단은 세계에서 탑5에 들어가는 대단한 GIOCATORE이지만, 디에고 마라도나는 다른 판타지스타들과는 차원이 다른 유일한 존재. 지단이 멈춰서서 하는 플레이를 그는 톱 스피드에서 정확히 해치워 버린다. 당시 나폴리의 연습에서는 많은 매스컴과 팬#s-2들이 보러 왔었는데, 거기에서 코치가 마라도나를 향해 강렬히 슛팅한 볼을 그는 어깨로 트래핑, 머리 위로 올려서 반대 어깨로 코치에게 돌려 보냈다. 믿어지나? 이런 광경을 마치 일상다반사처럼 볼 수 있었다'''
'''마라도나의 환상적인 기술을 보면 나 자신이 너무 작아졌다. 훈련장에서도 그런 기술들은 본 적이 없었다. 동료들이 본 걸 관중들이 못 봤다는 게 아까울 정도다.'''
프란체스코 로마노 (SSC 나폴리 팀 동료)
'''나는 메시를 좋아한다. 내 아들이 메시 능력의 1%라도 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마라도나는 독보적이다. 그를 뛰어넘을 수 있는 선수는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메시가 세 번 연속으로 월드컵에서 우승하거나 중앙선에서 오버헤드 킥으로 골을 터트려도 마라도나를 넘을 수는 없다.'''
엑토르 엔리케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 대표팀 동료)
'''마라도나는 펠레보다도 뛰어난 천재였습니다.'''
프란시스코 바라요 (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 참가 선수 중 최후의 생존자)
'''지금까지 축구를 40년 넘게 봤지만, 그 마라도나의 골보다 더 뛰어난 골은 보지 못했다. 그때 경기장에 있던 게 특권으로 느껴질 정도다. 그냥 놀랐던 기억밖에 없다. 60야드(68미터)나 되는 거리를 돌파하려면 한 번의 터치 실수도 없어야 하는데, 끔찍한 잔디 상태에서 빠른 속도로 질주하면서 특출난 잉글랜드 수비수들을 간단하게 따돌리던 모습은 믿을 수가 없었다.'''
스티브 호지 (8강 상대였던 잉글랜드 미드필더)
'''축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 11명이 하는 팀 스포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축구의 개념을 벗어난 최초의 선수를 보고 있습니다!'''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8강 잉글랜드전, 신의 손 골 이후 그가 터뜨린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골을 보며 아르헨티나 해설자가 외친 말
'''왜 그가 역사상 최고의 선수인지를 증명하는 골입니다. 슬프지만, 우리 선수들은 그에게 전혀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선수입니다.'''[81]
8강 상대였던 잉글랜드 해설자.
'''1989년 4월, 뮌헨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한 명의 선수가 시합 전에 워밍업을 하고 있었다. 바이에른 뮌헨 팬들 모두가 야유를 퍼붓는 와중에 그는 축구화 끈도 제대로 묶지 않은 상태에서 걸으면서 리프팅을 시작, 몸 전체 부분을 사용하며 볼을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이 다루었다. 그것을 본 팬들은 야유를 멈췄다. 야유를 퍼붓다 멈춘 그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이름은 디에고 마라도나. 적의 팬들까지 포로로 잡을 수 있는 천재는 어쩌면 앞으로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칼 하인츠 빌트 (키커 부편집장)
''''스펙타클'이라고 하면 당연히 마라도나다. 축구공을 그처럼 다룰 수 있는 선수는 동서고금을 통해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안토니오 핀코 (이탈리아 저널리스트)
'''디에고 마라도나 이외의 이름은 떠오르지 않는다. 물론 펠레도 위대했지만 펠레는 수준급의 팀메이트들이 받쳐주고 있었고 또한 전성기 시절 브라질을 떠나 국외에서 플레이한 경험이 없다는 점도 집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이라던가, 평범한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끈 나폴리 시절이라던가. 마라도나는 거의 혼자 힘으로 타이틀을 획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오로지 한 사람으로 인해 스타디움을 꽉 메워지게 할 수 있는 선수도 그 이외에는 없다. 무시무시한 스피드로 세계 정점에 오른 마라도나. 그것과 같은 스피드로 파멸을 향해 내리막 길로 내려간 마라도나. 그저 유감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하비엘 아스칼골타 (레알 마드리드 국제스쿨 교장)
'''나에게 있어서는 그가 세계 축구 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이고 가장 스펙타클한 선수다. 166cm의 작은 체구로 결코 피지컬적으로는 좋은 조건이 아니었지만 마라도나는 신(神)이 선사한 특별한 왼발을 갖고 몇 차례나 기적을 일구어 냈다. 우수한 탤런트들이 모여 있었다고는 할 수 없는 나폴리를 이태리 리그 챔피언 자리에 올려 놓았고,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우승도 거의 그 혼자의 개인기로 이룬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아쉽지만 마라도나의 플레이를 향수(享受)하는 기쁨은 약물 복용에 의해서 돌연 빼앗기고 말았다. 단 그것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도 그 연령(33세)을 생각하면 그의 기술은 특출했으니까.'''
프란시스코 아기랄 (스페인 엘 문도 부편집장)
'''혼자의 힘으로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의 플레이어. 오락성 면으로 보자면 헝가리의 전설 페렌츠 푸스카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위대한 7번” 바비 찰튼, 천재 조지 베스트, 그리고 네덜란드의 영웅 요한 크루이프조차도 마라도나에게 미치지 못한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잉글랜드와의 준준결승전. 하프라인 근방에서 드리블을 개시, DF라인을 뚫고 골네트를 가른 그 장면. 마라도나가 5명을 제친 그 장면은 틀림없는 ‘구극(究極)의 스펙타클’이었다.'''
롭 셰퍼드 (잉글랜드 저널리스트)
''' 축구계의 진정한 천재. 조금은 삐뚤어진 선수였지만, 천재였다. 명백하게 다루기 힘든 신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라도나는 말로서 형용키 어려운 경이로운 느낌을 주고 했다. 심지어는 미학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다. 개인전술이 대단한 선수였을 뿐만 아니라, 팀 스피릿을 갖춘 선수이기도 했다.'''
아달베르토 보르토로티 (이탈리아 저널리스트, 1997년 역대 최고의 선수 10인을 선정하면서)[82]
'''압박 축구를 고안해 낸 것은 디에고 마라도나를 막기 위해서이다.'''
'''메시는 현세대 최고 선수지만 나는 마라도나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그는 스페인, 이탈리아 등 자신이 있던 모든 장소에서 차이를 만들어 냈다'''
'''오렌지 삼총사의 3명이 각기 실력을 발휘하고 나서 그와 처음 동등해진다.'''
'''로베르토 바조, 루드 굴리트, 레이카르트, 프랑코 바레시 등등 많은 선수들이 있었지만 판바스턴이 내가 맡은 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던 선수이다. 그리고 지금껏 봐 온 선수 중에서 가장 대단했던 선수는 디에고 마라도나다. 그는 위대한 선수였다. 그를 영입하려 했지만, 그는 나폴리의 신이 되어 있었다. 두 명의 디에고 마라도나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오렌지 삼총사를 부른 것은, 한 명의 선수로 팀의 승패를 좌우 할 수 있는것은 디에고 마라도나 이외엔 없기 때문이다.'''
'''펠레가 여러 차례 월드컵 제패를 이룩함과 동시에 축구의 범대중화를 이끌며 축구계에 첫번째 혁명을, 요한 크루이프가 토탈 풋볼로서 전술적인 혁신을 일으키며 두번째 혁명을, 지단이 각 대륙의 장점만을 결합시킨 아트 풋볼로서 축구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플레이를 보이며 세번째 혁명을 일으켰다면 마라도나는 경기장에 선 그 자체가 혁명이었다.'''
'''디에고 마라도나라는 기적적인 재능에 맞서기 위해서는 누가 뭐라고 해도 새로운 개념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운 좋게도 마라도나는 나폴리에서 플레이를 했다. 그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던 이탈리아에는 혁신을 포용할 수 있는 토양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밀란의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려는 시점이었다. 더 이상 카테나치오만으로는 마라도나를 봉쇄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것이 혁명이라 불리우는 변화가 일어난 배경이며, 10명의 수비를 붙여도 마라도나는 그 모두를 제쳐버릴 수 있었다. 나는 마라도나 영입을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이 꿈은 밀란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마라도나와 대립하는 축구를 하는 것이었다. 또 한 명의 마라도나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마라도나와 함께했을 때는 이제 막 축구계에 발을 내디뎠을 단계였다. 마라도나는 매너리즘 관점에서 순수한 예술이었다.'''
로베르토 아얄라 ('폭스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맞닥뜨린 최고의 선수였다. 그는 18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실상 상대할 수 없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다.'''
'''리오넬 메시는 그의 발끝에서 마법을 보여준다. 그러나 내 책에서는 그는 세계적으로 보여준 면에서는 최고가 아니다. 그 영광은 디에고 마라도나로 가야만 한다. 우리는 모두 펠레가 더 많은 골을 넣었고, 메시가 더 많은 우승을 했다는 걸 안다. 그러나 마라도나를 탑에서 끌어내리기에는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마라도나는 본능적인 강력함과 천재적인 폭발력을 지녔다. 심지어 그는 코카인, 총격, 여자, 상해 등을 포함한 두드러지는 논란거리들 후에 궁극적으로는 자기 파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메시는 기술과 득점력 관점에서는 뒤에 있지 않지만, 최종적인 분석에서는 '최소한 지금까지는' 그는 역대 최고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왜냐면 그의 커리어가 아직 축구적으로 역대 최고가 되기에는 마라도나를 배제할 만큼의 규정짓는 그런 류의 사건이 없기 때문이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마라도나는 5골 5어시스트 및 절대적이고 경이적인 퍼포먼스와 함께 폭풍을 일으키며 토너먼트를 지배하면서 결국 아르헨티나에 월드컵 우승을 가져왔다. 아마 우리는 이번 여름 월드컵에서 메시로부터 같은 걸 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바르셀로나 스타로부터 그런 종류의 영향력을 월드 스테이지에서 볼 때까지는 진짜 논쟁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나를 믿지 못한다면, 메시 스스로 마라도나에 대해 말한 걸 들어보라. "비록 수백만년을 플레이해도, 나는 마라도나에 근접할 수 없을 것이다" 메시는 이미 이렇게 말했었다. "He's the greatest there's ever been."'''
스티브 베이츠 (데일리 미러 기자)
'''메시와 마라도나 사이에는 논쟁이 있기에 매우 어렵지만, 마라도나를 고른 이유는 규정 변화 때문이다. 마라도나가 1982월드컵에서 이탈리아와 젠틸레를 상대로 뛰었을때, 젠틸레는 옐로카드를 받기 전까지 마라도나에게 24번의 파울을 범했다. 당시에는 선수들에게 그런 것이 가능했고, 마라도나는 태클을 피하는 것을 넘어서 뛰어넘으면서 내가 축구와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태클을 했을 뿐 아니라 다치게 하려고 시도했다. 1986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는 그냥저냥 괜찮은 팀이었는데, 마라도나는 월드컵을 우승하게끔 만들었다. 그는 나폴리에서도 리그를 두번 우승했고 유럽대회도 한번 우승했다. 나폴리는 마라도나 이전에 리그도 유럽대회도 우승하지 못했으며, 그 이후로도 역시 우승하지 못했다. 마라도나는 나폴리를 다른 레벨의 팀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메시와 호날두는 어떨까? 그들은 환상적인 축구선수지만, 다른 이들이 그들을 위협할 수 있는 시대에 뛰었다면 어땠을지는 항상 의문이 든다. 선수들이 발로 차고, 잔디가 그렇게 좋지 않았을때는 전혀 다른 경기가 된다.'''
제이미 레드냅
'''펠레도 버리기 쉽지 않지만 역시 이 사나이가 아닐까. 그처럼 볼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선수를 나는 알지 못한다.'''
빈센트 듀르크 (프랑스 축구 저널리스트)
'''디에고 마라도나 이외에 생각할 수 없다. 볼을 가진 그는 우리들의 상상을 훨씬 더 초월하는 마술을 피력했다. 변화무쌍한 드리블로 DF를 제치고, 믿을 수 없는 패스를 하고, 화려한 골을 터뜨렸다. 마법의 그 왼발 앞에서는 펠레도 요한 크루이프도 침묵할 수 밖에 없다. 거의 혼자서 월드컵 우승을 차지할 수있는 것도 마라도나 뿐. 유일무이, 축구 사상 가장 빛나는 "금자탑”이다.'''
에드윈 스트라우스 (네덜란드 저널리스트)
'''내 생각에는 디에고 마라도나가 역대 최고다.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개인적이면서도 월드컵에서 승리했다. 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가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우승한 이유였다. 왜냐면 단지 좋은 팀을 거의 혼자만의 능력으로 가장 위대한 경지로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난 호날두를 그 다음으로 놓겠다. 왜냐면 그가 최고일 때는 unstoppable. Just incredible이기 때문에. 만약 메시 위에 호날두를 놓는다면 당신들은 그걸 소수로 치부할 테지만, 뭐 다른 것도 좋다. 그리고 그 다음이 리오넬 메시다. 어메이징한 플레이어고 올타임 베스트 중 한명이지.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나의 베스트는 아니다. 나는 이 3명을 피부로 직접 체감했고, 마라도나는 이 중에서도 다른 레벨에 올라있다. 내 관점에서는, 펠레와 현대선수들을 비교하는 건 의미가 없다. 왜냐면 그때 축구는 너무나 다르니까. 펠레는 그의 시대에서 최고다.'''
존 크로스 (데일리 미러 기자)
'''나는 1986년의 디에고 마라도나보다 더 뛰어난 개인 퍼포먼스를 전혀 본 적이 없다. 그때 그는 자신의 힘만으로 월드컵에서 우승을 실천해냈다. 메시는 지금 세대에서 베스트 플레이어지만, 내게 있어 그가 마라도나와 같은 레벨로 판단되기 위해서는 메시는 아르헨티나를 월드컵의 영광으로 이끄는 게 필요하다. 그리고 아직 메시는 첼시전 8경기 무득점이다...'''[83]
닐 맥레만 (데일리 미러 기자)
'''전성기의 에우제비우와 펠레의 플레이는 유감스럽게도 직접 체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가 낳은 천재와 동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행운을 주신 신에게 감사하고 싶다. 디에고 마라도나야 말로 스펙타클이고 완전무결이었다. 나폴리에게 두 번의 스쿠데토와 UEFA컵 우승을 안겨주고 아르헨티나를 월드컵 우승으로 이끈 마라도나는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안토니오 마가레야스 (포르투갈 저널리스트)
'''메시는 현세대 최고의 선수지만 마라도나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전지전능한 존재이다. 이 전에도 이후에도 마라도나에 비견할 선수는 찾을 수 없다. 마라도나보다 우위에 있는건 펠레겠지.'''
'''1위 펠레, 2위 마라도나, 3위 크루이프, 4위 메시, 그리고 그와 동급인 디 스테파노'''
알피오 바실레 감독 (유일하게 메시와 마라도나 모두 지도해본 감독, 최고의 선수들 뽑으라는 질문에)
'''웃긴일이죠. 메시는 최고지만, 월드컵에서 우승한 적이 없습니다. 다른 시대의 선수들을 비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예요. 저는 1978년, 마라도나는 1986년에 우승했고 메시는 그러지 못했어요. 이게 현재 상황입니다.'''
'''축구 역사상 3대 영웅은 펠레와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입니다. 크루이프는 네덜란드의 월드컵 우승을 이끌지는 못했지만, 그는 네덜란드와 세계 축구를 변화시킨 매우 특별한 선수였습니다. 메시가 펠레·마라도나·크루이프 수준에 도달하려면 월드컵에서 우승해야 합니다.'''
카를로스 빌라르도 감독 (1986년, 1990년 아르헨티나의 우승, 준우승을 이끈 감독)
'''마라도나랑 메시 중 누가 더 잘하냐고? 당연히 마라도나지.'''
'''내가 어린 축구팬이었을 때 마라도나는 나폴리에 있었다. 세리에는 당시 가장 어려웠던 리그였다. 선수들은 골대에서 골대까지 걷어차였고, 수비적인 축구가 대세였다. 그 득점하기 어려운 시기에 마라도나는 나폴리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는 또한 86년에 혼자만의 힘으로 월드컵을 우승시켰다. 당시 아르헨티나에 좋은 선수들이 많다는 걸 알지만, 내 생각에 그들은 월드컵을 우승할 만큼 뛰어나지는 않았다. 마라도나는 내가 보아온 선수 중 최고였고, 그건 지금도 그렇다. 축구가 변했다는 것은 알지만, 당시 마라도나는 골대에서 골대까지 걷어차였다. 그는 혼자만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냈고, 그렇기에 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다.'''
폴 머슨
'''모두가 알다시피 발롱도르는 오직 유럽 선수들에게만 수여하는 상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고 있다. 지난 10년간 누가 진정한 넘버원이었는지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디에고 마라도나의 업적을 기리고자 특별한 발롱도르를 선물하기로 했다. 그는 이 시대 축구의 신이다'''
드니 쇼미에르 (프랑스 풋볼 편집장)
'''마라도나는 마법과도 같은 무언가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술가였죠. 과할 정도로 예술가였고 천재였지만, 또한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예술가였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그처럼 되고 싶어할 겁니다. 그가 살아오면서 해왔던 모든 어리석은 행동들을 잊어야 한다 해도 말이죠. 그것이 그의 방식이자 모든 것이었고, 그의 진실된 모습이니까요. 메시는 현역 최고지만 월드컵 우승은 못했습니다. 그는 마라도나의 그림자 밑에서 살고 있죠. 재밌는 점은 메시는 외향적인 마라도나와 정확히 반대라는 겁니다. 조용하고 내성적이며 말이 없죠. 둘 다 천재입니다. 메시는 클럽 레벨에서 더 이겼지만 더 절대적인 인식을 성취해야만 합니다. 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에서도 그걸 해냈기 때문이죠.'''
'''마라도나가 나를 보카 주니어스와 리버 플레이트 경기에 초청했고, 스카이박스에서 경기를 봤다. 마라도나가 스카이박스 발코니로 걸어 나가자 사람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기립박수를 보냈다. 마치 신이 내려온 것 같았다. 마라도나와 같이 경기를 봤지만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별로 없었다. 마라도나는 경기 내내 판정을 이야기하는 등 무척 바빴다. 마라도나는 환상적인 선수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마라도나는 많은 유혹(마약·술 등)을 뿌리치지 못했지만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았다.'''
거스 히딩크 (세상을 떠난 디에고 마라도나를 추억하며)
'''...TV 방송사들이 가끔씩 틀어주는 월드컵 회고 영상이나 <축구의 영웅들> 같은 프로그램에 펠레는 단골로 보여지지만 저를 가슴 뛰게 하거나 ‘축구의 유일한 지존’으로 느껴지기에는 항상 무엇인가가 부족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펠레를 정의할 때 '축구 탄생 이후 1970년대까지만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축구 선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1970년대 초반부터 축구를 보기 시작해서 당시 인기있던 서독 분데스리가에 대해서는 박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까지 축구 매니아였던 저에게 마라도나의 플레이 하나하나는 그야말로 뒷통수를 후려친 충격이었습니다. 그것도 오로지 왼발 하나로만... 공이 발에 착착 달라붙는 부드러운 볼터치, 뒷꿈치와 발바닥, 허벅지까지 이용하는 도무지 예측을 할수 없는 패스들, 두세명 사이를 눈깜짝할 사이에 뚫어내는 드리블, 절묘한 휘어차기 프리킥까지, 마라도나의 모든 플레이에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5만명의 일본 관중들도 마라도나가 볼을 잡을 때마다 환호성을 지르더군요. 저는 생각했습니다. 신동(神童)이란 표현은 저런 데 쓰라고 있는거구나.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감동했던 축구 선수들, 이를테면 루메니게, 본호프, 키건, 시몬센, 심지어 크루이프까지도, 마라도나에 비하면 선수도 아니었다고 말입니다. 그 선수들은 재능은 있는지 몰라도 천재는 아니었습니다. (...) 불행하게도 앞으로의 축구 역사에 마라도나 같은 재능을 가진 선수는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겁니다. '신이 특별히 세상에 내려보내는 인간'은 어차피 단 한명뿐이니까요.'''
'''두 골 먹고 나니 갑자기 '광래 준비! 광래 준비!' 하면서 급히 부르시는 거라. 속으로 '전반전은 버티겠지' 했는데, 골 연거푸 먹으면서 급해지신 거지. 다른 선수들 웜업 시작도 안 했는데, 나만 급하게 숨 올려서 들어간 거예요. 원래 훈련할 때는 내가 선발로 뛰기로 돼 있었어요. 주전으로 계속 뛰던 때니까. 그런데 마라도나라는 존재가 워낙 특별하다 보니 김평석을 먼저 마킹시켰죠. 당시 마라도나는 메시 이상의 폭발력이 있었어요. 우리 뿐 아니라 다른 나라도 맨투맨으로 마라도나를 못 잡았으니까.'''
'''메시도 너무나 득점을 잘하는 세계 최고의 선수이지만 메시가 기술적으로 아주 두드러지는 선수인 반면, 마라도나가 좀 더 잡기 힘든 선수가 아닌가 생각해요. 파워, 스피드, 기술이 아주 특출난 선수였어요. 키가 작은 마라도나가 상대가 아무리 마크해도 뚫고 나가는, 한 마디로 힘이 있는 선수였습니다.'''
'''그때 마라도나를 본 한국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17분 동안 마라도나가 만들어낸 게 차원이 달랐으니까요. 순식간에 3~4골도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교를 하자면 '가장 좋은 날의 메시' 정도로 보고 싶어요. 물론 전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메시가 어떤 선수인지 알고, 어떻게 뛸지도 예상을 해요. 하지만 그때는 마라도나를 처음 겪었어요. 자주 볼 수 있는 선수도 아니었고. '가장 좋은 날의 메시'란 알고도 못 막는 놀라운 유형을 가리키는 건데, 마라도나가 당시 그랬어요. 준비가 안 돼 있었으니 충격은 더 컸죠.'''
'''월드컵만 보면 최전성기였던 마라도나가 더 낫죠. 월드컵에서 6명을 제끼고 골 넣고 파울이 아니면 막지를 못하던 게 전성기 마라도나였어요.'''[84]
'''마라도나는 1986년 대회 때가 최전성기였다. 상대해 본 선수 중 최고의 공격수였다. 수비수 두세명은 순식간에 따돌렸다. 워낙 개인기가 특출나다 보니 마크가 쉽지 않았다. 태클을 하지 않으면 정말 막기 힘들었다. 당시 태권수비라는 말까지 나왔는데, 정당한 마크였다. 무리한 수비였다면 당연히 퇴장을 당했을 것이다.'''
'''타임지 표지에 실리면서 유명해졌죠. 그걸 잘 보면 볼이 무릎 부분에 있었어요. 그걸 걷어낸 것으로 고의적인 파울은 아니었어요. 주심도 경고를 안 줬고요. 개인적으로 참 운이 좋아 요한 크루이프, 베켄바우어와 운동장에서 다 맞붙어봤어요. 그런데 마라도나는 솔직히 어떤 한 선수가 마크하는 게 불가능한 선수였어요. 상대방 중심을 역이용할 줄 알았고, 터치나 그런 게 정말 남달랐죠.'''
'''내가 반딧불이었다면 마라도나는 태양 같은 선수였다. 같은 시대에 선수 및 지도자 생활을 한 건 큰 행운이자 영광이었다. 마라도나의 생이 짧다면 짧았지만, 선수로서의 업적에는 진심으로 존경을 표한다. 내겐 도저히 잡기 힘든 선수였으며, 그걸 겪어보고 지켜 본 한국 축구에도 큰 가르침을 준 선수였다고 생각한다.'''
'''지금 룰이었으면 서너 명은 퇴장당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그렇게라도 버텨야 했어요. 난 당시 수비에 서서 마라도나의 플레이를 정면에서 생생히 봤어요. 이야, 저 정도 갖다 받으면 부러졌겠다 싶었지. 그런데 태클을 피할 때 몸 중심을 살짝 띄우더라고. 그걸 어려서부터 접해왔던 선수다 보니 상대가 들어올 타이밍을 다 알고 충격을 완화하더만. 그리고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게 무슨 종아리가 우리 허벅지만 한 거야. 나도 한 허벅지 했는데. 가만 보니 정강이 보호대를 앞뒤로 했더라고. 얼마나 견제가 심했으면 저렇게까지 했나 싶었지.'''
'''플라티니가 잘한다 잘한다 했어도, 마라도나는 펠레 이후 처음으로 나온 차원이 다른 선수였어요. 갖고 있는 기술부터 천부적이었죠. 나도 당시 유럽에 같이 있었으니 마라도나를 자주 접했거든. 사실 나폴리에서도 나를 원했었는데. 그때 레버쿠젠으로 선회했더니 그 다음에 마라도나가 나폴리로 떡 하니 가 있더라고. 마라도나는 예견대로 특별한 선수였어요. 연습장에서부터 난리가 났죠. 훈련에만 6만 관중이 들어찼다는 얘기가 이탈리아 언론을 통해서 퍼졌어요.'''
'''허정무 선배가 그때 몸이 아주 좋았어요. 근성도 있었고. 하물며 별명도 진돗개 아니야. 일반 사람들은 그렇게 부딪혔으면 일어나지도 못했을 거예요. 마라도나는 진짜. '악' 소리 지르면서 쓰러지는데, 무슨 곰 한 마리가 누워있는 것 같더라고. 저런 몸을 갖고도 어떻게 그렇게 민첩할까 싶었죠. 후반 20분경부터 이 선수를 마크했는데, 어찌나 힘들던지. 그 옆에 딱 붙어서는 일부러 호흡 참고 그랬다니까요. 그것도 고지대에서 말야. 정말 죽는 줄 알았지. 볼이 반대편으로 가면 그제야 참았던 숨 몰아쉬고요. 왜 그랬냐고요? 힘든 거 들키면 걔가 더 기 살아서 날뛸까봐.'''
'''진짜 거짓말 아니고, 나는 곰 새끼가 지나가는 줄 알았다니까. 사람이 아니더라고.'''
마라도나를 상대한 어느 국내 축구인의 회고.[85]
'''Q: 지, 네가 생각하는 역대 최고의 선수 세 명을 말해봐.'''
'''A: 마라도나, 파트리스 에브라, 그리고 이영표.'''
'''Q: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자세히 말해줘. 왜 마라도나를 1등이라고 생각해?'''
'''A: 왜냐하면 내가 어렸을 때, 마라도나의 영상을 봤고 그에 대한 책도 읽었거든.(후략)'''
'''(연습 도중 안토니오 카사노에게) 백힐 패스를 계속하지 마라. 너는 마라도나가 아냐.'''
'''사람들은 평생 한번의 기적#s-2을 목격하곤 하지만 대부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그 기적을 목격했다. 1969년 비가 오는 토요일에 8살이라는 나이가 믿겨지지 않는 아이가 공을 가지고 내 평생 한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을 하는것이다.'''
프란시스코 코르네효 (마라도나를 발굴한 아르헨티노스 유스 코치)
'''그는 최고이다. 그는 전지전능한 신이다.'''
'''나는 그를 내 아들처럼 사랑했다.'''
아르헨티나 시민들, 마라도나의 은퇴 경기에서.
'''가장 재능있는 선수 가운데 하나로 눈부시고, 악명 높고, 특별하고, 천재적이지만 흠결이 있는 축구 영웅으로 범상치 않은 삶을 살았다.'''
'''하고 싶은 말은 고맙다는 것뿐이다. 국민에게 이렇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또 얼마나 될까? 고맙다고 말하고 싶을 뿐.'''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세상을 떠난 디에고 마라도나를 추모하면서)
'''어느 날 나와 디에고는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만났는데, 그 날 디에고가 두 개의 시계를 차고 와서 나에게 그 두 개의 시계들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그는 이 두 개의 시계가 자신의 딸이 준 선물이고, 받은 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착용하지 않은 날이 없다고 말하였다. 또한 이 두 개의 시계를 차고 있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자신에겐 마치 분신 같은 존재라고 얘기했다. 그런 감동적인 사연을 알게 된 후 난 그저 그러려니 했는데, 식사가 끝나고 우리가 자리를 떠나려고 할 때 디에고가 자신이 차고 있던 두 개의 시계 중 하나를 자신의 손목에서 빼더니 나에게 선물이라고 주었다. 난 마라도나 본인에게 이런 뜻깊은 선물을 내가 갖고 있고 싶지 않아서 당연히 거절 했지만, 그가 되려 화를 내고 속상해해서 사실 당시에는 어쩔 수 없이 시계를 받았다. 당시에도 그가 그의 딸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기에 이 선물의 소중함을 알았지만, 지금 와서 되돌아보니 더욱 더 의미 있는 선물이자 물건인 것 같다. 난 이 시계를 내 남은 여생 동안 소중히 보관하며, 내 친구 디에고와 나의 친분을 기억할 추억으로 남겨두겠다.'''
'''그는 공 하나로 나라를 행복하게 한 소년이에요. 정치인들도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없는데, 그는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었어요.'''
'''15년 전에 아들을 잃었어요. 마치 또 한 명의 아들을 잃은 것 같아요.'''
'''마라도나는 많은 기쁨과 행복을 안겨주었습니다. 전 세계 축구계는 위대한 영웅을 잃었습니다.'''
'''마라도나를 아버지만큼 사랑했기 때문에 마치 아버지를 잃은 것 같다.'''
'''그는 아르헨티나를 전 세계에 알려지게 했다. 우리에게 큰 기쁨을 준 위대한 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세상을 떠난 마라도나를 추모하는 아르헨티나 시민들의 말
'''마라도나에 대해선 나쁘게 말할 수 없죠. 그를 욕한다면 신을 욕하는 건데 저 위에 계신 신을 욕할 수는 없잖아요?'''
나폴리에게 우승을 안겨다준 후, 그에 대한 나폴리팬의 말.
'''오빠는 열다섯 살 때부터 자기 인생이 없었어요. 다른 사람이 됐죠. 항상 모든 걸 챙겼어요. 그런 명성을 얻는 건 무거운 짐이었죠. 하지만 항상 혼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어요. 가족을 개입시키지 않으려 했죠. 그는 항상 영웅이었어요. 하지만 혼자 다 해낼 순 없었죠.'''
마리아 마라도나
'''그의 삶은 대단한 동시에 끔찍했죠. 디에고는 마라도나와 상관없었는데 마라도나는 디에고를 어디든 끌고 다녔죠.'''
페르난도 시뇨리니 (마라도나의 개인 트레이너)
'''나폴리에서의 이야기가 그의 인생 이야기예요. 반항아, 속임수도 쓰고... 영웅, 신, 아마 역사상 최고의 축구선수였을 거예요. 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죠. 이후의 모든 일은 끝이 안 좋았죠. 축구선수로서 마라도나는 끝났고 그의 신화만이 살아남았죠.'''
다니엘 아르쿠치 (스포츠 기자)
11. 어록
'''경기장에서 뛸 땐 삶도 사라져요. 문제들도 사라지고, 모든 게 잊혀지죠.'''
영화 <디에고>의 서두와 말미에 반복되는 대사.
'''그날 나는 손으로 하늘을 만지는 느낌을 받았다.'''
15세의 나이로 첫 성인팀에 데뷔했을때.
'''축구는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스포츠다. 당신이 축구에 관련한 실수를 했다고 하더라도 축구에 대해 미안해 할 필요는 없다. 축구는 모든 것을 정화하는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간 실수를 정말 많이 했다. 하지만 축구만큼은 더럽히지 않았다.'''
자신의 축구 선수 경력을 마무리하는 은퇴사에서.
'''평화를 기대해요. 바르셀로나에는 없던 평화요. 그리고 존중을 바랍니다.'''
'''파란색이죠. 나폴리 시민을 위한 파란색. 나폴리에 살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취급을 당했는지 상상도 못할 거예요. 그랬기 때문에 시민들은 이번 승리를 누릴 자격이 있어요.'''
유벤투스전 승리 후 이번 골은 무슨 색이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러면 감독님은 그것을 잘라야겠군요. 자위를 안 해봤을 리는 없었을 테니까요.'''
카를로스 빌라르도 대표팀 감독이 '''자꾸 머리를 만져서 연습을 못할거면 머리를 잘라라'''라고 이야기했을 때 되받아친 말.
'''그 때 공을 강타한 것은 나의 손이 아니라 신의 손이었다.'''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8강 잉글랜드전에서 손으로 슛을 넣은 직후.
'''나폴리에서 6년을 보냈어요. 이젠 사람들이 저를 잘 아니까 아르헨티나를 응원해주리라 믿어요. 갑자기 너무 많이 바라면 안 되겠지만 분명 제가 기뻐하길 바랄 거예요. 아르헨티나를 응원해주면 좋겠어요. 그 응원이 필요하기도 하고 저도 그분들이 절 필요로 할 때 늘 열심히 했으니까요.'''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4강 경기 전 인터뷰에서.
'''나폴리의 국민들이여, 북녘의 주적[86]
을 응원하지 말고 나폴리의 진정한 우방인 아르헨티나를 응원해다오.'''[87][88]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4강 이탈리아전에서 관중석에다 대고 외친 말.
'''힘들었어요. 나폴리에 처음 갔을 땐 85,000명이 절 환영해줬는데 떠날 땐 완전히 혼자였죠. 조용히 떠났어요. 소란 떨지 않았죠.'''
영광을 함께한 나폴리를 떠나면서.
'''2010년의 메시는 1986년의 마라도나보다 더 뛰어납니다. 그는 지금 예수와 공을 차고 있어요. 메시는 나와 펠레 간의 논쟁을 끝낼 수 있는 선수죠. 현재 그 누구도 메시와 비견될 수 없을 뿐더러, 그가 하는 것의 40%를 하는 선수조차 없습니다.'''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 리오넬 메시를 극찬하며.[89]
'''유럽 선수들은 대개 공을 제압하여 통제하는데 많은 공을 들인다. 하지만 나는 공을 친구로 대한다. 경기 중에 내 친구가 어디로 가든지 하고 싶은대로 하게 놔둔다.'''
'''펠레가 나이를 너무 먹어서 노망이 들었나보다.'''
'''우리 엄마는 내가 제일 뛰어나다고 하신다. 근데 펠레의 어머니는 펠레가 더 뛰어나다고 하시겠지?'''
'''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 아르헨티나가 조별리그 탈락하자 한 말.[91]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XX놈(...)들을 제외한 모든 분들께 이 영광을 돌립니다. 나와 대표팀을 믿지 못하는 기자와 언론 사람들은 X이나 XXX!'''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남미 지역예선을 힘겹게 통과한 후 기자회견 자리에서 했던 발언. 실제로 마라도나는 이 발언으로 인해 징계를 먹고 조추첨에 참가하지 못했다.
'''마치 무하마드 알리의 펀치에 얻어맞은 기분이다.'''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8강 독일전에서 0:4로 대패를 당한 직후.
'''이 낙지놈, 나는 네가 죽어서 기쁘다. 월드컵에서 진 것도 다 너 때문이야.'''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독일전의 참패를 점친 문어 파울이 죽자 트위터에 올린 글.
'''브라질은 별로다. 그렇다고 독일이 잘한 것도 아니다. 독일과 브라질의 경기에서 중반이란 없었으며, 다비드 루이스의 호흡도 전혀 안 맞았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브라질이 한 거라고는 롱슛밖에 못한 것이 전부라는 점이다.'''
미네이랑의 비극 직후 인터뷰에서.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와 에르난 크레스포? 그 두놈 자식들은 골방에 가둔 뒤 한쪽이 사망할 때까지 서로에게 펀치를 날리게 해야 한다.'''
아르헨티나 국대에서 두 사람의 갈등에 대해 한마디.
'''차기 회장선거는 블라터 회장을 내쫓을 좋은 기회라고 확신한다. 블래터는 축구에 큰 해악을 끼쳐왔다.'''
5선에 도전하는 제프 블라터 회장을 비난하면서.
'''저는 25년간 FIFA의 블라터, 그라노다 회장과 싸워왔습니다. 말하라고 돈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선수들을 방어해왔으며 마침내 오늘 괴물들에 대한 인식이 생겼습니다.'''
'Tyc Sports'와의 인터뷰에서.
'''지난번에 디 마리아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 봤는데 챔피언스리그 우승이라고 대답했다. 국가를 대표하는 월드컵 우승이 아니라 말이다. 이딴게 얘들의 마인드다.'''
러시아 월드컵 전 인터뷰에서.
'''나는 아르헨티나 경기를 보지 않았다. 나는 호러 영화를 즐겨 보지 않는 사람이다. 지금 대표팀을 이끄는 무능력한 사람들은 경기 전 베네수엘라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나? 이 팀은 늘 국민들을 배신하고 거짓말을 한다. 미안하지만 앞으로도 승리를 거두긴 힘든 팀. 대표팀 유니폼을 입을 자격도 없다. (상황이 나아질) 답이 보이지 않으며 이런 사기꾼들을 계속 믿어주는 팬들에게 내가 다 미안하다.'''
2019년 3월 23일 아르헨티나 대표팀이 베네수엘라와의 친선경기에서 1:3으로 패배한 직후 인터뷰에서.
'''미국은 25분마다 TV광고를 하길 원할 것이고, 4번씩 나눠 100분을 뛰기를 바랄 것.'''
'''캐나다 사람 중에서는 틀림없이 좋은 스키어들이 많다.'''
'''과거의 축구와 현대의 축구는 많이 다르지만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등번호 10번은 나의 것이다. 나는 아직도 국가대표 유니폼을 벗지 않았다.'''
2020년 5월 28일(한국시간) 자신의 SNS에 남긴 글.
'''만약 내가 하얀 옷을 입고 결혼식장에 서있는데, 흙 묻은 공이 날아온다면 단 1초의 고민없이 가슴으로 받을것이다.'''
마라도나의 사후 파브리지오 로마노[92]
가 SNS에 올린 그의 어록.
'''반월판이 산산조각이 나더라도 경기하고 싶다. 심장이 터질 때까지 뛰고 싶어. 항상 신중한 사람이 먼저 되는 건 아니야. 나는 경기하고 이기고 싶다. 광기? 문제없어. 내 인생의 마지막 날까지 미쳐 버릴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