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기리 카츠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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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기리가의 가몬, 카타기리 치가이야(片桐違い矢, 교차된 화살)
片桐且元(かたぎり かつもと)
1556년 (코지 2년) ~ 1615년 6월 24일 (겐나 1년)
1. 개요
일본 전국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 활약한 무장이자 다이묘. 또한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중 한명. 통칭은 스케자(助佐) 혹은 스케사쿠(助作)
도요토미가와 에도 막부에 직속했던 무사 가신으로 도요토미 성을 허락받은 가신이며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도 부역으로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모시고 있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협력하는 입장에서 호코지(方廣寺) 종명 사건으로 오사카 성을 탈출하고 도쿠가와 쪽으로 돌아섰다.[1] 카츠모토의 카타기리가는 야마토 국 타츠타(竜田) 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으며, 동생 카타기리 사다타카(片桐貞隆)는 동일한 국 고이즈미(小泉)번의 번주가 되었다.
1.1. 출생
오우미 국 아자이 군 스가타니[2] 에서 아자이 가문의 가신인 카타기리 나오사다(片桐直貞)의 장남으로 코지 2년(1556년)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미상. 시나노 겐지의 명문인 카타기리(片切, 한자가 다르다.) 씨는 본래 가마쿠라 시대 당시에는 시나노국 카타기리성(현재의 나가노현 가미이나군 부근)에 근거지를 둔 고케닌 이였지만, 종가는 시나노에 남는 한편 분가는 미노·오우미국에 진출하면서 카타기리(片桐)의 묘자를 사용한다. 센고쿠다이묘가 된 아자이 씨를 받들게 된 것은 나오사다 대 부터다. 그리고 쭉 스가타니 지방은 아자이 씨의 본거지인 오다니 성(小谷城)의 지성으로서 활용되었고 온천수가 솟아 탕치장으로도 이용되곤 했다.
겐키 원년(1570년)부터 덴쇼 원년(1573년) 9월까지 오다 노부나가가 아자이 나가마사를 공격함으로 인해서 오다니 성은 함락됐다. [3] 이 일로 당시 17세의 카츠모토는 어린 시절이었기 때문에 아자이 세 자매, 오오노 하루나가 형제들과 함께 낙성을 경험했다고 생각된다. 카츠모토가 가독을 이은 시기는 분명치 않다.
1.2. 히데요시에 직속했던 무사
하시바 히데요시는 아자이 씨의 나가하마 성 및 북 오우미 3군을 영지로 받은 후 많은 인재를 모집하고 있었다. 카츠모토는 덴쇼 2년(1574년)이후 덴쇼 7년(1579년) 사이에 같은 오우미 국 태생인 이시다 마사즈미[4] 삼형제와 같이 어린 인재라 히데요시에게 등용되었다. 이후 모리 데루모토에 대한 공격에 종군하고 있었다.
덴쇼 11년(1583년) 5월. 노부나가 사후에 히데요시와 맞선 시바타 가츠이에의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가토 기요마사 등과 함께 활약해 가장 먼저 공을 세운 공로을 인정받고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중 한명으로 꼽혔다. 이때 히데요시로부터 전공을 하사받고 셋츠 국 3천석을 부여받았다. 덴쇼 12년(1584년) 6월에는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 종군하여 군세 배치에서 다른 칠본창들과 함께 우마마와리슈[5] 로써 약 150명 가량의 군세를 이끌고 본진을 지키고 있었다. 덴쇼 14년(1586년) 7월 1일에는 종오위하 히가시노이치노카미[6] 에 임명되면서 도요토미 성을 하사 받는다. 이후 호코지 대불전 건설의 사쿠지부교(作事奉行, 성의 유지·보수 등을 담당하는 부교)를 맡았다. (이후 말년의 재건 공사에서도 카츠모토가 같은 직책을 맡는다.)
이후에도 부교(奉行, 행정관을 의미)로 활약하며 도시의 숙박지나 가도 정비 등의 병참에 관여하고 있었다. 또 영지가 있던 셋츠 국을 비롯한 히데요시의 지배 영역 확대와 더불어 단바 국, 야마토 국, 이요 국 등 각지에서 코보리 마사츠구[7] , 아사노 나가마사[8] ,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과 함께 부교로써 종사하게 된다.
덴쇼 15년(1587년)에는 큐슈 정벌에 종군하고 군선의 조달을 담당하였고 덴쇼 18년(1590년)의 오다와라 정벌에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 도쿠가와의 여러 가신과 함께 오다와라 성에 들어가 하야카와 나가마사(早川長政, 훗날 후나이 성주)와 함께 가마쿠라의 츠루오카 하치만 궁 복원 준비와 영지 안도 및 토지 조사를 벌였다. 오슈처벌(奧州仕置)에서는 데와 국 아키타에서 토지 조사 외에 아사리 사건[10] 의 대한 조사에 관여, 당사자들의 상락을 관리하고 나츠카 마사이에(長束正家, 오봉행 중 하나)에게 재정을 맡겼다.
덴쇼 19년(1591년)에 히데요시의 미카와 국의 관리자로 임명되었고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인 임진왜란에서는 동생 사다타카와 함께 출정하여 미야기 토요모리[11] 과 함께 도로의 정비를 담당했지만 비젠 국의 연체 때문에 해상 상륙용 배의 조달을 지시 받는다. 당시 그의 수하는 불과 200명 정도였는데 부산에 주둔하고 히데요시의 잇키 무리와 함께 도로 공사 등의 지령을 전했다. 또한 제2차 진주성 전투등에 참전했으며 분로쿠 2년(1593년)에는 강화를 위한 휴전으로 인해 9월부터 10월까지 잠시 귀국했다.
분로쿠 3년(1594년)에 후시미성 공사를 담당하여 그 해의 임란 토지 조사에서는 셋츠 국, 가와치 국 북부의 봉행이 되었다. 임란 4년(1595년)에는 하리마 국에 5800석을 가증 받아 본인의 4200석과 아울러 1만석이 됐다. 이 영지는 하리마, 셋츠, 이세에 나누어졌다. 그리고 분로쿠 5년(1596년) 7월 13일에 발생한 게이쵸 후시미 지진 이후로는 그 재건사업에 관련된 오사카 도시 개조 계획에 가담했다. 게이초 3년(1598년) 3월 15일 다이고의 하나미[12] 에서 산노마루도노(三の丸殿, 오다 노부나가의 딸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의 가마 호위역을 맡기도 했으며, 그 해 8월 15일에 코이데 히데마사등과 함께 히데요리의 모리야쿠[13] 5인 중 한명으로 지명되어 오사카 성 조반(城番)으로 근무한다.
1.3. 도요토미 가문의 가로
게이쵸 4년(1599년) 1월 10일에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오대로·오봉행과 함께 후시미 성에서 오사카 성으로 이동할 때 당시 오사카에 저택이 없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후시미 성으로 귀환할 때까지 카츠모토의 저택에서 2박을 묵었으며, 이후에도 두 사람은 연락을 계속하게 된다. 또한 오사카성의 근번체제가 개편되면서 마에다 토시나가(마에다 토시이에의 장남), 도쿠가와 히데타다, 이시카와 미츠요시(石川光吉, 이누야마 성주, 후일 이시카와 사다키요로 개명), 이시다 마사즈미(石田正澄, 이시다 미츠나리의 형), 이시카와 카즈무네(石川一宗, 이시카와 사다키요의 동생이라는 설이 있음, 훗날 요리아키로 개명)등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입지가 생겼다. 게이쵸 5년(1600년), 카츠모토는 나츠카 마사이에 등 오봉행에 의해 오사카성 소무(所務, 치안유지, 재판, 세금 징수 등)의 감독을,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오부교에 의해 오오쿠의 경호역을 맡는다.
9월에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문치파 오봉행들을 중심으로 한 이시다 미츠나리의 서군에 가담했으며 코이데 히데마사[14] , 이시카와 요리아키와 동생 사다타카 등의 하타모토도 가세한 오츠 성 전투에 마시타 나가모리와 함께 가신들을 파견했지만 무단파 무장들을 중심으로 지지를 얻은 이에야스의 동군이 승리하자 장녀를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내놓고 도요토미와 도쿠가와 양가의 중재에 힘쓴다. 게이쵸 6년(1601년) 정월, 1만 8천석이 가증되어 야마토 타츠타 성을 거성으로 삼게 된다. 그해 윤삼월에 코이데 히데마사와 함께 도요토미 가의 가로(家老)로 추대되었으며, 같은 무렵 동생 사다타카가 1만 5천석 가증과 이바라키 성을 수여받는다.
이후 이에야스의 정치를 어린 히데요리의 대행으로 승인하고 협력하는 입장이 됐다.[15] 처음에는 전국의 쿠라이치(蔵入地, 다이묘의 직할지)를 총감하는 입장에서 도쿠가와 가의 소무 책임자 오오쿠보 나가야스(大久保長安)의 토지 조사에 협력한다. 또한 지샤부교(寺社奉行, 절, 신사 등의 영지, 인사를 담당하는 부교)로써 도요토미 정권의 정책이었던 기나이를 중심으로 한 다수의 사원 부흥 사업을 추진한다. 게이쵸 9년(1604년) 코이데 히데마사가 사망한 이후 도요토미 가의 유일한 가로가 되어 가문의 외교·재정을 도맡았다. 당시 히데요리가 발급한 문서 131통 중 100통이 카츠모토가 중개자로 되어있었으며, 요도도노도 그를 신뢰해 「잠시라도 히데요리의 오야시로(親代, 부모를 대신해 아이를 양육하는 사람)가 되었으면 한다. 내게는 부모도, 상담할 수 있는 가신도 없다.」라고 편지를 남겼을 정도다.[16]
게이초 9년(1604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7주기, 15년(1610년) 13주기 대제(임시 제례)에서는 총 봉행을 맡는다. 또 조정과 도요토미 정권의 가교 역할을 했으며 게이쵸 14년(1609년)에 일어난 이노쿠마 사건[17] 의 수사에 교토쇼시다이[18] 의 이타쿠라 카츠시게(板倉勝重)에 협력했다.
게이쵸 10년(1605년)때부터는 이에야스로부터 도요토미가의 직할지인 셋츠 국·가와치 국·이즈미 국·쇼도시마를 관할하고 나라 봉행의 직책에 임명된다. 그 해까지 열린 혼다 마사즈미에 따른 지방의 33국 향장·국가 작성 사업에서는 5부교 담당 국가의 그림 작성뿐만 아니라 이에야스 시절의 후시미 성안에서 전반적인 실무에도 손을 대기 시작한다. 게이쵸 13년(1608년)에는 가와치 국 사야마 번의 영지에서 일어나는 대공사인 사야마 연못 치수 사업의 책임자로 임명된다.
게이쵸 16년(1611년)이 되자 슨푸 성을 노리던 이에야스가 4년 만에 상경한다. 이보다 전에 이에야스가 히데요리에 니조 성에서 면담 요청을 하여 히데요리의 어머니인 요도도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부터 오사카 성에 밀려 들어오는 어려움을 나타 내었는데 카츠모토가 관동 지역과 불화가 되기전에 무엇인가 일어나는 것이 틀림없다.''' 라는 설득을 해서 면담을 성사시켰다. 3월 28일에 니죠 회견에서는 카츠모토도 동석했다. 그 해의 궁중 공사에서는 오사카에서 3만석을 부담했다. 그리고 이미 게이쵸 11년(1606년)에는 이에야스 등의 뜻을 받들고 관할 내에 기독교 금지령을 발표했다. 하지만 게이쵸 19년(1614년)에는 외국인 선교사가 기초한 금지령에 따르는 교회를 부숴뜨리고 기교 정책를 철저히 하고 53명의 포로들을 히젠 국 나가사키로 보냈다.
1.4. 호코지 종명 사건
게이쵸 19년(1614년) 3월에는 재건을 시작한지 14년째이 되는 호코지 대불전이 거의 완성 되어가고 있었고 히데요리의 이름에서 전국에서 이름난 주물 기술자를 모은다. 그리고 사찰의 범종도 4월에는 완성하고 5부교의 대표로 그의 아들중 하나인 카타기리 히가시와 도요토미 어전의 이름도 새겨졌다. 상단의 글씨는 당시 천황인 미이데라 친왕의 친필에 따른다.
5월이 되자 이에야스는 카츠모토에게 방광사의 공양 담당을 지명한다. 7월에는 덴노의 허가를 받들어서 새로운 친왕를 지명한다는 칙명이 내려진다. 이에야스는 개안 법요(불교 집회)를 본래 8월 3일에서 날짜를 히데요시의 기일인 8월 18일로 바꾸라는 지시를 내렸다. 18일은 히데요시의 17주기 대제의 날이 되면서 카츠모토는 두 법회를 8월 3일로 하고 이른 아침(새벽)에 츠네타네 법 친왕을 개안하여 당 집회의 도사를 천태종 승려를 상좌로 임명한다.
7월 말 이타쿠라 카츠시게부터 이에야스에 대한 보고로 종명, 상량, 좌석 등에 의혹이 걸리게 되고 이에 항의하여 봉기를 일으키는 호코지 종명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슨푸에서 혼다 마사즈미를 중심으로 조사가 이뤄지며 이타쿠라 카츠시게의 대불 개안과 불공은 연기가 결정된다. 8월 13일 밤이 되자 이에야스가 오사카 성이 가지 않은 가운데 카츠모토, 오노 하루나가 등이 슨푸로 파견되는 일이 벌어지고 17일은 마리코 여관의 숙소에서 카츠모토가이 준부 봉행에 얻어졌다.
8월 18일이 되자 주지인 임제종의 승려 및 그 하위에 속한 교토 오산의 7명의 스님이 의혹에 대한 검증이 내려져 일부 공사비용을 빼돌린 자산이 문패에 숨겨진것이 밝혀진 문제로 '''국가 안강'''과 이에야스의 시호를 이용한것은 불경으로 간주되어 다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19일에 카츠모토는 이타쿠라를 만나서 항의를 했지만 이에야스와의 회견도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29일에 슨푸 진입한 임제종의 무관인 오쿠라 쿄노츠보네는 이에야스와 순조롭게 면회를 하여 이 문제를 세심하게 다루고 가신인 야마모토 토요히사는 평화로운 협정으로 평가했다. 9월 8일이 되자 임제종의 주지승인 곤치인 스덴은 오쿠라 쿄노츠보네와 함께 '''대부님의 기분이 나쁘지 않고 오사카에서 논의한 뒤 이후에도 도쿠가와 가문과 도요토미 가문 사이에 틈과 미심쩍은 것이 없는것 같다는 대책을 마련하고 에도에 맹약서를 참배해 달라.'''라고 알려지면서 9월 12일 귀환한다.
도쿠가와 가에 양보의 자세가 없다고 보고한 카츠모토는 뒤에서 승려들에게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히데요리의 안정와 에도에 평화, 요도도노를 에도로 소환해 인질로 할것, 히데요리가 오사카 성을 나오면서 다른 나라에 압송''' 중에서 하나를 조속히 할것을 제안하지만 히데요리의 원로 가신중 한 사람들인 오오노 치요시, 와타나베 타다시 같은 요도도노의 측근들부터 이에야스와의 내통을 의심을 받게 된다. 결국 그들은 9월 23일에 오다 노부타다, 스스키다 카네스케들을 토벌대로 암살 계획을 통보 받는다. 이때 카츠모토는 집에 틀어박혀서 수비를 다지게 되고 히데요리 직속의 문관인 와키무라 시게나리에서 이를 조정하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28일에 고야산으로 들어가고 성을 나오기로 하였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리 쪽에서도 불충한 자임을 이유로 개역이 결정된다. 거기서 곡물과 금 등의 계정 인수를 하면서 10월 1일에 300명 정도의 병사들을 데리고 동생 카츠시게와 부하인 이시카와 사다노부 등과 함께 오사카 성의 다마쓰쿠리 문으로 퇴각했다. 카츠모토는 카츠시게와 그의 수하 무장중 하나인 이바라키 세이카 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이 날은 이미 카츠시게부터 카츠모토의 집이 파괴된 보고를 받았던 이에야스로 부터의 오사카 전투의 선전포고를 하는 날이기도 하다.
1.5. 오사카 전투
오사카 전투에서는 이에야스에 인질을 보내고 10월 10일에는 카츠모토는 토사 국에 오사카에 대한 회송을 금지하고 있었다. 10월 12일에는 가신의 타라오 자에몽을 시켜서 300명의 병력으로 사카이 타다츠구에게 보냈지만 요격되어 자에몽도 전사에 이른다. 스스로도 본대를 이끌고 길을 가기 위해서 아마가사키 항구를 노렸으나 잘 되지 않고 도망치듯 돌아간다.
이에야스가 니조 성에 도착한 23일에는 군 회의에 끼어 선봉을 명한다. 11월 1일에는 쇼도시마 주변 3개국에 물자의 회송으로 오사카 성의 경제 봉쇄를 명령하였고 3일부터 5일까지에는 사카이 무리의 분전을 칭찬하는 이에야스에 협력을 한다. 12월에 도쿠가와는 사나다 마루의 싸움으로 인해서 패전과 식량 부족 문제 등으로 전황은 좋지 않았다. 거기서 16일에는 북쪽에만 100문 이상의 커다란 대포공격을 개시하고 18일에는 카츠모토도 이에야스의 포술장의 수십명을 이끌고 비젠지마루 부터 혼마루 물구덩이도 근처에서 포격전 등을 벌였다. 이 전과가 오사카 쪽을 강화의 자리에 앉는 하나의 계기가 됐다.
게이초 20년(1615년) 1월에 은거를 냈지만 용납되지 않았으며 다치바나 후시미 등에 의해서 저택이 주어졌다. 에도에 돌아온 후에는 여름의 진이 일어났으며 4월 26일 밤중에는 타츠타 성 주변에 방화가 일어난다. 5월 6일 오후 카츠모토는 도묘지에 도착하여 7일 새벽에 큐우호우지 에서 장군·도쿠가와 히데타다 휘하의 대열에 합류하고 군감·이시카와 사다노부, 마키타 히로시등과의 제장과 함께 모였다. 카츠모토는 오카야마 진입에 관한에 포진을 받았다. 첫 출전의 양아들인 카타기리 타카토시에게는 가신의 매호인 하치에몬을 지어보내고 있었다.
오사카 성 함락 후에는 오노 하루나가가 히데요리와 요도도노와 함께 산골 마루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의 구명 탄원의 청탁과 함께 카츠모토에게 알려서 히데타다에게 통보하였다 결국 도요토미 가문은 구명이 이뤄지지 않고 멸망한다. 1년전부터 폐병을 앓아 이에야스가 보내준 의원에게 진찰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 20일 가량 지난 5월 28일 경에 저택에서 60세로 사망했다. 장례는 후하게 치루어졌다.
나중에 그의 자리는 적남 타카토시가 자리를 이었지만 다쓰타 번의 1만석은 그 조카이자 4대인 카타기리 타메지가 젊은 나이로 요절한 것으로 인해서 1655년에 단절되고 말았다. 이렇게 카츠모토의 계통은 끊어졌으나 야마토국 이즈미 번 1만 1천 석의 영주가 된 동생 카타키리 사다타카의 가계는 메이지까지 다이묘로 존속되었고 그 자손은 메이지 시대가 되어 자작으로 서위 받았다.
[1] 이후의 자세한 내용은 오사카 전투를 참고.[2] 현재의 시가현 나가하마시 스가타니[3] 이때 낙성 전날(8월 29일)의 아자이 나가마사로 부터 카타기리 나오사다에게 내리는 서신이 현존하고 있다.[4] 이시다 미츠나리의 형[5] 馬廻衆, 다이묘의 경호 및 연락 담당[6] 東市正, 교토의 동쪽을 관리·감독하는 직책, 원래는 정육위상에 해당함.[7] 小堀正次, 빗추 마츠야마 번 초대 번주[8] 浅野長政, 기이 기슈 번 초대 번주 아사노 요시나가(浅野幸長)의 아버지, 오봉행중 하나[9] 당시에도 독살이라는 논란이 있어 안도 사네스에(安東実季, 아키타 사네스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히타치 시시도 번 초대 번주)가 도쿠가와 측에 해명하기도 했다.[10] 아키타 안도(秋田安東)가와 히나이 아사리(比内浅利)가의 분쟁, 이후 조정되는 듯 하였으나 결국은 다시 문제가 불거지고(이때 카츠모토가 중재) 도요토미 내부에서도 두 측으로 갈라져(안도 가는 나츠카 마사이에, 키무라 시게코레, 아사리 가는 마에다 토시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암묵적으로 지지) 의견이 분분했으나 당사자 아사리 요리히라가 게이초 3년(1598년) 1월에 병사[9] , 당주를 잃은 히나이 아사리 가가 혼란에 빠지면서 사건은 흐지부지 종결된다.[11] 宮城豊盛,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에 참가했으나 동군과 내응, 이후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오토기슈(御伽衆, 주군에게 상담, 조언 등을 하고 말동무가 되어주는 역할)가 된다.[12]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교토 다이고지(醍醐寺)에서 개최한 하나미를 의미한다.[13] 傅役, 보좌역, 즉 문무 및 예절 등을 교육하는 후견인 역할[14] 小出秀政, 이즈미 국 키시와다 초대 번주[15] 명목상일지라도 당시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의 가신이었기 때문[16] 구로다 모토키(黒田 基樹), 『羽柴家崩壊:茶々と片桐且元の懊悩 (中世から近世へ)』[17] 고요제이 덴노의 애첩과 여러 조정 고관들 사이에서 벌어진 성추문. 격노한 고요제이 덴노는 전원 사형에 처할 것을 명하였으나 당시 공가의 법에 사형은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에도 막부의 힘이 여러 공가에 스며들어 있었고, 사건의 수사권도 막부에 있었다. 또한 조사 과정에서 생각보다 연루된 인원이 많다는 것이 드러나자 전원 사형에 처할 경우 대혼란이 빚어질 것을 우려한 고요제이 덴노의 생모 카쥬우지 하루코(勧修寺晴子)의 탄원이 수사를 주관한 교토쇼시다이에 전해진다. 결국 주모자 두명은 사형에 처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사건을 종결하게 되었고, 주변의 설득으로 막부의 훨씬 가벼운 처벌에 동의할 수 밖에 없게된 고요제이 천황은 실의에 빠져 자주 양위를 입에 올리곤 했다. 이 사건으로 공가(公家)의 난잡한 성생활이 만천하에 드러났으며 에도 막부가 궁정에 간섭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18] 京都所司代, 원래는 쇼시다이라는 이름이었으나 오닌의 난의 혼란으로 한동안 책임자가 임명되지 않았다. 1568년(에이로쿠11년)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의 치안 유지를 위해 교토쇼시다이라는 이름으로 부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