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키자카 야스하루

 



脇坂安治 ( わきざか やすはる) 협판안치
(1554 ~ 16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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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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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키자카의 가몬[1]
센고쿠 시대, 에도 막부 시대에 활약한 무장이자 다이묘. 성인 와키자카는 '와키사카'로 읽기도 한다.

2. 생애


텐분 23년(1554년) 오우미(近江) 국(지금의 시가 현) 출신으로 와키자카 야스아키의 장남이다. 본래 아자이 나가마사의 가신이었는데, 1573년 아자이가가 오다 노부나가의 공격으로 멸망하자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아케치 미츠히데의 부장이 되어 단바 공략전에서 공을 세웠다.
이후 무슨 이유에선지 모시던 아케치 미츠히데를 떠나고 하시바 히데요시를 찾아가 그 밑에서 히데요시의 쥬고쿠 평정전에서 활약했으며 혼노지의 변 이후 히데요시의 통일전쟁에서도 활약하여 영지를 하사받았다. 이런 실전 등을 보면 와키자카는 육전에서 다양한 전공을 세웠으나 이후 해적집단이 주둔 중이던 영지를 받고[2] 1590년 무렵부터 수군 지휘관을 담당하였다. 이렇게 관직이 바뀐 직후 도도 다카토라, 구키 요시타카와 함께 수군의 지휘관이 되어 호죠가의 오다와라 성 공략전에서 수군을 이끌고 성을 봉쇄하는 활약을 했다. 즉 '''이때부터 임진왜란까지 수군 담당으로 전직하는 탓에 임진왜란으로서의 유명세(?)밖에 모르는 태반의 한국인들이 착각을 하게 된 것'''으로 즉 대부분이 잘못 아는 것과는 달리 해전 전공 무장까지는 아니라는 소리. 애초에 이 때의 3대 수군 지휘관 중에선 원래 해적 출신이던 구키 요시타카를 뺀 나머지 둘은 죄다 갑자기 영지가 해적이 있는 영지였던 탓에 어쩔 수 없이 전직하게 된 케이스다.[3] 다만 그렇다고 해도 오다와라 성 공략전에서 수군을 이끌었던 경험이 있는 만큼 수전의 문외한은 분명히 아니었다.
임진왜란용인 전투에서 '''1천 6백 명의 병력으로 7~8만의 조선군을 패주시켰다.''' 용인 전투는 임란 초기 조선군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전투. 단 수성하는 입장도 아니고 공격 측이면서 40~50배가 넘는 병사들을 학살한 건 아니고, 전시상황에 태평하게 아침밥을 먹고 있던 7~8만의 군인이 '''와키자카군의 기습에 쫄아서 무작정 도주하다가 서로 넘어뜨리고 짓밟고 난리법석이 나면서 일어난 참변이다.''' 실제 기록상 조선군 전사자는 10%도 안 되는 1천 명이라는 소수였고 일본 측 기록에서도 조선군이 '''궤주(패배하여 무작정 도망침)'''라고 기술하기도 했다. 피해량만 따져보면 수습할 필요도 없는 수준이지만 '''1할도 안되는 극소수의 병력에게 수십 배의 병사가 기습을 당했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못 하고 도주하면서 적군과 비슷한 숫자의 병사가 제대로 반격도 못 해보고 패했다'''라는 점에서 빼도박도 못 하는 흑역사. 어쨌든 자신보다 수십 배나 큰 규모의 적을 맞아 이김으로써 조선의 도성탈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업적을 세웠으니 무장으로서의 자격은 충분해 보이긴 하지만 얼마 안 가 한산도 대첩에서 대패하고 만다.
한산도 대첩에서 대패한 와키자카는 조선의 추격 선단을 피해 달아나다가 무인도에 갇혔고, 거기서 10일을 미역만 먹으며 조선 수군이 수색을 포기하기만 기다렸다. 이후 조선 수군이 철수하자 타고 온 배의 잔해로 뗏목을 만들고 간신히 탈출한다. 일본에 돌아간 와키자카는 이때 일들을 과장이나 축소없이 그대로 기록했고, 이 패배를 잊지 않기 위하여 한산도 대첩이 벌어졌던 날짜는 집안 전체가 미역만 먹는 풍습이 생겨났다. 현대의 후손들은 한산도 대첩하면 집안에서 미역만 먹는 날이라고 언급할 만큼 치욕적인 대패였던 건 확실하다. 참고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도도 다카토라와 함께 칠천량 해전에 참가,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궤멸시키게 되나[4] 명량 해전에서 또 패배한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노량해전에 참전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노량해전은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끌던 함대가 주축이 된 것으로 와키자카 본인은 노량해전이 발발하기 전에 다른 일본군과 함께 돌아갔다.
왜란이 종결되고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본래 서군이었으나 전투가 일어나기 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미리 동군으로 갈 의사를 밝혔고 세키가하라 도중에 배신, 오오타니 요시츠구를 패퇴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사실 이를 본다면 와키자카는 배신을 때리고 천수를 누린 배신자일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게 원래 와키자카는 '''세키가하라 이전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르는 입장이었다.''' 그런 만큼 이 전투에서도 동군 진영에 가담해서 싸우는 장군A가 될 뻔 했지만 하필 미츠나리가 다스리던 오사카의 성에 있었기 때문에 '''진실이든 거짓이든 서군에 합류 안 한다고 말하는 순간 지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마음은 동군인데 진영은 서군에 있게 된 것으로 의도가 그러니 만큼 대부분의 전투도 설렁설렁 넘기고 있었고 기회가 오자 오오타니 요시츠구를 패퇴시키는 활약을 하면서 동군으로 이적한 것으로 이는 어디까지나 '''이전 행적만 봐도 친 도쿠가와 파라는 걸 알 수 있던 와키자카를 억지로 품었던 용인술 호구 미츠나리의 실책이었다.'''
이후 중앙에서 다이묘를 견제하려는 분위기를 눈치채고 일부러 세력 확장을 억제하여 와키자카 가문은 에도 막부까지도 무사히 존속했으며 오히려 에도 중기에는 후다이 다이묘로 오히려 중앙 측에서 치켜세워주기까지 했고 이후에도 온당하게 처신하여 메이지 유신을 넘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유명해진 계기가 미역 에이포스인데 이 부분도 그 당시 가주였던 와키자카 겐지 측에서 직접 동의하고 지원한 것.
어쨌든 그렇게 도쿠가와의 동군으로 이적한 후, 60세가 되던 1614년에 벌어진 오사카 전투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고 차남이자 적자인 와키자카 야스모토를 대신 보냈다.[5] 이듬해인 1615년 야스모토에게 가문을 물려준 뒤 교토로 떠나 은거 생활을 했으며, 1626년 음력 8월 6일 교토 자택에서 7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3. 기타등등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중 최연장자이다. 단 사망년수가 가토 요시아키(1631)가 야스하루(1626)보다 5년 이후인지라 더 오래 산 것처럼 보이지만 가토는 와키자카보다 5살 넘게 어렸기 때문에 와키자카는 사후에도 칠본창 최연장자의 자리를 지켰다.
임진왜란 때 자기들이 이긴 것은 부풀리고 진 것은 쉬쉬했던 여러 일본 장수들과 달리, 자신의 승패를 솔직하게 기록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6]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자신이 와키자카 등과 같은 칠본창으로 묶이자 '''이따위 놈들이랑 동급이라니'''라는 식으로 공개적으로 불쾌하게 반응한 기록이 있다.
하지만 후쿠시마, 두 가토(기요마사, 요시아키) 등은 히데요시가 인위적으로 키웠던 인척 세력이었기때문에, 와키자카 외 3명이 되려 낙하산 들러리에 이용당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와키자카가 3만 3천석의 영지를 받을 시점까지 후쿠시마, 가토 등은 1만석 이하의 미미한 영지를 영유하고 있었다.
1) 가토 기요마사는 규슈 정벌(1586)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 직할령 24만 석을 관리하는 '성대(성주 대리)'로 발령이 났으며, 2) 가토 요시아키 또한 1586년 이후 아와 1만 5천 석, 3)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1587년이 돼서야 이요에 11만 석이 주어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에게 보낸 편지 수십 장이 해독되었다. 여러 모로 깐깐하고 집요한 히데요시의 성품이 잘 드러난다고 한다.
2016년 1월 21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에게 보낸 33편의 편지가 공개되었다. 기사 무려 10여년 동안 보낸 것으로 편지 내용이 해석된 결과 '히데요시가 상당히 아끼던 장수 중 한 명' 으로 드러났는데, 애당초 칠본창 일원 전부 히데요시가 직접 뽑고 기른 일원이니 만큼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타 일원에 비해 지명도가 적었던 영향인지 전에 비해선 비교적 위상이 오른 편이다.
참고로 임진왜란 이후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후손인 다쓰노 번주이자 도쿠가와 막부의 신료였던 와키사카 야스타다는 1811년 마지막(12대) 조선통신사를 당시 일본 막부 측의 부사로서 대마도에서 접대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어찌보면 조상과 후손이 각각 조선과의 인연이 어느정도는 있었던 셈이다.

4. 창작물에서


'''능력이 평균 이상임에도 불구하고[7] 일본보다 한국 창작물에서 대접이 더 좋은 특이한 인물'''이다. 임진록 2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과의 라이벌 중 한 명으로 나오는 것만 해도 엄청난 특례. 이 때문에 그 두 작품보다 취급이 더 안 좋아진 명량이나 징비록에서 나오는 와키자카의 모습에 대해 위화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8]
또한 조이온에서 제작한 임진록 시리즈와 거상에서의 와키자카가 사용하는 무기가 총인데,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 및 명나라 장수들을 임진록 시리즈에서 처음 접한 사람들은 와키자카가 실제로도 조총을 주로 사용하는 일본 제일의 명사수 정도로 인식한다.
국내에선 일본 측의 장수임에도 불구하고 종합적으로보면 '''긍정적인 면에서''' 인기가 있는 편인데 이는 국내의 역사스페셜 방송에서 그의 관점에서 한산도 대첩을 방영하였던 적도 있고 유명한 드라마인 불멸의 이순신에서 와키자카역 배우인 '''김명수의 열연'''에 이 작품내에서는 역사와는 다르게, '''이순신의 라이벌이자 일본 수군 최고의 무장'''이라고 띄워주는 등, 이래저래 긍정적인 평가가 많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실상은 상술했듯이 일본에선 여차하면 대체할 수 있던 장수임에도 이 정도까지 띄워지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게 ''' 용인에서 수십 배나 규모가 큰 적을 맞아 승리해 굉장한 인물로 손쉽게 포장할 수 있고, 3대 대첩 중 으뜸이며 제일 유명한 한산도 대첩에서 일본군의 총사령관으로 종군한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흥행을 위해선 부각시킬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결과적으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에게 '''일본 수군 최고의 명장'''으로 끼워넣기에 참 좋은 이유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다.[9]
또한 한산도 대첩만이 가지는 특징도 있다. 창작물로서 바라볼 때 이순신 최후의 전투인 노량 해전이나 패전 이후 최악의 위기 상황에서 승리한 명량 해전과는 달리, 한산도 대첩은 고증대로 묘사할 경우 극적 긴장감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당시 조선 수군은 옥포 해전부터 시작된 연전연승, 신무기인 거북선의 완전 배치, 그리고 전라도-경상도 수군 연합함대의 결성 등으로 전력이 제대로 갖춰지고 장졸들의 사기 또한 최고 수준이었다. 창작물에서는 주인공이 불리한 상황에서 고난을 극복하고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어야 재미를 이끌어낼 수 있을 텐데 한산도 대첩은 배경이 그러하지 않았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극적 긴장감을 제대로 끌어올리지 않으면 한산도 대첩 역시 '흔해빠진' 일방적인 승리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이러면 왜 한산도 해전이 '대첩'인지, 그리고 왜 임진왜란의 해전 중 최고의 승전으로 꼽히는지에 대한 설명이 어려워지며 흥미도 떨어지게 된다. 이때 극적 긴장감을 이끌어내는 가장 간편한 방법은 바로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그의 함대 전력을 최대한 버프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조선 측은 '이번 전투에서 만날 적장인 와키자카란 자는 지금까지 싸웠던 왜적과는 차원이 다른 놈이다', '이번 싸움에서 지면 지금까지의 승리들도 모두 물거품이 된다'라고 표현하고, 일본 입장에서는 '전황은 조선 측으로 기울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는 심정으로 일본 수군 최고의 장수인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투입한다'라는 식으로 표현함으로써 긴장감을 유발시키게 된다. 그리고 조선 수군이 한산도 해전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그 긴장감을 화끈하게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10] 게다가 그것 말고도 한국에서는 사상 최악의 패배와 가장 큰 대첩들에 모조리 참전한, 은근히 고니시 못지않게 조선에서 유명한 전투에서 뛴 유명(?) 무장이라는 점도 있다.
그런데 정작 일본에서는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의 일원이라는 점이라든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를 배신했다는[11] 점만 빼면 유명해질 만한 이유가 없다. 일본에서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의 특성을 고려하면 한국에서 더 유명한 것도 이상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국내에서는 이런 여러 의도로 인해 유명하지만, 상술했다시피 정작 일본내에서의 인지도는 극단적으로 말해 듣보잡을 겨우 면할 수준이다. 와키자카는 임진왜란 당시에도 고작 3만석의 영지를 거느린 인물로[12] 그 당시 영향력 있는 다이묘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으며, 선봉장 고니시와 가토 기요마사의 영지는 약 20만 석이었고 노량해전에서 개박살난 시마즈 요시히로는 혼자서만 10만 석을 다스리며 사츠마 시마즈 가문 전체 영지는 약 60만 석이었다. 와키자카와 비슷한 일례로 가토 기요마사가 국내에선 선봉대장이라는 이미지가 강해 대단한 인물처럼 비춰지지만 그 당시 일본 측에서는 칠본창의 수장은 끝까지 후쿠시마 마사노리였고 기요마사는 그저 칠본창의 일원 중 하나이자 1군을 맡은 장수 하나에 불과했고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들을 회유할 때도 한 명 한 명 회유한 게 아니라 칠본창의 단장 격이던 후쿠시마가 설득당하자 나머지도 덤처럼 딸려온 셈이라 더더욱 일본에선 그리 대단한 이미지가 없다. 실제 전장을 봐도 조선 측이 초반에 육전에서 참패하고 다녀서 위상이 지나치게 커졌지만 선봉대장이란 관직은 의외로 위험에 비해 얻는 게 적은 위치이기도 하다. 상기한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와키자카와 같이 칠본창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와키자카 '''따위'''와 내가 동급이라고?"라며 황당해했던 실제 기록이 있을 만큼 와키자카는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듣보잡이었고 그게 지금도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일본인들 중에서 역사에 어지간히 관심있는 사람들도 이 사람을 잘 모른다고 한다. 되려 불멸의 이순신을 시청한 몇몇 일본인들 사이에서 "이렇게까지 분전했던 장수를 우리가 몰랐었다니 부끄럽다"라는 반응이 있었다.
일본 창작물에서는 듣보잡답게 '''거의 등장하지도 않는다.'''[13] 게임, 만화, 소설은 물론 심지어는 사극에서도 마찬가지 대접이다. 다만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공명의 갈림길에서 등장하기는 한다. 공명의 갈림길에선 시즈가타케 전투 에피소드에 등장하며 전투 후 3천석을 받은 이후엔 역시 안나온다. 아도삼에서는 세키가하라 전투 편에서 일단 코바야카와 히데야키가 배신 때릴때 같이 배신때렸다고 언급되고, 그 이후에 승전 축하자리에서 1컷 나오고 끝이다.

4.1. 불멸의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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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에 자주 출연하는 연기파 배우 김명수가 맡았다. 이순신하고 라이벌 관계에 있는 일본 무장으로 설정되어 일본 수군 최고의 장수라는 나레이션이 나오는 등 알게 모르게 버프를 많이 받았고, 김명수의 열연에 힘입어 한국인들에게 와키자카 야스하루라는 인물의 존재를 알리는데 크게 공헌했다.
드라마상에서는 젊은 시절의 와키자카가 한량 이순신과 칼싸움을 벌이고,[14] 이순신이 와키자카의 얼굴에 상처를 냈다는 설정이 추가되어 시작부터 라이벌 플래그를 세워 놓았다. 이후 와키자카는 마지막회까지 쭉 얼굴에 흉터가 있는 채로 등장한다.
임진왜란 파견 당시 고니시의 선봉대에 포함되어 적지 않은 전공을 세웠고 천명 좀 넘는 병력으로 5만의 조선군을 몰아내는 용인 전투까지 조명되며 수군 장수가 본업이 아닌 육전에서도 큰 전공을 세웠다고 열심히 띄워졌다. 한편 남쪽에서는 이순인이 일본 수군을 하나씩 박살내며 큰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었고, 이에 일본에서는 이순신을 상대하기 위해 일본 최고의 수군 장수인 와키자카를 남쪽으로 파견하는데... 이후 이순신의 동네북 1이 되어 싸울때마다 이를 빠득빠득 갈면서 이!순!신!을 외치는 신세가 된다.
이후 부산포 해전진주성 공격에도 실패하면서 위신이 땅에 떨어진 와키자카는 절치부심하여 원균을 박살내고 이순신을 마저 제거하러 명량까지 쫓아가지만 다시 대패. 노량 해전에도 참전하지만 늘 그랬듯이 선빵을 맞고 부들대면서 털린다. 전투 중에 가리포 첨사 이영남과 칼싸움 끝에 바다에 빠지는 모습이 마지막.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이순신에게 패한 것을 참지 못해 자결한다고 적어 놓았지만[15], 논란이 많았는지 최후를 애매하게 처리했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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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키자카 하면 떠오르는 '''미역으로 웰빙하라!''' 짤방이다. 구글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로 검색해 보면 우측의 인물 설명란에 이 짤방이 대표 이미지로 뜬다. 아마 이미지 검색 때 제일 먼저 뜨는 이미지가 이 짤방이기 때문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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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명량 해전에서는 기분이 좋을 때는 고양이를 쓰다듬다가 기분이 불쾌해지면 집어던지는 등의 기행을 보여준다.[17][18]
불멸의 이순신이 한창 유행할 때 '''"내가 죽이고 싶은 사람도, 가장 존경하는 사람도, 함께 차를 마시고 싶은 사람도 이순신이다"'''라며 이순신을 존경했다고 그가 직접 말했다는 글이 퍼지기도 했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다. 이순신을 통해 민족적 자긍심을 극대화하려는 의도 때문인지 유독 이런 낭설이 많다.
하여튼 불멸의 이순신 탓인지 우리 나라에서 필요 이상으로 용인 전투의 맹장이니,[19] 가토와 고니시랑 맞먹는 일본군의 대표 장수 운운하며 지나치게 띄워주는 인물이다.[20]

4.2. 임진록 시리즈


임진록 2에선 조총을 사용하는[21] 장수로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다는 걸 빼면 장점이 없다. 임진록 2에서는 와카자키라는 잘못된 이름으로 나왔는데, 조선의 반격에선 교정되었으나 녹음된 음성은 여전히 "와카자키입니다". 체력도 낮고 공격력도 별로고 기동성도 떨어진다.
그나마 임진록 2에서는 이순신과 유닛 성능만 놓고 보면 엇비슷한 정도였으나 조선의 반격에서 이순신에게 가공할 마법 기공신포가 생기면서 이젠 이순신만도 못하다.[22] 대신 귀갑차에 탑승시키면 장수 보호도 되면서 장수 특유의 격려 시스템이 그대로 적용되고, 또 와키자카가 총병 유닛인지라 탑승시키면 귀갑차 기본 공격력도 상승하니 원펀치 쓰리 강냉이. 총병 계열에 공격력, 방어력 격려 효과를 많이 주기 때문에 조총병과 귀갑차를 끌고 다닐 때 데리고 다녀주자.
조선의 반격 시나리오에서는 이순신을 저격하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인다.[23] 다만 임진록 2 오리지날의 음성을 그대로 채택하는 바람에 선택시 대사에서는 여전히 자기 이름을 '와카자키'로 부른다.

4.3. 천하제일상 거상


임진록 2와 마찬가지로 조총을 사용한다. 조총낭인의 레벨 40부터 와키자카로 전직이 가능하다. 임진록 2의 와키자카와는 달리 두 가지의 공격타입이 존재하는데, 커다란 조총으로 한 발을 쏜 다음 쌍권총을 꺼내 여섯 발을 발사하고[24] 다시 조총을 꺼내 쏘는 방식이다.
고유기술은 '''일격필살'''이라 불리며 쌍권총을 쏘는 상태에서 일격필살이 발동될 경우 발사된 여섯 발 모두 일격필살이 발동된다. 이 상태로 여섯 발 모두 명중시키면 몬스터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힐 수 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여전히 와키자카를 데리고 다니는 유저들이 존재한다.
레벨 80부터 2차 장수인 지진차로 전직할 수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조총낭인문서 참조.

4.4. 코에이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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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코에이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능력치가 '''C급'''이다. 전투치가 70대 초반이고 나머지 능력치는 별볼일 없고, 태합입지전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 이를 두고 '와키자카 맹장 떡밥'에 낚인 사람은 "임진왜란은 일본에서도 흑역사 취급하니까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도 왜란 참전 장수들을 낮게 책정하잖아"라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와키자카나 우키타 히데이에[25] 같은 인물들만 놓고 보면 이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26]도 한국인들 생각보다 그렇게 능력치가 높은 편은 아니니까. 그러나 가토 기요마사, 시마즈 요시히로, 도도 다카토라, 나베시마 나오시게코바야카와 타카카게만 봐도 그런 말은 나올 수 없다. 노량 해전에 참전해 이순신과 맞붙은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경우 창조 기준 통솔과 무용이 모두 90이 넘고 서국무쌍이라는 고유의 특기까지 갖춘 준수한 능력치를 보유하고 있다. 무엇보다 임진왜란의 주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만 봐도 답이 나오는 문제. 고니시나 와키자카의 경우, 일본 내에서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외에는 이렇다할 특기할만한 군공이 없는데, 임진왜란에서 이들이 보여준 능력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저평가되었다고 볼 수 있다.
태합입지전5에선 무력만 78이고 통솔은 56, 전투쪽 기능은 3레벨이 무운 말고는 없다. 그나마 꼴에 다이묘라고 안 짤리고 나온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지.. 그래도 쓰기에 따라선 칠본창중 나가야스, 가츠모토, 다케노리보단 나을 수 있다. 물론 마사노리, 기요마사, 요시아키와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
전국무쌍 4전국무쌍 4-2 에서는 도요토미 측 클론무장으로 등장한다. 임진왜란 때 활약은 일본에서 듣보잡이라지만 나름 칠본창이고 유니크하게도 해전에 뛰어난 무장인데 대접이 박하다. 게임에서도 적으로 등장할 때 배를 끌고 등장하기도 한다.

4.5. 명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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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키자카 야'''쓰'''하루로 표기된다. 담당 배우는 조진웅. 기존 다른 한국발 매체에서 상당히 버프를 받았던 것과는 반대로 오히려 실제 역사를 정확히 반영한 안습한 위치로 묘사된다. 구루시마 미치후사와의 티격태격 장면에서 깨갱거리는 눈물 나오는 역할에, 해전에 들어가서도 소극적으로 미적거리다가 후반부에 만신창이가 된 이순신 대장선을 향해 돌격을 감행하지만 역으로 조선 수군의 충각술에 휘말려 안드로메다로... 근데 메이킹 필름 보면 아주 약간 나오는데 투구 없는 상태로 갑판 잡고 부들부들거리고 있는 거 보면 살아있는 것 같긴 하다.[27][28]
저평가 되었다고는 하나 충성심이 강하고 흉폭한 구로시마를 상대로 밀리지 않는 기세를 보이며 이순신을 얕봐선 안된다고 거듭 말하는 것을 보면 장수로서 기본적인 안목은 있는[29] 인물. 다만 능력이 조금 부족했을 뿐. 이순신의 발언이나 와키자카의 행동을 볼 때, 본인의 처참한 경험으로 인해 소극적인 행태를 가진다는 암시가 나온다.
명량에 등장하는 와키자카의 가몬이 묘하게 어떤 명품 브랜드 혹은 모 자동차 메이커 마크와 상당히 유사해보인다. 이 가몬은 원래 무로마치 막부의 충신 중 하나였던 하타케야마 가문의 가몬으로, 와키자카가 결혼을 통해 하타케야마 가문의 영지를 상속받으면서 가몬도 물려받은 것이다.

4.6.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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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에서 권근역을 맡은 김철기씨가 연기한다. 20화에서 등장했으며 육군에게 보급을 하고 나서 자청하여 삼도 근왕병을 무찌르겠다고 한다. 그 입지는 우키타 히데이에칠본창이라고 언급하며 알아줄 정도. 그리고 용인전투에서 조선군 5만을 전멸시켰다는 언급이 나온다. 21화에서 이순신을 치기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장수를 물색하던 중 마에다 토시이에의 추천을 받아 쓰시마에서 증원을 받은 후 이순신을 무찌르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 이전까지는 육군에 배속되어 있었던 모양. 불멸의 이순신때와는 달리 22화에서는 안습함이 마에다 토시이에에 의해 밝혀졌는데 '''그 실력과 명성이 후쿠시마가토에 미치지 못한다'''면서 영 탐탁치 않게 여기자 히데요시가 '''그러니 더 공을 세우기 위해서 열의를 보일 것'''이라며 반드시 이순신을 이기고 수급을 가져 올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와키자카는 도망가는 놈은 조선군이 아니라 내 손에 죽을 것이라며 반드시 이순신을 이기겠다고 다짐한다.
23화 드디어 대망의 한산도 대첩에서 예상대로 썰렸다. 초반에 조총의 사정거리까지 유인하여 섬멸하려던 그의 계획은 학익진에 의해 쌈싸먹혀져 포격으로 하나하나 지워지며 '''그야말로 개털렸다.''' 게다가 이번에는 도도 다카토라와 달리 이순신이 추격까지 명해서 망했어요
일본에까지 이게 보고가 들어가 모든 대신들이 '''"실력도 없으면서 공명심에 들떠 덤비다가 망했어요"''' 식으로 와키자카를 가루가 되도록 깔[30] 동안 마에다 토시이에만이 용인 전투를 들먹이며 그를 변호해 준다.
24화, 목숨만 부지한 채로 섬에 표류한 그의 참상이 묘사되었다. 자기 이외에 안골포에서 구키 요시타카가토 요시아키마저[31] 이순신에게 털린 걸 알자 허탈하게 웃다가 온 몸에 상처입은 채 이순신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오랜만에 47화, 48화에서 등장. 도도 다카토라가 공기화 된것과는 달리 우키타에게 인정받으며 칠천량 해전의 공을 '''"태합전하와 와키자카를 위해"'''라는 말로 축배를 들며 치하받았고 고니시에게 이순신을 제거해주어서 감사하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순신이 복귀하자마자 '''칠천량에서의 승리가 철저히 무색해지는 패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지만.'''
'''노량 해전 예고편에 등장했다!''' 그리고 역시나 관광당하고 쓸쓸히 일본으로 후퇴했다.

4.7. 임진왜란 1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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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대첩 편에 등장했다. 일본배우 타케다 히로미츠가 맡았다. 회의장에서 구키 요시타카가 세키부네에 조선화포를 달자고 하자, 겁쟁이라 디스하며 '이순신의 목은 이 와키자카가 딸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한다. 조선 수군의 진형을 보고 '학익진이구나......!' 라며 탄식한다. 하지만 곧 '우리는 속도다! 학의 날개를 뚫고 그 심장으로 들어간다'라며 포격을 감수하고 학익진의 중앙을 돌파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조선 판옥선의 장기인 180도 선회를 통한 연속 포격으로 궤멸당하고 본인도 바다에 빠지는 신세다.
불멸의 이순신이나 징비록 때와는 달리, 노량 해전 편에는 등장하지 않음으로써 고증이 지켜졌다.

4.8. 경계선상의 호라이즌


다른 칠본창 멤버와 함께 출연한다. 같은 칠본창 멤버인 가토 요시아키와 함께 세트메뉴로 종종 모습을 비추긴 한다.
[1] 불멸의 이순신이나 징비록, 명량 등 한국에서 임진왜란을 다룬 사극 및 영화 등지에서도 자주 나온다.[2] 와키자카의 무가 관위는 아와지노카미(淡路守)로 아와지는 지금의 효고 현 아와지 섬과 누시마 섬 일대. [3] 일본 역사에 대해 자세하지 못한 사람들은 제대로 모르는 부분이지만 이 시대까지도 일본의 '수군'이라는 개념은 다른 외국들 대부분과는 판이하게 달랐는데 애초에 기록을 살펴보면 '''수군(水軍)이란 표현 자체가 없다시피하다''' 대신 그 자리를 대신하던 표현으로는 海賊衆(해적중/카이조쿠슈), 船手衆(선수중/후나테슈)으로 이 당시 일본의 수군이라는 건 사실상 해적이며 동시에 해적이 수군역할을 하는 것.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바다 전용 지방 향토군이나 해전특화 용병에 가까운 존재였고 그런만큼 그 당시 타국에겐 이해하기 힘들지만 유서깊다고 말해야 할 정도의 해적들도 상당수 존재할 정도.[4] 단, 칠천량 해전의 1등 공신은 도도 다카토라이다.[5] 원래 야스타다(安忠)라는 장남이 있었으나 병으로 요절하는 바람에 둘째인 야스모토가 후계자가 되었다.[6] 와키자카기에 의하면 한산도에서 발린 후 해초를 먹어가며 연명한 끝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역사스페셜 등에서 현 와키자카가 당주가 이야기한 것에 따르면 와키자카의 후손은 연례 행사로 그 때를 기리는 의미로 미역으로만 식사를 한다고 한다.[7] 적어도 본인의 멍청한 짓으로 일을 망치진 않았으며 엄청난 전공도 엄연히 존재한다. 물론 그 이상의 흑역사들 역시 존재하지만 이건 '''상대가 인류사 역대 최고급 명장이여서 그런거다.''' 거기다가 최후의 승자랑 좋은 관계를 유지해 끝까지 살아남는등 처세술 역시 발군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8] 특히 명량은 영화 자체가 설정 고증을 포함해 이래저래 망작 소리를 들으며 비판당하던 입장인지라 더더욱 그런 듯하다.[9] 와키자카보다 훨씬 세력이 강했던 도도 다카토라 같은 경우는 정작 임진왜란에서는 별 활약한 게 없다. 칠천량 해전 때 조선 수군을 격파하기는 했지만 이때는 혼자 싸운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규슈 사쓰마 번의 유력 다이묘였던 시마즈 요시히로혼자 싸운 전투가 있긴 하지만 조선군이 아닌 명군을 상대로 거둔 승리라 한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조선군과의 전투는 제2차 진주성 전투, 칠천량 해전, 남원 전투가 있는데, 이때는 모두 혼자 싸운 게 아니어서 한국에서는 더더욱 부각되기 어렵다.[10] 이는 한산도 대첩뿐만 아니라 실제 역사에서도 자주 있었던 패턴 중 하나이다. 즉 상대를 무지막지하게 띄워줌으로써 그런 대단한 존재를 우리가 이겼다! 하고 홍보할 목적으로 고의로 상대를 대단하게 묘사하는 것. 또는 반대로 "우리가 못난 게 아니라 상대가 너무 강해서 이길 수가 없었다며 자신들의 패배를 정당화할 목적으로 상대를 띄우는 경우 또한 있었다.[11] 게다가 와키자카 한 명만의 배신도 아니여서 더더욱 부각되기가 어렵다.[12] 도도 다카토라도 그다지 영지가 크지는 않았지만 히데요시의 동생인 히데나가 가문에 직접 소속된 가신으로 활동한 적이 있어 영향력은 와키자카보다는 훨씬 컸다.[13]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의 일원으로써는 와키자카의 일본 내 인지도는 딱 칠본창 7명 중 아래인 셋에 포함된다. 후쿠시마, 가토 기요마사, 가토 요시아키는 물론이고 카타가리 카츠모토는 세키가하라 이후 도요토미의 오사카 성 수비 책임자로서 그 이름이 잘 알려져 있다.[14] 형 와키자카 야스요시가 허도주 상단과 밀거래를 하던 일본인들의 일원이었다. 이순신이 난입해 밀거래가 파탄나고 야스요시까지 살해당하자 형님의 원수를 갚겠다며 이를 갈고 있었다.[15] 실제로 이런 최후를 맞은 왜장이 있긴 했는데 이 인물은 다름아닌 한산도 해전 당시에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부장으로 출전했던 마나베 사마노조이다. 본래 한산도 해전에서의 패전으로 스스로 책임감을 느끼고 할복한 인물이지만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패전에 분노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와키자카 야스하루 대신 강제 할복당한다.[16] 작중 이영남이 부상을 입고 구출된 걸 보면 극중 일본군에 의해 구출되어 조선에서 탈출한 것으로 보인다. 극중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포섭시도를 당하는 모습이 연출되어 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에 선다는 떡밥을 푸는걸로 볼때 드라마가 진행되는 도중에 본래의 대본이 수정되어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생존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듯하다.[17]고양이의 품종은 당시 동양에 소개된 적이 없는 터키시 앙고라이다.[18] 자고로 집어던지는 장면은 두 장면이다. 하나는 갑자기 왜선이 쇠사슬에 걸려서 충돌하자 놀라 던지고, 마지막은 물살이 바뀌는 시간이 오자 고양이의 눈을 계속 쳐다보고는 기가 막혀 잡은 손을 놓는 장면이다.[19] 물론 자신보다 수십 배나 큰 규모의 적을 상대로 도주하지 않고 단독으로 공격하는 것은 어지간한 담력으로는 어려운 일이니 맹장으로 불리지 못할 이유는 없다.[20] 임진왜란에 일본 수군의 대표급으로 참전했다가 이순신에게 발린 장수라면 단연 구키 요시타카를 꼽을 수 있다. 그리고 구키 요시타카와 함께 안골포 해전에서 패한 일본 장수가 가토 요시아키이다. 용장으로 보면 노량 해전에서 박살난 시마즈 요시히로타치바나 무네시게가 와키자카보다 훨씬 급이 높다. 이순신에게 와키자카보다 더 많이 털리고 자주 털린 유명인물이라면 도도 다카토라가 있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 맞섰다가 형제가 모두 전사한 인물로는 도쿠이 미치유키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있다.[21] 무려 두 자루를 양 손으로 들고 쏜다.[22] 결정적으로, 이순신은 템 맞추면 일격필살 + 화전 연구로 공격업도 적용되지만, 얘는 철갑탄 업글 외엔 그런 거 없다.[23] 이 때의 목소리는 이순신이나 와키자카나 둘다 성우가 동일하므로 자문자답이라 할 수 있다.[24] 쌍권총을 쏜 상태에서 몬스터 한 마리를 사살하면 그 다음 공격에도 쌍권총으로 여섯 발을 쏘는 게 특징.[25]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에서 B급으로 승격되었다.[26] 그래도 고니시는 혁신에서 '''수군 적성이 S'''인 데다가 나머지 시리즈에서 내정관으로는 쓸만한 편이다.[27] 사실 주된 상대로 설정된 건 류승룡이 맡은 구루시마 미치후사다. 물론 와키자카 야스하루나 구루시마 미치후사나 일본 내에서 듣보잡 무장인 건 똑같지만.[28] 명량이 제작사의 의도대로 이순신 3부작으로 제작된다면, 다음에 제작될 한산:용의 출현의 경우 와키자카가 이순신에게 처절하게 패배한 전투인 만큼 부각될 위치에 있다.[29]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과 직접 맞붙을 것이 아니라 진도 외해 쪽을 돌아서 곧장 한양으로 치고 올라가 조선 국왕부터 사로잡은 다음에 조선 수군이 항복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0] 참수해 버리자라는 의견도 나왔다.[31] 적장 이름이나 어떤 전투인지는 정확히 안 나왔지만 안골포 운운하는 걸 보면 한산도 해전 이후 벌어진 안골포 해전을 의미하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