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진주성 전투
[clearfix]
1. 개요
임진왜란 중이던 1593년 음력 6월 22일부터 29일까지 벌어진 전투. 단일 전투 기준 임진왜란 최대 규모의 전투이며 또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온 전투로 추정되기 때문에 진주성 혈전이라고도 불린다.
일본군의 경우 '''참전 장수 명단'''을 보면 클라스가 장난이 아니다. 동원한 병력 역시 9만명이 넘는 숫자인데 이는 점령지를 최소한 유지만 할 수 있는 수준의 병력만 남기고 지상의 모든 가용 전력을 싸그리 모아온 것이나 다름없다. 그야말로 전설이 된 불사신을 죽이기 위해 모든 걸 걸었던 셈...[3] 조선의 경우 승산이 없어보이는 상황에 상당수의 무장들이 구원을 포기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장수와 의병장들이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사지에서 모든 걸 걸었다... 그야말로 단두대 혈전이라해도 무방하다.
내성과 외성이 있고, 남쪽엔 강이 있으며, 서쪽에 절벽이 있어 평지읍성치고는 매우 견고한 성이다. 다만 전쟁 직전 확장해 쌓았던 동문 쪽에 대한 방어력 문제가 임진왜란기에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2차 진주성 전투 때 먼저 떨어진 곳은 방어력이 약한 동쪽이 아니라 북장대 쪽이다. 현대에는 외성(초가집으로 보이는 집들이 바깥의 성벽으로 보호되는 지역)은 허물어졌고 내성만 남아있다.
2. 제2차 진주성 전투의 배경
2.1. 왜군의 보복전 준비
1593년 1월 6일 ~ 9일에 걸처 벌어진 4차 평양성 전투 (또는 '평양성 수복')은 일본군에게 크나큰 충격을 안겨주었으며, 흔들리던 전황이 확실히 조선 측에 기우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 일본군은 보급의 어려움 속에서도 간신히 대등한 수준의 전국을 펼치고 있었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완전히 열세에 처한 것이다.
평양의 패전으로 인해 북상했던 일본군이 서울로 총퇴각한 결과 안그래도 식량이 부족하던 서울의 일본군은 심각한 식량난에 빠졌으며, 각지의 성들 사이의 교통로가 자주 끊어지면서 위기감이 고조되었고 혹독한 추위까지 이르러, 벽제관 전투에서 반전이 일어나나 했던 전황은 행주 대첩으로 인하여 완전히 조선 - 명 연합군 측으로 넘어간다. 심각한 손실을 더는 견디지 못한 일본군은 결국 3월달에 부산포로 총퇴각한다. 임란 개전 후 1년만이었다.
히데요시는 부산포로 퇴각한 이후 4월부터 경상우도 및 전라도 공략을 명령하면서[4] 동시에 화전 양면책을 구사해 6월 초엽부터 명나라 측에 화친 협상을 시도한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전라도 공격, 그에 앞서 진주성을 함락시키는 것이 협상에서 우위에 설 수 있는 조건이라 본 듯 하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투에 적극적이지 않은 다이묘라고 판단된 오토모 요시무네 및 하타 노부토키, 시마즈 다다토키에 대해 꾀병을 부리는 등포스팅 참조 전투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지를 몰수했고 시마즈 요시히로에게는 '''전년도(임진년)처럼 아무런 공적도 쌓지 못한다면 가문이 끊길 것이다'''는 협박을 하는 등[6] 참전 다이묘들을 닥달했고, 이에 영지를 몰수당하고 가문이 끊길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빠진 참전 다이묘들은[7] 하다못해 진주성이라도 함락시켜 전공을 세움과 동시에 히데요시의 분노를 피하고자 했다.히데요시는 조선에 출병한 제장들에게 전라도를 공격하고, 12개의 성새(성과 요새)를 쌓을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제장들은 먼저 성새를 건축해야 한다는 견해라서 구로다 간베에를 히데요시에 파견해 뜻을 전하기로 했다. 히데요시는 적어도 한번은 전라도를 공격하고 나서 사자를 보내야한다며 제장들을 비겁자라고 불렀다. 구로다 간베에에게도 격노해 접견하려조차 하지 않고 봉록과 저택을 몰수했다. 이에 구로다 간베에는 삭발한뒤, 오랫동안 쌓은 공적이 사라졌다면서 조스이(如水)라 칭하고[5]
조선으로 돌아갔다.(프로이스 일본사)
이렇게 왜군의 진주성 공격이 결정되었다.
2.2. 지원 의지가 없었던 명군
이때에 명나라는 평양성 수복전을 통해 전쟁 목적, 즉 만주로 전쟁이 확대되는 것을 막는데 성공하여 참전의 일차 목적을 달성하자[8] 더이상의 전역 확대를 막고자 일본과 협정을 맺고 빨리 떠나고 싶어했다. 조선 측은 이러한 화친 기도에 몹시 반대했으나 상국의 권위를 활용해 주도권을 잡은 것은 명이었다. 단지 유격 오종도(吳宗道)만이 휘하 군대를 이끌고 한양에서 남하했으나 죽산에서 함몰 소식을 듣고 귀환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일본군의 위와 같은 분위기가 강화 협상을 맡은 심유경에게 파악되게 된다. 심유경은 이에 공격 중지를 강력하게 요구했으나 고니시 유키나가는 어쩔수 없다는 답변을 했으며, 어떻게 해서든 진주성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피하니 차라리 진주성을 빈 성으로 만들면 피해가 없을 것이라는 답변을 한다.
이에 명군은 일본군의 의도가 명백하니 진주를 방어하지 말것을 권하기까지 했다. 명군이 진주성 구원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6월 말이었다. 난중잡록에 따르면 이여송은 경상도, 전라도 일대 명군에게 진주성 구원을 지시했다고 하고, 선조 실록에서도 7월 10일이 돼서야 양도의 병력을 진주성 구원을 위해 파견하고 또한 서울에 주둔중인 명의 주력군 중 1만 8천을 끌고 가겠다는 이여송의 약속이 나온다. 그러나 대구, 남원, 상주에 있던 명군을 다 합친다 해도 1만 4천에 불과할 뿐이었고, 이미 전쟁 목적을 달성했다고 여긴 명군 장수들은 진주성 구원 명령에 따르지 않았고 이여송 또한 치일피일 출발을 미루기만 했다.『我日本往晋州兵馬三十萬, 恐不能當, 修書密報。』 今本府之民, 預避其鋒銳。 彼見城空人盡, 卽撤兵東回 해석 - 이번에 진주로 가는 우리 일본 군대가 30만 명이나 되니 아마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편지를 보내어 은밀히 알려』 진주 백성들로 하여금, 미리 예봉(銳鋒)을 피하게 하라. 그렇게 하면 우리 일본 군대도 성이 텅 비고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는 곧 철병(撤兵)하여 동쪽으로 돌아올 것이다. - 선조 실록 40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7월 10일(임술) 8번째 기사
2.3. 수성과 포기 사이에서...
조선 측 또한 딱히 방도가 없었다. 이미 1년여의 전투를 벌인 끝에 조선 측의 여력이 많이 소모되었을 뿐 만 아니라 명군의 군량을 대면서 많은 국력 소모가 존재했다. 이에 선조를 비롯한 조선 측은 '''일본군이 지구전으로 밀어붙이면 아무리 진주성이 요새라 해도 답이 없다'''면서 명군에 몇번씩이나 구원 요청을 했다. 하지만 대부분 무시당했을 뿐더러 때가 늦기도 했다.
당시 분위기는 '여긴 도저히 못 막을 곳.'이었다. 실록 및 다른 기록을 보면 '여기는 지킬 수 없으니 후퇴해서 병력이라도 보존해야 한다'와 '설령 못 지킨다고 해도 끝까지 싸워야 한다'가 충돌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상이 정원에 전교하였다.“진주의 일이 매우 위급하다. 지금의 적세를 보건대 실로 심상치가 않다. 적들이 만약 진주 근방에 있는 사방의 고을을 다 함락하고서 진영(陣營)을 벌여 놓고 군대를 나누어 주둔시켜 내외의 교통을 끊고 지구전(持久戰)으로 오랜 시일을 두고 괴롭힌다면 아무리 성을 잘 지키더라도 종당에는 스스로 지쳐 죽고 말 것이니, 오늘날 진주를 구원하는 일은 일각이 급하다. 경략에게 품첩(稟帖)할 것을 이미 전교하였거니와, 전에 이미 구원을 청하기는 하였지만 제독에게는 계속 구원을 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니 함께 품첩을 보내도록 하라.”- 선조 실록 1593년 7월 13일자
그때 막 도원수가 된 권율은 진주성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였고,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와 영천 군수 홍계남(洪季男)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말하기를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물러나 안 쪽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라고 주장(선조 수정 실록 27권, 선조 26년 6월 1일 갑신 3번째 기사)했다. 곽재우도 이런 병력차를 보고 '이 전투는 미친 짓이야, 여기서 나가야겠어.' 라고 생각했는지 "차라리 자결을 하면 했지 저런데서 개죽음은 못하겠다". 면서 진주성 구원을 포기한다.
반면에 일부 장수와 군인, 소수의 의병들은 기어이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사실 2차 진주성 전투는 딱히 기습도 아니었고 양측 모두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진주성의 군인들은 충분히 도망갈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진주성 방위군 측은 명군과 다른 조선군 장수들의 이러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진주에 남아 싸울 것을 결의했다. 이들은 일본의 진정한 의도를 알 수 없고, 무슨 이유든 진주가 함락되면 전라도가 위험하므로 계속 진주를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오직 임기 응변할 수 있는 자만이 제대로 군사를 부릴 수 있고 지혜로운 자만이 적을 헤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적병의 성대한 세력을 보건대, 그 누구도 당하지 못할 기세를 떨치고 있는데 3리(里)밖에 안 되는 외로운 성으로 어떻게 방어하겠습니까. 나는 차라리 밖에서 원조를 할지언정 성에 들어가지는 않겠습니다.”하니, 좌순찰사(左巡察使) 김늑(金玏)이 그를 꾸짖기를,“그대가 대장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군율(軍律)에 어쩌려는가.”하자, 곽재우가 말하기를,“이 몸이 죽는 것은 족히 아까울 것이 없으나 전투 경험이 많아 노련한 군졸들을 어떻게 차마 버릴 수 있겠습니까. 라고 했다.”-선조 수정 실록 27권, 선조 26년 6월 1일 갑신 3번째 기사
의병장 김천일은 "호남은 나라의 근본이고 진주는 실로 호남의 울타리이다."라며 진주를 지킴으로서 호남을 보호할 것을 주장하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곧장 진주성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는 진주성에 들어간 직후 조정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더군다나 당시 1차 전투의 승전으로 인해 영남지역의 백성들 및 인근의 백성들 사이에 '일본군으로 부터 도망치기는 어렵고 진주성은 견고해서 함락 안된다' 라는 소문이 번져 수만의 백성들이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느린 피난 속도는 일본군의 진격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피난처로 진주성을 떠올리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전라도를 지키는 길목이라는 명분보다 이것이 더욱 수성의 동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진주성 전투에 참전한 조선군은 왜군으로 부터 도망쳐 온 백성들을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신이 이달(6월) 14일에 진주성(晉州城)에 도착하였는데, 목사(牧使) 서예원(徐禮元)이 중국군 지대(支待)하는 일로 나갔다가 저물어서야 돌아왔습니다. 그와 함께 변란에 대처하는 여러 가지 일을 상의하여 결정하였습니다. 15일에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 조방장(助防將) 이계정(李繼鄭), 충청 병사 황진(黃進), 조방장 정명세(鄭名世), 경기 조방장 홍계남(洪季男), 경상 우병사 최경회(崔慶會), 복수 의장(復讐義將) 고종후(高從厚)들이 잇따라 달려왔는데, 다음날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권율(權慄)이 전라 병사와 각항(各項)의 장령(將領) 등에게 전령(傳令)하여 모두 나아오게 하므로 제장(諸將)이 일시에 달려가니 성중이 흉흉하여 이 때문에 일이 누설되었습니다. 신이 최경회·황진 등과 더불어 겨우 수합(收合)하였으나 3천 명에 불과하였습니다. 성안은 넓은데 이처럼 주린 군사로서는 방어하기가 쉽지 않으니 지극히 우려됩니다. 대개 진주는 바로 전라도의 보장(保障)인데 순찰사 이하가 방어를 철수하여 산음(山陰)으로 옮겨 갔으니 더욱 우려됩니다.
선조실록 선조 26년 7월 10일자 기사
조선군의 지휘관들이 거의 패배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지했으면서도 밀려오는 피난민과 성내의 백성들에게 피난 권고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을 비판하는 글이 넷상에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말도 안되는 것이, 민간인들의 피난 속도는 정예화 된 10만의 병력으로 부터[9]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었고 당시 소수의 조선군 병력은 옹성 없이는 그런 상황을 막아낼 수 없었다. 권고한다고 해서 진주성으로 몰려드는 주민들을 통제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10] . 만약에 진주성에서 전투가 없었더라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압박을 받던 왜군들은 어떻게든 전공을 만들기 위해 인근의 백성들을 학살했을 것이고[11] , 인근 백성들 또한 왜군들이 집결하면서 흉흉한 기운을 풍겨대는 걸 눈치채기는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조인물고를 보면 곽재우가 황진에게 제발 진주성을 포기하라고 말했으나 이를 따르지 않고 끝내 진주성에서 전사해서 곽재우가 슬퍼했다는 내용도 있다. 황진의 경우 당시 웅치 전투와 이치 전투등 여러 전투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우던 명장 중 한명이었으며 [12] , 충청도 절도사의 직책까지 오른 장수였다. 조정에서도 그만한 장재를 이런 데에 소모시킬 생각은 없었고, 그가 참가한다 했을 때 '아니, 그 지위에 있는 사람이 담당 구역도 아닌 곳에 왜 목숨걸고 감? 님은 거기서 죽기 아까운 인재임. 가지 마셈.' 라며 말리는 분위기였지만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참여했다[13] .
즉, 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한 의병장과 관군 장수들은 서예원 빼고 '''다들 죽을 것을 각오하고 사지(死地)로 온 것이다.''' 임진왜란 사상 최대의 혈전은 이렇게 시작된다.당초에 황진이 진주(晉州)로 나아가려 할 때 의병장(義兵將) 곽재우가 황진을 만류하며 말하기를, “진주는 외로운 성(城)이니 지켜낼 수가 없다. 그리고 공은 충청도 절도사를 맡고 있는 만큼, 진주를 지키다 죽는 것은 직분에 걸맞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공은 말하기를, "'''이미 창의사(倡義使)에게 승낙하였으니, 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식언(食言)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14]
이에 곽재우가 공의 뜻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술잔을 나누며 서로 작별하였는데, 뒤에 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애통해하며 슬퍼해 마지않았다. 아! 공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정말 열장부(烈丈夫)라고 해야 할 것이다. (국조인물고, 권54 왜난시 입절인(倭難時立節人) 피구인부(被拘人附)
3. 양측 병력 구성 및 진주성의 지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미 3월 10일 경상도 상주 주변, 부산포 주변, 상주와 부산포의 연결선상의 축성 및 병력 배치, 수군 배치와 더불어 진주성 공략군으로 37,100명의 병력을 편성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이때에 이 진주성 공략군에는 마에다 토시이에, 우에스기 카게카츠 등 5대로급 영주들이 다수 배치되어 있었으나, 정작 이들은 다들 알다시피 바다를 건너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아직은 탁상공론에 불과했다.
그러나 4월에 일본군이 부산포 일대로 총퇴각한 직후 히데요시의 진주성 공략군 편성은 구체화되었으며, 5월 20일 구체적인 공략군을 편성, 공격 명령을 내린다.
이때에 일본군 구성은 다음과 같다.[15] 다른 임진왜란 전투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나 가토 기요마사 같은 일본 기준으로 볼 때 애송이 다이묘들이 주력이었으나 이 전투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진주성을 무조건 함락시키라는 특명을 내렸기에 다테 마사무네 같은 거물 다이묘[16] 도 참전하게 되었다.
- 제1대 25,624명
- 제2대 26,182명
- 제3대 18,822명[19]
- 오오타 도모스케, 야마다 도죠 1,823명
- 이나바 사다미치 638명
- 아카시 노리자네 363명
- 벳쇼 요시하루 313명
- 히토츠야나기 가유 406명
- 다케나카 시게토시[18] 246명
- 하토리 가즈타다 693명
- 다니 모리토모 340명
- 이시카와 사다미치 298명
- 미야베 나가히로 912명
- 가키야 츠네후사 201명
- 기노시타 시게카타 450명
- 기타 1173명
- 제4대
- 모리 히데모토 13,600명
- 제5대 8,744명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6,596명
- 고바야카와 히데카네 400명
- 다치바나 도고 1,133명
- 다카하시 도소 288명
- 츠쿠시 히로카도 327명
그야말로 '''10만 대군.''' 사실상 일본군과 주요 무장 전체가 휘하 병력을 이끌고 참전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공성전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일본 수군도 동원되어 수로를 통한 조선 수군의 배후 공격과 진주성 구원을 견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대, 2대, 3대와 4대, 5대 연합 부대는 추첨에 따라 한 부대는 주변에서 동원될 지 모르는 구원군을 방어하고 나머지 세부대는 성을 공략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20]
이에 대응한 조선군은 최소 3천, 최대 1만 5천까지 추산 가능하다. 그러나 정확한 숫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제2차 진주성 전투 5개월 전 진주에 머물던 김성일 휘하 병력 수는 1만 5천에 달하나 이 병력 전체가 진주성 방위군이었을 가능성은 많지 않다는 점에서[21] 이것을 진주성 방위군 총수로 계산하는 것은 어려움이 따른다. 진주성에 입성해 전투를 치른 조선군의 병력 수 추정은 선조 실록 7월 16일 기사와 7월 22일 경상우도 감찰사 김늑의 진주성 전투 파악 전사자 수를 비교해 확인할 수 있으나, 김늑 자신이 말했다시피 일본군이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전사자 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게다가 '''이 전투 이후 진주성에서 생존하여 돌아온 조선 측 장수는 한명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입성한 관군 및 의병 총 숫자는 아무도 확실히 알지는 못한다.'''
조선군 병력 추정치
- 창의사 김천일 - 3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 입성, 전사자 파악 수 60명. 의병을 총괄했으며, 동시에 사실상 성의 총사령관으로 방어전을 지휘했고 그의 휘하로 아들 김상건, 공조 좌랑 양산수, 양산숙 등이 있었다.
- 경상 우병사 최경회[22] - 3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입성했는데 전사자는 420명으로 입성시보다 병력이 많다. 최경회가 임란 시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의병장 중 한명이며 의병의 관군화 과정에서 경상 우병사가 된 것을 생각하면 입성 당시 그가 지휘한 의병이 파악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관군을 총괄했다.
- 전라우의병부장 고득뢰 - 최경회가 관군과 함께 이끌고 입성한 의병을 지휘했을 가능성이 크다.
- 충청 병사 황진 - 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입성. 전사자 파악 수 97명. 가장 활약한 장군으로 여겨진다.
- 그외에 태안 군수 윤귀수, 결성 현감 김응건, 당진 현감 송제, 감포 현감 이예수, 황간 현감 박몽열, 보령 현감 이의정 등 다수의 충청도 수령들이 휘하 병력과 함께 황진을 따라 남았다.[23] 단 이 병력은 황진이 거느린 병력에 포함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오희문의 쇄미록에 의하면 전사한 호서(충청도) 수령의 수가 9인이라고 하는데, 그중 한명인 회덕 현감 남성경은 후에 극적으로 생존했음이 확인된다. 황진 휘하의 군관인 정로위 인발도 극적으로 생존해 이시언에게 이를 보고했다. 또 그밖에 황진의 일가인 6촌동생 황대중이 황진 휘하에 참여했다.[24]
- 진주 판관 성수경 - 불명
- 복수 의병장 고종후 - 입성시 700명. 고경명의 아들이며 고인후의 형이다. 복수 의병 부장 오유가 부장으로 종군한 듯 보인다. 전사자는 파악되지 않았다.
- 복수 의병장 전사의 - 입성시 몇명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전사자 파악 수 50명. 고종후의 휘하였을 가능성도 높다.
- 적개 의병 부장 이잠 - 입성시 400명. 전사자 파악 수 50명. 남원 의병장(적개군) 변사성의 부장으로 진주성 지원군을 이끌고 합류.
- 의병장 이계련 - 입성시 300명. 전사자는 파악되지 않았다.
- 태인 의병장 민여운 - 입성시 100명. 전사자는 파악되지 않았다.
- 웅의 대장 정원한 - 입성시 병력 파악 안됨. 전사자 파악 수 11명. 민여운 군의 부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 순천 의병장 강희열 - 입성시 200명. 전사자 파악 수 50명.
- 도탄 의병장 강희보(강희복) - 입성시 숫자 파악 안됨. 전사자 파악 수 30명. 휘하에 임우화가 있다.
- 진주 목사 서예원[26] - 진주성이 본래 확보하고 있던 주둔 병력(본주군)을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에 몇명이 있었는지는 파악되지 않았으나 전사자 파악 수는 2,400명이다.
- 별군관 정평구[25]
- 사천 현감 장윤 - 입성시 300명. 전사자 수 파악 안됨. 당시 황진 다음으로 전투를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 거제 현령 김준민[27] - 입성시 병력 파악 안됨. 전사자 수도 파악 안됨. 무력에 능했다 한다.
- 김해 부사 이종인[28] - 입성시 병력 파악 안됨. 전사자 수도 파악 안됨. 인간 흉기이자 진주성의 슈퍼 탱거 황진과 친했다 한다.
- 해남 의병장 임희진 - 입성시 병력 파악 안됨. 전사자 수도 파악 안됨.
- 이계년(직책 파악 안됨) - 입성시 병력 파악 안됨. 전사자 파악 수 30명. 임희진 군의 부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 영광 의병장 심우신 - 입성시 병력 파악 안됨. 전사자 파악 수 12명.
- 현웅군 대장 정충훈 - 입성시 병력 파악 안됨. 전사자 파악 수 20명.
- 채의 대장 정운호 - 입성시 병력 파악 안됨. 전사자 파악 수 10명.
- 진주 부사 정국상
명목상 지휘권은 진주 목사인 서예원에게 있었으나, 이전에도 도주 의혹이 있는 등 겁이 많고 능력이 모자랐던지라 의병장 김천일이 사실상 성 전체의 방위 사령관을 담당하고, 최경회와 황진, 장윤 등이 실 지휘를 맡았다.
그외에 다수의 일반 백성들이 있었는데, 진주 대첩의 영향으로 진주성이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 여겨 더 많은 백성들이 입성했다고 한다. 조선 측 기록에는 약 5만, 일본 측 기록에도 진주성에서 죽은 자가 3만에 달한다는 것으로 볼때 수만, 어쩌면 2만 이상의 백성들이 진주성에 입성했다가 성이 깨지면서 대다수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명군 유정 휘하의 임호가 이끄는 수만의 병력으로 진주성을 구원했다가 다치바나 무네시게, 고바야카와 히데카네 등에게 격파되었다는 말이 있지만 징비록에는 명군이 구원하지 않는 기록상의 충돌 때문에 의문점이 있다.
진주성 남쪽은 험준한 절벽 아래에 큰 강이 흘러 공성이 아예 불가능했고, 서쪽도 절벽이 있어 방어에 수월했다. 북쪽은 3개의 못(대사지)으로 된 큰 늪지대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일본 측 사료인 《일본전사 조선역》에 따르면 폭이 약 100m, 길이가 700m ~ 800m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동남쪽 부분은 선조 24년 경상도 관찰사 김수가 성을 확장해 지었는데, 지나치게 넓고 아래로 내려 쌓아서 방위가 취약해졌다고 한다.[30] 이러한 동쪽의 약점을 보강하기 위해 서쪽에서 동쪽으로 참호를 파고 다시 남쪽으로 강에 연결되게 만들었으며[31] , 동문 밖에 제방을 쌓아 성첩으로 삼았고, 또한 서북쪽도 대사지가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 취약점으로 존재했는데 이지역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호를 깊게 파서 물을 담아 취약점을 보강하였다.
또한 진주성 주위에는 4개의 작은 산성이 존재했다. 이들 산성들은 진주 대첩 당시 외곽에서 진주성과 호응하는 조선 측 병력의 거점으로 기능하여 승리에 이바지하였으나, 이때에는 너무 일본 측 병력이 많아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이러한 외곽 산성은 다음과 같다.
- 작당 산성 : 진주시 일반성면 대천리, 작당산(해발 252m)에 위치. 둘레 250m. 진주성이 함락되자 이 지역 방위를 맡은 관군이 거점으로 잡은 성이다.
- 죽방 산성 : 진주시 대곡면 대곡리, 죽방산(해발 300m) 정상부에 있으며, 둘레 4km 내외의 매우 큰 성이다. 현재는 대부분 붕괴되어 잔존 흔적만 남아있다.
- 덕계 산성 : 진주 3현 중 하나인 영선현에 속했던 성으로, 오늘날 진주시 금곡면 성산리에 위치한다. 현재는 흔적만 남아있다.
- 장군 대산성 : 진성면 중촌리, 하촌리, 금산면 가발리를 연결하는 장군대산에 있는 석축 성지로, 흔적만 남아있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따르면 4개소에 석축 기지가 남아있고 둘레는 동단 각각 240m, 130m, 100m, 서단 100m이었다.
4. 제2차 진주성 전투의 전개
4.1. 전투 전야(6월 15일 ~ 6월 20일)
일본군은 6월 15일 군을 출발시켰다. 15일 당일 함안을 점령하고, 16일 반성을 차지했으며, 18일 정진을 건너 의령을 점령하였다. 일본군이 전진해오는 상황에서 이미 늦었다고 판단했는지 명군의 장수 유정의 부장인 왕필적과 상주 목사 정기룡이 19일 성에 들어와 "유 총병(유정)의 군사는 성의 외곽에서 지원하고자 하는데 그 선봉은 이미 삼가에 도착해 있으니 경들은 잘 방어를 하라" 하고 '''격려하고 돌아갔다.'''
4.2. 6월 21일
일본군 기병 200여 명이 동북쪽 산인 순천산에 올라가 성 주변을 정찰하고 군대를 투입해 진주성 주변에 해자를 메우는 일에 착수했다.
또한 인근 제현에 군대를 분산 주둔시켰는데, 수정 실록에 따르면 사방 수백 리에 달했다고 한다.
4.3. 6월 22일
아침 8시경에 일본군 기병 500여 명이 북산에 올라가 군세를 과시했고, 이후 10시에 일본군 본대가 도착했다. 일본군 제 4대, 제 5대 연합군은 개경원 산허리에 진을 치고 외부의 구원군을 저지하는 임무에 들어갔으며, 나머지 군은 향교 길가로 늘어서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본 측 사료에 따르면 최종적으로는 동문은 우키타 히에이에가 지휘하는 제 3대가, 북쪽은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하는 제 1대가, 서쪽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제 2대가 포진하였다 전한다.
일본군은 먼저 도착해 공격을 시작했다. 낮의 1차 공격에 대응해 조선군이 일본군 30여 명을 쏘아 맞추차 일단 물러났고, 초저녁에 다음 부대가 도착하자 일본군은 다시 공격, 저녁 10시에 물러났으며, 밤 12시에 다시 진격했으나 황진, 이종영, 장윤, 김준민, 오유, 이잠, 강희보, 강희열 등 조선군 장수들이 진두지휘로 방어전을 펼친 끝에 새벽 4시에 물러났다. 특히 순성장 직을 맡은 황진이 대활약했다고 한다.
또한 이때 일본군은 진주 대첩 당시 상당히 곤욕을 맛보았던 외곽 해자를 메꾸는 작업에 들어가, 서북쪽과 동남쪽에 둘러친 해자의 물을 빼고 흙으로 매꾸어 공격 루트를 만들었다.
이날 저녁 호위병 부장 강희보가 김천일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전령을 파견할 것을 건의했고, 이에 강희보의 부하인 임우화를 파견했으나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일본군은 이 전령을 결박한채로 공격조 맨 앞에 내세워 심리전을 전개하였다고 한다.
4.4. 6월 23일
일본군은 해자를 메꾸는 일을 마무리한 다음 죽창 등 공성용 기구를 동원해 공격했으나 조선군의 격렬한 반격에 격퇴되었다. 조선군은 낮에 세번 싸워 세번 다 격퇴했고, 저녁에는 네번 싸웠으나 네번 다 격퇴했다.
4.5. 6월 24일
전날의 맹공 직후 일본군은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5천, 6천여를 전진 배치해 마현 쪽에 포진했고, 500명 ~ 600명 남짓을 동쪽에 전진 배치했다.
4.6. 6월 25일
동문 쪽 해자까지 마저 메꾸는 데 성공한 일본군은 이곳에 작은 언덕을 쌓고 정루를 설치한 다음 성을 내려다보며 사격전을 시도했다. 이에 황진이 진두지휘하여 진주성 안에 마찬가지로 언덕을 만들어 현자 총통을 올리고 맞사격전을 벌여 이를 격파했다. 이날의 공격도 23일과 마찬가지로 낮에 세번, 밤에 네번 있었으나 일본군은 모두 격퇴당했다.
이때에 고성의 의병장 최강, 이달 등이 진주성 구원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의 규모가 크고 경계가 삼엄해 접근에 실패했다. 오히려 최강이 이끄는 의병군 300명은 일본군의 역공에 포위 섬멸 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최강의 분전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4.7. 6월 26일
이날에는 일본군이 생가죽으로 짠 나무 방패(맨틀리트 계열인듯)를 만들어 화살과 총탄을 막으면서 성을 허물기를 시도했다. 이에 성에서 바위와 나무를 아래로 굴려 막아냈다. 또한 동문 쪽에 높은 망루를 만들고 그곳에서 화공을 시도해 성 안쪽 초가집이 상당수 불타는 피해를 입었다. 이런 상황이 전개되자 목사 서예원은 겁을 먹고 우왕좌왕했고, 이에 김천일은 장윤으로 하여금 가목사를 삼았다.
직후 장마비가 내려 궁시가 풀어지고 병사들이 피곤해했다. 이에 일본군은 '대국의 군사도 장차 항복할 것인데 너희 나라가 감히 항거하는가?' 하는 글을 던지자 '우리는 죽음을 무릅쓰고 싸울 따름이다. 천명 30만이 지금 너희들을 추격하여 남김없이 무찌를 것이다.' 고 답했고, 이에 일본군은 '당장(唐將)[32] 은 이미 모두 물러갔다.' 하는 등 심리전을 지속적으로 걸어왔다.
이날에도 밤낮으로 쉬지않고 공격해온 일본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4.8. 6월 27일
가토 기요마사 군과 구로타 나가마사 군이 귀갑차를 만들어 성을 공격했다. 이를 김해 부사 이종인이 진두지휘해 격퇴했다. 또한 동문과 서문 양쪽에 언덕을 쌓고 누각을 만든 후 사격전을 벌였는데 이런 공격에 조선군은 전사자가 300명에 달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순천 의병장 강희열도 이런 저격에 의해 전사했다.
초저녁에 일본군이 다시 북문을 공격해 성문 위로 올라오기까지 했지만 이종인에 의해 격퇴되었다.
4.9. 6월 28일
전날 저녁 일본군이 공격해왔던 북쪽 성곽 쪽에 일본군이 밤 사이 몰래 성벽에 접근해 성벽을 무너뜨리려 함과 동시에 기습을 감행했다. 이때의 경계를 맡은 것은 서예원이였는데 겁먹고 제대로 돌아보질 않아서 성벽 자체에 심각한 대미지를 입은 것. 이에 이종인은 경계에 소홀했던 서예원을 책망했다. 이날에도 하루종일 일본군은 대공세를 벌였으나 이 또한 격퇴당했다. 그러나 이날 수성전에서 가장 큰 공이 있었던 황진이 '''전과를 확인하다가 숨어있던 일본군에 의해 저격당해 사망한다.'''
보다시피 조선왕조실록에 황진이 저격당해 전사했다고 분명히 기재되어 있다. 50m 이내의 거리라면 조총으로 저격하는 것도 가능하다.다음날 적이 또 동쪽과 북쪽의 성을 침범하여 크게 전투가 벌어졌는데, 종인이 다시 크게 싸워 물리쳤다. 황진(黃進)이 순행차 이곳에 이르렀다 성 아래를 굽어보고 말하기를, "적의 시체가 참호에 가득하니 죽은 자가 거의 1천여 명은 되겠다."하였다.
그런데 이때 적 한 명이 성 아래에 잠복해 있다가 위를 향해 철환(鐵丸)을 쏘았는데, 판순(板盾)을 뚫고 진의 이마에 맞아 진이 즉사하였다. 황진은 용략(勇略)이 여러 장수 가운데 으뜸이었으므로 성안에서 그를 의지하였었는데, 그가 죽자 성안이 흉흉해지며 두려워하였다.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6월 1일 갑신 5번째기사)
황진의 허무한 전사와 서예원의 무책임함으로 인한 북쪽 성벽의 약화는 사실상 진주성의 운명을 결정지은 치명타로 일컬어진다.
4.10. 6월 29일
[image]
마지막 날, 황진을 대신해 서예원을 순성장으로 삼았지만 서예원이 겁을 내며 울고 다닌다고 해서(...) 경상 우병사 최경회는 서예원을 참하려고 하다가 그만두고, 대신 장윤을 순성장으로 삼았지만 곧 전사했다.
이날 폭우가 내려 동문이 무너져 일본군이 난입해오자 이종인이 이를 일시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다시 귀갑차를 활용해 북쪽 성벽도 무너뜨리려 시도, 정오 무렵 기여코 이에 성공하면서 북쪽을 담당하던 창의군이 무너졌고 결국 이쪽으로도 일본군이 난입하면서 진주성은 함락된다. 수성장 김천일과 그 아들인 김상건, 최경회와 고종후 등은 물에 뛰어들어 자결을, 김준민 이하 장수들 대다수는 싸우다 전사했으며 이종인은 적병 둘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했고 목사 서예원은 도망치다가 잡혀 죽었다.
조선 측 기록에 의하면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죽은 자가 6만여, 일본 측에서는 이것이 과장된 기록이라고 주장하지만 정작 일본 측 자신의 사료에서도 음덕기에서는 진주성에 인구가 3만이고 그중 강으로 도망친 수백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가 죽었다고 기록되 있으면 또한 일본전사 조선역에서는 일본군이 취한 수급만 2만이 넘고[33] 그 외에 엄청난 수의 포로를 포획했으며 익사한 자의 수도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하고 있다. 전투 후 일본군은 진주성을 때려부셔 평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실제로 임란 후 진주 일대의 인구가 너무 급감해 행정 구역이 개편되기까지 했다.
살아남은 자는 황대중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5. 7월 이후 전라도의 상황
7월 13일 조선 측은 권율로 하여금 다시 한번 진주성 구원을 명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아닌 게 아니라 조정에서 명군에게 부산진을 공격하게 하는 등 구체적인 진주 방어책을 내놓았을 때는 이미 진주가 함락된지 열흘이나 지난 뒤였다.
진주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군대를 몇개로 나누어 전라도로 몇 차례 진입시도를 해서 하동과 사천 등을 약탈하면서 남원과 구례 방면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남원성 방어태세에 들어간 명나라군과 홍계남의 반격을 받고는 그대로 돌아가 버린다. 전력을 기울여 진주성을 함락한 것과는 달리 몇 차례 전투만 치루고 그냥 돌아간 것으로 보아 당시 일본군이 적극적으로 전라도로 진격할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조선왕조실록에 전투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미루어 아래 나오는 장흥부사 유희선으로 인한 소요사태와는 별개로 일본군이 전라도 남원 방면으로 진입시도한 것도 사실이다.비변사가 아뢰기를, “삼가 권율(權慄)의 장계를 보니 왜적이 온갖 방법으로 진주를 공격하고 있는데, 명군(明軍)은 아직까지 달려가서 구원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왜적과 대진(對陣)하고 있는 외원(外援)으로는 오직 선거이(宣居怡)·이천(李薦), 홍계남(洪季男) 뿐으로 그 형세가 매우 외롭고 약하다고 합니다. 품첩은 이미 정사(正寫)하였습니다. 권율의 생각은 다만 요해처(要害處)를 지켜 호남을 보전하고자 할 뿐, 군사를 보내어 진주를 구원할 의사가 없는 듯합니다. 진주를 구원하는 것이 바로 호남을 보전하는 길이니, 이런 뜻으로 급히 권율에게 하유하소서.”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 실록 40권, 선조 26년 7월 13일 을축 8번째 기사
이때 낙 참장(駱參將, 명나라 장수 낙상지를 말함)은 남원에 있으면서 성지(城池)를 수축(修築)하여 죽음으로 지킬 계획을 하고, 포수(砲手) 3백 명을 파견하여 취성(鷲城)에 진을 친 다음 영상(嶺上)에 기치(旗幟)를 많이 벌여 놓고서 불을 들어 호응하게 하였다. 홍계남(洪季男)이 군사를 거느리고 영(嶺)을 내려가다가 적의 선봉(先鋒)을 만나 길에서 적을 공격하여 수십 리를 가며 싸우다가 구례(求禮)·광양(光陽)에 이르러 오랫동안 크게 싸우니 적이 물러갔다. 1기는 사천(泗川)·고성(固城)으로 향해 가서 분탕질을 했고, 1기는 삼가(三嘉)·의령(宜寧)으로 향해 가서 공사(公私)의 가옥(家屋)을 불태우고 돌아와서 함안(咸安)·창원(昌原) 등지에 주둔하였으며, 1기는 포로로 잡은 남녀와 복물(卜物)을 싣고 김해(金海)를 향해 돌아갔다.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 7월 16일 무진 5번째기사 )
위의 일본군 진입시도와는 별개로 전라도 복병장으로 두치진(하동현 서쪽 5리 나루터)을 수비하던 장흥 부사 유희선이 진주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양, 순천 지역으로 도망쳐 왜군이 쳐들어온다고 떠들어 댔고 이에 전쟁 공포에 휘말린 일부 백성들과 병사들이 도적떼가 되어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다. 이 소요 사태는 전라도 남부 전체로 확대되어 조선군의 보급 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선조실록 42권, 선조 26년 9월 6일 정사 8번째기사, 서애집, 난중일기)[35] 류성룡은 책임을 물어 유희선의 참수를 건의했다.적병이 갑자기 구례현(求禮縣)에 들이닥쳤다. 불의에 적이 이르렀으므로 사민(士民)들이 태반이나 상해를 입었는데, 적은 마을을 불태우고 성곽을 무너뜨렸다. 남원(南原)의 군민(軍民)이 이 소식을 듣고 놀라 흩어져 하룻밤 사이에 성을 비우고 빠져나갔다. 적병이 또 곡성(谷城)에 들어가 주민을 거의 다 살략(殺掠)하였다. 명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사대수(査大受)·송대빈(宋大斌) 등과 우리 나라 장수 홍계남(洪季男) 등이 모두 물러나 진을 쳤는데, 조금 후에 유정(劉綎)이 군사를 보내 남원을 구원하였다. 낙상지·송대빈 등 여러 장수가 비로소 우리 나라 이빈(李蘋) 등과 더불어 남원성에 들어가 지키니, 적이 마침내 군사를 철수해 진주로 돌아갔고 인하여 해상으로 돌아가서는 다시 강화의 일을 의논하였다.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7월 1일 계축 2번째기사)[34]
6. 제2차 진주성 전투의 영향
일본군이 2차 진주성 전투를 벌인 목적은 1차 진주성 전투의 원한을 갚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분노도 피하고, 조명 연합군에 심리적 타격을 입혀 강화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 전라도 점령이 아닌 처음부터 진주성 하나만 노리고 움직였을 가능성이 크다.[36]
2차 진주성 전투로 인해 전라도로 들어오려는 왜군의 기세가 멈췄다는 평가는 현대에 와서 생긴 대중의 평가일 뿐인것은 아니다. 왜란 직후에도 이러한 평가가 있었다. 물론 이것이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별개이다.
이 전투로 인해 전라 좌의병은 지휘부가 전멸했고 전라 우의병은 병력 대부분을 상실해 전국의 의병 중 가장 전력이 강했던 호남 의병대는 사실상 와해된다. 이때 전사한 사람들은 18세기 호남 절의록 편찬 때 대거 이름을 올린다. 또한 위에서 서술한 대로 경상도 남서부 지역 및 진주 인근의 인구가 급감하는 바람에 행정구역을 재편하게 된다.
왜군의 피해는 불명이다. 물론 왜군의 의도와는 별개로, 진주성이 2차 전투에서 함락되기는 했으나 거의 10만의 군대를 상대로 열흘을 버텼기에 왜군 입장에서는 이번에도 무시하기 어려운 피해가 났을거라는 추측을 해볼 수는 있다. 위에 나와있는 왜군의 해자를 메우는 등 공성 전개 과정에 조선 측이 가만히 놀고 있었을리는 없다. 위키백과에서는 일본군의 전사자수가 13000여명으로 나와있는데 여기에 대한 출처는 불명이다. 전략상으로 볼 때 전투 한번에 이정도의 손실이면 더 이상 군을 움직이기는 어려운 수치인 것은 맞다.
진주의 관기였던 논개가 촉석루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같이 죽었다는 야사가 유명하며 진주 목사 서예원을 1차 전투에서 자신들을 물리친 김시민으로 착각한 왜군이 그의 목을 베어 일본에 보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전사한 분들을 모시기 위한 사당이 남성동에 존재하는데 이름이 창열사이다.
6.1. 패전 책임 논란
류성룡은 자신의 저서인 《징비록》에서 "김천일은 의만 높고 재주가 없어서 졌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안방준은 스스로 써낸 《진주서사》 에서 '류성룡 그사람이 진주성 무너진 걸 순 김천일 책임으로 돌렸는데 뭔 생각인지 모르겠다' 면서 깠다. 이로 인해 진주성 함락 책임 논란이 벌어졌는데, 이러한 논란에는 당파성[37] 이 있다. 또한 윤근수 등은 징비록에 대해 '잘된건 죄다 자기 공으로 돌려서 이거 공평하지 못하잖아' 하면서 투덜거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때 전사한 사람들의 후손들은 당시 방어의 중심이 누구였느냐 및 패배의 책임을 놓고 서로의 조상을 비난하며 싸우고 있다(주로 김천일과 서예원의 후손들). 2000년에 서예원의 후손이 서예원을 변호하는 장문의 글을 쓰기도 했다. 이런 논쟁이 계속되는 이유는 일차적으론 김천일이 지휘관으로서 유능했다고 보기 힘들고, 서예원은 또 완전히 무능한 장수가 아니었기 때문. 북방에서 여진족과 싸울 때도 용맹 하나는 입증했고 김해성 전투 이후 백의종군했을 때 김면 휘하에서 김성일도 인정할 정도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핵심적인 요인은 황진이 전사하기 전에는 아무 문제 없다가 전사후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방어를 지휘한 핵심은 황진이고 왜군이 너무 많아 누가 지휘하던 끝까지 막아낼 순 없었기 때문이다.
6.2. 정평구의 비거?
제2차 진주성 전투는 후대에 떡밥 하나를 남겼는데 바로 정평구의 비거가 그것이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비거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있는데, 정평구라는 사람이 비거를 만들어 진주성이 함락되기 전에 사람들을 이끌고 나왔는데 30여 리를 날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정평구의 비거에 대한 기록은 조선 후기 실학자 신경준의 <여암전서>, <차제책>에도 기록되어있고, 정평구의 고향인 김제 군지에도 비거를 이용해 정평구가 왜군을 농락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이를 조정에 보고했으나 조정에서는 하늘을 나는 물건이 있다는 것을 터무니없이 여겨서 무시해버렸다는 것.
일련의 기록으로 미루어본다면 정평구가 뭔가를 만들었을 개연성은 충분한 듯하다. 다만 그것의 정체가 뭐냐가 문제인데 이규경의 기록에 풀무가 등장하는 것이나 1인승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탔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아마도 열기구 같은게 아니었을까라는 추측을 하기도 하고 연에서 발전한 행글라이더 같은게 아니었나라는 추측도 있지만 설계도 등이 남아있지 않아 명확하지는 않다. 200여년 뒤에 윤증의 증손자인 윤달규도 정평구의 비거와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고 한다.
7. 제2차 진주성 전투를 묘사한 대중 매체
허생전에서는 나가사키에 간 허생이 진주성 전투에서 살아남은 일본군 병사가 낙오하여 산을 넘다 진주성에서 아들을 잃은 노파에게 죽을 위기에 처하는데 그가 자신도 일본에 노모가 있다고 목숨을 구걸하자 노모의 다른 아들이 저자가 왜인이긴 해도 효성이 있는 듯 하니 살려주자 하여 여차저차 하다 보니 그 일본군 병사와 함께 일가가 일본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 후손을 만나는 내용이 있다.
신암행어사에서는 마치 온 조선이 다 함락된 후 최후의 6만명이 결사 저항하다 죽은 것 정도로 후기에 묘사했다.
# 조선왕조 500년 2차 진주성 전투
2차 진주성 전투를 조명한 사극은 MBC 조선왕조오백년이 유일하다. 임진왜란 편 33회 후반과 34회 전체를 할애하여 집중적으로 묘사했다. 당시에 활용 가능했던 거의 모든 방송 기술이 총동원되어 지금의 눈높이로 봐도 어마어마할 정도의 대규모 접전을 제대로 묘사하였다. 눈물나는 스케일의 퓨전 사극으로 연명하는 지금의 MBC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부분. 전투에 참전한 장수와 의병장들의 면모를 하나하나 잘 묘사했으며 특히 최후에 왜군 둘을 한꺼번에 껴안고 기록 그대로 "김해 부사 이종인이 여기서 죽노라!"를 외치며 남강에 투신하는 이종인의 최후는 명장면이다. 배경의 고증 오류가 일어났는데 전투는 여름에 벌어졌는데 겨울눈이 내리는 데에서 찍혔다는 것이다.
징비록은 34회에서 배경 상황만 묘사하고 전투는 내레이션으로 처리했다. 조선 쪽 지휘관 다수가 구원을 포기한 사안은 언급하지 않고 명군이 현실적으로 구원할 수 없었던 정황도 무시한 채 조선 길들이기를 위해 일부러 출병하지 않은 것으로 왜곡했다.
임진록1의 일본군 8번째 임무가 2차 진주성 전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