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다 토시이에

 


'''오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토시이에'''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우에스기 카게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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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다 토시이에'''
'''마에다 가문 매화 가몬'''[1]
前田利家 (まえだ としいえ) 전전리가
(1539년[2] 1월 15일 ~ 1599년 4월 27일[3])
1. 개요
2. 생애
3. 인간관계
4. 가부키모노
5. 여담
6. 대중매체에서


1. 개요


일본 전국시대 무장이자 다이묘. 오대로의 한 사람이자, 에도시대 카가 번(加賀藩)[4] 마에다 씨의 시조.

2. 생애


오와리 지방의 호족이었던 마에다 토시하루(前田利春)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이누치요(犬千代). 어려서 오다 노부나가의 시동으로 들어갔으며, 노부나가 휘하의 엘리트 부대인 아카호로슈(赤母衣衆) 창설 멤버이자 필두로 활약한다. 그도 그럴 것이 통칭 '창의 마타자(槍の又佐)'로 불릴 정도로 창의 명수였다.
20대 초반에 자신의 물건을 훔친 동료를 노부나가의 앞으로 데리고 가서 이 동료가 훔친 물건을 자신에게 돌려주고 동료를 처벌할 것을 부탁하였으나 노부나가는 가볍게 한 , 즉 그 쥬아미가 한 짓은 별 뜻 없는 그런 행동이라고 대답하였다. 격분한 토시이에는 노부나가의 앞에서 동료를 단칼에 베었고, 화가 난 노부나가는 토시이에를 해고하였다. 해고된 이후에 전쟁이 났을 때 멋대로 오다 가문 편에 서서 전투를 치뤘으나 용서가 되지 않았다.[5] 토시이에는 사이토 가문의 용장 아다치 로쿠베에를 죽이고 오케하자마 전투에서도 활약하는 등 노력했고, 3년간의 고생과 궁핍한 생활 끝에 노부나가는 토시이에의 귀참을 허락한다.
하지만 토시이에는 이때의 가난한 생활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가신들에게 주는 봉록이 적었고 돈을 사용하는 것에 크게 인색하였다. 삿사 나리마사가 8천명을 이끌고 토시이에를 공격하자 토시이에의 가신들은 어디론가 도망가 버려 병력은 2500명 밖에 모을 수 없었다. 평소 가신들의 봉록을 가증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토시이에에게 묵살당하던 마츠 부인은 토시이에에게 찾아가 돈과 함께 전장에 나서라고 말하는 둥 핀잔을 주었지만 회의 중인 토시이에와 그의 가신들의 앞으로 가서 "만약 성이 함락된다면 토시이에님은 성으로 돌아오시지 말고 전사하시고 가신 여러분들께서도 전장에서 전사하십시오. 저도 여러분과 함께 죽겠습니다. 끝까지 싸우다 전사합시다."라는 식의 말을 하였고 마츠 부인의 진심이 담긴 이 말을 들은 가신들은 평소 적은 봉록을 잊고 필사적으로 싸워 토시이에는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장신인 180cm의 키[6]에 6m가 되는 장창을 들고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전장을 누볐다고 하며, 젊었을 때는 호쾌하고 다혈질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1559년, 노부나가가 보는 앞에서 쥬아미(拾阿弥)[7]를 베어버리고 오다 가문에서 내쫓겼지만[8], 이후로 2년에 걸쳐 오케하자마 전투나 이나바 산성 공략 등에서 자기 혼자 마음대로 참가해서 군공을 세우게 된다. 결국 2년 만에 노부나가도 용서하면서 오다 가로 복귀하게 되었고 전공을 인정받아 오히려 봉급은 더욱 늘어났다.[9]
그 후에는 형인 토시히사가 병약하여 무사로서 전장에 설 수 없다는 이유로 노부나가의 명을 받고 마에다가의 가독을 토시이에가 잇게 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말이 많아서 야심이 있던 토시이에가 노부나가에게 청하여 일이 그렇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거나 토시이에는 출세하여 이제는 노부나가의 우마마와리(馬廻)[10]가 되었으며 그 때문에 전장에 직접 나설 일은 거의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틈틈히 전공을 세워서 점점 자신의 입지를 굳혀갔다.
1574년에는 시바타 카츠이에의 요리키(与力)[11]가 되었다. 그 후에는 카츠이에를 따라서 각지에서 농민반란을 진압했으며 전공을 인정받아 후츄 3인중이라 불리며 다이묘가 되었다. 노부나가가 토시이에는 카츠이에의 밑에 계속 두지 않고 전투가 있는 곳으로 전지를 바꿔서 계속 파견했고, 1581년에 노토(能登) 1국을 가증 받아 영지 23만석의 쿠니모치가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1582년 6월 때마침 토시이에는 카츠이에의 밑에 있었고 이에 따라 개인적인 교분이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와 카츠이에의 중재에 노심초사했다. 토시이에는 노부나가의 명으로 카츠이에의 요리키가 된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카츠이에의 밑에 남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이듬해 히데요시와 카츠이에가 교전을 하는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토시이에는 갑자기 철군했고 그 덕에 히데요시는 카츠이에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계획적인 모반은 아니었는지 아니면 악명을 두려워한 것인지 그 후에도 잠깐 동안은 카츠이에의 밑에 있었고 카츠이에도 토시이에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 동안의 공을 칭찬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히데요시측에 회유되어 투항했고, 히데요시는 시바타 카츠이에 측의 무장이었던 사쿠마 모리마사(시바타 카츠이에의 조카)를 죽이고, 모리마사의 영지였던 카가(加賀)국을 몰수해 토시이에에게 카가(加賀)국의 2개 군(郡)을 가증함으로써 그를 중용했다.
그 후에는 히데요시의 심복으로서 지속적인 공을 쌓았고 일본을 장악한 히데요시가 대륙 정복의 야심에 불타오르자 그 첨병으로 출진하게 된다. 그러나 직전에 명과 화친이 맺어져 출진하지 않고 일본내에 남게 된다. 그러다가 1594년에는 종3위의 관직을 받게 되었으며 관직의 서열상으로는 오히려 토시이에보다 석고[12]가 높은 우에스기 카게카츠보다 높은 자리에 앉게 되었다.[13]
이것은 오다 가의 가신 시절부터 함께 한 토시이에를 믿었기 때문에 외부세력인 우에스기와 도쿠가와를 견제하기 위해서 일부러 토시이에의 힘을 키워준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러다가 1598년이 되어 노령에 접어든 토시이에는 병을 얻어서 은퇴한다. 그러나 후계에 대한 불안이 남았던 히데요시는 토시이에의 은거를 인정하지 않았다. 동년 8월 히데요시는 죽었고 죽어가면서도 토시이에에게 히데요리의 후원을 부탁했다고 한다.
1599년이 되자 도쿠가와는 히데요시의 사적 혼인을 금하는 정책을 깨고 정략결혼을 통하여 자신의 세력을 급격히 성장시킨다. 그것에 제동을 걸은 것이 토시이에로 당시 마에다가의 석고는 100만석 정도였지만, 255만석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토시이에도 그 해를 넘기지 못했고 결국에는 도쿠가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을 물리친 후 1602년 쇼군이 된다.

3. 인간관계


원래 거칠었던 토시이에의 성격도 나이를 먹으면서 서글서글해졌고 이 때문에 많은 사무라이들과 다이묘들이 토시이에를 좋아했다. 대표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서로의 신분이 낮았을 때부터 부부 단위로 교우를 가졌으며 토시이에가 히데요시의 신하가 된 후로도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친구로서 사귀었다고 한다. 일본을 통일한 이후 폭군이 된 히데요시도 토시이에의 간언만큼은 들어주었다는 설화가 남아있을 정도이며 말년에 히데요리를 맡긴 것도 그러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도요토미의 신하가 된 후에는 실력자가 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인망이 모였는데 히데요시 사후 둘로 갈라진 무단파와 문치파 모두 토시이에의 말만큼은 거스르지 못했으며 이에 따라 전일본 중에서 유일하게 양자의 중재역을 맡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히데요시의 사후 야심이 있었으면 일본을 가질 수 있었던 인물이라는 평도 있으며 도쿠가와도 그를 감당하지 못하고 토시이에가 죽은 후에야 직접적인 행동에 옮겼다.
반면에 가족관계에는 다소의 불행이 있어서 원래 4남이었던 그가 마에다가의 가독을 잇게 된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들이 있다. 당시 마에다가의 가주였던 토시히사가 병약하여 병역을 치룰 수 없다는 이유로 세력확장 때문에 인재가 아쉽던 노부나가가 그의 등을 밀어준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토시이에가 음모를 꾸며 노부나가에게 탄원하여 그렇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어쨌거나 갑자기 쫓겨나게 된 토시히사로서도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양자의 관계는 악화되었으나 후에 토시이에와 화해하기 위해서인지 토시히사는 출가[14]했고 토시이에도 자신이 부재중의 대리인으로 형 토시히사를 내세우기도 한 것을 보면 화해했다고 추측된다.
이런 사정 때문인지 조카인 마에다 케이지와의 관계는 서로 못 죽여서 안달인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으나 후세의 창작이라고 생각된다. 케이지 자신도 마에다가를 출방하면서 가족을 남겨두고 간 것을 보면 양자의 관계는 좋지는 않더라도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한 겨울철 케이지가 물을 덥혀놓았으니 탕에 들어가라고 권하여 토시이에가 탕에 들어갔는데 실은 냉탕이었다, 같은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이것은 후세의 창작인 듯 하다. 하지만 케이지가 토시이에에게 장난을 자주 쳤다는 것은 진짜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사촌이자 아내 마츠와는 금슬이 무척 좋았던데다[15] 아이를 많이 가지는 사람이 많았던 옛날 사람이라는걸 고려해봐도 총합 11명이라는 자식을 둔 걸로도 익히 알려져있다. 그러나 최후까지 도요토미 가문을 택하고 지키라고 신신당부했던 토시이에와 달리, 마츠는 토시이에 사후 그보다 빠르게 시국을 읽고는 아들들에게 '니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니들 아버지만은 못하니 걍 기어라' 라고 가문 방침을 못박으면서 사실상 도요토미 가문도 여차하면 포기할 수 있는 식으로 태세전환을 했고, 그런 빠른 태세전환 덕에 오히려 마에다 가는 도쿠가와 막부 시절에도 다이묘로써 존속할 수 있었다고 한다.

4. 가부키모노


토시이에의 주군인 노부나가도 젊은 시절에는 남다른 기행을 저질렀으나 토시이에는 그 보다 한층 더 해서 가부키모노였다. 그렇다보니 화려한 것을 좋아하여 여성용의 의복을 자신의 패션아이템으로 사용하거나 털가죽을 걸치거나 긴 창을 가지고 다니거나 했다.
늙어서는 시동들에게 '젊었을 때 어느 정도 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말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혈기왕성했던 젊은 날을 그리워 했던 것 같기도. 이러한 점이 조카에게 영향을 주었는지는 불명.

5. 여담


1560년 전후로 부상을 당해 애꾸눈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는 토시이에가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참전한 전투인 이노우 전투(稲生の戦い)[16]에서 적군의 미야이 칸베에(宮井勘兵衛)가 쏜 화살이 오른쪽 눈 밑에 명중했음에도 '아직 적의 수급을 하나도 거두지 못하였다.'며 화살이 꽂힌 채로 미야이 칸베에의 목을 거둔 일화에서 기인한다. 왠지 이 분이 연상되는 일화.
노부나가와는 젊었을 때 와카슈도[17]의 관계였는데 후에 토시이에가 나이를 먹고 그것을 피로하자 주변 사람들이 몹시 부러워했다는 일화가 있다. 현대의 상식으로 이해하긴 힘들지만 당시의 다이묘들은 모두 중도를 당연히 받아들였다.
여담으로 부인인 마츠(호슌인)와 부부 관계가 아주 좋았고 둘 사이에 자식들도 많았다. 카가 번 초대 번주 마에다 토시나가는 마츠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다. 다만 토시나가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복동생인 마에다 토시츠네를 양자로 삼아 가독을 물려줘 토시츠네는 카가번(加賀藩)의 3대 번주(藩主)가 된다. 또 둘사이의 딸들 중에 셋째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었고, 넷째딸은 히데요시가 양녀로 삼아 우키타 히데이에에게 시집 보내 히데이에의 정실이 되었다.
쥬아미를 베어죽이고 집에서 쫓겨나 무직이 되었던 시절, 먹고 입는 것조차 어려웠기 때문인지 유독 그 시절에 대한 발언이 남아있다. 자기가 힘들 때 말을 걸어오는 자야말로 진정한 친구라 하였으며 이 때의 경험탓인지 상황적으로 힘든 자를 도와서 그의 신임을 얻는 방법을 사용했다. 카츠이에를 배신했을 때도 그를 후하게 대접하여 그에게 원망을 사지 않았으며 히데요시가 가톨릭을 금하자 그 때문에 재산을 몰수당한 다이묘의 후원을 하고 그를 자신의 부하로 삼는 등 처세술에도 몹시 뛰어났다.
젊은 시절 힘든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를 거쳐서인지 돈에 집착하는 기질이 있어, 수하 가신들에게 봉록을 적게 주는 짠돌이 구두쇠였다고 한다.
출신지는 오늘날의 아이치현에 해당하는 오와리지만 오늘날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에서도 많이 사랑받는 무장인데, 도시이에가 이 지역의 영주를 지냈기 때문. 그 당시에는 카가(加賀)라고 불렸는데, 후술된 토시이에가 주인공인 NHK 대하드라마 <토시이에와 마츠>의 부제도 '카가 100만석 이야기'이다. 또 카가번(加賀藩)의 마에다 가문이 거성(居城)으로 삼았던 성(城)이 카가에 있는 가나자와성(金沢城)이다.
드라마 토시이에와 마츠에선 부부사이가 좋아 토시이에가 측실이 거의 없고 측실들이는 것도 꺼리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 토시이에는 5명 정도의 측실을 두었다.[18]
중년이 넘어선 이후에는 학문에도 관심을 갖게되어 가토 기요마사등 후배 무장들에게 영주로서 학문을 익히도록 권하기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고 한다.
마에다 토시이에 사후 토시이에의 영지 일부인 노토국(能登國)은 그의 차남 마에다 토시마사에게 분할 상속되었고 나머지는 장남 마에다 토시나가에게 상속되었다. 그러나 토시마사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西軍)으로 가담했기 때문에 전투 후 토시마사의 영지 노토1국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몰수되었는데 반해, 토시나가는 동군(東軍)으로 서군 다이묘들과 싸웠기에 전후 논공행상에서 영지(서군에 가담한 토시마사의 노토 1국과 서군 다이묘의 영지 일부)를 가증 받아 카가(加賀), 노토(能登), 엣츄(越中) 3개국(國)에 걸쳐 120만석의 거대한 영지를 가진 다이묘가 되었다. 이후 에도막부가 세워짐으로써, 마에다 가문은 120만석을 가진 카가 번(加賀藩)의 주인이 되었다. 3대 번주(藩主) 마에다 토시츠네 시절엔 토시츠네가 노년에 은거를 하면서, 120만석 중 18만석 정도를 각각 차남과 삼남에 분배해 지번(支藩 - 일종의 분가)을 세워 카가번의 최종 고쿠다카는 1,025,000석(실제 고쿠다카는 1,338,000석)이 되었고, 에도막부 시기엔 여러 번(藩)(신판, 후다이, 토자마)들 중에 가장 높은 고쿠다카(石高)를 가진 번(藩)이 되어, 막말까지 존속하였다.
도쿠가와 막부 내내 마에다 가의 카가 번은 유일하게 100만석을 넘는 최대 번으로 많은 우대와 특혜를 누렸다. 카가 번주(마에다 당주)는 쇼군과 도쿠가와, 마츠다이라 유력자만이 앉을 수 있는 상석 오오로쿠에 앉을 수 있는 특권을 누렸고, 이외에도 1국1성령[19]의 유일한 예외를 받아 가나자와 성 이외에도 코마츠 성을 재건해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특혜조치는 대정봉환메이지 유신, 폐번치현 등 일련의 반 막부 사건에 마에다가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게 되는 효과를 낳았고, 결국 카가번주 마에다 가는 102만석에 달하는 석고와 위상에도 후작작위를 받았다. 이는 72만석 시마즈와 36만석 모리가 메이지유신 주도로 공작 작위를 받은 것에 대비된다.[20]

6. 대중매체에서



6.1. 2002 NHK 대하드라마


2002 NHK 대하드라마 토시이에와 마츠(利家とまつ)에서 남자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카라사와 토시아키가 분했다. 지식은 부족하지만 무술과 사교성이 높고 의리가 두터운 남자로 그려졌다.
토시이에와 마츠의 인기로 인해 공명의 갈림길에서도 카라사와 토시아키가 마에다 토시이에 역으로 나왔다. NHK 시대극에서는 한 배역으로 중복 출연을 암묵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21]
총 54작품의 NHK대하드라마중 인기순위 8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있었던 작품.

6.2. 전국 바사라 시리즈


마에다 토시이에(전국 바사라) 참조.

6.3. 슈팅 게임 바사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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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대든다면, 너를 내 창의 녹으로 만들어 주겠어♡

3면 보스. 여성용 옷을 패션으로 걸치고 다녔다는 독특한 성격때문인지 뜬금없이 웬 '''오카마'''가 되어버렸다.
기체명은 '''갑옷메카 자창(紫槍).'''
저 우스꽝스러운 모습과 달리 이 보스부터 난이도가 본격적으로 매우 어려워 지는데, 1형태는 양쪽의 날개에서 원형으로 침탄을 계속해서 발사하며, 플레이어를 가두는 초고속 2Way 탄을 발사하면서 기체 중앙에서 '''랜덤으로 날아가는 보라색 탄을 발사한다.''' 초고속탄에 갇힌 상태에서도 회피는 가능하지만, 운을 요구하므로 웬만하면 모아베기로 초고속탄을 소거하는 동시에 빠져나와서 넓은 공간에서 회피하자. 이후 넓게 3겹의 탄을 발사한후 반복.
어느정도 대미지를 주면, 폭발하며 이름답게 초록색 창을 장착한 2형태로 돌입. 이후 뒤로 후진한뒤 돌진하면서 갑자기 창을 '''딱 한번''' 일정시간동안 마구 휘두르는데 이 창의 리치가 '''여지껏 보아온 인간형 메카의 근접공격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넓은 리치를 가졌기 때문에''' 재빨리 최하단으로 빠지지 않으면 순식간에 꼬치가 되버리니 바로 뒤로 빼주자. 물론 창을 휘두르는 사이에도 날개에서는 원형으로 탄을 계속해서 발사하니 그것도 같이 피해줘야 한다.
창질이 끝나면 비로소 날개가 4겹으로 펴지면서 본격적으로 패턴을 전개한다. 날개에 달린 4개의 눈에서는 매우 느린 10개 가량의 탄을 끊임없이 전개하며, 본체는 보라색 초고속 침탄 4줄기를 3번 발사->랜덤 방향으로 보라색 탄 난사->시계,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3Way 탄 전개를 반복한다. 체력이 적어질수록 패턴 주기가 빨라진다.
2주차에서는 2형태도 2형태지만 1형태 난이도가 엄청나게 급상승한다. 초고속 탄으로 플레이어를 가두는건 똑같은데, 이 다음 초고속 탄 구간안으로 빠른 보라색 V자 탄 2개를 빠르게 날리는 동시에 본체에서 발사하는 '''랜덤 보라색 탄은 양이 대량으로 늘어나고,''' 거기에 양쪽 날개에서 보라색 침탄을 고속으로 조준해서 발사하는 패턴이 추가된다. 1주차처럼 안에 갇혀서 멍하니 공격만 하거나 안에서 패턴 피하겠다고 피하려다가는 '''100% 끔살당하니''' 반드시 모아베기로 초고속 탄을 베는 동시에 빠져나와서 패턴을 회피해야 한다. 물론 빠져나왔다고 해서 절대 방심은 금물이다. 자비로운 1주차와 달리 패턴을 3개씩 섞어서 날려대고, 랜덤탄의 수가 급증했기 때문에 집중해서 피해야 한다. 발악 패턴은 그나마 1형태에 비하면 양심적인데, 날개의 눈에서 나오는 탄의 일부가 보라색으로 바뀐게 전부다. 믈론 이거도 1형태에 비해서 자비롭다는 거지 쉬운건 절대 아니다. 발악으로 돌입하면 패턴 주기가 답이 없을정도로 빨라져서 사실상 바사라 모드 사용을 강제한다.

6.4. 전국 란스


오와리의 기본 무장 하나. 그대로는 그다지 쓸모가 없지만 만족도 보너스를 이용하면 마에다 케이지로 변신시킬 수가 있다.
공방지속이 4/4/4/4로 안습한 능력치를 자랑하지만, 대만족 보너스를 통해 강화하면 공격력과 방어력이 3씩 늘어난다.
스텟을 올려주는 책을 이용해 공격력과 방어력을 6/6으로 맞춰주고 대만족 보너스를 하면 공9, 방9의 패왕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
다만 기본 행동력이 낮아서 범용성 면에서는 가츠이에에게 밀린다.

6.5.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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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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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대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장 강력한 대항마였던 그 명성과는 달리 대체로 평범한 능력치. 혁신에선 고유 전법도 없고 능력치도 80을 넘는 항목이 무용 하나 밖에 없다던가(그나마도 겨우 80) 대우가 시궁창. 최신작 천도 기준으로 통솔이 겨우 73에 지략이 60. 무용만은 85에 정치는 82라 좀 나은 편. 일러스트만은 번쩍거리는 금빛 갑옷으로 간지가 철철 흐르지만 그나마도 혁신의 것을 천도에서도 그대로 재탕했다. 능력치야 실제 토시이에가 히데요시나 미츠히데 같은 이들처럼 개인의 특출난 능력보다는 성실함을 무기로 출세한 사람에 가까워서 평범한 능력치를 받는 건 어쩔 수 없을 듯. 말년에 이에야스의 대항마로 떠오른 것도 능력 때문이라기보다는 글자 그대로 인망 때문이었고. 매력 능력치가 있으면 이건 높았을지도 신장의 야망은 천상기 이후로 매력 능력치가 삭제 되었다. 천상기에서 매력이 92이긴 하지만, 외전이나 매력이 있는 태합입지전에서도 능력치가 그 모양인걸 보면 있었다고 하더라도...
병과적성을 보면 족경과 철포가 B인데다가 개인 전법이 족경전법인 천도에서는 족경으로 사용하면 초반에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되며, 혁신에서는 철포를 이끌어도 그럭저럭 쓸만하나, 돈이 남아돌아서 철포가 남아도는 후반으로 가면 다른 세력에서 영입되는 우수한 무장들에게 밀려 내정용이나 후방 수비용 정도로 쓰게 된다. 안습. 그래도 좋은 아이템들을 보유했으니 압수하자.
삼국지 12에서는 나오지만 전법 때문에 안습 하필이면 잉여성을 자랑하는 창방어강화이다. 물론 창병에게는 쓸만하지만 알다시피 창병한정이라서 버리는 전법이다. 더군나가 토시이에의 지력이 50대이라서 망했다.
최신작 창조로 오면서 B+와 A-를 오가는 애매모호한 능력치는 여전하다. 이런 모습과는 대비되게 의외로 전국전에 많이 등장한다. 아내와 꽁냥꽁냥하는 모습과 히데요시 내외와 이웃으로 지내며 친하게 지내는 모습, 그리고 유일한 무장록으로 쥬아미를 베고 출분했던 그 역사대로 토시이에를 2년간 등용하지 않는 전국전이 존재한다. 플레이어가 오다 가문일 경우 발생하며 2년 후 등용하게 되면 토시이에의 능력치가 성장하는데 생각보다 성장폭은 좋지 않은 편. 또한 초기에 토시이에는 사기 특성으로 꼽히는 '가부키모노'가 있으나 마츠와의 이벤트가 있은 후로는 정신을 부여잡고 출세하겠다고 하여 이 특성이 사라진다. 혼노지 이후에는 히데요시와 관련하여 전국전에 등장하며 역시나 둘만 있을 때는 군신 관계를 떠나 허물없는 우정을 보여주기도 하는 등 각별한 사이. 히데요시 임종때도 후사를 토시이에에게 부탁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두 사람의 관계가 말년에 가서도 변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전법은 고유 전법으로 3개의 코스트를 소비해 난전, 방어, 속도를 2단계 상승시켜주는 '창술명인(창의 마타자,槍の又左)'으로 토시이에가 '창술' 특기를 가지고 있어 몸빵이나 난전용으로 쓸만하다. 토시이에의 능력치가 기본적으로 준수한 편인데다 성장시켜서 써먹어주면 그것 또한 쓸모가 많다.
혼노지 이후 시나리오나 군웅집결에서는 독자적인 세력으로 나오긴 하지만 주변 세력에 비하면 달리는게 사실. 중급자 이상 다이묘로 인식하면 편할 것이다.

6.6. 태합입지전


태합입지전 시리즈에서도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처럼 전체적으로 평범한 능력치로 보통 지모를 제외한 능력치가 70대정도에서 논다.능력치나 적성들이 평범한 편이지만 이 시리즈의 주된 요소가 육성이기 때문에 바꿔 말하면 무장을 키우는 재미는 제법 쏠쏠한 편. 특출난 능력치는 없지만 능력치는 그럭저럭 고른 편이기 때문에 만능형으로 육성 가능한 무장이다. 5에서는 창의 마타자 답게 시작부터 창명인(부가무력+6)칭호를 달고 나오지만, 막상 기본 무력자체는 71에 불과해서 안습. 부가무력을 합하더라도 77밖에 안되고 '''가장 높은''' 능력치가 매력인데 그것도 78밖에 안된다. 이에야스는 '''가장 낮은''' 무력마저도 기본 78에 템빨 13이 더해져서 91인데...
게임 내에서는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와는 달리 나름 비중있게 나오는 편인데, 시리즈 때마다 항상 플레이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직속 선배 격으로 게임 기본 정보를 알려주는 튜토리얼 역할을 맡는다. 히데요시와 말단 시절부터 친밀한 관계였던 것을 반영한 듯하다. 5에서는 전용이벤트도 있다. 위에서 언급된 쥬아미를 베는 이벤트. 베지 않을 경우엔 아무일도 없지만 벨 경우 분노한 노부나가가 쫓아내서 낭인이 된다. 그러면 뭐가 좋냐 싶겠지만 노부나가는 재수없으면 재야가 되려고 할때 목을 치는 군주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낭인이 돼서 다른 가문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노부나가를 찾아가면 문전박대당하지만 다른 가신들의 배하로 오다가에 재임관하는 것은 가능하다.그러나 낭인이 되고 1-2달 후에 자택에 들어가면 역사대로 오케하자마 전투에 참가하여 다시 노부나가 휘하에 들어가는 이벤트로 이어지고 당연히 노부나가의 직속으로 복귀하므로 굳이 배신으로 들어갈 이유가... 다만 낭인이 될때 무사훈공이 기존의 절반으로 깎이고 이건 복직되더라도 복구되지 않기 때문에 계속 오다가문으로 있을 꺼면 굳이 볼 이유는 없는 이벤트.
시나리오 1598년인 태평의 장에서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서 이벤트로 병사한다.사족으로 1598년 태평의 장으로 시작할 경우 다이묘로 나오는데 토시이에로 플레이시엔 당연히 병사이벤트가 일어나지 않고 세키가하라 합전도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토시이에는 역사대로면 그해 병사라 수명자체가 그 시나리오기준으론 미친듯이 짧으니 항상 언제 죽을지 걱정하면서 플레이해야겠지만.(사인이 병사가 아닌 전사의 경우는 병사보다 약간 기대수명이 높아진다)

6.7. 전국무쌍 시리즈


마에다 토시이에(전국무쌍) 문서 참조.

6.8. 하라 테츠오의 만화 '꽃의 케이지'


조카인 마에다 케이지가 주인공인 바, 삼촌인 토시이에의 등장과 비중 또한 필연적으로 많다. 여기선 마에다 가문을 토시이에가 잇는것이 토시이에가 노부나가에게 로비해서 그런걸로 나온다. 또 작가의 성향과 스토리 진행상 토시이에는 주인공 케이지의 앞을 막아서는 악역의 역할로서 상당히 악랄하면서도 멍청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안습.

6.9.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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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대하드라마 징비록에서는 前 드라마 야인시대시라소니로 유명한 조상구가 연기하였다. 다른 매체에서는 불같은 성격으로 묘사된 데 비해 본작에서는 차갑고 냉정한 인물로 묘사된 점이 특징.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다른 일본측 인물들과 차원이 다른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22] 조선으로 직접 출병하려는 도요토미에게 조언을 하며 등장. 이후 히데요시의 폭주를 제지하면서 그 포스와 도요토미 정권하에서 마에다 토시이에의 위치와 위엄을 보여주고 있다.[23] 21화에서는 도도 다카토라가 개쳐발렸다는 말을 듣고 와키자카 야스하루추천한다.
전쟁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자 칼을 들고 부하들을 처형하며 날뛰는 히데요시를 실제로 자기가 썼던 것처럼 창을 들고 일기토로 제압하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을 조선으로 보내달라고 하는데 역사와 같이 직접 가지는 못한다.
[1] 마에다 (토시이에)의 가문으로 매화를 가문으로 삼았다.[2] 1536년 또는 1537년의 설이 있다.[3] 음력 3월 3일[4]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일대[5] 다른 가문에서 일할 수 있었지만 토시이에는 거부하였다.[6] 19~20세기에서도 저정도면 장신이었다. 게다가 당시 일본인 평균 키가 140cm대인걸 감안하면 엄청난 거구다.[7] 노부나가의 이복 동생으로 방약무인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토시이에의 칼을 훔칠려고 하거나 거듭해서 그를 모욕하기도 했다.[8] 원래대로라면 죽을 죄였으나, 시바타 카츠이에 등의 탄원으로 목숨만은 구하게 된다.[9] 오와리 통일전 이후의 봉록이 100관정도였는데 오다 가로 복귀한 직후의 봉록은 300관 정도였다고 한다.[10] 이름처럼 말을 타는 무사로 다이묘의 경호나 연락을 맡았다. 현대의 개인비서겸 연락장교에 해당한다.[11] 일종의 파견무장이다.[12] 당시 토시이에는 약 100만석이었고 우에스기는 약 120만석이었다.[13] 도쿠가와는 대체로 마에다와 관위가 같거나 한 등급 높았다. 가령 임진왜란 발발 당시 마에다는 종사위하 참의였고, 도쿠가와는 이미 종이위 권대납언이었다. 히데요시 사망 당시 도쿠가와는 정이위 내대신이었고, 마에다는 권대납언이었다. 도요토미 입장에서 도쿠가와를 견제하는 용도로 마에다를 키울 요인은 있었겠으나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 2인자는 어디까지나 이에야스였다.[14] 출가한 사무라이는 가문의 일에는 직접 연관되지 않는 것이 당시의 통념이었다. 이에 따라 말을 듣지 않던 부하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다케다 신겐도 출가한다고 위협을 가한 적이 있다.[15] 정략혼이 많은 이 시기에 꽤나 드문 연애혼이었다고 한다. 재미있는건 친한 사이이자 주군이었던 히데요시 부부도 연애혼이었다는 것.[16] 노부나가와 동생 노부카츠 간에 벌어진 가독 상속 싸움.[17] 같이 잠자리에 드는 그것이다.[18] 그런데 드라마 내에서도 마츠 이외에 이와, 치요보의 2명의 측실이 등장한다. 노히메와 키츠노의 두명이 나오는 오다 노부나가는 많고, 120명이 넘는 측실을 들여 네네와 마츠를 기함하게 만들었고 작중에서도 5명의 측실이 등장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비하면 적지만, 어쨌든 작중에선 측실이 좀 나오는 편[19] 1개 쿠니(国) 혹은 1개 번에 1개의 성 소유만을 허락하여 번의 위세를 누르고 유사시 막부의 무력동원에 손쉽게 제압당하게끔 한 조치[20] 어찌보면 당연하다. 공작 작위는 쇼군(도쿠가와 요시노부), 메이지 유신의 주역 중 이와쿠라 토모미나 산조 사네토미처럼 원래 신분이 높았던 이들, 공경 중에서도 최상위인 고셋케만이 받은 작위로, 사실상 메이지 유신에 제대로 협조하지 않고 쇼군 밑에 남았던 카가 번은 쇼군보다 아래에 위치하는 것이 합당하며,. 쇼군가 바로 아래 반열의 무가인 고산케도, 흔히 유신의 주역으로 알려진 유신삼걸도 처음 부여된 작위는 후작이었다. 여담이지만 마에다 가는 그나마 협조하지 않고 방관만 해서 후작이라도 받은 거지 오우에츠 열번 동맹을 주도하며 유신 정부에 정면으로 대항했던 오슈 센다이 번은 원래 70만석 수준의 대영주였음에도 해당 건으로 신정부에 단단히 찍혀서 10만석급 다이묘 취급 받고 백작으로 굴러떨어지는 수모를 겪었다. 거기에 분가였던 시코쿠 우와지마 번의 우와지마 다테 가가 본가와 동렬인 백작이었다가 후작으로 승급하면서 본가보다 위상이 높아져 버린 것은 덤,[21] 또다른 예로는 타케나카 나오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아사리 요스케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야마모토 코지히지카타 토시조.[22] 히데요시는 토시이에가 오자마자 '''"이게 누구신가! 나의 친구 마타시로 아닌가!"'''라면서 기뻐서 방방댄다. 그런데 "마타시로"라는 것이 히데요시와 토시이에의 친근감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것 같은데 정작 마타시로는 잘 쓰이지 않았고 마타자, 마타자에몬, 하시바 치쿠젠노카미 등으로 더 자주 불렸다. 그래서인지 이후 방영분에선 성인 마에다로 정정했다.[23] 다른 사람의 반대에는 '''내 멋대로 하겠다는 데 니 한심한 식견으로 뭔 상관이냐'''라고 폭주하는데, 마에다가 반대하면 '''정말 안될까? 정말 가면 안돼?''' 식으로 태도가 확 바뀐다.